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내 주님! > 조그만 빈들판

우리들의 소식

조그만 빈들판


본문

전선에 부치는 편지

2020-09-03 / 82 회차

전선에 부치는 편지



사랑의 내 주님!

배 경 옥 집사님

기나긴 날들 동안 문밖에서
말없이 기다리고 계신 주님!

그 짙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던 자에게
가까이 찾아오신 사랑의 내 주님!

내 아픔, 내 슬픔, 내 저주를
그 몸에 다 짊어지시고
잠잠히 묵묵히 그 십자가로 가신 주님!

그 붉은 십자가의 빛은
내 영혼을 맑고 밝게 비추이는
새벽별입니다.

그 생명 버려 날 사주셨으니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사랑의 손으로
내 작은 손 잡아주셨기에
내 마음, 내 인생 그분께 맡겨드립니다.

열린 하늘 보좌에 기도의 사닥다리를 두고
그 음성, 그 얼굴빛 구하고 찾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

이 땅에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자
나를 빼앗기지 않고자 섭리하신
그 깊으신 사랑의 손길이
감사로 저며옵니다.

오늘도 그 사랑의 손 꼭 붙잡고
그리운 주님 계신 저 천성 향해
노래하는 순례자로 나아가렵니다.

전선에 보내는 편지

강현 교회 심 길 수 집사님 (93세)

전선에서 무더운 날씨에도
국방을 위해 수고하시는 장병 여러분
수고가 많으십니다.

여러분이 계시기에
세계 속에 대한민국이 우뚝 솟아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뒤돌아보면,
저는 일제 강점기, 8·15 광복, 6·25 사변을
다 겪은 나이 많은 할머니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수고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로
항상 감사하며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매어 달려서
열심히 기도하며 잘 살고 있습니다.

장병 여러분들도 저처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어렵지만 하루하루 감사하면서
잘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강원도에서
할머니가 드립니다.

참된 근거

김 성 관 집사님

젊음의 시기에 군이란 곳에 와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여러분께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 속에 장차 인생을 살아가는 데 참된 준비가 되고, 내 인생의 좌표와 푯대가 되어주실, 진정 따르고 사랑할 분을 발견하고 만난다면, 훗날 두고두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시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예전에 군 생활하는 동안 열심히 했었고요, 군인 정신이 투철하다는 소리도 여러 번 들었어요. 그런 반면에 여러 번 부딪힘도 있었고, 내적 갈등이나 상실감 같은 마음 때문에 어려움도 겪고 힘들어해 본 적도 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나 자신을 근거로 두고 군 생활을 하였기에 영혼은 힘들었던 것 같아요.

‘예수님께 마음의 근거를 둘 때는, 주님이 주시는 좋은 마음도 있고, 힘이 되어주시고, 평안과 사랑을 주시는 주님 때문에 병영생활도 밝고 힘 있게, 옆 동료에게도 솔선수범하며 따뜻함으로 대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드네요. 지금은 이런 내적 갈등이나 어려움은 없어요. 주님 품안에 근거를 두고 살면서 조용한 행복과 참된 의미와 진정한 자유를 가지고 살고 있어요.

저는 여러분이 군 생활하시는 동안 이런 은혜와 행복과 자유 속에 밝은 병영생활을 이루어 가시길 바라고요, 참된 삶으로 이끌어 주시는 주님을 만나고 알아가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진심으로 원하여봅니다.

갈보리의 사랑

배 경 복 집사님

우리 스스로 설 수 없는 이곳은 광야라지만
주님의 은총으로
참된 주님을 복음 가운데 깨달았을 때
갈보리 십자가의 짙은 사랑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를 건져주셨고
부활의 영토는 새 생명으로
나를 새롭게 해 주시는
놀라운 은총임을 알았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함께 살아주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긍휼을 힘입어 볼 때
새벽이슬처럼 조용히 임해오는 새로운 마음이
생기 있는 축복으로
새롭게 일어서고픈 강함이 솟아오릅니다.

지극히 평범한 보잘것없는 작은 자의 가슴에
임해오는 생명의 원함이
나를 이기고 환경을 능가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전선에서 수고하시는 장병들의 가슴 가슴에
이 믿음의 은혜 입혀주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구해봅니다!

참길

강현 교회 이 복 순 사모님

주님!
주님이란 이름만 불러도
마음에 평안을 얻습니다.
밖에는 온통 앞이 보이지 않게
요란한 비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내 나그넷길 가는 동안
내 삶 속에 순풍이든 거센 풍랑이든
개의치 않으렵니다.
나의 앞길이 어떤 길일지 알지 못해도
오직 살아계신 내 주님 한 분 믿고 의지하며,
힘 있게 서가고 싶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하니”(눅 1:28)
이보다 위로와 축복된 말씀이 있을까요?
이 귀한 말씀, 나의 말씀으로 믿고
큰 위로와 평안을 얻습니다.

남은 길,
주님께서 묶어주신 이 값진 참길.
감사함으로 뚜렷이 서가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동 행

류 정 곤  집사님

한 곳을 향해 함께 가는 길!
태어나서는 부모와 형제
커가면서는 친구와 동료
그렇게 우리 인생은 동행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떤 동행도
나와 평생을 같이 할 수 없고
나의 악과 죄를 사하지도
나의 영혼을 구원하지도 못합니다.

오직 주님 한 분만이
나의 영원한 동행자시요,
엠마오 제자들과 동행하셨던 그 주님이
나의 주님임을 고백합니다.

살아갈 길들 속에서 주님께만 흠뻑 빠져
주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주님과 함께 길 가기를 원합니다.

그저 세상 길 동행이 아니라
그 어떤 시련과 핍박이 있다 해도
주님과 함께 본향 길 달려가는
참된 동행의 삶을 살아보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나의 주님!

조 경 숙 집사님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 31:15)

나의 삶이
이 땅 그 무엇을 의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안에 있음이 큰 평강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살고
무엇을 위하여 죽는다는
그 대상을 발견함은
얼마나 큰 행복일까요?

우리를 이 땅에서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의 집에 거하는
그의 자녀로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셔서
그 주님 안에서
참된 진리와 참된 사랑과
참된 평강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음은
참으로 큰 행복입니다.

이 땅 머무는 동안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고
죽어도 주를 위한다는
내 삶의 목표와 의미가
뚜렷이 있음이 행복입니다.

내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나와 함께해주십니다.

즐거운 나의 집

신 수 영 집사님

일평생 애써서 마련하고
가꾸는 내 집.
겉의 집도 안의 가정도
애쓰는 만큼 이루기도 어렵지만
애써 이룬 그 집의 안과 밖은
얼마나 견고할까요?
조그만 바람에도
흔들려버리지는 않는지요.

건축자의 버린 돌이
내 집의 머릿돌이 되어주실 때는
스스로 애쓰지 않아도
얼마나 견고한 반석 위의 집을
지을 수 있는지요.

어떤 몰아치는 폭풍에도 끄떡없답니다.
그 집안은 또 얼마나 화목한지요.
세상 그 어떤 집보다도
견고하고 사랑이 넘치는 집!
그 집은 바로 내 주님 안이랍니다.

오 늘

조 병 례 집사님

일평생 애써서 마련하고
가꾸는 내 집.
겉의 집도 안의 가정도
애쓰는 만큼 이루기도 어렵지만
애써 이룬 그 집의 안과 밖은
얼마나 견고할까요?
조그만 바람에도
흔들려버리지는 않는지요.

건축자의 버린 돌이
내 집의 머릿돌이 되어주실 때는
스스로 애쓰지 않아도
얼마나 견고한 반석 위의 집을
지을 수 있는지요.

어떤 몰아치는 폭풍에도 끄떡없답니다.
그 집안은 또 얼마나 화목한지요.
세상 그 어떤 집보다도
견고하고 사랑이 넘치는 집!
그 집은 바로 내 주님 안이랍니다.

내 목자 예수님

강 명 숙  선교사님

진정한 삶은 목자이신 주님께 흠뻑 젖을 때
은혜의 삶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 은혜로
두려움의 땅에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님 모신 참된 평강이
오늘도 내 안에 가득합니다.

주님 그리워하는 짙은 마음으로
주님의 얼굴빛 구할 때
주님은 그의 얼굴빛 비춰 주십니다.
멀리 있으면 나와 관계없는 분이지만
가까이 있으면 나의 강함으로 서주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주님을 알고 이 광야길 간다면
신선한 바람도 불고요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이지만
진정 사랑할 주님이기에 
그분 한 분 마음에 정하고
이 길 함께 가길 소망해 봅니다. 

내 영혼의 안식처!

연 진 숙 선교사님

이제는 하늘 보좌에 오르셔야 하건만
차마 떠나지 못하시고
양들 곁을 맴도시던 내 구주 예수님.

거친 이 세상 상관치 마라
내 안에 거하라 하시며
친히 생명의 양식 되어주신 예수님.

그 어디에도 몸 둘 곳 없건만
보좌의 주님이 내 목자 되시니
당신의 울타리 안에서 나를 지켜주소서.

날마다 내리시는 은혜 이슬이
더없는 참 평안, 참 자유 되시니
내 영혼의 감독 되신 당신만 쳐다보며
힘 있게 오늘 걸음 걸으렵니다.

아무 염려 없고요
아무 근심, 걱정, 불안도 없고요
나 자신 의지하고 싶음도 전혀 없어요.

내 목자 따르는 이 참된 길에는
“아무도 내 손에서 빼앗을 자 없노라.
”죽음보다 강한, 주님 사랑으로 서주시고

주님의 이름 속에 나를 숨기시며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마
그 언약의 홍색실로 단단히 묶어주시니

아멘! 내 목자 예수님!
내 영혼의 안식처!
당신의 양으로만 따라가렵니다.

참된 증인

나사렛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부활하셨으며, 이제 그가 사도행전 1장에서 하늘로 승천하여 가시는 그 마지막 걸음에 앞서서 갈릴리에서 온 그 대부분의 사람을 향하여 “너희는 내 증인이 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들에게 결코,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증인은 어떤 사실을 훤하게 아는 사람만이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모르는 일을 증인으로 서겠어요.

이제 이들은 예수님을 안 지가 3년 정도, 그 이내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내 영혼에 구주와 주님 되시고 난 이후에, 내가 조용히 겪어보는 내 삶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영혼에 주님 되시고 난 이후에는 내가 전에 살던 그 집에 살고 그 평범한 가난한 삶 속에 있어도, 내 영혼에 주님으로 인한 참된 삶은 뚜렷했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천국 가시고 난 이후에, 저 하늘 보좌로부터 임하여 오는 성령님을 힘입을 그때, “너희는 내 증인이 되어 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 무엇을 한들, 그 무엇을 가진들, 그 무엇이 된들, 예수님이 내 영혼에 나의 주님이 되시는 이것 이외에는 우리에게 참된 해답이 결코, 결코 없습니다. 이들은 많은 것을 헤아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은 아닌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내 주님으로 의지하고, 내가 마음으로 모시고 살아갈 그때, 가져본 내 삶은 분명히 구별된 것 사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있는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그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열흘이나 머물러 있다는 것 쉬운 일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예수님이 부활하심도 보았고, 천국으로 올라가심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한 확고한 마음을 더 가질 수 있는 것 사실입니다.

어떤 억압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그들 각자의 마음속에 내 인생에 참으로 필요한 그 주님, 내가 모시었던 그 주님을 지금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었으며, 그 주님 모시고 나의 나됨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자아를 상실하지 아니하고,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내 선한 양심과 착한 마음으로 살아도 부끄럽지 않은 생활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한창 젊음의 나이에 나라에서 명한 군 복무를 성실히 행하고 있는 줄 압니다. 여러분이 가진 건강, 나름대로 가져볼 수 있는 이 세상에서의, 이 땅에서의 희망들, 있을 수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에게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있을까요? 조금만 헤아려 보아도 벌써 짐작하고 계산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주변에 볼 수 있는 정말 많고 많은 사람처럼 자기를 잃어버린, 자기를 지키지 못하는 그런 삶이 우리 모두의 삶이 아닐까요?
여기서 나를 빼앗기지 아니하고, 나를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나의 나됨을 가지고 참된 삶을 진실된 행복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부요 때문,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이런저런 것 때문, 결단코 아닙니다.

오늘도 유일한, 진정한 구주 되시고 주님 되시는 나사렛 예수님이십니다. 성서 히브리서 13장 8절 말씀은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라고 하시었습니다.

이 사도행전 2장에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제 부활하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히심으로 우리 각자의 구주와 주님이 되게 하셨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지금 이 땅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우리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 없는 내 영혼의 주님은 없고요. 예수님 없는 내 인생의 구주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을 이끌 수 없고요, 그것을 벌써 여러분은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된 고백으로 ‘스스로는 아니 됩니다.’란 이 진정한 말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 구주, 내 주님 되신다면, 우리의 삶은 그리고 이 땅에 사는 우리의 생활은 분명히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보람된 생활은 될 수 있습니다. “나를 잃어버리지 아니했다. 나는 나의 참된 나를 찾았다.” 그것은 주님을 찾음으로 우리가 찾았다고 고백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예수님은 이 초라해 보이는 사도행전 1장의 백이십 명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위치가 어디라도 나아가서 그들이 모신 주님, 예수님을 전할 때, 참 마음으로 영접한다면 영접하는 그에게도 주님이 주님 되어주시고, 주님께서 그의 삶에 진정한 구주가 되어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보다 더 명료하고, 더 확실하고, 더 뚜렷하고, 더 소망 있는 말이 이 땅에 있나요? 어디를 찾아봐도,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의 구주 되심! 예수님의 내 주님 되심!”은 정말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제가 참 마음으로 이 길에 돌아오기를 권하십니다.

누가 나사렛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부인할 수 있나요?
온 세상이 2020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심을 기점으로 삼는 시간입니다. 나사렛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음도 헤아려 보고 관심 있게 찾아본 사람이라면, 그것도 역사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는 예수님과 함께 삼 년 동안 다녔던 열한 제자의 이름이 나옵니다. 물론 이곳에서 가룟 유다의 이름도 우리가 잠시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던 자요, 나중에 양심에 가책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남은 열한 제자가 부활하셔서 천국을 향하여 올라가신 그 예수님께서 지정한 장소를 벗어나지 아니하고, 그 주님을 경배하는 자세와 주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약속하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 이들은 이 땅을 다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간 흔적이 전하여 오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부활하신 그 주님을 오늘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이 강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그 삶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이 말씀을 좇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그들은 먼 곳까지 나아가서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 사실이지만, 참된 소망은 이 길 이외에 없습니다.

오래전보다 지금은 문화가 얼마나 발달 되었으며, 지식이 많으며, 오가는 교통이 얼마나 편리한지요.

그러나 여러분!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황폐되어 있는가요! 예전보다도 훨씬 더 우리의 인격은 무너져 있고, 우리의 마음은 파탄되어 있고, 우리의 영혼은 부패 되어 있는 것, 숨길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지식이 모자라서 그럴까요?
좀 더 교육을 적게 받아서 그럴까요?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을까요?
도무지 해답 없습니다.

하나의 길은 있습니다!
오늘도 내 구주 내 주님으로 다가오고자 원하시는 그분 향해 조용히 내 마음 문을 연다면, 지금은 보좌에서 보이지 않으시지만, 나의 구주와 나의 주님 되어주시고자 내 마음가짐을 보시고, 내가 그분 향하는 자세를 보십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을 조용히 살펴보시는 그 주님을! 그 나사렛 예수님을! 지금 내 마음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은혜와 그분의 자비로우심을 구한다면, 여러분의 특징은 상실된 자가 아닐 것입니다.

무엇이 많이 있는 것 같아 보이고, 무엇을 많이 활용할 수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영혼은 정말 엉망인 이러한 오늘의 세대 속에서, 여러분이 구출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안정된 마음, 정돈된 영혼, 맑고 생기 있는 영혼! 어찌 나사렛 예수님을 내 구주, 내 주님으로 모시지 않고서 이런 영혼 될 수 있나요. 없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
이런 영혼이 되면 우리 마음은 영원히 부끄럼 없는 자유도 있고요, 은혜 속에 아름답고 강한 영혼도 됩니다. 오늘 이 세대에서 때론 내 가족을 위해서, 때론 내 친지를 위해서, 때론 무너져 가는 내 이웃들을 위해서도 할 것이 있는, 보람된 내 삶은 능히 가능할 수 있습니다.

성서 누가복음에서는 많은 내용이 있겠지만 저는 세 가지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7장의 죄 많은 여인.
누가복음 10장의 저 베다니 촌의 마리아.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
이 세 영혼을 조용히 살펴보면서 오늘 여러분이 생각 있는 자라면,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이 세 가지 영혼과 무관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그러한 길까지 처절하게 빠져들지는 아니해도, 이 세 사람의 길에 우리가 서 있다고 봐도 괜찮습니다.

누가복음 7장은 동네 사람들도 그 여인을 죄인이라고 지목했고요, 여인도 자기 행실과 자기가 살아온 길이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이러한 환경을 벗어날 수 없음도 아는 것 같았습니다. 스스로는 어쩔 수 없음도 아는 것 같습니다.
소문에 소문을 이어서 들었던 그 나사렛 예수님이 자기 마음속에 은연중에 가져보는 조그만 소망(희망)이었을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역사하셨겠지요.

어느 날 그 나사렛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까지 오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아마도 마음속에 헤어나지 못하는 자기, 어둠과 죄악의 자기, 부끄러운 자기, 그러나 마음속에 생기는 한마음이 있다면 예수님이 그 수많은 사람을 꾸짖었다거나, 책망했다거나 외면해 버렸다는 소문은 못 들었습니다.
듣는다면, 나름대로 자기가 잘났다고 똑똑하다고 그렇게 산다고 하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 무리를 향해서는 질책했다는 소문은 들려올지라도, 그 외의 어떤 사람도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주님께서 뿌리쳤다거나 책망했다거나 만나지 아니하려고 하셨다는 소문은 못 들었던 것 같습니다.

여인은 그 예수님에 대해 소문만 들어도 고마웠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역사하여 주신 은혜이겠지요. 달리해서 어떻게 자기를 바꾸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나아가도, 그 예수님은 자기를 뿌리칠 것 같지 아니하고, 자기를 훤히 아시면서도 너무 잘 아시면서도 감싸주고,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분으로 서주실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저 여인을 안다면, 발을 잡을 때 발을 팽개치고 빠져나오실 줄 알았는데, 주님은 전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 나사렛 예수님이 저 여인을 안다면, 가만있지 않으실 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입가에 흘러나온 말씀은 모르시는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은 빚진 것이 오십 데나리온이고, 어떤 다른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의 빚을 졌다고 하자.” 열 배입니다. “그런데 둘 다 갚을 것이 없었을 때 둘 다 탕감해 주었다고 하자.”

여러분!
이 짤막한 말씀에서 좀 더 죄가 적고, 좀 더 이웃들에게 눈총 받지 않는 그 사람과 온 주변 사람들로부터 눈총받는 이 죄 많은 여인이 다른 것을 주님은 다 아셨습니다.

주님은 죄가 적어 보이는 사람도, 많아 보이는 사람도 스스로 자기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도가 없음을 아셨습니다. 갚을 길 없는 고로 다 담당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담당해 주고자 하시는 사랑은 여러분과 제가 종종 무의미하게 흘려 보았던 십자가의 그 모습이십니다.

알고 보면 여러분과 나 자신의 그 문제, 그 허물, 그 실수, 그 죄악 때문입니다. 담당해 주고자 하시는 주님은 여인이 주님을 붙드는 것을 마다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여인이 고마운 마음으로 눈물 쏟는 것 마다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고마워하는 그 참된 마음으로 주님의 발에 향유 붓는 그 마음, 주님은 귀하게 받아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회개를 종종 잘못 알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을 알고, 울면서 괴로워하고 그래야 회개인 줄로 다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물론 마음 아파하는 마음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회개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자로, 그런 어두움과 그런 죄악에 있더라도 내 구주 되신 주님께 온 마음으로 나아와서, “예수님, 나 그런 자입니다. 나 숨긴 것 없습니다. 나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어찌할 방도는 없습니다. 내 맘에 임해오시는 예수님! 정말 고맙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붙듭니다.”라고 하는 그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주님은 붙들지 아니하고, 땅을 치고 우는 것, 그것이 회개 아닙니다. 예수님께 돌아와서 예수님을 내 구주, 내 주님으로 붙드는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주님은 기뻐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함입니다.
주님께 돌아오는 자를 찾기 위함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여인의 죄만큼 빠져들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여러분과 저의 선한 양심은 압니다.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할 자인 것을요. 의인과 죄인을 구별한다면, 어쩔 수 없이 죄인 편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과 저는 압니다.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도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내 구주, 내 주님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주님 말입니다.
이제는 내가 스스로 방황하지 아니하고, 내가 참으로 사랑하며 따를 수 있는 “내 주님!” 말입니다. 내가 언제나 혼자가 아니고 그분 없이는 내 삶은 또 방황하기에 나와 늘 함께하여 주실 “내 구주, 내 주님!”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땅에서 산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글쎄요,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사도 야고보는 주님 떠나신 지 십 년은 좀 넘는 것 같습니다. 일찍이 예루살렘에서 순교했습니다.
그분의 은혜 속에 기도하며, 날마다 보좌의 주님을 모시고 의지하며 살던 그 주님이셨기에, 그에게 죽음이 와도 “예수님은 참으로 구주이시요, 진정한 주님이시요, 살아계신 분이십니다!”라고 이 점을 시인하면서 순교한 줄 압니다. 정말 우리 생활 속에 살아계신 주님이셨으니까 말입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베드로는 늙어서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설프게 죽음을 두려워한다거나 어려워한 것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1장에서 미리 말씀하신 것처럼, 그의 마지막 길이 이 길임을 알았고, 이제까지 살아온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 보좌의 주님이 내 사랑으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분으로 늘 살아주셨기에, 그 주님이 진정한 구주요! 주님이심을 늙은 몸으로도 증거 하면서 마지막 이 땅을 떠나간 것입니다.

그것은 오래전의 그 이야기만 한 것 아닙니다. 오늘 내 생활 속에 살아주시는 구주, 주님이란 뜻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란 이 관계 속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온 것입니다. 너무 생생한 내 구주, 내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는 주님의 제자 중 안드레는 헬라 지역과 소아시아 지역에서 주님을 전하다가 그는 X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옛날에 돌아가셨던 그 주님, 옛날에 부활하신 주님, 아닙니다! 오늘 내 삶 속에서 생생한 구주와 주님 되시는 그 주님을 붙들고 살다가 마지막에 그는 그 주님이 지금 살아계신 내 구주요, 주님이심을! 내 목숨을 다해 증인으로 서주면서 이 땅을 떠나간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 빌립은 부르기아 지역에서 선교했다 하고요, 히에라볼리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은 바돌로매란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는 아르메니아에서 주님을 전하였고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의심 많은 도마. 우리가 요한복음 20장에서 읽을 수 있는 의심 많은 도마는 인도에서 주님을 전하였고 그 인도에서 내 구주, 내 주님 되신 주님을 목숨을 다하여서 전하다가 순교하며 이 땅을 떠나갔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리 마태라고 하는 레위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주님을 전하다가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 말고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에서 선교했다고 하고요, 하루하루 주님과 함께 생동감 있는 삶을 살아가다가 이집트에서 그 목숨 다하여서 “예수님은 지금 진정한 구주요, 진정한 메시야라고!” 마치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님이 주님을 전하고 열린 천국 바라보며 예수님을 전하였던 것처럼, 그렇게 주님께로 갔다고 합니다.
다대오는 수리아 지역에서 주님 전하였고, 수리아 지역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가나안 사람인 시몬, 그는 마지막을 십자가 형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듯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 몇십 년 전에 만난 그분 아닙니다! 오늘도 생생한 주님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베드로에게 그 길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도 주님께 속한 그 길 걸어가다가, 디모데후서 4장에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길로 자기의 목숨 다하여 생생하게 내 구주, 내 주님 되신 그분을 전하고 가시었습니다. 오늘 주님이 살아계신 내 구주고 내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둠과 죄악의 생활 아닙니다.
세상에 휘말리고 휩쓸리는!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등불 같은 생활 아닙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아닙니다!
주님 내 구주, 내 주님 되신 그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맑고, 정결하고, 경건 되고, 거룩하고, 강한! 그 사랑 가운데 사는 값진 삶을 가져가므로, 이 세상 무엇이 그렇게 필요하나요? “예수님이 당신의 구주요, 주님”이란 말이 제일 필요할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순서를 잠깐 바꾸어서 19장의 삭개오에 관한 얘기를 잠깐 하려고 합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세리장이었습니다.
그가 나사렛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들은 것 같습니다. 바람에 밀려오는 향기처럼 주님께 대한 소문은 참 아름다웠을 것 같습니다. 삭개오도 그 예수님께 깊은 관심과 마음을 많이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의 행함은 대단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은 정말 마음속에 큰 감동과 새로움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그의 모습은 평범하면서도, 인자하면서도 친근한 분이었을 줄 압니다.

여리고란 자기 동네에 다가오셨을 때, 삭개오가 주님을 보고 싶었는데 키가 작았습니다. 지나가는 길 예측하고 뽕나무 위에 올랐습니다. 고맙게도 주님은 그 나무 아래 오셔서 “아무개씨 내려오세요.”라고 이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삭개오야!”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삭개오를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지나온 살아온 길, 세리장으로서 선한 양심 따라 살지 못했던 것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마음으로부터 그러한 삶을 참으로 싫어하며, 참되게 살고 싶어 하는 삭개오의 마음도 아신다는 뜻인 줄 압니다.

주님께서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실 때, 삭개오는 “주님, 제가 가진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겠습니다. 남에게 토색한 것, 지나치게 뺏은 것은 네 배로 갚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짤막한 말속에서 그는 그 위치 속에서 자기에게 돌아오는 그 부요는 분명히 챙긴 사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토색은 지나치게 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긴 날 동안 세리장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될, 세금 이상의 세금을 받았다면 생각이 안 날 리가 없습니다.
“내가 남에게 토색한 것 네 배 갚겠습니다.”라고 할 때는 양심에 거리끼면서 어떤 사람에게, 어떤 사람에게, 어떤 사람에게, 그러한 짓을 한 것 같다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진짜 적은 퍼센트이지만 양심이 살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 점을 아셨습니다.

여러분! 제가 먼저 말씀한 오십 데나리온, 오백 데나리온 빚진 두 사람을 이야기할 때 여인이 못 들었을까요?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인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 옳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열 배나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라고 인정할 것 같아요. 주님은 다 짊어져 주고자 하셨습니다.

오늘 이 글을 읽게 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냥 그대로 덮어놓고 또 가 보렵니까? 과일나무는 삼 년만 되면, 쓸모 있는가 없는가를 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 삼 년 동안만 살아온 사람 아닙니다. 삶의 참 것에 대해서 이모저모 생각해 보는 청소년기도 지났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한 그대로 되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삭개오는 주님을 향하여 이 진정한 마음으로 ‘주님, 재물을 모아보아도 그것이 절대 내 인생에 삶은 안됩니다. 주가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예수님을! 내 주님으로 맞이하고자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과정과 절차가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그 주님 영접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 아닙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시원치 않게 알아서 예수님 영접하기를 뺑뺑 돌도록 만들어 놓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바로 “주님 당신은 나를 아십니다. 내가 이 영토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 원치 않습니다. 내 진정한 구주 되시는 주님께 나아갑니다.”라고 하면, 주님은 우리를 맞아주십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실 만큼 주님은 나의 주님, 나의 구주가 되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월이 한참 가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나요? 바로 오늘 주님은 우리를 그런 자라고 기쁨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가슴속에 주님으로 인한 평강이 올 수 있습니다.
영혼의 자유가 올 수 있습니다!
확신이 올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한 가지 더, 10장의 베다니 마리아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베다니 마리아는 누가복음 7장의 여인 같은 죄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처럼 돈을 사랑하고 긁어모은 그런 사람도 아닙니다. 그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많은 사람이 위로하러 온 것처럼 보입니다. 착한 자처럼 보입니다. 괜찮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래도 여러분!
이 베다니 촌의 마리아, 그 언니 마르다, 그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그렇게만 인생을 살면 인생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슬픔의 집입니다. 그것 참 그렇습니다. 주님이 주님 되어주셔야 그래도 인생다운, 내 삶다운 삶을 가질 수 있습니다.
조금 착해 보인다고, 조금 양심적인 것 같아 보인다고, 그 어떤 가족애가 있어 보인다고 할지라도, 아닙니다.

그 마리아가 자기 집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자기의 집에 모시고 그 발 앞에 앉아서는 움직일 줄 몰랐습니다. 그의 영혼이 어떠했는가는 제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자기를 압니다.
예수님께서 그 집에 다가와 주실 때, 그 앞에 앉았을 때, 그의 영혼은 정말 빼앗기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정말 내 영혼 속에 이렇게 모시고 싶은 주님이었습니다. 주님도 아셨습니다. 그 마리아에게도 예수님은 주님 되어주셔야 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의 여인에게만 아닙니다. 삭개오에게만 아닙니다. 오늘 나름대로 착해 보이는 그리고 손가락질당하지 아니할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은 구주와 주님 되어주셔야 내 삶이 됩니다.

우리가 나라를 위해 애쓰시는 여러분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 우리 마음은 뜨거웠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마음이 뜨겁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의 수고에 고마워하는 그 정도로 제 영혼은 지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나사렛 예수님은 지금의, 오늘의 여러분의 주님 되어주시고자 하십니다. 그 주님 모실 때, 여러분의 인생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다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입니다. 그리고 내일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도 먼저 천국 가셔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계신 그 예수님을 오늘도 그분의 주권과 은혜를 힘입을 뿐 아니라, 그날에도 기쁨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수백 년을 산 은행나무, 그리고 천년을 능가하는 어떤 식물을 보고 사람들은 오래 살았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런 식물보다 훨씬 더 귀중한 인격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주님으로 여러분과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빼앗기지 않으시고, 우리를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우리가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면서, 영원한! 영원한 천국의 삶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는 이 땅입니다.
시간의 흐름이 있다는 뜻입니다.
밤이 옵니다. 우리의 인생은 아침도 맞이하는 것 같고, 정오 시간도 맞이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무는 시간 분명히 옵니다.
아직 여러분은 오전 시간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마치 오후가 없는 것처럼, 저녁이 없는 것처럼, 밤이 없는 것처럼 생각할지 몰라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일깨워 주시는 것 아닐까요?

아침 있습니다. 오전 있습니다.
해가 작렬하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있는 정오가 있습니다. 이제 점점 그 그늘이 길어지는 오후가 있습니다. 그리고 밤이 옵니다. 인생은 그러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세요. 잊지 마세요!
주님은 우리를 이곳에서 잃어버리고자 하시지 않습니다. 저 저녁과 저 어두운 밤에 말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밤이 없는, 어두움이 없는, 저 영원한 천국을 예비하시고 오늘 하루하루를 내 구주, 내 주님 되시는 주님과 함께 빼앗기지 않는, 나를 상실하지 않는,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오늘도! 이 시간도! 붙들어 주고자 하십니다.

이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이 놀라운 은총이 금번 여러분에게 주어진 이 좋은 기회에 이루어지시기를 우리는 기도하였고, 우리는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이 있으시다면!
예수님을 내 구주! 내 주님으로!
이 가을에 영접하시는
복된 시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을 입은 자

동행 교회 박 영 주 사모님

스스로 해 보려고
애쓰고 힘써 보는 나는
나를 입고 있는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내 마음과 생각대로
움직여가는 나는
역시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내 열심, 내 착함, 내 성실함으로
주를 섬겨보고자 했지만
그래도 역시 어찌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하나님의 설계도가 있었던 거예요.

전 마음으로 나를 벗어버리고
못된 나는 거절하고 주님께 속하여서
내 주님 한 분만을
내 옷처럼 매일 입고자 한다면
그때 나는 의인의 길에 서는 거예요.

나도 몰랐던 내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고 알았어요.
나는 진짜 안 되는 사람이구나!!
껍데기였던 거예요.

예수님 모시고
귀 기울여 가는 오늘
나는 그분만의 어린 양이에요.

주님 곁에 서 있고 싶습니다!

삼동 교회 유 오 순 집사님

주님!
허락해주신 귀한 날들의 시간
흘러 떠내려 보내기 싫어
주님 앞에 잠잠히 엎디어 봅니다.

오늘 길에 그 무엇 없고
보이지 않고 이루어 놓은 것 없고
때론 굴욕과 모욕 앞에
일어서지 못할 저이지만
다시금 주님 힘주심으로 서고 싶습니다.

주님!
강가에 철새 오리가
흐르는 물에 헤엄침 아니고 물살을 거슬려
물 위에 일어나는 파장에 민감하여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자기 영역 안에서
어미 품을 떠나지 않고 줄지어 따르듯,

오늘 길에 크고 작은 문제들
가슴 쓸어내려야 할 일들 있지만
주님 인식하며
주님 곁에만 있고 싶습니다.

수없이 밀려오는
어리석은 못된 나의 생각에 머묾이 아닌,
“주님, 오늘 길에 제가 무엇 했습니다.”가 아닌,
“주님, 주님입니다!”라고 늘 고백하며
이 땅에 잠시 머문 자로
주님 곁에 서 있고 싶습니다.

주님! 때마다 일깨워 주심 감사드립니다.

내가 가질 참된 나의 것

양 승 관 집사님

이 땅에 수많은 것 취할 수 있고“
이것은 내 것이야.”라고 부를만한 것 많지만
나를 뛰어넘는 문제들과 아픔 앞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 어느 것 하나
내 것이라 부를만한 것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천 년 전에 나를 위해 오시고
나의 모든 허물과 약함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나사렛 예수님은
나를 뛰어넘는
수많은 문제와 아픔에 대하여
유일한 해답과 위로와 구원이 되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
내가 알지 못하였던 새로운 삶을
창조하여 주시고자,
내가 의지하고 따르고 사랑할
유일한 나의 주님으로
내 곁에 서주시고자 하십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으라.”(행 3:6)

값진 하루로

이 충 기 집사님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내가 주님과 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천년처럼 값진 날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과 함께하지 않고 
스스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천년 같은 하루를 허비하는 날입니다. 

내 주님과 함께
천년과 같은 값진 날로 살아가서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간 다윗처럼
진정한 이기는 자로
남은 길 달려가고 싶습니다.

빈 들

차 정 자 사모님

빈 들에 나갔더니
그 어떤 것도 없고
단 한 그루의 포도나무만 있습니다.

그 중, 가지 하나가
저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포도나무 되신 주님을 향하여
매일 조금씩 나아갑니다.

귀 뚫은 종

강 주 영 자매님

귀 뚫은 종
벌써 그 종은 알았을 것 같아요.
나로서는 진정한 삶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살아가는 삶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내 영혼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주인님을 가까이하다 보니
벌써 그는 알았을 것 같아요.
정말 그분은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정말 그분은 사랑할 만하다는 것을,
정말 그분은 내 남은 삶을 믿고
맡길만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영혼 얼마나 자유로웠을까요?
내 삶, 참 좋으신 분께 맡겨졌다!
나의 거처, 참 좋으신 주님의 집에 있다!

이제 내가 전 마음으로 힘쓸 것은
그 주인님 사랑하며, 그 주인님 기쁘시게
섬기고자 하는 전 마음이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밤낮 깨어 주님께 귀 기울이며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았을 것 같아요!

귀 뚫은 종!
정말 좋아 보여요! 정말 아름다워요!
나도 이제 그 이름으로 살아갈래요!

주님께 속하여

장 사 라 선교사님

세상에는
나의 마음을 빼앗아 갈 일이 많고,
나의 마음 이곳에 두라고
유혹하는 목소리 많지만 나는 압니다.

내가 지금 온 마음으로 선택할 분은
오직 주님이시라는 것을요.
먼저 나를 선택하사
그의 소유 삼으시고 구속해 주셨기에
주님, 나는 주님께 속하였고
주님은 내 주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세상에는 피할 곳이 많다고
사람들의 소리 많지만,
나는 조용한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주님, 주님께 속하고 주께 피하나이다.

세상은 자기를 드러내라 하고
자신에게 속하라고 말하지만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내 주님께 속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은
부활의 영토에서
영원히 사는 삶이라는 것을요.

사랑하는 주님!
주님께 속한 자로 살게 하소서.
못된 나를 벗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로 말입니다.

오직 보좌의 주님을 내 주님 삼고
더 그분께 속하여
부르신 자리에서 겸손하게 말입니다.

-----------------------------------------------------------

덧입음으로 강한 자


“주님의 주권의 홀”
그리고 “복음의 영향권” 안에서
주님 향한 뜨거운 가슴을 안고
이 가을을 맞는 것은 어찌 그리도 복된지요.

게, 가재와 같은 갑각류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단단한 갑옷 같은 껍질을 벗고
언제 잡혀서 먹힐지 모르는
약하디 약한 모습으로 변한답니다.
자신의 생명을 삶의 맨 밑바닥으로 내려놓는
큐티클(cuticle)이라는 아픈 과정을 거쳐
더욱 멋진 모습으로 성장하는 것이지요.

주의 권능의 날에
지금의 생활의 터전에서는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주님 의지하여 생생한 생활 속의 기도와
끊임없는 교제를 근거 삼아
주님 앞에서는 진실 되게 벌거벗은 자로,
하늘 보좌에 대하여는
은혜의 이슬을 덧입은 자로,
혼탁한 세상과 불의에 대해서는
전신 갑주를 입은 강한 자로 서고 싶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시고
함께하여 주옵소서!

- 방 상 식 집사님

-----------------------------------------------------------

빈들판으로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강의 은혜는
나를 부인할 수 있게 하신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있기에
날마다 빈들판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나를 부인할 수 있는 은혜!
너무도 너무도 소중한 은혜입니다.

나로서는 십자가 지어 보았지만
중한 짐이 되어 주님 따라 길갈 수 없었습니다.
나로서는 순례자 될 수 없었습니다.
순례자처럼 행색을 갖출 수는 있었어도
순례자의 삶은 될 수 없었습니다.
나로서는 빈들판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빈들판은 보이지 않고
세상의 뽀얀 먼지만이 보였을 뿐입니다.

내 앞길은 주님이셔야 합니다.
내 앞에 주님을 모실 때
요동치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동안
내 영혼의 구별됨! 잊지 않으렵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서
구별된 자로 살아가기 위해
나 가진 것 모두 던져두고
빈들판으로 먼저 나아갑니다.
빈들판으로 불러주시는 주님!

오늘 길도 앞서가 주시고
빛으로 인도하실 은혜에 감사합니다!!
오늘 길 끝까지 동행하여 주옵소서!!

- 김 경 일 교수님

-----------------------------------------------------------

내가 알기로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의 고백은,
“나는 죄인이오니 나를 떠나소서.”
“부정하다. 부정하다.”
소리치는 문둥병자처럼,
“나는 죄인이오니 나를 떠나소서.”
주님 앞에 선 나의 고백도,
“나는 죄인이오니 나를 떠나소서.”

나를 떠나지 않으셨기에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고
채찍 맞고 가시면류관 쓰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
나를 사랑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의 언약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하리라.”

나와 함께하신 주님이
내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나를 보혈로 씻으셨으니,
나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이 내게 주신 주님의 언약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주님의 생명은 사랑으로 빛나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언약은 소금 언약이라
썩어질 내 모든 것을 이기고요,
나는 세상 끝날까지
내 주님과 항상 함께할 것입니다.

- 수민 교회 이 상 분 권사님

-----------------------------------------------------------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보좌, 주님 얼굴을
그리움으로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곳에
주님! 제가 자리를 잡고 서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작은 자의
주님 사랑하는 마음을 받아 주시는
그 바닷가에 이슬 젖은 눈으로
주님! 제가 서 있습니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싶어서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어서
주님 손바닥에 새겨져 있는 작은 자가
주님을 그리워하면서
천국 이슬 내리는
부활의 영토에 서 있습니다.

주님! 오늘도 내 기도하는 집에서
주님이 부르신 빈들에서
마음의 허리를 더 단단하게 동여매고
일어서서 주님을 따르렵니다.

주님! 오늘 제가 서 있는 곳에서
온 기쁨으로 주님을 따르렵니다.

- 배 명 자 집사님

조그만 빈들판

여러분과 저는 오늘이라고 하는 이 시간 속에서 낮과 밤이 진행되어 가는 이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기야 이 세상이 결코 좁다란 곳은 아니기에 이곳저곳에 주어진 환경과 여건은 정말 다릅니다.

그러나 공통점으로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뚜렷한 것은, 특별해 보이지 아니하고 조금만 마음 쓰면 괜찮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오늘 그리고 이 세상 같아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세상에서 갑자기 태어나서 처음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그런 자는 아닙니다. 이 세상을 지나간 이는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도 이 세상에서의 삶을 제대로 그리고 값지게 살아간 이는 정말 적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살고 있는 여건이 편리하고 또 안전해 보입니다만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가 가진 지식과 생활의 편리한 것들은 많아 보입니다만, 지금 이 세대도 살아가기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정말 해답이 없을까요?
우리도 역사의 그들처럼, 이 땅의 삶에 발버둥 치다가 소리 없이 이 땅을 떠나간 그들처럼 우리도 아무런 의미 없이 이 땅을 떠나야 할까요? 그것이 오늘 우리의 운명이고 몫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참으로 조금만 헤아려 보면 생각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조그만 빈들판’이란 이름으로 여러분과 함께 잠시나마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조그만 빈들판!
그것은 어려운 것 아닙니다. 우리가 조금만 마음 쓰면 가져볼 수 있는 그리고 선택해 볼 수 있는 여건입니다. 물론 제가 말하는 이 내용은 근무를 열심히 하다가, 잠시나마 쉼의 시간을 갖는 여가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내 인생의 근본적인 것을 붙들어 줄 수 있는 조그만 빈들판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상상이 아니냐고요? 또 생각해 보는 또 다른 하나의 사상은 아닌가요?”라고 물으신다면, 이렇게 말하는 제가 죄송할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생각 있게, 잠시나마 여러분과 함께 진정한 이 의미를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주목할 수 있도록 펼쳐주신 소중한 책입니다. 그 이사야 말씀 앞부분을 읽어봐도 결코 삶이 쉽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문화가 도도히 흐르고 있는 이사야 1장. 거기서 내가 참다운 인격으로 선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점을 너무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말이야 단순한 하나의 문화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만, 우리의 인격을 죄다 빼앗아 가 버립니다.

이사야 2장에서는 그런 소돔과 고모라는 아니라도 이 세상의 유행이라 할 수 있는, 어떤 특정한 삶의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풍속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보다는 나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젖어있어서 내 인격이, 내 삶이 제대로 유지되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이사야 3장 말씀은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생각하고 염려해야 할 그러한 것들에 관한 내용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할 수 있으면 좋은 물 마시고자 하고, 할 수 있으면 그냥 단순한 흰밥보다는 유익된 여러 가지 곡식이 섞인 양식을 취하고자 하고, 이러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은 다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의 필수적인 것들이 우리 마음을 꽉 차지하고 이것에 매여 살아보아도, 인생은 그렇게 의미 있고 값진 것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장에는 참으로 전쟁의 후유증으로 남편을 잃어버린 많은 과부들의 애처로운 모습들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가정들, 이 세상은 그럴 수 있습니다.

이사야 5장은 그러한 것은 아니라도 괜찮아 보이고 주어진 여건이 잘 정돈된 것 같아 보이지만, 사람이라면 능히 가질 수 있는 욕심 때문에 그 괜찮아 보였던 삶들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사람이 자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육체의 정을 따라 살지 않는다는 것, 단순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평화롭고 정돈된 여건이라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육신의 정과 욕심은 우리를 참으로 허무하게 무너뜨려 놓습니다.

이사야 7장은 아직 전쟁으로 폐허 된 것은 아닙니다만, 훨씬 더 강한 여러 나라가 - 아마도 지금의 우리나라의 형편과 비슷한지도 모르겠습니다. - 쳐들어와서 이 나라를 자기 뜻대로 운영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참 안타깝고 가슴 아픈 얘기입니다.

잠깐 순서가 바뀌었습니다만, 이사야 6장은 환경적으로 어려워 보이지는 아니해도 나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참 경건 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자임을 알고 탄식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나요?

환경은 다 괜찮아도 내가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경건 되고 거룩하게 살 수 없어서, 이런 삶을 살아간들 어떤 뜻 있는 삶이 되겠느냐? 그 말인 것입니다.

한 군데만 더 인용해서 이사야 8장 말씀을 이야기해 보면 우리가 생각해 보지 못한 두려움이, 우리가 생각해 보지 못한 놀라움들이 우리를 휘몰아쳐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 태풍이 늘 살고 있는 집에 있었나요? 갑자기 남지나 해에서, 때로는 필리핀 근해에서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일어납니다. 여러분, 그것이 적은 두려움이 아닙니다. 적은 놀라움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런 곳입니다.

제가 지금 얘기한 것이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죄다 이야기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만 읽어보아도, 그 수많은 사람이 부딪히며 걸어간 일과만 생각해 보아도 또 다른, 또 다른 문제가 이 세상에선 수없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과 저는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젊음이 있어 보이고 여러분은 나름대로의 지식을 갖춘 분이라 할 수 있겠지만, 세상의 그 어떠함에 대해서 우리를 지켜보시는 우리 하나님, 우리 주님 그분의 말씀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여러분과 제가 참으로 연약함을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강하라고 말하고 굳은 마음을 가지라고 말합니다만, 우리의 본질을 꿰뚫어 말씀하시는 그 말씀은 다가오는 바람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갈대이고, 벌써 여러분과 저의 속은 상하여 있는 갈대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12장에서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곳에서만 하신 말씀이 아니지요. 성서 전반에 깔려있는 내용을 엮어서 한 말씀으로 보아도 좋을 줄 압니다.

그 누가 아니라 해도, 그 누가 그러해도, 강한 자로 보였던 알렉산더 대왕도 그리고 그 누구누구도 다 그런 자 아닌 것 같아 보였지만,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님!
오늘 우리의 삶이 대단히 분요한데, 우리가 오늘도 부딪히는 현실은 우리를 참으로 곤두서게 만드는데, 우리가 이런 생각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해답이 없다면 그냥 우리를 임시로라도 엮어 오늘을 대처하면서, 되지도 않는 삶이라도 그래도 꾸려가고자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만, 오늘 이 세대에 여러분에게 진정한 삶을 주고자 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그 연약한 생각과 마음으로 몰아가던 생각과 마음을 잠깐만 돌이켜서, 나에게 참된 삶을 주실 수 있는 그분을 향해 그분의 도우심과 그분의 은총을 구하여 본다면, 이것은 현실에서 벗어난 얘기가 아니라, 오늘 이 세상에서 살아갈 우리에게 너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줄 압니다.

저는 오래전에 글을 읽고, 또 그보다 더 오래전에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직접 들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분은 해병대 대령이었습니다. 나이가 제법 드신 분이셨지요.

6·25가 일어났을 때 그분은 전방에서 소대장이었고, 이제 군은 어쩔 수 없이 후퇴하면서 내려오는 적군을 잠시라도 지연시키기 위해 소대장으로서 그 위치를 맡아서 부하들과 함께 전투하라는 것이 그에게 하달된 명령이었다고 합니다. 생각 있는 그가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모르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은 그곳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었습니다.

그는 지하 벙커로 내려갔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호소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정말 살아계십니까? 날 좀 도와주세요!”
확고한 그 무슨 신앙을 가졌던 분은 아니었겠지만, 하나님께 대하여 그나마 들어온 것이 있었던 분 같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살아계신다면, 날 좀 도와주세요!” 그리고는 전투가 치열하게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는 수많은 포탄이 날아드는 가운데 쓰러져 있었으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보니 온 사방이 고요하더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분이 해병대 대령으로 현역으로서 군복을 입고 강대상에 서셔서, 그 감격스러웠던 일을 간증하시는 것을 직접 들었습니다.

적군은 지나가고, 자기는 그 포화와 더불어 쓰러졌는데, 그때 그분의 고막이 다 터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용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그곳에서 죽지 않았고, 그 이후 이야기는 하나님의 지켜주심 가운데서 그는 6·25 전쟁을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답니다.

제가 그분의 말씀을 들었을 때는 1970년대 초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힘쓰고 있는 분으로서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분은 그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하 벙커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조그만 시간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조그만 빈들판’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경상북도 문경에서는 매년 한 차례씩 어떤 장군의 추도회를 연다는 글을 언젠가 읽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실 때는 대령이었다고 합니다. 나이가 서른 살 되는 김 아무개 대령이었습니다.

그도 6·25 전쟁을 만나서 후퇴하는 그 군 속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연대장으로서 자기 부대가 밀려오는 북괴군을 향하여 막아서도록 명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있었던 병사로서 생존해 계신 분이 그때 상황에 대해 쓴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서른 살이었지만 그 당시에 연대장이었답니다. 대령이었죠. 아마도 6·25 전쟁 전에 군사 교육을 받은 분 같았습니다. 그가 막다른 길에 서게 되었는데, 곁에 있는 병사가 볼 때 그는 자기 자리에서 뒤로 평안하게 눕더랍니다. 그때 그 곁에 있는 병사가 생각된 바는 죽어서 눕게 될 것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전투는 치열하게 일어났고 그는 그곳에서 세상을 떴습니다. 정말 막다른 길이었지요. 정말 어려운 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 말씀드린 그 해병대 소위, 나중에는 대령으로 계셨습니다만, 그분은 하나님을 향해 무릎 꿇고, “하나님! 살아계신다면 날 좀 도와주세요!”라고 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였습니다.

오늘은 전쟁의 날이 아니라도, 이사야 1장부터 8장까지만 볼 때, 우리가 부딪치는 문제들은 우리를 무너진 인격으로 만들고자 하루에도 쉴새 없이 밀려옵니다.

무너진 인격, 그것은 참된 사람 아닙니다. 결코, 뜻있는! 참된 사람으로서의 값진 삶은 살 수 없습니다.

오늘 나라의 일과를 맡아 오신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압니다.
강하게 서 있는 분입니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입니까?
속이 벌써 상하여 있는 상한 갈대입니까?

이사야 말씀에는 우리에게 해답이 되는 내용을 들려주셨고요. 오늘도 그 해답은 우리에게 사실입니다.

저는 국군 장병들을 위하여 긴 날 동안 무척 많이 기도해 온 사람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제 마음의 어떠함을 하나님은 아실 것입니다.
해답이 없는 것 아닙니다.
“돌이켜 안연히 처하라.”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입니까? 내가 자리 잡고 쉴만한 곳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오늘도 이 땅에 “회개하라 천국 가까이 왔다.”라는 그 주님의 부르심 속에, ‘회개’란 말은 ‘돌아오라.’라는 말이지 않겠어요. 우리가 스스로 나아가 봐도 아니지요.

그러나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셨던 그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사렛 예수님은! 여러분의 구주와 여러분의 주님으로서, 여러분이 돌이켜서 그분에게 피하면, 피하여 자리 잡을 수 있는, 나의 진정한 쉼터가 되어주십니다.

저는 이것을 ‘조그만 빈들판’이라고 부릅니다.
그냥 일과에서 벗어났다.
그것 아니지요.
그냥 오늘 여가가 있어 좀 쉼을 가져본다.
그것 아니에요!
내 예수님께로! 내 구주 되신 주님께로!
마음을 돌이켜서 그분을 향하여 본다면, 그분은 품어 주실 것입니다.

“돌이켜서 쉼을 가져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리고 내게 속한 자로 잠잠히 나를 바라보며 신뢰하라. 힘을 얻을 것이다.”

여러분!
그 힘은 이길 수 있습니다!
그 힘은 설 수 있습니다!
바람에 나부끼지 않습니다. 강한 자로 서서 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설 수 있을 줄 압니다.
여러분이 제대로 선다면 여러분의 이웃에게도, 여러분의 가족에게도, 여러분의 동료에게도, 여러분은 축복이 될 줄 압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이 세상 어디에 속해 본들, 어떻게 자기를 극대화시켜 본들, 오늘 이 세상에서 나로라 하고 서 있을 사람은 없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서 있는 것처럼 보여도 속은 다 연약함과 상함으로 무너져 있습니다.

적절한 표현은 아니겠습니다만, 6·25 전쟁 때 북한에서 밀고 내려왔을 때 그들은 정말 질주하듯이 달려왔습니다. 왜냐하면, 안으로 볼 때 서서 대항하며 버틸 수 있는 근거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상황에 관해서 한두 번이 아니라 자상하게 글을 읽어 본 사람입니다. 그 당시는 제가 어려서 군에 갈 나이는 못 되었지만, 나라의 상황이 도무지 감당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못 되었습니다.

“돌이켜서 안연히 처하라.”
오늘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환경에서 잠깐만 돌아서면 조그만 빈들판이 되듯이, 돌이키기만 하면 예수님은 나의 주님으로 가까이 서주실까요?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오늘의 주어진 그 병영생활에서 주님을 향하여 여러분 마음을 돌이키다 보면, 오늘 여러분이 부딪치는 수많은 일과 속에서도
능히 설 수 있는! 안정감과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의 동료들에게도 여러분은 나름대로의 힘과 기쁨이 될 수 있을 줄 압니다. 그런 우리로 새롭게 새롭게 나의 진정한 구주 되시는 예수님 안에 자리 잡는, 예수님 안에서 주님을 기다리고 기대해 보는 그 마음 가져본다면, 우리는 무너질 자 아닙니다.

이사야 28장 16절 말씀처럼 벌써 견고한 주님! 정말 보배로우신 주님! 참 뚜렷하게 확증된 그 주님 때문에 우리는 쓰러진다거나, 나의 됨됨이가 무너진다거나, 원치 않는 이런저런 것에 사로잡혀 가는 우리는 아닐 것입니다.

조그만 빈들판!
만약에 우리가 주님께 돌아갈 수 있는 오늘의 단순한 삶 속에서 내일도 아니고, 오늘 나의 영역 속에서 조그만 빈들판에 나아가듯, 내 주님 향하여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돌아갈 수 있는 이 길이 없다면, 우리는 역사적인 그분과 결코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과거보다 문화나 생활의 편리함에 관해서는 비교치 못할 만큼 낫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됨됨이는 그들보다 더 못합니다.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나됨을 찾을 수 있는, 그리고 우리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 앞에 참으로 기대감이 있는 자로 설 수 있는, 우리 각자가 되기 위해서, 오늘 조그만 나의 빈들판을 헤아려 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정말 원합니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되지도 못할 것을 우리가 이야기한다면, 말하는 사람이 좀 그릇된 사람이겠지요. 그러나 분명하게! 분명하게! 오늘도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 점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조금만 헤아려 보아도 달리 해답이 없다면!

오늘 여러분이 나사렛 예수님! 이 땅에 오셨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 뚜렷하게 천국 올라가신 그분! 명료하게 지금도! 지금도! 여러분의 구주 되신 그분 향하여, 여러분 개인의 주가 되시는 그분 향하여, 여러분이 조그만 빈들판 찾듯이 그분께 나아간다면, “안연히 처하라.”라는 쉼의 마음도 얻게 될 것이고, 그분의 건져주시는 구원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 주님 안에서 잠잠한 마음으로 신뢰한다면, 예전에 생각해 보지 못했던, 전날에 전혀 힘입어 보지 못했던, 위로부터 오는 새 힘이 임해와서, 여러분이 참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오늘도 근원이 되어주심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가슴에 끓어오르는 마음으로 그리고 뚜렷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돌아가는, 예수님을 향하여 보는 조그만 빈들판이, 이 가을에 여러분에게 주어지기를! 그래서 내 인생의 참된 터를 발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그리고 내게는 구주가 없고, 내게는 진정한 주님이 없는 자가 아니라!
그 주님을 내 가슴에 모시고 그 구주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여 가면서, 맑고 정결한 마음으로 강하고 힘 있는 영혼으로!
오늘도 어지럽고 어수선한 문제가 많은 이 세상이지만 그 예수님과 함께 뜻깊게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첨부파일

Total 0건 1 페이지
조그만 빈들판 목록
번호 날짜
게시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