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30 / 60호
    1월 조그만 나의 빈들판
    조그만 빈들판
      주님!
      나의 날들이 어두워지지 않기 위해
      내 주 당신께로
      새로이 다가서 보고요.

      주님!
      나의 날들이 누렇게 퇴색된
      그러한 날들 같지 않기 위해서
      내 기쁨 되신 당신께로
      새로이 솟아오릅니다.

      그 누구인들 자기의 날들을
      복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사망의 땅과 흑암의 권세 아래 있는
      이 땅 위의 사람에게
      유일한 참 구주 되신
      큰 빛 되신 내 주 당신만은
      나의 날들을
      참으로 새롭고도 기대감 넘치는
      복된 날로 이끄실 수 있기에

      주님!
      조그만 빈 들판이라고 합니다만
      실상은 너무 소중하고 너무 값진
      내 삶의 근원 되신
      내 주 당신과의 만남의 이 가느다란,
      쉽게 무시당하기 쉬운 이 조그만 영역,
      이 조그만 시간을
      달리 없는 내 진정한 삶의 근원으로 알고
      나아가고 매달려 보고자 합니다!

      주님!
      참된 밝음과 참된 새로움이 거기에 있습니다!!
      주님! 거기에서
      무익하나마 당신이 보내시고자 하시는
      어두움과 낡음의 이 세상에
      당신의 보내신 빛으로
      당신의 보내신 참된 소금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당신의 그 어떠하심에 묶인
      내 주 당신의 사람으로 말입니다.
      내 주여! 내 주여!! 아멘! 아멘!!

      2013년 1月에
      Chapter I.
      기도의 방을 지키는 자
      취적리교회 배 명 자 집사님
      이 하루 세상과 마주하기 전
      기도의 빈들에서
      먼저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합니다.

      오늘 맞닥뜨릴 세상길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기도의 손 놓지 않고
      꼭 붙들겠습니다.
      그래서 한 낮에도, 하루일과가 마쳐진 저녁에도
      이 세상 보이는 그 무엇 때문에
      주님 곁에 머무는 행복을 놓치고 싶진 않습니다.

      어떤 날은 아무런 일 없어
      하루가 무미건조하게 다가와도
      기도는 오늘을 살아갈 의미이고
      섬김이 있고 그 어떤 것이 좋아보여도
      기도를 놓쳐 버린다면
      의미를 담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길이 어떠하든
      보이는 그 어떤 것에 이끌려 아파하지 아니하고
      내 기도의 방을 지키는 자로
      지칠 줄 모르고 주님을 바라보는 기도의 사람으로
      주님 앞에 머물고 싶습니다.

      내 살아가는 삶의 곳이 비록 좁지만
      기도의 날개를 펼칩니다.
      어디까지 이르렀던지
      나의 사랑하는 주님 곁에서
      기도에는 늘 목마른 자로
      주님을 부르고 또 부르며
      내 기도하는 성루에 오르렵니다.
      Chapter II.
      빈 들판
      영동에서 김 훤 자매님
      예수님 제가 사는 곳은 빈 들판입니다.
      세상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빈 들판은 제가 살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 제가 가야 할 학교도 어렵지만
      예수님과 함께 빈 들판으로 나아가는 맘일 때는
      어렵지 않습니다.

      빈 들판에서 예수님이 저를 아십니다.
      빈 들판에서는 숨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위로하시고 친구로 만나주십니다.
      빈 들판에서 사랑하는 목사님 식구님들이
      더 보고 싶어집니다.

      빈 들판은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빈 들판에서 저는
      예수님과 더 많이 가까이 사귀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예수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Chapter III.
      돌이킬 수 없는 삶
        요한복음 9장의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은 그 부모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보면 장성한 사람이라고 할 만큼 많은 세월을 보낸 사람임을 보게 됩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었기에 이 세상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고 밝히 보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볼 수 없었던 이 세상을 이제는 한번 살아볼 만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이 소경은 그러한 마음을 품은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확실하고 강한 마음이 있는 모습을 우리가 읽게 됩니다.
        사실 그가 세상을 제대로 본 적이 없고 이제 눈을 떴는데 이 세상을 한번 살아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것에 깊은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이고, 그 예수님을 향하여 온 마음으로 믿고, 온 마음으로 따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틀림없이 그는 요한복음 9장 다음 장인 10장의 진정한 주님의 양이 될 수 있을 줄 압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9장의 말씀 가운데서 이러한 것을 넉넉하게 헤아려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자기에게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들이 하는 말을 틀림없이 들었습니다. 그의 귀에 생생하게 들렸습니다.
        “주님! 이 사람이 이렇게 소경된 것은 자기 때문입니까? 자기 부모 죄 때문입니까?”라고 제자들이 물을 때, 자기 때문도 아니고 부모님 때문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여주시는 예수님의 그 인자로우신 음성! 그 인자로우심은 그의 마음속에 정말 뭉클하게 다가왔을 줄 압니다.

        그가 소경이었습니다만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곁을 지나가고, 그가 아는 대로 자기 부모님, 자기의 가족들, 그 모든 이들로부터 그가 들었던 말들은 얼마나 그러하였겠습니까! 눈 감고 당하였던 그것이 진실된 것 아닐까요?
        그러나 그 가운데 자비로운 음성으로 “그 사람 죄 때문 아니다! 그 사람 부모님 죄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고자 하신 역사가 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일이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그 인자로우신 음성!

        요한복음 9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그 눈을 띄워 준 소경을 두 번째 만나셔서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눈 감은 가운데서 들었던 그 음성의 사람이 바로 주님 자신임을 주님은 증명하여 주시었습니다.
        한 번 들었던 그 음성!
        바로 그 속에는 주님의 인격이 포함된 줄 압니다.
        그가 또한 눈 감고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그 목소리. 바로 그것이 세상입니다.

        그렇습니다!
        눈 감았을 때 이 세상에서 수많은 멸시와 모욕을 당했던 그가, 업신여김을 당하고 철저히 낙망했던 그가, 눈 감은 가운데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만, 눈 뜨고 난 이후에 이 세상을 향해서 다시 나아가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는 정확했습니다. 이 세상에 기대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감은 가운데서 그에게 들려왔던 주님의 그 음성 속에 소망과 기대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질 것에 관해서 기대감이 있습니까?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나아가십시오.

        요한복음 5장의 38년 된 병자처럼 일으킴을 받은 이후에 이 세상에서 살아볼 마음으로 나아가십시오. 히스기야 왕도 짓눌리고 어려움 당했던 가운데서 주님께서 건져주신 그 구원을 인하여 자유로워진 이후에, 다시금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나아가십시오.

        그러나 참된 마음을 가진 소경은 그가 많은 것 만나보지 아니했지만, 아마도 주님은 틀림없이 “네가 눈 감은 가운데서 본 그 세상이 바로 이 세상이다. 눈 감은 가운데서 만난 그 사람이 바로 나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진실된 관계 속에서 내 주님을 알아본다면, 내가 만나보지 못한 세상을 향해 새로운 그 무엇을 볼 것처럼 다가서는 마음이 아니라, 나의 목자 되신 주님 한 분께 내 인생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 세상에 대해서는 그렇게 속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낙심도 해보았습니다. 벌써 마음으로 이 세상에 더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신의 그 음성은 지쳐있는 내 영혼 속에, 삶이 없는 내 영혼 속에, 무언가 살아갈 의미가 있도록 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주님 당신이 내 영혼에 언제나 새롭게 다가올 주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나의 주님께 매여 보는 것 얼마나 좋을까요!

        마치 여러분이 세상을 보지 못하는 소경처럼 세상을 실컷 만나놓고, 또 새롭게 무엇을 좀 안다고 세상을 또 만나보겠다고요?
        그러나 제대로 눈 뜬 사람이라면 절대 그렇게 가지는 아니할 것 같습니다.

        삶에 실패하고 팔려서 6년 동안 종살이를 살았던 신명기 15장에 나오는 그 종이 세상을 잘못 본 것일까요? 자기를 잘못 본 것일까요?
        다시 한 번 도전해볼 만한 이 세상일까요?
        그렇게 한다면 우리 인생이 또 어떻게 될 것인가는 너무도 뚜렷한 것 같습니다.

        ‘주님! 제가 제힘으로 살아온 세상의 어떠함도 보았습니다마는 내 주인님께 속해서 주인님의 집에서 힘입은 사랑도 제가 압니다. 세상과 나의 주님께 속한 주님의 집과 이 둘의 차이를 제가 다 압니다.

        내게 지금 자유로운 길이 주어져 와서 이제 선택하라 말하고 다시금 세상에서 한 번 더 살아볼 기회가 있는 것 같이 말합니다만, 주님 아닙니다. 저는 이제 세상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돌이킬 수 없습니다. 나의 남은 일생을, 나의 영원을 내 주인님께 속하도록 결정하렵니다.’

        그렇습니다.
        보지 못한 세상이 또 앞에 올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금부터 40년 전에는 보지 못했던 세상이 지금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생각을 똑바로 해보십시오. 전에 보지 못했던 세상을 지금 보고 살지만 세상은 역시 그 세상입니다.
        ‘예수님! 나의 주님으로 나의 진정한 구주로, 아버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빛으로 인도하여주시고, 나의 삶을 주시고자 하시는 예수님! 당신께 매인 생활만이 나의 삶입니다.’ 하는 마음으로 내 주님께 속하는 이 진실한 마음이 2013년을 열어가는 우리 마음이 되었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9장의 소경은 그 세상에서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의 진실함 가운데서 고백함으로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란 주님의 부름을 받아 나온 자들의 모임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이제 세상에 속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향해서 한 번 도전해보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 당신의 그 음성에, 당신의 그 사랑에, 당신의 그 역사하심에, 내 인생을 맡기고 싶습니다. 조용히 주님 따르며 주님과 함께하는 이 길 속에서 내가 여전히 세상을 보지 못하고, 내 장래를 보지 못하는 소경 같을지라도 나는 주님만을 보면서 가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눈 감았을 때 들려왔던 그 음성. 주님! 그 음성에 저를 맡기고 싶습니다. 당신은 보이지 않는 나의 장래에 관해서, 보이지 않는 나의 내일에 관해서 나를 맡기고, 한 시간 후를 알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내가 알고 내가 주목하며 내가 따라갈 수 있는 분은 당신뿐인 줄 압니다.’

        여러분!
        이 강한 마음일 때 자기를 상실한 안타까움의 고백은 없을 줄 알고요, 내 주님 모신 생명의 삶을 우리는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치 요한복음 10장에서 주님의 양이 갖가지 음성이 들려오고 세상으로부터 갖가지 소리가 자기를 불러도 ‘아니다’라고 다 피하면서 보이지 않는 선하신 주님의 그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모습처럼, 요한복음 9장과 직결해 본다면 ‘이제 나는 세상에 대해서 기대하지 않습니다. 내가 스스로 이런저런 것에 대해서 기대가 없습니다. 나의 진정한 기대는 주님입니다!’라고 하는 마음으로 꽉 붙잡힌 자가 주님의 양으로 살아가는 참다운 자인 줄 압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해가 왔다 하여 무엇을 기대해볼 만한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진실된 주님의 양은 아닙니다.
        또 새롭게 아버지 하나님의 하실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그 빛으로 이끌어 주실 내 목자 되신 나의 주님 없이는 여전히 소경된 마음으로, 내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온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이 참된 삶의 자세가 여러분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주님 한 분께 마음 두어가므로 세상을 안다는 말이 아니라, ‘나를 참으로 사랑하시고 나를 참으로 알아주시는 내 주님을 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손안에 있다! 주님과 함께이다!’라는 이 행복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돌이킬 수 없습니다!
        돌이킬 수 없습니다!!
        벌써 그때 보았던 세상, 눈 감았을 때 보았던 세상이 그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들려왔던 주님의 음성이 내 영혼을 결정할 수 있는 나의 주님, 나의 목자이십니다!

        다가오는 시간 속에 주님을 향하여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정돈하여가며 내 주님을 따르는, 내 주님께 이끌려 가는, 참되신 주님의 사람 되고자 조용하게 주님을 향해 기대감을 갖는, 이러한 나의 빈 들판을 선택하여 보는 여러분 되시기를 원합니다.
        Chapter IV.
        그리스도의 심장
        김 그 래 집사님(세나 엄마)
        아득히 밀려오는 저녁노을에
        물들어 가는 붉은 하늘.
        소리 없이 스치고 가는 물결.
        이 시간 나의 빈들입니다.

        바닷가에 서 계신 주님 향해 뛰어든
        베드로의 마음이 생각됩니다.
        표현하기조차 가치 없는 나를
        주님의 십자가로 살려 주시고
        오늘 그리스도의 심장을 듣게 하십니다.

        하늘 향한 사닥다리 굳게 붙들고
        살아있는 심장으로
        주님의 마음과 심장을 지키며
        올해도 한 발 한 발 오릅니다.

        우리의 불붙는 기도가
        우리의 간절한 간구가
        그곳에서 이곳에서 또 저곳에서도
        영혼들의 심장이 살아나기를 원합니다.

        어떠한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 와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간구한
        사도 바울 선생님의 구함이
        나의 구함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두운 세상이지만
        주님 백성의 심장이 힘차게 뛰며
        겸손히 신실하게 하늘 향해 오르는
        낮은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Chapter V.
        감사의 멍에
        영동에서 유 오 순 집사님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 11:29)

        주님 안에서만 저의 삶을 꾸려갈 때
        참 기쁨을 얻어 봅니다.
        주님께서 지워주시는 멍에는 영광입니다.
        그 안에 주님께서 저의 길을 예비하시고 계십니다.
        그 무겁고 어려운 짐은 제게 큰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매여주시고 빛 비추어 주셔서
        그 어둠의 골짜기도 순종의 걸음입니다.

        주님께서 지워주시는 멍에
        저로서는 설 수 없고 부족하지만
        제게 들려주시고자 하시는 세미한 음성 듣고자,
        찬 서리와 찬바람이 볼이 시리도록 불고 불어
        어느새 집 앞 냇가에 두껍게 얼어붙은
        그 얼음 사이에 귀 기울이면,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만 들려오듯이
        녹지 않을 정도로 두꺼워진
        어둠의 빙벽 같은 못된 저를
        그 멍에와 함께 지워주셨습니다.

        그 멍에와 저의 모든 짐을 주님께 내려놓아 봅니다.
        그 속에는 세미 하지만 평안입니다.
        그 길에만 귀 기울입니다.
        주님께서 지워주신 멍에 속에서 만이
        알 수 있기에 말입니다.

        주님!
        이 길 속에 주님 은혜 허비하지 않는
        기름 등불 예비하는 자로 주 앞에 드려봅니다.
        Chapter VI.
        주님 앞에 일어선 자
        영동에서 김 현 섭 집사님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주님!
        지나간 날도
        걸어가 보지 못한 새날에 허락한 순간순간도
        감사하며 주님의 생명을 좇아 일어서 갑니다.

        때론 더디고 무능해 보일지라도
        사람들의 길 감이 아닌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 더듬으며
        일어서 보는 맘 있기에 잠잠히 기다립니다.

        승리의 기쁨은 없어도
        잠잠히 주님 앞에 기다리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어리숙해 보여도
        잠잠히 주님 얼굴 내밀어 주실 때까지 기다립니다.

        서 있는 곳이 메마른 땅끝일지라도
        예루살렘 향하여
        주님이 나의 생명으로 다스려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모리아 산에서 순종하여
        잠잠히 이삭을 드렸던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그 믿음 지키고
        주님 위해 강한 자로
        일어선 자로 힘써 가봅니다.
        Chapter VII.
        나의 평범한 오늘의 생활 속에서…
          영문학자였으며 시인이었던 변영로 씨는 논개를 가리켜 말씀할 때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더 깊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종교는 나름대로 그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그보다도 더 깊다고 논개의 그 삶을 논하여 주었습니다.

          어느 분은 대통령 어르신을 모시는 삶이 얼마나 철저하였던지 그 철저함을 곁에서 보았던 이가 “그 비서실장에게 대통령을 모시는 것은 종교였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두 사람 모두 종교에 관한 것을 결코 가볍게 얘기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논개의 그 강한 마음을 가볍게 폄하하고자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만, 우리가 종교라는 그 영역 속에서 나름대로 그 무엇을 추구한다면 변영로 씨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이 나름대로 종교의 어떠함을 추구하는 강한 면모로 본다면 어느 대통령 비서실장이 정말 온 마음으로 밤낮없이 어떤 시간도 빈틈 두지 아니하고 대통령을 철저히 모시고자 했던 그 열성을 표현할 때, 그에게 대통령을 모시는 것은 종교였다는 그 표현은 나름대로 종교에 열심 있는 어떤 면모를 표현해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로마서 6장 말씀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과 함께 나를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새 생명 속에 사는 것이 우리에게는 종교가 아닙니다.

          분명히 종교는 아닙니다!
          나를 던져버리고 아니, 그들은 종교를 통하여 참으로 그 나름대로 그들이 원했던 자기를 얻고자 할지 몰라도, 내가 속할 수 있고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참된 생명 주시는 주님의 그 생명 속에서 사는 삶을 가지고 있다면, 어느 사람이 어머님의 사랑과 아기가 엄마 품에 매달리는 그 마음을 종교라고 표현하겠습니까?
          그것은 생명의 움직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줄 압니다. 그 사랑은 살아있는 생명의 약동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관계는 정말 그러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멀찍이 따라가다 보면 종교밖에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도 멀찍이 바라보다 보면 종교밖에 못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참으로 구속해주신 예수님의 그 짙은 사랑과 못된 나를 그 몸으로 감싸셔서 십자가에서 처리하여 주시고, 그 못된 나를 무덤 속에 넣어서 장사지내주시고, 부활하신 그 사랑 안에 나를 품어주신 것을 종교라고 한다면, 우리는 분노할 것입니다. 정말 분노할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 아닙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머님과 나 자신보다도 더 나은,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는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은, 아버지와 어머님을 사랑하고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는 그보다도 종교가 더 깊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내 삶의 존재의 근원이십니다.
          내가 오늘 나를 얻을 수 있는 근원이 주님이십니다. 그 사랑이 그러한 사랑입니다.

          누가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그 무슨 종교인 것처럼 이야기한다면 그는 웃을 것입니다. 겉옷을 어떻게 입고 예식을 어떻게 하고 이런 것 가지고 만약에 베드로에게 이야기한다면 그는 그야말로 엉엉 울 것입니다.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오, 그건 정말 나와 상관없는 일이오. 나는 한 분 예수님께 매달린 사람이요. 한 분 예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요.”라고 고백할 줄 압니다. 논개보다 얕은 것 종교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논개의 그 거룩한 분노를 그렇게 우러러 바라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가볍게 대한다는 뜻은 추호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특정한 시기와 어떤 위기 상황 속에서 어떤 일을 이루어 간다는 것, 제가 인용했던 대통령을 모시는 어떤 특별한 일과이거나 그리고 나름대로 나라의 위기 가운데서 그가 안으로 느꼈던 빼앗긴 분노, 그 점을 참으로 가져보는 그 마음. 우리가 한편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나마 예수님을 이런 강한 마음으로 모시는 것이 오늘 여러분과 저의 삶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삶을 오늘 여러분과 저의 신앙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평범한 생활이 어떠하기를 원하실까요?

          저는 잠시나마 우리의 평범한 생활들 가운데서 우리 삶이 이러했으면 좋을 것 같음을 많은 성서 가운데 누가복음에서만 몇 군데 인용해보면서 이것이 어떤 특별한 날이 아니라, 나의 주님을 향한 오늘의 나의 평범한 생활 속에서 주님을 이렇게 모시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정말 그런 생활을 마음속에 품고, 가지고, 그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복음 6장 말씀에서 원수가 갑자기 뺨을 치고, 모욕하고, 겉옷을 빼앗고, 핍박하는 이러한 상황은 세상을 떠나 있고 속세를 떠나 있는 이런 모습은 아닙니다. 갖가지 불의가 있고, 옳지 않음이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얼마든지 성도가 당할 수 있는 여건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여건 속에서 내 주님을 모시고 있는 생활이 누가복음 6장의 반석 되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나의 생명으로 모신, 내가 정말 내 생명으로 붙드는 이런 주님으로 모시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요동치 아니할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 마음속에 홍수와 같고, 창수와 같고, 갑자기 불어 닥친 바람 같을지라도, 내 주님 모신 이 고요한 삶은 흔들 수 없을 줄 압니다.

          여러분!
          종교는 그렇지 못해도 주님을 모신 것은 내 생활입니다. 이 땅에 아직도 여러분과 제가 건강한 몸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지 몰라도 벌써 마음은 부활하신 주님 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나의 반석 삼고, 보이지 않는 주님을 나의 빛으로 삼고, 보이지 않는 주님의 생명을 내 생명 삼고, 예수님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 땅을 떠나고 난 이후에 가져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바보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통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것을 벌써 주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평범한 날, 여러분과 제가 정말 힘입고 살아야 할 중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기초하여 서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여러분, 그냥 내가 어쩔 수 없이 재능이 낮고 생각이 모자라고 주어진 환경이 그러해서 어리석다면, 그 선하신 주님께서 어리석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분명히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찾지도 않고, 추구하지도 아니하고, 붙들지도 아니하며, 자기에게 매여 살고 이 세상에 속해 사는 그 생활은 다른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
          바보야’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선하신 우리 주님께서 ‘어리석다’고 하신다면 그는 정말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0장에서 길가는 사마리아인을 압니다. 어떤 의미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인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런 종교에 매여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여행하는 중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여 주시었습니다. 세상의 이런저런 것에 매여 사는 사람을 여행하는 사람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내 주님께 속하여 주님 모신 마음으로 ‘주님 일어선 세상 저도 일어섰습니다. 주님 길 가시는 세상 저도 주님과 함께 길갑니다. 사랑하는 주님! 예수님께 속한 이 마음은 제 마음을 사로잡습니다.’라고 하며 주님께 매여 이끌리는 그 마음이 누가복음 10장의 사마리아인의 마음인 줄 압니다. 그는 주님을 모신 마음이 뚜렷합니다.

          사무엘 상 10장에서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떡을 가지고 있었나요? 또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세 마리를 끌고 있었나요? 또 어떤 사람은 포도주를 한 가죽 부대를 가져가고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사마리아인도 이런 영혼의 양식을, 이런 영혼의 기쁨을, 이런 영혼의 힘을 가지고 오늘도 주님과 함께 길가고 있는 자인 줄 압니다.

          여러분!
          우리가 날마다 근무를 하든, 평범한 삶을 살아

          가든 주님 모신 이런 삶으로 걷기를 원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되어야 합니다! 아니 참 마음으로 나아가는 마음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언제나 사무엘을 만나보십시오.
          힘이 없는가요?
          언제나 다니엘과 세 친구를 만나보십시오.
          포도주와 영광스러운 힘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양식을 먹어서 생기 있는 마음은 분명히 있을 줄 압니다.
          세상에 흔들거리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연약함을 보이지 아니하고 주님과 함께란 그 속에서의 기쁨, 그 속에서의 영광스러운 힘, 그 속에서의 풍성한 생명력!
          여러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0장 마지막 부분의 베다니 촌의 마리아의 집에서 예수님의 발 앞에 앉은 마리아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다가오셨던 특별한 날에 이루어진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의 전후를 조용히 묵상하다 보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영혼이 주님을 향하여 이런 자세 속에 있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시편 14편에서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내가 이런 마음으로 주님께 속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갈망하고, 주님께 이끌리고 싶은 그의 사람으로, 그의 양으로 주님께 매여 있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빼앗기지 않으실 줄 압니다. 주님을 향한 이런 관계에서 벗어난다면 빼앗긴 자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슴 아픈 마음입니다.
          이것이 오늘 여러분의 집안에서도, 주님과 나의 끊임없는 평범한 생활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2장 35절 말씀에서 주인님께서 혼인집에 가시면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게 말씀해도 주인님 사모하는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이 강하지 않는 자는 그냥 주저앉아버리고 맙니다. 세상의 술친구들과 가까운 삶을 살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내 주님 그리워하고, 내 주님 사모하는 마음속에 있는 마음이라면, 이제 곧 주님이 오신다면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마음으로, 지금 곧 오실 주님처럼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서 있는 영혼을 보게 됩니다.

          이런 영혼이 되어야 누가복음 12장 42절 말씀처럼 그분의 끊임없는 은혜 속에 주님께 신실한 자가 될 수 있고, 주님 주시는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고, 때를 따라 주님 보시기에 기쁨 되는 섬김을 할 수 있는 우리가 가능함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서 있는 것이 어떤 특정한 날입니까? 아닙니다. 어떤 대통령의 비서실장보다도 더 철저한 주님을 향한 이 마음을 정말 가지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날마다 우리 생활이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활을 이런 삶으로 붙들어 주시기를 정말 원하십니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육신을 입고 있지만 자기에게 속한 자가 아니요, 주님께 마음으로부터 사로잡혀서 보이지 않는 주님을 향해 불붙는 마음으로!
          불 꺼진 마음 아닙니다.
          참으로 지친 마음 아닙니다.
          금방이라도 순종해 볼 이런 강한 마음으로 주님을 향해 서 있는, 이런 자세가 여러분과 저의 끊임없는 오늘의 생활이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주님은 정말 이러하시길 원하십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 이하에서 우리는 즐겨 잘 읽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너희 마음이 둔하여지고… ”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세상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 어느 의미에서 이 땅에 남아있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인 줄 압니다. 우리는 이 내용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삶에 대한 해답으로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조금만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벅차고 얼마나 감격스러운 것인가요!
          기도, 주님 들어주십니까? 들어주십니다.
          여러분! 이것.
          정말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할 기도입니다.
          종교적인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일지 몰라도, 오늘도 인격과 인격이신 주님과 나 사이의 기도는, 내 사랑 내 주님 내 구주되신 주님과 나 사이의 은밀 된 속삭임은 중언부언 아닙니다.
          내 생명의 속삭임입니다.
          내 가장 깊은 마음의 속삭임입니다.
          주님을 향하여, 나를 보시는 그 주님을 향한 내 인격의 외마디입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기도를 듣기를 원하십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조용히 있을 그때도 내 주님을 모신 마음, 내 주님을 주님답게 향하는 그 마음! 이 깨어있는 마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이 때론 이런저런 여건 속에서 위기를 만났을 때 히스기야 왕처럼 부르짖어 보는 것도 중요한 것 맞지요. 그러나 자유롭고 평안한 여건일 때는 내 주님으로 모시지 아니하고, 내 구주로 모시지 아니하고, 내 주님으로 앙망하지 아니하고, 주님과 함께 살아갈 것 생각지 아니하고, 스스로 염려하고 스스로 걱정하는 그 어리석음.
          그것은 종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던 예수님과 나 사이의 참된 신앙생활은 그것 아닙니다.

          ‘주님! 보이지 않아도 주님은 내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으셔도 주님께서 저를 보지 않으실 리 없습니다. 보이지 않으셔도 주님께서 저를 기억하지 않으실 리 없습니다.
          주님! 당신은 나를 언제나 감찰하십니다.
          당신은 나를 아십니다. 당신은 나를 깊이 있게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주님! 당신은 나를 영원히 인도하시고 함께하실 내 주님입니다.’

          시편 139편에서 다윗의 가슴 저리는 고백이 그러한 고백인 줄 압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이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생활! 그것 버리십시오.
          아비나 어미보다 나를, 아들이나 딸보다 나를, 바로 우리 가운데 가까이 오셔서 나의 주님으로 서 주시고자 하시는 내 주님의 그 따뜻한 마음을 우리가 알아차려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을 언제나 이렇게 모시고, 이런 마음으로 기도하며 사는 생활!

          누가복음에서 많이 인용할 수 있겠지만 한 군데만 더 인용해보십시다.
          누가복음 24장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열흘 동안의 날짜를 압니다.
          어떤 특정한 날짜라고요? 아닙니다.
          저 예루살렘에서 그들이 열흘 동안만 이렇게 머물렀다고요?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3장이나 누가복음 19장에서 정말 눈물 흘리며 가슴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셨던 그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이 땅을 떠나시고 난 이후에도 주님은 짧지 않은 긴 세월 동안 기다려 주시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만 AD 70년에 로마의 타이터스(Titus) 장군에 의하여서 바로 예루살렘이 처절하게 황폐될 그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향한 마음을 변함없이 역사하여 주시었습니다.
          만약에 주님의 돌아보시는 사랑이 없다면 교회는 떠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열흘만 아닙니다. 열흘만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고 많은 이들이 핍박을 받고 사도 야고보가 죽임을 당하고 사도 베드로가 감옥에 갇히고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주님은 그곳에 계셔 주시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남겨두신 이곳! 핍박이 있고, 환란이 있고 때론 어려움을 겪어가면서도 참으로 주님께서 “이 성에 유하라. 이 성에 유하라!”
          오늘도 예수님 의지하고 예수님 사랑하며, 나의 주님께 다스림 받는 믿음에 인격적인 예루살렘의 진정한 그 복된 삶을 우리가 굳건하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말할 때, 예루살렘 심판 때 교회는 깨어서 그 심판을 피했다는 역사적인 증언처럼, 주님의 뜻하신 심판이 임해올 그때에 주님 불러주실 그날까지, 우리가 언제나 나의 주님 신뢰하며 이사야 26장처럼 견고한 믿음으로 서야 합니다.
          주님의 평강 속에 서 가며, 내 주님의 뜻하시는 그 주님의 이끄시는 의로운 길 따라 순종하며,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가 주의 사람으로 잘 서가는 그런 생활이 우리의 평범한 생활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이, 주변의 환란과 핍박이, 우리를 엄습하지 못하고 주의 평강 속에 있다면 힘주어 말해도 좋습니다. 어둠과 죄악도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밝으심과 주님의 거룩하심과 주님의 그 어떠하심만이 우리 인격을 점령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이 되기를!
          날마다 오늘의 생활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주시고자 하십니다!
          주님은 주시고자 하십니다!!
          Chapter VIII.
          주님이 함께하시기에…
          수민교회 백 승 천 장로님
          영문학자였으며 시인이었던 변영로 씨는 논개를 가리켜 말씀할 때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더 깊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종교는 나름대로 그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그보다도 더 깊다고 논개의 그 삶을 논하여 주었습니다.

          어느 분은 대통령 어르신을 모시는 삶이 얼마나 철저하였던지 그 철저함을 곁에서 보았던 이가 “그 비서실장에게 대통령을 모시는 것은 종교였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두 사람 모두 종교에 관한 것을 결코 가볍게 얘기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논개의 그 강한 마음을 가볍게 폄하하고자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만, 우리가 종교라는 그 영역 속에서 나름대로 그 무엇을 추구한다면 변영로 씨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이 나름대로 종교의 어떠함을 추구하는 강한 면모로 본다면 어느 대통령 비서실장이 정말 온 마음으로 밤낮없이 어떤 시간도 빈틈 두지 아니하고 대통령을 철저히 모시고자 했던 그 열성을 표현할 때, 그에게 대통령을 모시는 것은 종교였다는 그 표현은 나름대로 종교에 열심 있는 어떤 면모를 표현해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로마서 6장 말씀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과 함께 나를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새 생명 속에 사는 것이 우리에게는 종교가 아닙니다.

          분명히 종교는 아닙니다!
          나를 던져버리고 아니, 그들은 종교를 통하여 참으로 그 나름대로 그들이 원했던 자기를 얻고자 할지 몰라도, 내가 속할 수 있고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참된 생명 주시는 주님의 그 생명 속에서 사는 삶을 가지고 있다면, 어느 사람이 어머님의 사랑과 아기가 엄마 품에 매달리는 그 마음을 종교라고 표현하겠습니까?
          그것은 생명의 움직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줄 압니다. 그 사랑은 살아있는 생명의 약동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관계는 정말 그러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멀찍이 따라가다 보면 종교밖에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도 멀찍이 바라보다 보면 종교밖에 못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참으로 구속해주신 예수님의 그 짙은 사랑과 못된 나를 그 몸으로 감싸셔서 십자가에서 처리하여 주시고, 그 못된 나를 무덤 속에 넣어서 장사지내주시고, 부활하신 그 사랑 안에 나를 품어주신 것을 종교라고 한다면, 우리는 분노할 것입니다. 정말 분노할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 아닙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머님과 나 자신보다도 더 나은,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는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은, 아버지와 어머님을 사랑하고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는 그보다도 종교가 더 깊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내 삶의 존재의 근원이십니다.
          내가 오늘 나를 얻을 수 있는 근원이 주님이십니다. 그 사랑이 그러한 사랑입니다.

          누가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그 무슨 종교인 것처럼 이야기한다면 그는 웃을 것입니다. 겉옷을 어떻게 입고 예식을 어떻게 하고 이런 것 가지고 만약에 베드로에게 이야기한다면 그는 그야말로 엉엉 울 것입니다.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오, 그건 정말 나와 상관없는 일이오. 나는 한 분 예수님께 매달린 사람이요. 한 분 예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요.”라고 고백할 줄 압니다. 논개보다 얕은 것 종교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논개의 그 거룩한 분노를 그렇게 우러러 바라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가볍게 대한다는 뜻은 추호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특정한 시기와 어떤 위기 상황 속에서 어떤 일을 이루어 간다는 것, 제가 인용했던 대통령을 모시는 어떤 특별한 일과이거나 그리고 나름대로 나라의 위기 가운데서 그가 안으로 느꼈던 빼앗긴 분노, 그 점을 참으로 가져보는 그 마음. 우리가 한편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나마 예수님을 이런 강한 마음으로 모시는 것이 오늘 여러분과 저의 삶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삶을 오늘 여러분과 저의 신앙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평범한 생활이 어떠하기를 원하실까요?

          저는 잠시나마 우리의 평범한 생활들 가운데서 우리 삶이 이러했으면 좋을 것 같음을 많은 성서 가운데 누가복음에서만 몇 군데 인용해보면서 이것이 어떤 특별한 날이 아니라, 나의 주님을 향한 오늘의 나의 평범한 생활 속에서 주님을 이렇게 모시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정말 그런 생활을 마음속에 품고, 가지고, 그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복음 6장 말씀에서 원수가 갑자기 뺨을 치고, 모욕하고, 겉옷을 빼앗고, 핍박하는 이러한 상황은 세상을 떠나 있고 속세를 떠나 있는 이런 모습은 아닙니다. 갖가지 불의가 있고, 옳지 않음이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얼마든지 성도가 당할 수 있는 여건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여건 속에서 내 주님을 모시고 있는 생활이 누가복음 6장의 반석 되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나의 생명으로 모신, 내가 정말 내 생명으로 붙드는 이런 주님으로 모시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요동치 아니할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 마음속에 홍수와 같고, 창수와 같고, 갑자기 불어 닥친 바람 같을지라도, 내 주님 모신 이 고요한 삶은 흔들 수 없을 줄 압니다.

          여러분!
          종교는 그렇지 못해도 주님을 모신 것은 내 생활입니다. 이 땅에 아직도 여러분과 제가 건강한 몸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지 몰라도 벌써 마음은 부활하신 주님 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나의 반석 삼고, 보이지 않는 주님을 나의 빛으로 삼고, 보이지 않는 주님의 생명을 내 생명 삼고, 예수님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 땅을 떠나고 난 이후에 가져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바보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통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것을 벌써 주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평범한 날, 여러분과 제가 정말 힘입고 살아야 할 중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기초하여 서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여러분, 그냥 내가 어쩔 수 없이 재능이 낮고 생각이 모자라고 주어진 환경이 그러해서 어리석다면, 그 선하신 주님께서 어리석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분명히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찾지도 않고, 추구하지도 아니하고, 붙들지도 아니하며, 자기에게 매여 살고 이 세상에 속해 사는 그 생활은 다른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
          바보야’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선하신 우리 주님께서 ‘어리석다’고 하신다면 그는 정말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0장에서 길가는 사마리아인을 압니다. 어떤 의미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인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런 종교에 매여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여행하는 중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여 주시었습니다. 세상의 이런저런 것에 매여 사는 사람을 여행하는 사람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내 주님께 속하여 주님 모신 마음으로 ‘주님 일어선 세상 저도 일어섰습니다. 주님 길 가시는 세상 저도 주님과 함께 길갑니다. 사랑하는 주님! 예수님께 속한 이 마음은 제 마음을 사로잡습니다.’라고 하며 주님께 매여 이끌리는 그 마음이 누가복음 10장의 사마리아인의 마음인 줄 압니다. 그는 주님을 모신 마음이 뚜렷합니다.

          사무엘 상 10장에서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떡을 가지고 있었나요? 또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세 마리를 끌고 있었나요? 또 어떤 사람은 포도주를 한 가죽 부대를 가져가고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사마리아인도 이런 영혼의 양식을, 이런 영혼의 기쁨을, 이런 영혼의 힘을 가지고 오늘도 주님과 함께 길가고 있는 자인 줄 압니다.

          여러분!
          우리가 날마다 근무를 하든, 평범한 삶을 살아

          가든 주님 모신 이런 삶으로 걷기를 원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되어야 합니다! 아니 참 마음으로 나아가는 마음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언제나 사무엘을 만나보십시오.
          힘이 없는가요?
          언제나 다니엘과 세 친구를 만나보십시오.
          포도주와 영광스러운 힘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양식을 먹어서 생기 있는 마음은 분명히 있을 줄 압니다.
          세상에 흔들거리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연약함을 보이지 아니하고 주님과 함께란 그 속에서의 기쁨, 그 속에서의 영광스러운 힘, 그 속에서의 풍성한 생명력!
          여러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0장 마지막 부분의 베다니 촌의 마리아의 집에서 예수님의 발 앞에 앉은 마리아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다가오셨던 특별한 날에 이루어진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의 전후를 조용히 묵상하다 보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영혼이 주님을 향하여 이런 자세 속에 있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시편 14편에서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내가 이런 마음으로 주님께 속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갈망하고, 주님께 이끌리고 싶은 그의 사람으로, 그의 양으로 주님께 매여 있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빼앗기지 않으실 줄 압니다. 주님을 향한 이런 관계에서 벗어난다면 빼앗긴 자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슴 아픈 마음입니다.
          이것이 오늘 여러분의 집안에서도, 주님과 나의 끊임없는 평범한 생활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2장 35절 말씀에서 주인님께서 혼인집에 가시면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게 말씀해도 주인님 사모하는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이 강하지 않는 자는 그냥 주저앉아버리고 맙니다. 세상의 술친구들과 가까운 삶을 살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내 주님 그리워하고, 내 주님 사모하는 마음속에 있는 마음이라면, 이제 곧 주님이 오신다면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마음으로, 지금 곧 오실 주님처럼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서 있는 영혼을 보게 됩니다.

          이런 영혼이 되어야 누가복음 12장 42절 말씀처럼 그분의 끊임없는 은혜 속에 주님께 신실한 자가 될 수 있고, 주님 주시는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고, 때를 따라 주님 보시기에 기쁨 되는 섬김을 할 수 있는 우리가 가능함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서 있는 것이 어떤 특정한 날입니까? 아닙니다. 어떤 대통령의 비서실장보다도 더 철저한 주님을 향한 이 마음을 정말 가지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날마다 우리 생활이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활을 이런 삶으로 붙들어 주시기를 정말 원하십니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육신을 입고 있지만 자기에게 속한 자가 아니요, 주님께 마음으로부터 사로잡혀서 보이지 않는 주님을 향해 불붙는 마음으로!
          불 꺼진 마음 아닙니다.
          참으로 지친 마음 아닙니다.
          금방이라도 순종해 볼 이런 강한 마음으로 주님을 향해 서 있는, 이런 자세가 여러분과 저의 끊임없는 오늘의 생활이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주님은 정말 이러하시길 원하십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 이하에서 우리는 즐겨 잘 읽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너희 마음이 둔하여지고… ”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세상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 어느 의미에서 이 땅에 남아있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인 줄 압니다. 우리는 이 내용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삶에 대한 해답으로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조금만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벅차고 얼마나 감격스러운 것인가요!
          기도, 주님 들어주십니까? 들어주십니다.
          여러분! 이것.
          정말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할 기도입니다.
          종교적인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일지 몰라도, 오늘도 인격과 인격이신 주님과 나 사이의 기도는, 내 사랑 내 주님 내 구주되신 주님과 나 사이의 은밀 된 속삭임은 중언부언 아닙니다.
          내 생명의 속삭임입니다.
          내 가장 깊은 마음의 속삭임입니다.
          주님을 향하여, 나를 보시는 그 주님을 향한 내 인격의 외마디입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기도를 듣기를 원하십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조용히 있을 그때도 내 주님을 모신 마음, 내 주님을 주님답게 향하는 그 마음! 이 깨어있는 마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이 때론 이런저런 여건 속에서 위기를 만났을 때 히스기야 왕처럼 부르짖어 보는 것도 중요한 것 맞지요. 그러나 자유롭고 평안한 여건일 때는 내 주님으로 모시지 아니하고, 내 구주로 모시지 아니하고, 내 주님으로 앙망하지 아니하고, 주님과 함께 살아갈 것 생각지 아니하고, 스스로 염려하고 스스로 걱정하는 그 어리석음.
          그것은 종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던 예수님과 나 사이의 참된 신앙생활은 그것 아닙니다.

          ‘주님! 보이지 않아도 주님은 내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으셔도 주님께서 저를 보지 않으실 리 없습니다. 보이지 않으셔도 주님께서 저를 기억하지 않으실 리 없습니다.
          주님! 당신은 나를 언제나 감찰하십니다.
          당신은 나를 아십니다. 당신은 나를 깊이 있게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주님! 당신은 나를 영원히 인도하시고 함께하실 내 주님입니다.’

          시편 139편에서 다윗의 가슴 저리는 고백이 그러한 고백인 줄 압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이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생활! 그것 버리십시오.
          아비나 어미보다 나를, 아들이나 딸보다 나를, 바로 우리 가운데 가까이 오셔서 나의 주님으로 서 주시고자 하시는 내 주님의 그 따뜻한 마음을 우리가 알아차려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을 언제나 이렇게 모시고, 이런 마음으로 기도하며 사는 생활!

          누가복음에서 많이 인용할 수 있겠지만 한 군데만 더 인용해보십시다.
          누가복음 24장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열흘 동안의 날짜를 압니다.
          어떤 특정한 날짜라고요? 아닙니다.
          저 예루살렘에서 그들이 열흘 동안만 이렇게 머물렀다고요?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3장이나 누가복음 19장에서 정말 눈물 흘리며 가슴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셨던 그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이 땅을 떠나시고 난 이후에도 주님은 짧지 않은 긴 세월 동안 기다려 주시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만 AD 70년에 로마의 타이터스(Titus) 장군에 의하여서 바로 예루살렘이 처절하게 황폐될 그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향한 마음을 변함없이 역사하여 주시었습니다.
          만약에 주님의 돌아보시는 사랑이 없다면 교회는 떠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열흘만 아닙니다. 열흘만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고 많은 이들이 핍박을 받고 사도 야고보가 죽임을 당하고 사도 베드로가 감옥에 갇히고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주님은 그곳에 계셔 주시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남겨두신 이곳! 핍박이 있고, 환란이 있고 때론 어려움을 겪어가면서도 참으로 주님께서 “이 성에 유하라. 이 성에 유하라!”
          오늘도 예수님 의지하고 예수님 사랑하며, 나의 주님께 다스림 받는 믿음에 인격적인 예루살렘의 진정한 그 복된 삶을 우리가 굳건하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말할 때, 예루살렘 심판 때 교회는 깨어서 그 심판을 피했다는 역사적인 증언처럼, 주님의 뜻하신 심판이 임해올 그때에 주님 불러주실 그날까지, 우리가 언제나 나의 주님 신뢰하며 이사야 26장처럼 견고한 믿음으로 서야 합니다.
          주님의 평강 속에 서 가며, 내 주님의 뜻하시는 그 주님의 이끄시는 의로운 길 따라 순종하며,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가 주의 사람으로 잘 서가는 그런 생활이 우리의 평범한 생활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이, 주변의 환란과 핍박이, 우리를 엄습하지 못하고 주의 평강 속에 있다면 힘주어 말해도 좋습니다. 어둠과 죄악도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밝으심과 주님의 거룩하심과 주님의 그 어떠하심만이 우리 인격을 점령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이 되기를!
          날마다 오늘의 생활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주시고자 하십니다!
          주님은 주시고자 하십니다!!
          Chapter IX.
          진동치 않을 하늘나라
          수민교회 이 정 애 집사님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마음
          누가 실족하면 그토록 애타는 절규
          진동치 않을 나라를 주시고자
          밤낮을 달려오신 주님의 절절한 사랑

          오늘도 뚜렷한 주님 사랑
          저 하늘 바라보며 주시는 그 사랑
          감옥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진동치 않을 참 평안과 안식

          주님 바라봅시다.
          주님으로 옷 입으세요.
          자신 바라보며 육체의 기회를 허락지 마세요.
          연약한 우리를 세우시며
          달려와 허락하신 진동치 않을 하늘나라

          나그네 삶의 하룻길
          주님 뜻 무엇인지 물어가는 행복감
          항상 고맙고 감사합니다.
          형제 사랑 속에
          진동치 않을 나라로 달려갑니다.
          Chapter X.
          병원 한 모퉁이
          수민교회 백 정 원 자매님
          열매 맺는 주님의 터.
          순결된 마음으로 세상 것 탐하지 않는
          오직 하늘나라에서 거둘 귀한 열매.

          사랑과 섬김으로 함께 하는
          주님의 몸 된 터.
          수고로이 눈물로 단을 거두리로다.

          황무지 뒤집어 일굴 땐 고통 고난 있지만
          그럴수록 더욱 부드러운
          오늘의 십자가진 주님의 터.

          소망이 있기에
          오늘의 비바람은 오히려 양분이 되어
          새 생명 허락하실 주님의 터.

          가난하고 병든 자에게 다가선
          한 알의 밀알된
          온전한 주님의 터 되게 하소서.
          Chapter XI.
          나의 찬송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 구속해 주신 주님의 은혜, 불러주신 주님의 사랑, 택하여 주신 주님의 은혜를 참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후서 1장 말씀처럼 오늘 생활 속에서 주님 가까이하기를 잃어버리고 내 주님 모신 가까운 삶을 놓아버렸다면, 우리는 열매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내다보는 밝음도 없고 옛 죄를 깨끗케 하심도 잊어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벌써 어둠 속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한 삶에 주저앉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되다 보면 찬송은 있기 어려울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베드로 후서 1장, 2장, 3장 말씀처럼 내 주님 알기에 힘써가므로 예수님 모신 삶 가운데 잘 서 있다고 하십시다.
            주님의 마음을 평온케 하고 우리 예수님이 기뻐하실 만큼 주님을 모시고 서 있는 삶을 바로 경건한 삶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이 경건된 삶을 내 삶이라고 붙들고, 이 세상의 어떠함에 치우치지 아니하면서, 주님 모신 강한 마음으로 서서 나의 오늘도 나의 내일도 내 주 되신 주님을 알아가면서, 하루하루 그 은혜 속에 살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이라고 하십시다.

            이러한 마음이라면 그냥 탄식하는 노래 말고요, 우리가 방황하면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애통해하는 그런 노래 말고요, 오늘 이 문제 많고 죄 많은 세상이지만 선하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므로, 주님을 향한 불붙는 강한 마음과 담대하고 확신 있는 마음인 동시에, 우리 영혼 속에 찬송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는 줄 압니다.

            신약 성경 마태복음 26장이나 히브리서 13장이나 골로새서 3장 15~17절이나 에베소서 5장이나 사도행전 16장에서 찬송에 관한 말씀을 조금만 더듬어 본다면, 이 찬송에 관한 말씀들의 내용의 특징이 처음 신앙을 출발할 때에 관한 내용이기보다는, 내 주님을 모시고 오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생활 속에서의 찬양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찬양의 특징이 이 세상을 외면하고 벗어나서 어떤 한적하고 고요한 것이라기보다는, 바로 다가올 엄청난 일들이 있는 그러한 여건들 속에서 또한 그러한 일들을 앞둔 가운데서 주님을 모시고 주님을 향하여 찬송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 생활이 평안하고, 우리 생활이 안정되고, 주어진 범사가 잘 되어 간다고 하여 우리 찬양이 많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줄 압니다. 무덤덤한 영혼이 되어버린다면 진실한 찬양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 오늘도 일들을 형통하게 해주시고 평안하게 해 주시고 주어진 여건이 다 좋아서 감사합니다.’라고 한다면 그 찬송이 깊이 있는 찬송일 수 있을까요?

            출애굽기 12장의 애굽에서 나오는 그날 밤에 하나님을 향해 기뻐하는 것 그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출애굽기 14장의 홍해 바닷가에서 애굽 군대를 그 밤도 막아주시고, 다음날 애굽 사람들은 홍해에서 장사지내버리고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로 인도했을 때, 홍해 건너고 난 이후에 그들이 춤추며 찬송하는 것 그 누가 못하겠습니까!

            물론 찬송하고 기뻐하는 것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다음에 즉시 왔던 수르 광야에서 삼일 길의 목마름 가운데서도, ‘주님! 저는 주님을 찬송할 것입니다. 저는 주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죽을지라도 나의 구원 되시고 나의 길 되시며 나와 함께 계신 내 주님을 저는 찬송할 것입니다.’라는 마음으로 다가섰다면…

            여러분!
            이곳 출애굽기 15장에서는 출애굽기 14장처럼 애굽에서 온 그들을 다 물리쳐 주시고 놀라운 길로 이끄신 그러한 날은 아니라도, 어쩌면 그분의 사랑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보이고 함께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내가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서서 내 진정한 주가 되신 그분을 내 가슴속에 가장 가까운 분으로 붙들면서 ‘주님! 당신의 고마움을 잊지 못합니다. 나는 죽어도 당신께 속할 것입니다. 주님! 이 가운데서 주님의 사람으로 끝을 낸다 할지라도 저는 이 길에 설 것입니다.’라는 마음이었다면…
            꼭 산다는 마음은 아니지요.
            로마서 14장의 ‘살아도 죽어도’라는 말씀처럼 주님을 향한 이 마음 있어서 찬송이 흘러나온다면 얼마나 값지고 귀한 찬송이었겠습니까!

            출애굽기 16장의 배고픔 속에서 ‘주님!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무리 배가 고파도 예수님 잊을 수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을지라도 저는 주님을 찬송할 것입니다. 주님! 저는 당신을 찬송하고 감사하면서 이 땅을 떠나갈 것입니다.’ 이런 강한 마음이라면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그분의 사랑이 멈추어 버린 것 같아 보이고 그분이 나타나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여건 속에서도, 내 가슴으로부터 그분을 내 주님으로 내 가장 가까운 분으로 붙드는 이 마음을, 이 찬송을 주님은 얼마나 소중히 보시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그 주님을 내 마음에 붙들어 본다면, 세상에서 달리 붙들 것도 없고요 탄식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송할 것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빌립보서 1장에서 사도 바울 선생님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는 죽음이 와도 기뻐하면서 가겠다는 것입니다.
            ‘내 사랑 되신 주님, 내가 사는 길이 아무리 어려워도 예수님을 위해 살 수 있다니 너무 좋습니다.’ 그리고 달리 표현하면 ‘주님, 이제 내가 죽음을 맞이합니다만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니 정말 좋습니다.’
            바로 이 말이 그 말인 줄 압니다.
            빌립보서 1장에서 노래 불렀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지만, 그것은 노래입니다.
            그것은 가슴에 맺힌 노래입니다.

            ‘예수님! 내가 당신을 바라보면서 당신이 살아 주시는 이 가까움 속에서 당신을 위해 살 수 있다니, 아무리 어려움이 많다 해도 저는 찬송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내가 당신을 위하여 죽을 수 있다니, 당신이 부르시는 길속에서 내가 빼앗긴 죽음이 아니라 당신을 위하여 죽을 수 있다니, 이것은 정말 영광입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주님께 향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4장의 향유 부은 여인에 관한 이 내용을 소중히 말씀해 주시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서든지 이 여인의 행한 일을 말하여서 저를 기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런 결과가 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식사하시는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쏟아 붓습니다. 그의 집에 너무 많은 것이 있어서 잠깐 부었다는 것 아닙니다. 힘을 다하여 부은 것이었습니다. 모두어진 사랑이었습니다.
            권능을 행하실 때도 아닙니다.
            놀라운 말씀을 하실 때도 아닙니다.
            조용히 식사하시는 주님입니다.
            조용히 식사하시는 주님께!

            그는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며 온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을 보지 못할 때도 사랑하면서 그 사랑을 묶어온 사람이었습니다.
            복음!
            예수님께서 날 위해 죽기까지 흘리신 그 피.
            복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까지 내게 주신 그 사랑!
            그것이 복음의 알맹이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변함없으심을, 이것도 한번만이 아닌 깊은 사랑이고, 그런 주님으로 지금 보좌에 계신 주님이 내 주님이시라면, 보이지 않는 주님을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품는다면, 여인의 가슴 속에 정성을 모두어 주님께 사랑을 쏟아 붓고 싶은 마음으로 모두운 그 사랑을 무엇이라 할까요?
            그가 이런저런 많은 노래는 부르지 아니했다 할지라도 그의 가슴은 주님을 향하여 젖은 마음이고 노래하는 마음일 줄 압니다.

            ‘주님! 떠날 수 없습니다. 주님! 어려워도 좋습니다. 주님! 그런 것 관계하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은 관계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어느 날, 어느 날, 어느 날 … 이런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주님은 모르시겠습니까? 주님은 분명히 아실 줄 압니다. 이 옥합 속에는 그런 사랑이 깃들어 있다는 뜻인 줄 압니다.

            철없는 사람이, 생각 모자라는 주님의 제자가 그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서 더 많이 활용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짙은 사랑을 나의 장사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시었습니다.
            예수님의 장사.
            돌아가신다고 하여도 사랑하는 그 사랑.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그처럼 사랑하기 원하십니다.

            주인님이 먼 나라 가셔도, 시간이 지나 아무리 길게 기다려도, 주인님이 오시지 아니해도, ‘주인님! 달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주인님! 주인님께 매인 그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삶을 마친다 해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아마 이 마음이 누가복음 19장의 열 므나 남긴 종의 마음일 줄 압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
            보이지 않는 예수님!
            그 주님을 이런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
            아마 예수님은 ‘그래, 오늘도 너는 내가 죽었다 한다 할지라도 나를 벗어나지 못하고 온통 사랑을 쏟아 부을 자이다.’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이상합니다. 주님께 진실된 사랑을 품은 사람은 다 꼭 같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먹는 제자가 있는가 하면, ‘예수님 위하여 감옥에도 죽는데도 함께 갈 것입니다.’라고 하는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지금 아는 것은 죽으면 영광이 있다거나 감옥에 갇히면 영광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주님 사랑하는 그 순수한 마음이 이렇게 묶어지고야 만 줄 압니다.
            그러한 사랑은 예수님이 아니 보여도, 예수님이 떠나가셔도, 주님을 향하여 장례를 준비하는 그런 향유가 될 수 있을 줄 압니다.

            이런 마음은 주님으로 젖어있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은 주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은 주님을 향하여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주님을 위한 생활 외에는 그 무엇도 원치 않는 그러한 마음으로 버티고 있을 줄 압니다.

            히브리서 13장을 보세요.
            여러분!

            히브리서 10장이나 12장이나 주님만 붙들고 이런 삶을 살아온 사람이 그 무엇 가진 것이 많겠습니까?
            만약에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히브리서 13장의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라고 하신 말씀대로 절대 못삽니다. 있는 바로 족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주님 한 분을 믿고 살아왔고, 예수님 한 분을 히브리서 12장처럼 참으로 추구하며 달려온 그 마음이라면, ‘오! 주님, 그러지요. 얼마든지 그러지요! 가진 것이 아무것 없어도 그러지요. 예수님은 전부인걸요. 그리고 주님 당신이 떠나지 아니하시고 당신이 버리지 아니하신다면 저는 족합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자가 나아간다면 오늘 내 살을 에는 그런 아픔이 있는 곳에서도 주님을 찬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찬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겨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향하여 남김 없는 섬김을 할 수 있는 이 마음! 섬김 할 수 있는 이 복된 마음!!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마음이 주님을 향하여 언제나 감사하고, 이런 마음이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며 경배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주님을 향하여 무언가 섬겨드리고 싶은 이 마음이 곧 노래하는 마음인 줄 압니다. 우리 영혼이 주님을 향하여 이런 관계가 되어감으로 노래하는 마음 되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 당신이 빌립보 옥중에서 실컷 매 맞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는 가운데서도 당신이 그날 밤에 기도하면서 찬송했는데 그 찬송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무슨 마음으로 찬송했습니까?’라고 한다면, 얻고자 함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상실한, 내어버리는 가운데서 오는 찬송이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라는 기도는 있었을 줄 압니다.
            주님의 역사가 제한되지 않기를 구하는 기도는 있었을 줄 압니다.

            그러나 그 기도뿐이었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주님! 고맙습니다. 내가 이렇게 당신을 위하여 이렇게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니요. 내가 당신을 위하여 이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다니요. 주님! 고맙습니다.’
            이 짙은 기도가 넘쳤을 것 같습니다.
            그 기도만 하고 싶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주님! 찬양하고 싶습니다.
            정말 찬양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그날 밤에 찬양이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을 마지막으로 오르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찬송 부른 것 같은 마음일 것 같습니다.
            십자가로 가시는 줄 분명히 아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향해 목숨 내놓은 그 마음속에, 아버지를 사랑하며 아버지를 위해 내놓은 마음은 인색한 마음이나 돌아볼 것 없는 그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왔거니와, 다가서는 그 마음속에는 참으로 성령님이 이끌어 주시는 참된 찬송 있을 수 있는 줄 압니다.

            우리의 찬송이 이랬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마음은 찬송하는 마음일 것 같습니다.
            골로새서 3장의 찬송도, 에베소서 5장의 찬송도 주님을 모신 생활이 있는 찬송입니다.

            시편 69편은 찬송 부르기 정말 어려운 여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꽉 묶인 마음, 내 주님을 주님답게 바라보는 마음은 주님 위해 꼭 살겠다는 것 아니라 주님 뜻하신다면 살 수 있고요, 또 주님 부르신다면 기꺼이 주님을 위하여 던지고 싶은 그 마음일 때, 오늘도 주님을 위한 찬송은 있을 수 있는 줄 압니다.

            다윗은 자기 마음을 압니다.
            다윗은 그가 지금 자기 마음속에 품은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러기에 그는 ‘제가 드리는 이 찬송이 뿔이 있고 굽이 갈라진 황소를 드린 것보다도 주님께서 더 기뻐하실 줄 안다.’라고 합니다.

            오늘도 여러분!
            우리에게 이 짙은 찬송이 있었으면 합니다.

            주님이 주신 복음이란 엄청난 사랑이 없다면, 우리가 주님께 묶어질 수 없고 하나님을 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짙은 사랑이 변함없는 오늘의 사랑이고 이 시간의 사랑인 줄 안다면, 그리고 그 사랑에 매이고 난 이후에 내가 나를 스스로 돌아보지 않고자 한다면, 내가 스스로 나를 구원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아니 도리어 주님을 위해서 잃고자 한다면, 저는 여러분과 저의 가슴속에 성령님이 주시는 이런 조용한 찬양이 있을 수 있는 줄 압니다.

            오늘도 보좌에 계신 주님 앞에 다윗의 가슴 속에
            흘렀던 그 값진 찬송! 사도 바울 선생님의 가슴 속에 흘렀던 그 값진 찬송!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주님께서 마지막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면서의 그 값진 찬송!

            히브리서 13장의 그 값진 찬양이 오늘도 강한 마음으로 주님을 조용히 찾는 여러분의 가슴속에 그러나 결코 나약하지 않고 결코 물러설 수 없는 그 강한 마음 위에, 주님 주신 은혜로 인하여 이 짙은 찬양이 여러분의 가슴 속에 늘 있기를 원합니다.
            Chapter XII.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김 아 가 권사님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시 119:54)

            사랑하는 주님!
            택하여 나아간 빈들
            내 주 당신과 함께 서 있습니다.

            내 주 당신의 그 갈보리 십자가
            나를 벗고 당신을 입는 자유함이,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를 노래할 수 있는 여유
            있게 합니다.

            이곳 빈 들에서도
            쪼개어진 짐승 사이로
            횃불은 타오르며(창 15:7)

            쪼개어진 짐승 사이로 지나서
            내 주 당신과의 새로운 언약
            당신의 말씀,
            당신의 법이 임하여 오신다면(렘 34:18)

            오! 주님!
            기꺼이 택하여 갈 십자가.
            이곳에서만
            온 밤과 온 낮을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는 나의 노래로
            내 삶을 채워가리이다.
            주님! 나의 주님! 아멘! 아멘!!
            Chapter XIII.
            달리는 자
            주 하 나 자매님
            주님! 이 빈 들에서
            오늘도 당신께만 달려가고 싶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바울 선생님께서
            나의 달려갈 길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바울 선생님은 아셨겠지요.

            이 길이 힘들어도
            주님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길임을
            그래서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고 귀하다는 것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자, 훈련받지 못한 자는
            결코 오래 달릴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더 주님께 매여야 하고
            더 깨어 있어야 함을…

            다른 곳 바라보지 않고
            오직 우리 예수님만 바라보고
            바다로 뛰어들었던 베드로의 모습처럼
            오늘도 당신만을 바라보며 달려갑니다.
            내가 달려야 하는 이유는
            이곳이 목적지가 아니기에
            그 목적지를 향해 가고 싶어 달려갑니다.

            힘없고 무서움에 가득한
            열왕기상 19장의 엘리야의 기도가 아니라
            시편 27편의 강한 담대한 마음입니다.
            앞으로 지나가야 할 파도들, 넘어가야 하는 산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이 길,
            순종하며 감사하며 달려갑니다.
            시작하는 2013년,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기에 기대해 봅니다.
            우리 예수님 원하시는 길로
            힘차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달려갑니다.
            Chapter XIV.
            주님은 나의 머리이십니다
            수민교회 이 상 분 권사님
            이 땅의 첫 하루를 빛으로 여신 주님,
            빛을 지으신 후에 하늘도 땅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던 모든 것을 지으신 주님,
            저도 항상 주님의 빛을 가지고 싶어요.

            제 기도를 들으셨나요?
            그래서 새벽이 오기 전에 빛을 끌어안고
            밤이슬 속에 문을 두드리셨나요?
            때마다 제가 달려 나와 주님을 맞던가요?
            제 기도가 진심이던가요?

            솔로몬의 기도를 기뻐하시고
            아벨과 그의 제물을 열납하신 주님,
            제게 그들의 중심이 조금이라도 보이던가요?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드리고 있나요?

            느려도 더뎌도 충성하며 살리라 정했지만
            당신께 합하지 않는 걸음은 기쁨이 아니지요.
            하오니 부디
            매일 제 등잔을 기름으로 채우시고
            제 삶의 길이를 빛의 시간으로만 정하소서.
            Chapter XVI.
            참 길
              사람들은 이사야 35장의 내용의 그 축복스런 삶을 정말 원하실 줄 압니다. 사막에 광야에 샘이 솟고, 시내가 흐르고, 생수가 솟아나는 것 얼마나 값지고 중요한 일입니까?

              여러분, 이사야 35장의 내용은 사막 같은 내 영혼, 광야 같은 내 영혼 속에 주님의 은혜가 솟아나고 주님의 은혜가 흐르고 있는 그리고 주님의 은혜가 참으로 풍성하게 다가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기뻐 뛰는 것 사실이지요.
              찬양하는 것 사실이지요.
              내 영혼이 광야와 같고 메마른 광야와 같고 사막과 같은 영혼이라면 우리는 기뻐한다거나 뛴다거나 찬양한다거나 이러한 것은 다 사그라지고야 말 줄 압니다.

              이사야 35장의 뒷부분을 보면 이것은 거룩한 성도의 길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위에 이러한 것은 영영한 기쁨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목하여보면 이것을 추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많겠습니까마는 대부분 다 낙심해서 그림의 떡처럼 쳐다볼지언정 오늘도 여전히 사막 같은 마음 가지고, 여전히 광야 같은 마음 가지고, 여전히 오늘도 거친들 같은 마음을 가지고, 도리어 이사야 35장의 그 내용과는 정 반대의 길속에서 이제는 지친 마음으로 누워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하게 명료한 뜻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사야 35장 바로 앞장인 34장의 마지막 부분을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의 어떠하심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주목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는 언제나 짝이 있음을 말씀하여 주시었습니다. 한편만, 그러한 좋은 결과만 보지 말고 그러한 삶이 올 수 있는 것을 주목해 보란 뜻인 줄 압니다.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이사야 35장보다 몇 장 앞서 있는 이사야 30장과 이사야 32장만 주목해 보아도 우리에게 참으로 도움될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사야 35장은 오늘 우리가 누리는 영적 경험이요 영적 축복이라면, 30장과 32장 속에서 우리는 주님과 나 사이의 언약적인 관계를 더듬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약이 없고 주님과 나의 관계가 언약적이 아닌, 이러한 흘러오는 은혜 속에서 기뻐하는 것 그 얼마나 갈까요? 그것은 정말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여리고 성의 승리 때문에 기뻐하는 것 좋습니다마는 다음날 아이 성에서 실패하다 보면 그 노래와 그 기쁨은 간데없고, 참으로 즐거웠던 그 마음은 간데없고, 비참할 데로 비참해 버린 그들이 되고야 말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길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이기는 자고, 언제나 주님을 모신 가운데서 변함없이 살아갈 수 있는 값진 길이 있습니다. 이것을 언약적인 길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약을 곱씹어야 합니다.
              언약을 되새김질해야 합니다.

              만약에 언약을 내 맘에 곱씹고 되새김질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만약에 이사야 35장만 기뻐하는 그러한 마음이라면, 그것은 레위기 11장의 정결한 자는 절대 되지 못합니다.

              이사야 30장 15절 말씀은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해라! 잠잠하고 신뢰해라!”
              이 말씀은 기뻐 뛰노는 모습은 절대 아닙니다. 변함없으신 내 주님을 향하여 돌아와서 그 주님 안에 그 주님께 속한 마음으로 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잠잠히 신뢰하고 잠잠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어떤 결과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 주님께 나의 뿌리를 두는 그러한 마음입니다.

              여리고 성의 일주일 후에 엄청난 결과가 보였습니다만, 하룻밤 지나고 그 성에서 참으로 성 밖에서 평안한 마음으로 잠을 자는 것, 주님 안에서 쉬는 마음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잠잠히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그들은 벌써 영혼의 구원을 얻고 있습니다.
              그들은 벌써 영혼의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 없이 일 주간 되었을 때 참으로 소리치며 기뻐 뛰노는 것만 생각한다면, 이사야 35장만 생각하고 이사야 30장은 생각하지 않는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른 시간이나 깊은 밤에도, 환경이 자유롭지 못한 전쟁의 상황 속에 있는 그 여건 속에서도, 내 주님 안에서 안식하고 잠잠하고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이 자세가 있어야 기뻐 뛰노는 그 점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7장은 주님 안에서 새롭게 자리 잡는 마음 있었나요? 주님 안에 자리 잡는 마음이 있었나요? 그리고 그 주님 바라보고 잠잠하고 신뢰하는 마음 가졌나요? 그리고 그 주님의 인도 하심을 기다렸나요?
              그것 없이 계속 달려갈 때 그들의 걸음은 탄식으로 끝나고 만 것이 여호수아 7장입니다.
              그렇지만 여호수아 8장 말씀에는 다시금 주님 안에서, 주님 안에 자리를 잡습니다. 어제의 승리에 자리 잡는다는 마음이 아닙니다. 새롭게 깨어 믿음에 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 주님을 바라보는 끊임없는 사귐 속에서 잠잠하고 신뢰합니다.

              이 잠잠함이란 말은 기도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는 잠잠함입니다. 여건이 어지럽고 복잡해도 내 주님을 바라보는 사귐 속에서의 잠잠함입니다. 그리고 내 주님을 신뢰하면서 참으로 힘을 얻습니다. 그리곤 주님을 따릅니다.
              여기에 또 새로운, 참으로 활기 있고 생명수 넘치는 가운데 영광 돌릴 수 있는 일들이 다가오는 줄 압니다. 이사야 35장이 우리에게 임하여 온다는 말씀인 줄 압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 30장 없는 35장은 생각지 마세요.
              그러나 한 가지 이사야 32장 말씀을 우리가 좀 더 첨가해서 35장과 비교할 수 있는 귀중한 짝으로 본다면 내 주님을 오늘 진정한 나의 구원자로, 폭풍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폭양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세상의 어떠함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 그뿐만 아니라 그 주님의 사랑스러움에 내 눈이 감기지 아니하고, 내 귀가 그분께만 참으로 기울어져 가 있는, 끊임없이 주님께 속하여 주님만 향하는 이 자세가 있을 때, 사랑하는 주님은 이사야 35장의 그 놀라운 은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실 수 있는 줄 압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이사야 30장과 32장의 이 자세를 새롭게 가지기 위해서는 조용하게 주님께 나아간 빈 들판의 자세를 가져야 할 줄 압니다.
              그러하다면 주님을 모신 충만한 기쁨 속에서 주님과 함께 나아가는, 이사야 35장의 활기찬, 거룩하면서도 생기 있고 영광스럽게 주님과 함께 걷는 걸음이 우리 앞에 전개될 수 있습니다.

              조용한 빈 들판의 귀중함을 잃어버리지 않고 곱씹는 여러분이 되시길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평안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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