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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주제 : 새봄, 깨어 내 주님 기쁘시게!!
2022-03-06
3월 주제 : 새봄, 깨어 내 주님 기쁘시게!!
『아브라함이 헷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창 49:30)
빈들판 형제에게
보셔요!
그 옛날 새파란 청소년 다윗이 아버지 맡겨주신 그 양 떼 곁에서 조용히 눈 감고 수금 타던 그 모습을 생각해 보셔요. 그가 어디 하루아침에 왕 앞에서 수금 탈 수 있는 그런 자가 될 수 있었겠나요?
어느덧 가까워진 그 주님!
조용히 사랑으로 임해오신 그 은혜에 민감히 한 줄 한 줄 수금을 뜯을 때, 곁의 그 양 떼들도 포근함이 더해갔을 것입니다.
어느덧 빈들판이 빈들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순수함과 맑음과 신령함과 하늘의 것으로 정말 때 묻지 않은 은총으로 채워진 공간 같았을 것입니다. 모르긴 하지만 그 수금 소리는 하늘의 천사들도 결코 얕잡아 볼 수 없을 만큼 감미로웠겠고 은혜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수했을 것입니다. 어디 값비싼 악기였겠습니까? 그럴 리 없겠지요. 착한 애가 부탁함으로 준비해 주신, 아니면 그나마 흉내 내어 만든 것일지도 모르는 그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한 줄 한 줄의 리듬에 주님의 영감 함께 하시었고 주님 온 기쁨으로 듣고 계시었으니 말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그렇게 익숙했으면 왕 앞에서도 오직 그 주님께 매인 그 빈들판처럼 그렇게 연주하다가 그의 기쁨으로 다가오시던 그 주님께서 깨우시매 사울 왕의 창을 피하도록 했을까요?
형제여!
지금 나의 생각이 지나치게 다윗의 수금에 매여 있나요? 스치어 지나가도 될 얘기를 꼼꼼스레 하고 있나요? 아니외다. 정말 아닙니다.
그 빈들판에서 겨우 양 떼들이 누워 그 풀 뜯을 거기 사람들과의 대화도 없어 이 수금으로 그의 주님 향해 마음을 열고 찬미할 수 있음은 결코 적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 같은 빈들판에서 시들지 않고, 지치지 않고, 무료해 하지 않고, 주님과의 사귐으로 서 있고, 밝고, 성실하고, 용기 있고, 사랑에 찬 마음이라면 그는 벌써 골리앗과의 전쟁에는 크게 마음 쓸 것 없이 이길 것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형제여!
어둡든, 사람이 없든지, 초라하든지…, 상관할 것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 오직 내 주님과의 사귐이 있다면 말입니다.
다윗은 주님과의 사귐의 그 빈들판이 그의 삶의 뿌리였습니다. 그곳이 골리앗과의 전쟁에서 유독이 이 조그만 청소년이 이기는 이유를 캘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이 사울 왕의 악귀를 내쫓는 이유를 캘 수 있는 곳이며, 그곳이 왜 이새의 앞선 일곱 아들이 거절되고 아버지 이새도 그렇게 추천하고자 애써 보이지 않던 그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형제여!
여기서 우리 그 무엇을 알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의 진정, 그렇게도 원하심이 그 무엇인가를 말입니다. 사실 그것은 승리도 아니요, 왕이란 영광도 아니요, 그것은 이 세상이 좋아하는 그 나름대로의 괜찮은 이런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도 정말 철저히 그는 그 빈들판 이런저런 것 없는 정말 오직 주님과 나밖에 없는 그런 사귐을 정말, 정말 원하실 것입니다.
왕의 사위, 천부장이란 자리 다 흔들어 놓으시면서 그 빈들판으로 다시 몰아 놓으시던 그 주님. 거기서 다시금 그 옛 광야의 친구 되신 주님을 철저히 사귀도록 이끄시던 그 주님의 섭리가 그 어찌 고맙고도 아름다운지!
그것을 잃어 왕위에 있더라도 그는 마른 가지 다윗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뒤편 기드론 계곡을 지나 감람산 기슭에 그의 주님과의 사귐의 빈들판을 갖지 못한다면 그 예루살렘은 벌써 속으로부터 황폐하여 갈 것입니다. 죽은 자들로 가득 차 갈 것입니다.
보셔요!
식물이 밤에도 잠잔다기보다는 오히려 산소를 취하는 김내기 작용을 하듯 내 영혼이 그 깊음, 어두움 속에서 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위한 산소를 마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낮의 삶이 어찌 형제들에게 지친 자들에게 산소를 내뿜는 그 삶이 가능할까요?
빈들판!
거기에서 오직 내 주님과의 사귐을 내 진정한 삶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우린 어느덧 머리 깎인 삼손. 주의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다윗.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스스로 그 몸 일으키지 못하는 엘리야 되고야 말 것입니다.
형제여!
주님이 부르시는 그 순수함의 빈들판이
그리웁지 않습니까?
거기서 나의 진정한 오늘의 삶을 뿌리내리고,
기뻐하고, 준비하고 싶지 않습니까?
아무것 없어 보이는 거기에 …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거기에 …
인생들이
조매 마음 두고자 생각지도 않는 거기에
진정한 값진 삶이 있음이 놀랍지 않습니까?
오늘도
거기서 조용히 내 삶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를 찾고, 나를 새롭게 하고
거기서 비로소 행복해하고 싶습니다.
잊혀져만 가는 듯한 그의 빈들판의 의미가
오늘 우리에게 정말 새롭기를
온 마음 모두어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
형제와 내게 큰 축복 되길 기원하고 싶습니다.
평안하소서.
거기서….
- 산곡인 -
* 이번 주일에 나올 「우리들의 소식」 글을 미리 준비해 놓다 보니 저희 목사님께서 천국으로 가신 지금의 형편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여 목사님께서 평생 추구하며 끝까지 지켜가셨던 빈들판의 목사님 글을 대신 실었습니다.
식구님들에게 깊은 은혜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옛날 새파란 청소년 다윗이 아버지 맡겨주신 그 양 떼 곁에서 조용히 눈 감고 수금 타던 그 모습을 생각해 보셔요. 그가 어디 하루아침에 왕 앞에서 수금 탈 수 있는 그런 자가 될 수 있었겠나요?
어느덧 가까워진 그 주님!
조용히 사랑으로 임해오신 그 은혜에 민감히 한 줄 한 줄 수금을 뜯을 때, 곁의 그 양 떼들도 포근함이 더해갔을 것입니다.
어느덧 빈들판이 빈들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순수함과 맑음과 신령함과 하늘의 것으로 정말 때 묻지 않은 은총으로 채워진 공간 같았을 것입니다. 모르긴 하지만 그 수금 소리는 하늘의 천사들도 결코 얕잡아 볼 수 없을 만큼 감미로웠겠고 은혜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수했을 것입니다. 어디 값비싼 악기였겠습니까? 그럴 리 없겠지요. 착한 애가 부탁함으로 준비해 주신, 아니면 그나마 흉내 내어 만든 것일지도 모르는 그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한 줄 한 줄의 리듬에 주님의 영감 함께 하시었고 주님 온 기쁨으로 듣고 계시었으니 말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그렇게 익숙했으면 왕 앞에서도 오직 그 주님께 매인 그 빈들판처럼 그렇게 연주하다가 그의 기쁨으로 다가오시던 그 주님께서 깨우시매 사울 왕의 창을 피하도록 했을까요?
형제여!
지금 나의 생각이 지나치게 다윗의 수금에 매여 있나요? 스치어 지나가도 될 얘기를 꼼꼼스레 하고 있나요? 아니외다. 정말 아닙니다.
그 빈들판에서 겨우 양 떼들이 누워 그 풀 뜯을 거기 사람들과의 대화도 없어 이 수금으로 그의 주님 향해 마음을 열고 찬미할 수 있음은 결코 적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 같은 빈들판에서 시들지 않고, 지치지 않고, 무료해 하지 않고, 주님과의 사귐으로 서 있고, 밝고, 성실하고, 용기 있고, 사랑에 찬 마음이라면 그는 벌써 골리앗과의 전쟁에는 크게 마음 쓸 것 없이 이길 것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형제여!
어둡든, 사람이 없든지, 초라하든지…, 상관할 것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 오직 내 주님과의 사귐이 있다면 말입니다.
다윗은 주님과의 사귐의 그 빈들판이 그의 삶의 뿌리였습니다. 그곳이 골리앗과의 전쟁에서 유독이 이 조그만 청소년이 이기는 이유를 캘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이 사울 왕의 악귀를 내쫓는 이유를 캘 수 있는 곳이며, 그곳이 왜 이새의 앞선 일곱 아들이 거절되고 아버지 이새도 그렇게 추천하고자 애써 보이지 않던 그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형제여!
여기서 우리 그 무엇을 알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의 진정, 그렇게도 원하심이 그 무엇인가를 말입니다. 사실 그것은 승리도 아니요, 왕이란 영광도 아니요, 그것은 이 세상이 좋아하는 그 나름대로의 괜찮은 이런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도 정말 철저히 그는 그 빈들판 이런저런 것 없는 정말 오직 주님과 나밖에 없는 그런 사귐을 정말, 정말 원하실 것입니다.
왕의 사위, 천부장이란 자리 다 흔들어 놓으시면서 그 빈들판으로 다시 몰아 놓으시던 그 주님. 거기서 다시금 그 옛 광야의 친구 되신 주님을 철저히 사귀도록 이끄시던 그 주님의 섭리가 그 어찌 고맙고도 아름다운지!
그것을 잃어 왕위에 있더라도 그는 마른 가지 다윗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뒤편 기드론 계곡을 지나 감람산 기슭에 그의 주님과의 사귐의 빈들판을 갖지 못한다면 그 예루살렘은 벌써 속으로부터 황폐하여 갈 것입니다. 죽은 자들로 가득 차 갈 것입니다.
보셔요!
식물이 밤에도 잠잔다기보다는 오히려 산소를 취하는 김내기 작용을 하듯 내 영혼이 그 깊음, 어두움 속에서 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위한 산소를 마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낮의 삶이 어찌 형제들에게 지친 자들에게 산소를 내뿜는 그 삶이 가능할까요?
빈들판!
거기에서 오직 내 주님과의 사귐을 내 진정한 삶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우린 어느덧 머리 깎인 삼손. 주의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다윗.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스스로 그 몸 일으키지 못하는 엘리야 되고야 말 것입니다.
형제여!
주님이 부르시는 그 순수함의 빈들판이
그리웁지 않습니까?
거기서 나의 진정한 오늘의 삶을 뿌리내리고,
기뻐하고, 준비하고 싶지 않습니까?
아무것 없어 보이는 거기에 …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거기에 …
인생들이
조매 마음 두고자 생각지도 않는 거기에
진정한 값진 삶이 있음이 놀랍지 않습니까?
오늘도
거기서 조용히 내 삶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를 찾고, 나를 새롭게 하고
거기서 비로소 행복해하고 싶습니다.
잊혀져만 가는 듯한 그의 빈들판의 의미가
오늘 우리에게 정말 새롭기를
온 마음 모두어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
형제와 내게 큰 축복 되길 기원하고 싶습니다.
평안하소서.
거기서….
- 산곡인 -
* 이번 주일에 나올 「우리들의 소식」 글을 미리 준비해 놓다 보니 저희 목사님께서 천국으로 가신 지금의 형편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여 목사님께서 평생 추구하며 끝까지 지켜가셨던 빈들판의 목사님 글을 대신 실었습니다.
식구님들에게 깊은 은혜 있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