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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조그만 나의 빈들판

2013-04-10 / 61 회차

4월 조그만 나의 빈들판



주님만 향하여 서 있는 빈들판

취적리교회 배 명 자 집사님

주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곳
하늘 샘 흐르는 빈들판
나 거기 나아가 주님을 뵙습니다.

이 세상 보이는 그 어떤 것에도
마음 빼앗기지 아니하고
설령 그것이
주님이 내게 허락해 주신 것이라 할찌라도
주님만 향하여 서 있는 빈들판
이곳에서 만나는 주님은
참으로 뜨겁습니다.

평범하기만한 삶이 반복되어지지만
빈들판에서
그리움으로 부르는 주님은
나의 삶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땅에서는
둥지 틀 어떤 것도 허락지 아니하시지만
하늘에는 아낌없이 쌓아가도록
이 빈들판에서 가르쳐 주시니
빈들판은
나를 주님의 사람답게 만들어 가는
훈련장이기도 합니다.

주님! 다가오는 날들
두려움 없이 불평 없이 맞이할 수 있음도
이 빈들판에서 들려주신
주님의 음성, 주님의 뜻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부르시는 님의 목소리에
마음은 벌써 빈들판에 서 있습니다.

이 빈들판에서의 은밀한 시간들이
주님과의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가고
나의 주님과의 사랑이 더 깊어져 가서
주님을 향한 사랑의 노래가
늘 머무는 가슴을 지닌 자로
살고 싶습니다.

그 언제나 주님꽈 함께가 아니면 결코 아무 것 아닙니다

우리가 시편 16편에서 다윗이 “하나님 나를 보호 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라고 말할 때 다윗은 정말 어려운 환경과 여건이었는 줄 압니다.
주님께서 그의 피난처가 되어주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라는 이 말씀은 다윗이 참으로 어지럽고 현기증 나는 그런 환경과 여건 속에서 주님을 바라봄으로 겨우 마음의 여유와 기쁨과 안식을 가질 수 있었음을 표현하여 주는 말씀인 줄 압니다.

우리가 시편 34편에서 읽을 수 있는 ‘그 모든 환난, 그 모든 고난, 내 모든 두려움’이라고 말하는 그런 여건 속에서도 다윗은 주님을 앙망하므로 영혼의 빛을 얻고 안정감을 겨우 가져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런 환경과 여건 속에서 주님 없이는 숨쉬기 어려울 만큼, 주님 없이는 살아가기 곤란할 만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히브리서 10장 말씀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이 말씀 가운데 히브리서 10장 뒷부분의 환경도 역시 어려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어려운 여건이 아니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주님께 속하여 서서 주님을 앙망하며 살고 주님을 기대하며 사는 이 믿음의 자세가 아니라면, 벌써 의인 된 삶은 우리에게 있을 수 없음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 우리는 오늘의 주어진 환경과 여건 속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하셨습니다마는, 만약에 주어진 환경이 시편 16편이나 시편 34편처럼 어렵지 않다고 할지라도, 여러분과 저의 영혼이 나의 주님께 속한 강한 마음과 내 주님만 모신 구별된 마음으로 주님만 바라보는 이 마음 아니 된다면, 참으로 주님과 더불어 의미 있고 살아있는 걸음으로 달려간다고 말하기는 불가능할 줄 압니다.

그렇습니다. 시편 16편의 그와 같은 환난이 아니라도, 시편 34편의 그런 두려움이 아니라도, 주님께 속함이란 이 관계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할 줄 압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마침내 우리 마음속에 형성되고 우리 마음속에 얻게 되는 결론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깊으신 뜻은 전적으로 ‘내 주님과 함께 살아가라’는 뜻인 것을 알게 될 줄 압니다. 우리에게 그날이 속히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님과 함께!
내 주님이 나의 전적인 신뢰가 되고, 내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고 내 주님만 붙든 가운데서, ‘주님과 함께!’ 이것 아니면 우리는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걸어갈 수 없으며, 우리는 달려갈 수 없으며, 우리는 만족할 수 없으며, 우리는 노래할 수 없으며, 우리는 섬김 할 수 없는 그러한 비참한 자인 것을 알아가는 것은 대단히 귀중한 일인 줄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과 함께!
그것을 어려운 환경과 여건 속에서 라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많은 내용 가운데서 두 교회만 인용하여 본다면, 2장의 서머나 교회에 “내가 네 환난과 궁핍과 핍박을 안다 그러나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들은 환난과 핍박과 궁핍 가운데 있는 자인 줄 압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 한 분께만 전적인 신뢰를 두고, 주님을 모시고,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신실하게 살고자 하는 그들을 실상은 부요하다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삶을 말씀하실 때 좋은 여건이나 괜찮아 보이는 환경일 것이라는 말씀 없이 죽기까지 이러한 걸음으로 신실하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과 함께를 붙들고 있는 너의 자세가 참으로 온전 된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나는 너의 생명이 되며, 나는 너의 의지가 되며, 나는 너의 사랑이 되며, 나는 너의 주가 되며, 나를 바라보며 내게 속한 삶을 살아가는 이 생활이 바로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삶이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이것 놓치면 아무것 없습니다.
우리가 비교하여 보건대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님께 관하여 모릅니까? 그들은 예수님께 관하여 압니다. 그렇지만 주님 자신께 속하고 주님과 친근한 사귐 속에 삶을 꾸리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 밖에 있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 내게서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내게서 안약을 사서 발라 밝히 바라보게 하라!”

여러분!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환경과 자신이 가진 그 무엇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함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그곳에서 가진 것이 진정한 그들의 것이란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과 함께입니다. 나의 주님과 함께를 벗어나면 우리는 아무것 아닙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 주님과 함께를 벗어나면 참으로 초라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상에서 다윗이 주님과 함께를 벗어나면 초라했듯이, 사무엘하에서 왕인 다윗도 주님과 함께를 벗어나면 참으로 참으로 그러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 속하여 주님과 함께를 이 세상에서 저 천국까지 우리가 늘 가져야 할 전부임을 아는 자가 참으로 복 있는 자인 줄 압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과 함께!! 그렇습니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어려운 여건과 환경 속에서만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가 아니면 아무것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워놓으신 유일한 길입니다.

로마서 6장을 보세요!
예수님과 함께여야 살아 있는 새 생명 속에 있는 자입니다. 로마서 8장을 보세요! 주님과 함께여야 우리에게 살아갈 진정한 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생명과 평강을 알아 갈 수 있습니다.
유업도 있습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도 있습니다.
소망도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 있는 기도도 있습니다.
담대함도 있습니다.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삶도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나의 주님과 함께란 이점을 소중하게 붙들어야 할 줄 압니다.
오늘 소중한 것은 여러분과 저의 영혼이 내 주님과 함께를 어떤 때, 어떤 시련과 어떤 특별한 여건과 어떤 그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일 때 여러분과 저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자인 것을 데살로니가전서 5장 10절은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자든지 깨든지 예수님과 함께 살게 하시었습니다.”

오늘 주님과 함께를 잊어버리기 얼마나 쉬운지요! 나의 육신 속에 그리고 이 세상 속에서 내 주님과 함께를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없는 메마른 가지, 내 선한 목자가 없는 참으로 스스로 살아가는 길 잃은 양, 생각만 해도 비참합니다.
빛이 없는! 참 빛 되신 주님이 없는 우리, 내 영혼의 참된 생명수 샘이 없는 우리, 나의 의지할 진정한 빛이 없는 그러한 우리, 생각만 해도 암담
합니다. 내 영혼의 생명의 떡 되신 주님 없는 우리.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깊으신 뜻은 주님과 함께입니다. 내 주님과 함께를 붙들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르는 이런 친근함 속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주저앉은 자가 아니고, 이 땅에서 쓰러진 자가 아니고, 일어선 강한 자로 하나님의 영광 위하여 걸어가는 우리 한 분 한 분 되었으면 합니다.

조용한 빈들판이 필요한 것은 내 주님께 속함으로 주님과 함께를 뚜렷하게 마음속에 붙들기 위함인 것입니다.
어리석게 나 자신에게 속하지 아니하고, 보이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우리를 불러주신 그 주님께 온 마음으로 속하여서 나의 빛 되시며, 나의 생명 되시며, 나의 사랑 되시며, 나의 기름 부으심 되시는 주님과 함께 그의 명하심 속에 참으로 의미 있게 길 가기 위해서 조용하게 주님을 묵상해보는, 주님을 찾아보는, 내 주님께 속하여 보는, 조그만 나의 빈들판은 정말 필요한 줄 압니다.

주님과 함께가 아닙니까? 망합니다!
주님과 함께입니까?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아름다운 자로, 강한 자로, 영광 있는 자로, 주님과 함께 오늘도 영광의 그날 향해 걸어갈 수 있을 줄 압니다.

다시 한 번 힘주어 말씀하고 싶습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주님과 함께는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다윗에게 시편 16편이나 시편 34편의 어려움 속에서 주님과 함께를 붙들게 한 것은, 그가 나중에 평온하고 왕위에 앉을 그때, 예수님과 함께를 꼭 붙드는 자로 훈련하기 위함인 것을 아는 자는 대단히 복 있는 자인 줄 압니다.

어려운 시간 속에 주님과 함께가 아니면 설 수 없었나요? 마찬가지입니다.
평안과 부요 속에서도 예수님과 함께가 아니라면 우리는 설 수 없고, 우리는 걸어갈 수 없으며, 우리는 행할 수 없으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인 된 삶을, 경건 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그것은 우리가 마침내 찾게 되는 진정한 나 자신의 유일한 길입니다.
주님과 함께!!
오늘도 조용한 빈들판에서 이 점을 깊이 있게 묵상하며 찾는 여러분 되시길 원합니다.

나의 감사

최 경 수 목사님

어리석고 죄 많은 나에게도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교회를 섬기게 하시고
39년 동안 목회할 수 있도록
언제나 함께해 주시고
이제는 물러나 한적한 곳에서 쉬라 하시니
주님 감사합니다.

며칠 전 반가운 분들의 방문을 받았는데
한때 강원도에서 일했던 벗님이
경기도에서 오셨는데 한동안 못 알아보았습니다.

헬렌 켈러는
단 3일 만이라도 세상을 볼 수 있다면
평소에 보고 싶은 것들을 다 본 후
마지막 날 밤에
3일 동안 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다시 캄캄한 세계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는데
오른쪽 눈은 안 보이고 왼쪽은 흐릿하지만
나를 지금까지 보게 해 주셔서
주님 감사합니다.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주님께서
나의 눈도 밝혀주시면 좋겠습니다마는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합니다.

육신의 눈은 안 보여도 신령한 눈이 열려
나와 세상은 간곳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인다고
하나님께 찬양하고 간증한 성도처럼
나에게도 베푸실 은혜와 긍휼을 바라보면서
주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나그네 길

강현교회 이 복 순 사모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막6:31)

네 짐을…
네 염려를…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도 주님을 내 앞에 모시고
단순히 주님 믿고 의지하면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맘으로 걸어갑니다.

때로는 철부지하고
우둔하고 미련한 자신을 보면서
순간 낙심 되지만 …
못된 나를 벗어 던지고 주님 음성 들어봅니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오, 주님! 감사합니다!
어느새 주님은 내 마음 깊은 곳에 계셨으며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늘 자유함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는
행복한 나그네길 달려가고 싶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빛으로 채우시니

영서교회 김 병 수 목사님

주님께서 빛으로 채우시니
보좌를 향하여 손을 들고
시온 향한 걸음 빨라져 갑니다.

주님께서 빛으로 채우시니
굴 어귀의 세미한 소리에
땅이 갈라지는 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빛으로 채우시니
목의 줄 스스로 풀어 던지고
땅 끝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빛으로 채우시니
나의 장막 터 마음껏 넓히며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주님께서 빛으로 채우시니
나의 줄을 길게 늘어뜨리며
나의 말뚝을 견고하게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빛으로 채우시니
생물들의 '일제히 앞으로 곧게'가
나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빛으로 채우시니
피리소리에 춤을 추었고
애곡소리에 가슴을 쳤습니다.

주님께서 빛으로 채우시니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 경고 소리
스쳐가는 가벼운 바람소리였습니다.

주님께서 빛으로 채우시니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고
내 등과 뺨을 저만치 내어놓았습니다.

주님 빈손이라도 좋으니
오늘도 빛만 있으면 족하겠습니다.

내가 살아 숨쉴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우리가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자로 산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 누구인들 하나님 보시기에 산 제물 되고 싶지 않을까요! 살아 있는 생활을 살고 싶지 않을까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로마서 12장의 살아 있는 제물과 같이 살기 위해서는, 로마서 6장 11절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가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살아 있는 자만이 살아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사데 교회의 그들은 이름뿐이었지 실상을 죽어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때 그 남아 있는 모든 시간과 모든 여건도 죽게 되어 있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이름뿐이지 실상은 죽은 자라면 이제 나의 남은 일도, 남은 시간도, 남은 건강도, 남은 내 가진 모든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 있는 것이 결코 될 수 없음을 주목해야 할 줄 압니다.

이사야 56장 뒷부분에서 주님과 더불어 연합하고, 주님의 언약을 붙들고, 주님의 종이 되고, 주님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하고, 나의 주님과 나 사이의 안식을 지키는 이런 생활뿐만 아니라, 주님의 인도 하심을 좇아 기도하는 성산으로 나아가서 내 주님과 나 사이의 기도 생활 속에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가지는 그자!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어떤 말로 할 수 있을까요? 살아 있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자가 나아가서 섬기는 그런 제사, 그런 희생은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신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내 주님께 연합하며, 나의 주님과의 안식을 지키며, 내 주님의 언약을 붙들며, 내 주님의 종이 되고, 내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고, 내 주님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하고, 나의 주님께 이끌림 받고, 주님께 이끌려가서 함께 조용히 사귀며 기도하는 그런 은밀한 사귐 속에서의 큰 기쁨!
중요한 것은, 이런 산 생활 없이 나아가서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 있는 그 무엇이 되겠다는 것은 어림없는 얘기입니다.

이사야 56장 뒷부분은 주님을 향하여 죽어 있는 자들이 죽은 행실밖에 계속해서 할 일이 없음을 읽게 됩니다. 정말 우리는 주님과 나 사이의 살아 있는 삶이란 것을 정말 소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에 주님과 나 사이의 살아 있는 삶만 있다면 나머지는 정말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을 줄 압니다.

우리가 사무엘상이나 사무엘하서에서 주목해 볼 수 있는 귀중한 것은, 나머지 이런저런 일보다 전쟁에 관하여 그들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를 하나님께서는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울이 주님께 대하여 살아 있나요?
지금 들판에서 농사를 짓고 돌아오는 걸음이지만 살아 있는 관계였나요?
평범한 농부였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을 때, 길르앗 야베스 형제들이 어려움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그는 분노할 수 있으며 싸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다!”
그 점을 성서는 얼마나 중하게 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무엘상 17장 말씀만 보아도 사울은 블레셋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이지 이기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사무엘상 14장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맹세도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금식도 하는 사울입니다만, 살아 있는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길게 말하지 않더라도 이 어려움 속에서 살아 있는 모습이 아니라면, 성서는 그 사울이 왕으로 사십 년 동안 있었던 일에 관해서 이런저런 많은 것들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살아 있는 일들을 하게 마련이라는 뜻인 줄 압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 ‘이런 제사 드리겠다. 저런 제사 드리겠다.’라고 하는 것은 별것 아닙니다. 살아 있는 관계가 있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말씀하여 주시는 줄 압니다.

다윗도 역시 그러합니다.
사무엘상 16장, 17장, 18장의 살아 있는 관계!
요나단이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가 있을 때 그는 블레셋을 향해 산 위로 올라가기를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관계가 있을 때 다윗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그렇습니다. 요나단의 나머지를 보지 않고 이 두 가지만 보아도 그는 틀림없이 살아 있는 관계 속에 서 있는 줄 압니다.

사무엘하서에도 그러합니다.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만 있으면 블레셋이 쳐들어오고 또 쳐들어와도 문제없습니다.
그리고 사무엘하서에는 전쟁에 관한 것을 종종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역할에 관한 내용은 별로 기록되지 않는 것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삶이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이기는 자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는 자라면 그는 틀림없습니다. 주님께 속한 자고, 주님께 귀를 기울이는 자로서 그는 주님의 천사임이 틀림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첫머리에 나오는 ‘사자’라는 말은 ‘천사’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천사’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있는 것임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자기 인식도 없고, 어느 환경에 이끌려가는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있는 자. 바로 ‘천사’의 의미인 줄 압니다.
‘마귀’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죽어 있는, 참으로 그러한 것임이 틀림없을 줄 압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세 가지 비유는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살아 있는가 아닌가를 보시고 싶어 합니다. 나머지 많은 말 하지 않아도 살아 있는 자라면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나의 주님을 향하여 죽은 자처럼 산다면, 말하지 않더라도 그 이면적인 것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오늘 주님과 나 사이의 살아 있음에 온통 마음을 써 보는 우리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

돌아와서 다시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라는 말씀을 로마서 6장 11절에서는 명료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 구원자 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2장 말씀처럼 예수님 없이 허물로 죽었던 우리입니다. 그러나 그의 흘려주신 보혈의 은총 속에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있는 삶을 살 수 없는 옛사람을 십자가로 벗어버리고, 장사지내버리고, 죽음에 넘겨버리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연합하여 일어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속한 자요,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있는 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
살아 있는 자!!

로마서 6장에서 이 살아 있는 자는 몸의 사욕을 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몸의 사욕을 좇아 죄에 종노릇하는 일에서 이길 수 있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새 생명으로 이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께 순종하는 주님의 종이 될 수 있으며, 우리 생활은 의로움과 거룩함이 우리 생활의 특징이 될 수 있답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것은 찾지 아니하고 주의 종이라 말하고, 죄를 이기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의롭게 살고자, 경건 되게 살고자, 거룩하게 살고자 힘써 가기도 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애태워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내 구원자 되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새롭게, 새롭게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로마서 8장은 이 관계를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지금 살아계신 주님 안에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다른 것을 더듬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의 이끄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것을 내 법으로, 그것은 내 생명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길로 붙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함께 살았다는 이 관계를 가질 뿐 아니라, 로마서 8장 1절 말씀처럼 지금! 지금!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여야 합니다.
오늘도 새로운 마음으로 로마서 13장처럼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이겠지요!

여러분과 저의 영혼이 이러한 마음으로 내 주님 안에 거하여 갈 그때,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살아 있는 관계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있는 관계를 붙들어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이와 같은 우리의 영혼 속에 생명수로 임하여 오셔서 내 영혼이 마실 수 있고, 내 영혼이 자유로울 수 있고, 내 영혼이 강할 수 있고, 내 영혼이 의로울 수 있고, 내 영혼이 경건 되게 살 수 있는 이런 삶을 예수님 안에서 그의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부활인 동시에 나의 생명이십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속한 그의 양처럼 정함 있는 마음으로 주님 안에 믿음을 둡니다.
아무리 들려주시는 그의 음성이 쉽게 보이지 않더라도 떠날 길이 없습니다. 이 길 외에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버티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의 살아 있는 생명의 속삭임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임하여 옵니다.

우리는 그 음성을 좇아 일어나서 순종하여 갈 때 들어가고 나오면서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을 수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 삶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 이김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평강도 함께 주십니다. 이 생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의로운 생활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십니다. 주님의 생명의 흐름이 있는 곳에 거룩하고 경건된 생활이 자연스럽습니다. 능력 있는 생활이 되어져 갑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라!
이점을 마음속에 되새기면서, 새로운 날 그냥 바삐 부지런히 일과를 진행한다 해서 여러분이 이기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기지 못한다는 의미는 벌써 살아 있는 생활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생활이 못 된다는 뜻은 틀림없이 나머지 삶도 살아 있는 생활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이기는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생명수 샘물을 선물로 얻게 된다고 말씀하여 주시었습니다.
오늘도 내 주님 안에서 살아 있는 자가 되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기는 생활을 얻고, 우리 하나님 기뻐하시는 의롭고도 거룩하고도 참으로 보암직한 선한 열매를 생활 속에서 맺어가게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 보암직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이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그 무엇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런 것은 많이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있는 삶을 여러분에게 절대 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도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있는 삶을 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다시 한 번 로마서 6장 11절을 조용히 나의 빈들판에서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여러분!
주님이 주시는 이런 은혜를 나의 것으로, 연합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달려갈 때, 우리는 어느덧 주님께 속한 자가 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은 어느덧 우리 영혼을 붙들어주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보시기에 또 선한 양심과 착한 마음에 어긋나는 것을 내 주님의 생명으로 거절하게 하시고, 설 수 있게 하시고,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의로운 생활, 거룩한 생활, 예수님께 붙들린 그의 종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심을 맛볼 수 있을 줄 압니다.

오늘도 내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라!
우리는 로마서 6장 말씀 속에 나 스스로 아무리 애써도 죄의 종이란 이 이름 속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죄의 종이었습니다. 옛사람은 죄의 종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예수님의 생명만이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아름답고, 능하고, 복스러운 삶을 가지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점을 조용히 묵상하므로 여러분과 저의 영혼 속에 큰 영광 있기를 원합니다.

서두르지 마세요.
스스로 몸부림치지 마세요.
조용히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므로 오늘도 예수님께 연합된 이 조용한 마음으로 내 주님을 조용히 갈망하며, 내 주님을 사모하며, 끊임없는 그의 은혜를 구하여 가므로 예수님의 은혜의 이슬에, 예수님의 사랑에, 예수님의 생명에 붙들린 자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있는 값진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원합니다.

좋은 밭

부산수민교회 이 상 분 권사님

주님께 소망을 올립니다.
이 봄에는
따스한 햇볕 아래 싹을 틔우게 하시고,
여름에는 하늘 우로로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풍성한 열매로 주의 제단을 찾게 하소서.

주님의 보좌 앞에 앉아 주님께 귀 기울이리니,
사람 의를 좇고 사람의 판단을 따르는
깨달음 없는 길가 밭으로 가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세상 앞에서는 주님께 피하여 숨으리니,
홀로 일어서서 세상과 헛되게 씨름하는
상처투성이의 돌밭으로 가지 않게 하소서.

이 땅의 부요에 마음 두지 않는다 하여도
오늘의 부족함과 고단함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결실이 없는 가시떨기 밭이 되리니,
유업의 동산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게 하소서.

주님,
이 아름다운 부활의 봄에 긍휼을 베푸소서.
이 세상에는 주님의 말씀을 심을 곳이 없으니,
주께서 친히 좋은 땅을 주소서.

생명수 가에 뿌리내리고
시절을 좇아 열매 맺도록
하늘 이슬에 젖어있는 좋은 밭을 허락하소서.

광 야

윤 선 교 목사님

광야는 외로운 곳입니다.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는 막막한 곳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한계에 직면한 곳,
그래서
하나님과 나와 일대일로 직면하는 곳,
내 영혼이 정결해지고
맑아지는 곳이 광야입니다.

내 영혼이 단순해 해지는 곳,
그래서 철저히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손을 드는 그곳이 광야입니다.

난은 가장 고통스러울 때에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고난의 긴긴 밤을 지날 때
생명 같은 이슬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미드바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이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누구든지 인생의 광야를 만날 때는
절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인생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요 기적의 장소입니다.

우슬초와 같이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릴 때
생명과도 같은 은총의 이슬이
하늘로부터 내려옵니다.

오늘도 승리의 비결은 주님 안입니다.
은밀하게 다가오시는
새벽이슬 같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슬초와 같이
날마다 내 영혼이 천국 이슬에 젖어 살 때에
광야 같은 거친 세상에서
우리도 넉넉히 삶의 꽃을 피우고
아름다운 인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 영혼의 빈들판을
잊지 말고 찾아 나섭시다.
그리고
주님 거기 계심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내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광야는 외로운 곳입니다.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는 막막한 곳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한계에 직면한 곳,
그래서
하나님과 나와 일대일로 직면하는 곳,
내 영혼이 정결해지고
맑아지는 곳이 광야입니다.

내 영혼이 단순해 해지는 곳,
그래서 철저히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손을 드는 그곳이 광야입니다.

난은 가장 고통스러울 때에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고난의 긴긴 밤을 지날 때
생명 같은 이슬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미드바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이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누구든지 인생의 광야를 만날 때는
절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인생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요 기적의 장소입니다.

우슬초와 같이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릴 때
생명과도 같은 은총의 이슬이
하늘로부터 내려옵니다.

오늘도 승리의 비결은 주님 안입니다.
은밀하게 다가오시는
새벽이슬 같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슬초와 같이
날마다 내 영혼이 천국 이슬에 젖어 살 때에
광야 같은 거친 세상에서
우리도 넉넉히 삶의 꽃을 피우고
아름다운 인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 영혼의 빈들판을
잊지 말고 찾아 나섭시다.
그리고
주님 거기 계심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