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7 / 80호
    전선에 부치는 편지
    주님! 이 길에서만
    김 아 가 권사님
    일생을
    내 주님께 매여서
    내 주님과의 사귐 속에서
    기도하며 사셨던 사무엘.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삼상 12:23)

    거기에 다윗 있으면 참 좋았고요.
    거기에 오늘의 제가 있으면 더욱 좋겠지요.

    벗어난 다윗 참 그렇고요.
    벗어난 솔로몬 왕을 비롯한 왕들
    참 볼품없었고요(왕상·하).
    벗어난다면
    저, 또한 그러할 텐데요.

    거기서 살 때 정말 아름다웠던 다윗.
    그 길에서 벗어나고 회복하고
    그렇게 몇 차례 하다가
    그의 인생 그만 저물어 버렸습니다.

    오! 주님!
    저 또한 여기에서만 살고
    여기에서만 죽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불쌍히 여기소서.
    내 주여! 내 주여!!
    Chapter I.
    나의 한밤을
    박 성 혜 집사님
    그리운 나의 주님 곁에 눕고 싶어
    나아갔던 나의 빈들!
    오직 나의 주님과 나만의 홀로였지만
    홀로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어느덧
    광명한 새벽별 되신
    나의 주님의 얼굴 가까웠고요.

    내 주님께 붙들린 심령으로
    한밤을 나의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더듬어 간구함으로
    내 주님을 시원케 하는 복된 시간.

    이 시간도 어김없이
    전선에서 우리 위해
    깊은 밤, 하늘의 별 헤아리며
    나라를 지키시는 사랑하는 장병님들이
    많이 생각되어
    위하여 간절히 구하면서…

    이 가을에
    주의 집에 거하여
    풍성한 열매를 가득 맺혀 드리고 싶습니다.
    Chapter II.
    들에 핀 백합화처럼
    이 재 흥 집사님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7:27)

    제가 잠시 병원에 누워 있을 때였습니다. 환자로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먹는 것은 제한되었고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은 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시간들 속에서 주님께서는 위의 성경 말씀을 주시면서, ‘이곳에 지금 누워 있어도 내가 주님을 바라본다면 그리고 주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는 삶을 산다면, 세상에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 솔로몬 왕보다 더 의미 있고 복된 삶, 뻗어가는 가지로 번성하는 삶을 살 수 있다.’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장병 여러분들!
    2년이 안 되는 시간 속에서 내가 사랑하는 부모 형제를 떠나 세상과 격리되어 낯설고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해 나아가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오늘의 이 현실에서 내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주 예수님께 나아온다면, 군 생활이 얼마나 복 되고 의미 있는 시간일까요? 이 시간이야말로 죽은 시간이 아니라 인생의 한 부분에서 정말 살아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장병 여러분들!
    지금 주 예수님께 나아오세요.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사세요.
    인생을 복된 길로 이끄는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Chapter III.
    예수님을 만나세요!
    주 영 조 장로님
    얼마 전 전철역에서 어머니 손을 꼭 붙잡고 기차를 기다리는 군인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기차가 오고 군인은 손을 흔들고 떠나갔고 어머니는 아들이 간 쪽을 한 참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문득 사십여 년 전, 내가 휴가를 나왔을 때 밤새 기차를 타고 와서 모두 잠든 꼭두새벽 대문에서 “어머니!”하고 불렀을 때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로 마당을 건너 뛰어와 문을 여시곤 와락 안아주시던 어머님의 사랑이 생각났습니다.

    약 3년 가까운 군 생활에 어머님은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으셨지만, 하나님은 눈동자같이 나를 지켜주셨습니다. 참 힘들고 외롭고 어려웠던 당시의 군 생활에서 내가 예수님을 의지했을 때 주님은 내게 큰 힘이 되어주셨고, 어려움을 맞부딪힐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 또 큰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 후 사회생활을 할 때도 예수님은 나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어주셨는지...

    시간이 많이 지나 어머님은 천국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내 곁에서 나를 그렇게 사랑하고 계십니다. 살면서 부딪히는 곤란과 어려움과 문제가 없는 것 아니지만, 그때마다 예수님은 그 따스한 사랑으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주시며, 그 어려움을 능히 감당하고 또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정말 사랑하셨습니다.
    그 외아들 예수님을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셔서 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학창 시절에 예수님을 만난 것은 내 생에 가장 큰 축복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은혜를 감사하고 있고요. 나는 모두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세요.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Chapter IV.
    나에게도 진정한 삶의 근거가 있는가?
      우리 사회는 주어진 배경으로 인하여 삶이 많이 좌우되는 것을 봅니다.
      주어진 환경이 그럴듯하고 괜찮은 분위기에서 삶을 꾸려가는 분들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정말 태어난 환경, 주어진 여건을 참으로 안타까워하기가 참 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성서에서 진정한 참된 삶의 근거를, 그것도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짧지 않은 긴 삶을 그렇게 살아온 분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리고 확신 있는 마음으로 한 마디 전하고자 합니다.
      그런 확신과 진실된 마음과 담대함이 없다면 제가 이 말씀을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제 말씀을 간략하게 하도록 여러분의 생각을 모두어 가며 읽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성서 마태복음 20장에는 종일 할 일이 없어서 놀고 지내다가, 오후 다섯 시지만 그래도 내 생활에 필요한 것은 있는데 꾸릴 방도가 없어서, 자기를 품꾼으로 써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보입니다. 틀림없이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하여 호소하듯 많이 외쳤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집안에 꼭 필요한 생활비는 있어야 되는데, 해가 저물어 가는 오후 다섯 시인데, 우리는 가진 것이 도무지 없습니다. 하나님! 좀 살려주세요!”
      그의 몸부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향하였을 것이며, 그래도 나가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오후 다섯 시에 시장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0장에서 그 다섯 시에도 찾아간 포도원 주인을 바라봅니다. 무엇하려고 그 다섯 시에도 나아갔을까요?
      아닙니다. 이 내용은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안타까운 부르짖음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정말 긴급한 상황을 만나서 어쩔 수 없을 때, 진퇴양난이라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갈 수도 없는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하나님! 저를 좀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고 외쳐서 특별한 신앙을 가진 사람 못 되어도,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뚜렷이 입었던 사람의 고백을 들어본 적 있습니다.
      물론 그분 지금은 예수님을 잘 믿는 성도님이시지요. 글쎄요. 오래전 이야기이니까 지금까지 살아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로라 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잘 의지하고 계신 분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내 어두운 형편 아십니다.
      여러분의 어려운 형편 아십니다.
      여러분을 은밀히 제일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구하여 본다면, 여러분이 참으로 긍휼을 구하듯이 해 본다면 임하여 오는 자비로움이 없잖아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다가올 적군들의 환경을 너무 뻔히 알고, 나라의 혼란과 참 어지러움도 너무 잘 알고, 지금 자기가 있는 위치에서의 군사와 참으로 가지고 있는 장비 그 어떠함을 너무 잘 아는 가운데서, 그가 속을 태워가며 안타깝게 울부짖었던 것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우리가 참으로 사시고 참되신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시는 주님을 향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진실된 마음으로 그 자비로움을 구하여 본다면,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나를 아십니다.

      아마 여러분도 진실된 마음으로 저 하늘을 창조하시고 이 땅을 만드셨으며, 오늘도 우리에게 낮과 밤을 주시는 하나님, “이것 분명한 하나님의 작품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운행하심이지 않습니까! 여기에 제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세요!”란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진실된 마음으로 구하여 본다면, 마태복음 20장 내용은 우리에게도 다가올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을 잘 몰라도 말입니다.

      그런데요. 그다음 마태복음 21장에서 우리가 늘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아요?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위해 예비해 놓으신 이 땅의 삶의 진정한 참된 근거를 주시고자 하십니다.
      늘 오후 다섯 시에 부르짖는 이런 생활은 할 수 없지 않겠어요? 내 영혼의 참된 근거가 필요하지 않아요?

      내가 의지하고 내가 상담하고 내가 도움을
      힘입을 수 있는 한 분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아요?

      마태복음 21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본다면 사람들이 주님을, 하나님께서 주신 이 진정한 근거를 버렸대요.
      그러나 참으로 영접해서 내 근거를 삼는다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도 천국의 열매를 맺을 수 있대요.

      우리가 좀 풀이해서 말한다면 내 삶이 안정감이 있고, 평안이 있고, 자유가 있고, 참된 기쁨이 있고, 참으로 내 영혼이 메마르지 아니하고 하늘나라로부터 오는 은혜가 있는 이런 영혼이 안 된다면 열매 맺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씨앗도 발아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인이 필요하지 않던가요? 산소와 습도와 적절한 온도는 필요하지 않던가요?
      정말 우리 영혼은, 내 영혼이 참으로 의지할 한분이 계셔야 되고요. 내 영혼이 안정감 있어야 하고요. 그리고 평안이 있어야 하고요. 그리고 내 영혼이 메마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흡족해야 되고요. 그리고 기쁨 있어야 되어요. 평강도 있어야 되어요. 이런 가운데서 우리는 천국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의 누구도 그런 근거가 될 수 없어요.

      이사야 1장은 우리가 스스로 가만히 놔두면 머리는 정상적인 사람이 못 되고, 내가 나를 가누지 못하고, 마음은 피곤할 대로 피곤해 버리고 그리고 우리는 딴 사람의 죄의 유혹에 끌렸다기보다는 우리 스스로가 죄를 만들어 내는 종자가 된대요. 그래서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일밖에 없겠지요.

      이사야 2장 말씀 속에 우리가 나로 가만히 있으면서 세상에 흘러가는 그 모든 풍조만 내 마음에 그냥 그대로 다 받아들여도 우리는 결코 좋은 사람으로 있지 못한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하나님 보시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안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이런저런 여건을 다 가졌다고 생각해 봐요. 이사야 3장 말씀처럼요. 그래도 우리는 무언가 참된 영혼의 안정감이나 평안이나 기쁨이나 이런 것 없어요. 내가 세상에 필요한 모든 것을, 세상을 다 가졌다 할지라도 내 영혼의 이런 것은 안 된다는 그 말씀이에요. 이런 여건 속에 우리가 외부적으로 전쟁이 온다 생각해 봐요.

      이사야 4장도 전쟁, 5장도 전쟁, 비슷한 어려움이 오는 것 같아 보이고요.
      이사야 7장도 전쟁.
      그렇습니다.
      8장도 그와 같은 어려움인 것 같습니다. 우리 감당 못하지요. 그 조용한 날은 가만히 있을지 몰라도요.

      그런데 내가 그러한 어려움들이 와도 내 영혼이 안정감이 있고, 생기가 있고, 강하게 설 수 있는 근거, 그것은 우리 스스로는 안 되지요. 그러나 사망을 이기신 진정한 구주이신 예수님이 내 삶의 근거라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귀하신 형제님들께, 여러분이 세상의 풍조 따라서 이렇게 쓰러지고, 이렇게 말라가고, 이렇게 혼돈되고, 나 자신을 가누지 못하는 이런 삶으로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한다면, 죄송합니다만 만물 중에 제일 부패한 것이 인생이란 예레미야 17장 말씀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진정한 내 구주 내 주님이신 그분을 근거 삼는다면 잃어버린 생활이 아니고, 빼앗긴 생활이 아니고, 짓밟힌 생활이 아니고, 찾은 바 된 삶은 분명히 될 수 있는 줄 압니다.

      오늘도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이 혼란스러운 이 지구 상에, 혼란스러운 문제가 많은 이 지구 상을 그래도 운행해 주시는가요?

      하나님의 말씀은 뚜렷합니다.
      참으시면서 인내하시면서 오늘도 이 참길로! 그래서 내 진정한 삶을 가지고 내 영혼이 이런 복된 삶을 가지고 아울러서 내 영혼이 천국의 열매를 맺고, 이웃을 참 사랑하는!

      나는 경건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면서 또 한편은 이웃을 참 사랑해 보는!
      천국의 열매가 있고, 오늘 여러분이 진정한 의미에서 가족을 사랑하는! 진짜 가족을 사랑하는 것도 아닌 그런 어처구니없는 삶이 아니라,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삶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내 가족, 내 부모, 모두를 사랑해 보는!
      이런 값진 자로 설 수 있는 참 좋은 시간이 바로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뜻깊은 마음으로 되새겨 주셔서 길지 않은, 또 한편으로는 길어 보이는 이 시간 속에서 귀한 삶을 얻게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노력한다고 해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 인생을 진정한 내 구주요, 내 주 되신 그분께 속하여 맡기고 의지할 그때에, 그분과 함께 누려가는 귀한 삶이 되시기를 원하여 봅니다.
      Chapter V.
      성 도
      김 성 애 집사님
      성도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귀에 들리는 것들에 이끌리지 않습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삽니다.

      흔들리는 미로 같은 세상이지만
      주님이 비추어 주시는 빛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소망이 있고 감사와 기쁨이 넘쳐납니다.

      생명수가 늘 흘러넘쳐서
      부족하지 않으며
      나누고 또 나누며 살아갑니다.

      스스로는 결단코 얻을 수 없지만
      주님 안에만 있다면
      주님께만 매이고자 한다면
      주님은 언제나 그 풍성한 그 모든 것을
      아낌없이 채워주십니다.

      성도는 
      그러한 풍요를 늘 누리며
      이 땅을 살아갑니다.
      Chapter VI.
      주님의 좋은 군사로
      김 규 성 집사님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치매 약대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더라”(삼상 30:7)

      삶의 터전인 시글락은 불에 타 버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은
      아말렉에게 사로잡혀간 현실 속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 높여 우는 모습을 읽게 됩니다.

      그 이후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군대를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라는 응답 속에
      쫓아가 아말렉 진에 도달하게 됩니다.

      아말렉은 그 탈취한 것으로 인하여
      먹고 마시고
      춤추며 즐기고 있는 그 모습 속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더더욱 분노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분함과
      그 스스로 된 자기의 모습으로
      즉시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조용히 주님의 긍휼을 구하게 됩니다.

      나아오기 전 응답을 주셨던 주님이셨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의 때와 시간을 기다려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때에 주님과 함께
      전투를 행해가는 이 모습이
      얼마나 저의 가슴속에 아름답게 다가오는지요.

      마치 느헤미야가 왕 앞에서 잠시 묵도하고
      지금 주님을 더듬으며 행해갔던
      그 모습처럼요.

      아이성 뒤편에 매복하여
      온 마음 다해 주님과 한밤을 보내고
      그리고 오늘의 주님 이끄심을 따라 나아갈 때
      온전한 승리가 있었던 이 모습에
      많은 감사가 되었습니다.

      저의 평범한 하루의 삶 속에서도
      주님과의 한밤이 살아있고
      그리고 오늘의 주님 순간순간 앙망하며
      주님의 좋은 군사로
      잘 서 가고 싶습니다.
      Chapter VII.
      참된 삶
        우리가 보기에는 그래도 착해 보이는 비둘기가 농부들이 씨앗을 뿌리고 간 다음에는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다가 내려와서 그 씨앗을 다 쪼아 먹는다고 합니다. 그 비둘기의 마음속에는 죄송한 마음이나 미안한 마음 전혀 없는 줄 압니다.

        우리가 곁에서 가까이 보아도 참 순진해 보이는 고라니가 애써 농사 지어 놓은 밭에 들어와서 그 밭을 헤쳐 버리는 피해를 끼침에도 불구하고 전혀 미안해하는 마음이 없는 것 사실인 것 같습니다. 또 들어오고 또 다녀가는 것 보아서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하나님 형상으로 지으셔서 오늘도 미흡한 마음이 있고 죄송한 마음이 있어서, 스스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마음속에 선한 양심과 착한 마음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선한 마음과 착한 마음이라는 것이 없다면,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 나을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다니엘서 12장에는 인류의 삶의 종말이 가까울 그때에 “많은 사람의 지식이 더하여 가고 오가는 왕래가 아주 빨리 오갈 수 있게 될 것이라.”라고 예언했습니다.

        여러분! 길게 볼 것 없어요.
        지금 이 땅에 긴 세월을 살아온 이 땅이지만 백 년 전만 해도 지식이 그렇게 많다 할 것 있습니까? 우리만 아니라 어느 나라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백 년 전만 해도 오가는 길이 빨리 간다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다 느리고 안타깝게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정말 지식이 많은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가는 그 속도는 대단히 빠르지요. 자동차도 빠르고, 기차도 대단하고, 비행기도 글쎄요 마하 몇이라고 할 만큼 엄청난 속도를 지니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더하여가고 빨리 왕래한다 해서 사람이 나아진 것 아닙니다. 그 이후에 바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창세기 6장의 노아 때 심판도 사람이 악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도 사람이 추악하고 참으로 악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식이 많다고, 빨리 왕래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선한 양심을 저버리고, 깨끗한 마음을 저버리고, 그 어두움과 그릇됨을 악함을 추구할 정도가 되어간다면 그것은 대단히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선한 경쟁은 괜찮아 보이지만, 상대방에게 은밀하게 피해를 끼쳐가면서 경쟁한다면, 그것은 정말 듣기만 해도 마음이 아픕니다.
        지식은 더하여 가고 빨리 왕래를 할 수 있는 그런 기술과 그런 연구는 왕성해 가지만 사람의 마음은 더욱더 어두워져 간, 선한 양심과 착한 마음과는 거리가 먼 길로 달려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요한 계시록 21장 뒷부분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한 자를 가리켜 말씀할 때 거짓된 사람! 하나님의 나라와 거리가 멀다고 말씀하셨고요.
        그다음, 가증된 자! 하나님의 나라와 거리가 멀다고 경계하며 말씀하셨고요.
        그리고 참으로 속된 자! 그건 선한 양심과 착한 마음으로 볼 때는 ‘그러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속된 자! 그것도 하나님의 나라와 거리가 멀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이 깨끗한 양심과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를 찾으려고 하면 곤란하겠지요. 그러나 착한 마음과 선한 양심 있는 이들은 나의 어떠함을 하나님,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솔직히 고백하면서 용서받을 수 있는 참된 길을 구할 것입니다.

        선한 양심을 보시고 착한 마음을 보시는, 우리의 양심과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어떻게 하면 바른 마음으로 나갈 수 있을까?

        그때 들려온 소식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는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바로 여러분과 저의 허물과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못 박히셔서 처절한 고통과 수치와 아픔과 모욕과 죽음을 경험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죄 없는 분이셨어요. 하나님 기뻐하시는 분이셨어요.

        우리 죄 때문에!
        만약에 이 사실을 진실되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자비를 구할 때, 우리 영혼 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이 소식이 우리 마음속에 전달된다면 그리고 여러분이 진실된 감사함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씻어질 수 있고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자로 여김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 우리가 ‘예수님, 예수님, 내 구주, 내 주님’ 하면서 부르고 의지했던 참 믿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한 양심과 착한 마음을 가지고는 정말 거짓됨이 많고 포악함이 많은, 참으로 삐뚤어진 길로 자기의 이익과 그 무엇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바르게 살아간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진실된 조그만 어린양이 이리떼 가운데 둘러싸여 있는 것과 같은 환경이라고 말해도 조금도 틀리지 아니할 줄 압니다. 때로 사람들은 “양심 가지고는 못 살아. 착한 마음 가지고는 못 살아.”, 이 말을 부끄럽지 않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예수님은 우리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그 은총은 우리에게 참으로 신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에게 유효하게 임하여 올뿐만 아니라, 그분은 삼일 만에 부활하셨으며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는 우리의 구주! 살아계신 구주! 살아계신 주님으로서 오늘 여러분과 제가 이 땅에서 참된 마음으로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연약하고 세상은 참으로 그러하기에, 우리가 감당 못 하겠지만 진실 되게 내 허물을 담당하여 주시는 그분.

        오늘도 살아계시면서 참 마음으로 그 주님을 내 구주와 내 주님으로 영접하여 의지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도우심과 주님의 함께하심으로, 이 어려운 세상 속에서도 착한 마음과 선한 양심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우리 예수님으로 인하여서 우리가 삶을 꾸려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심과 착한 마음을 버리고 사는 것은 참된 삶은 아닙니다.

        때론 가난하고 때론 내가 사는 환경이 좀 그러해도,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의지할 수 있다면, 우리 영혼은 요한복음 3장 말씀처럼, 내 영혼이 참으로 의지할 그분 때문에 우리는 거리낌 없는 밝은 마음으로 빛 되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주님 없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는 어두움과 죄악을 얼마나 마시기가 쉬운가요! 그것은 양심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내 구주, 내 주 되신 예수님을 참으로 나의 살아계신 주님으로 알고, 그분이 주시는 생명수를 내가 마시고자 한다면, 요한복음 4장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내 선한 양심, 내 깨끗한 마음 전혀 버리지 아니하고 정말 맑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편 51편 말씀처럼 내가 의지하는 주님께서 주시는 정결한 물, 의로운 영, 성령님의 감동하심과 함께하심. 은밀히 보시는 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도우시는 그분의 손길 속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솟아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선한 양심과 착한 마음은 하나도 손상받지 아니하고 그 선한 양심과 착한 마음 가지고 복 되게, 알차게 그리고 생기 있게 삶을 꾸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내 선한 양심과 착한 마음이 모시고 의지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에게 정말 유일한 내 구주, 내 주님이십니다.

        형제님들!
        여러분들은 생생한 젊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양심과 착한 마음이란 우리가 정말 생각하고 지키고 바르게 가꾸어야 될 이점을 생각하다 보면, 여러분이 젊음이란 것 가지고, 여러분의 의지로 여러분이 선한 양심과 착한 마음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기에는 너무 불가능함을 지금 잘 알고 계실 줄 압니다.

        스스로 아니 됩니다.
        주어진 환경과 여건은 우리를 정말 어둠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지금도 우리에게 참된 삶을 주실 수 있는 예수님께 “주님! 나로서는 불가능합니다.”라는 이 겸허한 자세로!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애써 살아봐도 되지 않습니다.” 이 진실된 마음으로 다가오신다면, 사람의 진정한 기쁨은 마음에 있습니다.

        그 착한 마음과 선한 양심을 주님 때문에 버리지 아니하고, 지나간 허물과 죄는 도리어 주님으로 인하여 사함을 얻고, 오늘도 나와 함께 살아주시는, 내가 의지하고 내가 모시고 언제나 함께할 수 있는, 내 주님과 함께 빛 가운데 살아간다면!
        여러분, 삶을 살아가는 의미를 대단히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하시기를!

        지금 여러분은 주어진 학업도 중단하고 계시고, 주어진 세상에서 이런저런 삶에 많이 부딪히는 것 가운데서도 좀 벗어나 있고, 내 인생에 진정함을 선한 양심과 착한 마음이라는 이 근거에서 내 앞길을 스스로 헤어나갈 수 없음을 벌써 헤아려 보시었습니다.

        어느 의미에 있어서 지금보다 더 많은 지식이 더하여 갈 수 있을까?
        지금보다 교통이 더 빨리 왕래할 수 있을까? 전날에는 이것 너무 느리다. 지식이 너무 빈약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극으로 달려간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것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선한 양심, 착한 마음!
        오늘도 보십니다.

        스스로 아니 된다는, 참으로 주 앞에 부복한 겸허한 마음과 ‘나로서 감당할 수 없다.’라는 이 진실된 마음으로 다가온다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태복음 9장 13절)라는 말씀처럼, 오늘도 이런 진실한 자를 만나주시기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살아주시기를 정말 원하실 줄 압니다.

        오늘의 이 길 속에서 기다려 주시고 사랑하는 형제 한 분 한 분을 향하여 주시는 우리 하나님의 부르심에, 진실한 마음으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응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원하여 봅니다.
        Chapter VIII.
        나의 생각, 나의 마음!
        박 은 주 집사님
        어느 의미에서 우리의 생각은
        우리 영혼의 창문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오늘의 삶의 주님으로
        경배하는 마음으로 생각할수록
        그 창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보혈 남김없이 나를 위해 흘려주셨고
        지금은 은혜의 보좌에서
        내 영혼의 목자 되어주시는 내 예수님!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헤아려 살펴주시고
        내 입술의 모든 말과 행하는 것까지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시간 시간 조용히 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세요!
        모두어지고 정돈된 내 마음 속에
        오늘을 이길 수 있는 삶의 비결을
        우리 주님은 새기듯이 말씀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장병님들!
        나의 생각과 나의 마음은
        주님께서 주시는 보배로운 그 말씀을 담는
        얼마나 귀한 그릇인지요!!

        흘러가는 시간 속에
        그 맑고 정돈된 마음 잘 지켜가므로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나’를 발견해 가는
        축복된 군 생활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Chapter IX.
        주님의 군사 된 자
        황 주 훈 집사님
        신병교육대에서 훈련병은 조교의 엄한 구령에 따라 땅바닥에서 뒹굴며 때로는 흙탕물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된 훈련을 받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훈련 가운데 어느덧 몸의 군더더기는 다 사라지고 야무진 모습으로 변화되고 눈빛에서도 각이 잡혀집니다. 마치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카멜레온처럼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강해집니다.

        군대생활에서 때로 훈련 속에 흙과 친숙해지며 한 가지 귀중한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셨으며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만들어진 창조물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살면서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이 있습니다. 그 무엇도 내가 스스로 이길 수는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부활의 생명으로 이전에 내가 흙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참으로 쉽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의 주어진 길속에서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딤후 2:3~4)는 말씀처럼, 주님 모시고 주님과 함께 주님의 군사 된 자로 항상 이기는 자로 서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싶습니다. 아멘!
        Chapter X.
        참 좋은 목자
        오 성 주 집사님
        귀하신 예수님이
        오늘 나의 목자 되시고
        그의 양으로 살도록 허락해 주심은
        최상의 길이요,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동트는 새벽, 태양 빛 아래 낮 시간,
        저물어가는 저녁에도
        주님이 내 목자 되어주심은
        진정한 자유요, 안식이요,
        참 평안이며 큰 기쁨입니다.

        비록 오늘 만나는 고난과 억울함.
        환경의 어둠이 있지만
        참고 인내하며 성실히 살아갈 수 있음은
        내게 살아주시는
        참 좋은 목자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평생에
        주님만을 내 영혼의 목자로 모시고
        그분 곁에 늘 자리 잡은
        한 마리 양으로 살아가렵니다.

        “주님이 내 목자이시니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영광 드리며 말입니다.
        Chapter XI.
        솔로몬의 후회
          신앙인이든 그리스도인이 아니든 간에 솔로몬은 대부분 사람들이 다 알아봅니다. 딴 것보다도 그의 지혜의 정말 두드러진 뛰어남 때문에 그리고 그가 누렸던 정말 호화스러운 영광 때문에 솔로몬은 신앙인이든 아니든 간에 대부분 다 솔로몬을 알아봅니다.

          그러나 그 솔로몬이 자기 삶을 살고 난 이후에 그는 자기 입으로도 후회를 한 것 사실입니다.
          “내가 바람을 잡았다.” 바람을 잡아봤자 그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내가 헛된 삶을 살았다.”

          몇 년 전, 오래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정말 내로라하는 삶을 살아간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연세가 구십 세 좀 넘었을 때 이 땅을 떠났습니다.

          그는 자기 삶을 정리한 책에 인생의 무상함을 이야기했고요. 그가 짧지 않은 사십여 년 동안 정치에 관여하면서 한국의 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나라를 바르게 세워보고자 애쓰셨던, 어느 정도 의미에 있어서 나라를 세운 것 같아 보이는 그런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치는 허구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정치한 기간은 사십여 년은 되는 것 같습니다. 그의 나이가 서른여섯 살 때 나라의 대표로 일본에 나아가서 일본의 나라를 담당한 그 수반에 위치한 분과 대화를 했을 때, 젊은 사람의 명석함과 결단력 있는 의지와 그 모든 것에 탄복했던 일본의 그 으뜸 되는 정치가는 “당신 나이가 몇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서른여섯 살이었습니다.
          그런 뚜렷한 소신도 있고, 생각하고 결단하며 뚜렷한 지혜도 많이 있는 것 같아 보였던 사람인데, 자기 인생을 구십 년 가까이 살고 허무하다고 고백했고, 정치를 사십여 년 동안 아주 중심에 서서 해보고 나서도 “그것은 허구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솔로몬의 후회!
          그것 우리도 무시하고 간다면 또 그 길로 가겠지요. 또 제가 이름을 드러내면 여러분도 뻔히 아실 분이겠지만, 이런 일로는 이름을 드러내지 않아야 예의일 것 같아서, 그분이 말한 인생과 나름대로의 삶에 가장 중심에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그 정치란 것에 관여했던 것을 그것 잘한 것 아니라고 후회했음을 우리가 기억해 보는 것은 도움 될 일일 것 같습니다.

          잊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조용하게 진실된 참된 증언을 받아들이는 그런 자세를 참으로 원하십니다.
          예를 들면, 성서 사도행전 뒷부분에 가면 사도 바울 선생님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는 줄 뻔히 알면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자기 동족들에게 진정 메시야는 예수 그리스도란 이 점을 전하려고, 그래서 동족들을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보려고 목숨을 내건 마음으로 예루살렘 올라갔습니다. 그는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가 붙잡힌 가운데서 몇 차례 증언을 했습니다.

          그의 증언은 이런 증언입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입니까?
          지금 살아계신 이 나라의 으뜸 되시는 대제사장들도 나를 분명히 알아볼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엄청나게 박해했던 사람이었고요. 예수 믿는 자를 죽이는데 으뜸 선 사람이었고요. 나는 대적하는 마음으로 먼 곳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자 애썼던 사람입니다. 나에 대하여는 증인이 따로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계신 대제사장들이 참으로 나를 압니다. 그들 가운데 인정받았던 나입니다. 그런데 제가 다메섹 도상을 가다가 진실하게 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 선생님이 예수님을 얘기해서 자기에게 하나도 유익될 것 없습니다. 그들은 성난 군중처럼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고자 하는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야’라고 말입니다.
          감옥에 머물러 있던 시간은 짧은 기간 아니었습니다. 한두 달 아니었습니다. 해를 넘겨가는 제법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하나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 한다고 그 사도 바울 선생님을 없애고자 했던 그들이 사도 바울 선생님이 감옥에 갇혀있는 것 모르나요?
          압니다!

          그때 사도 바울 선생님은 전날의 이방인의 이곳저곳에서 다닐 때는 표적도 기사도 많이 행하면서 놀랍게 역사를 했던 그분이지만, 지금은 그런 일을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담보한 진실한 증언! 그것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세워놓은 사도 바울 선생님을 주님은 이 진실된 증언으로 그들이 ‘아, 이리 살펴보아도 저리 살펴보아도 참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사실인 것 같구나.’ 또 이 사도 바울이라는 분이 증거 하는 말을 들어볼 때 자기가 지금 이렇게 해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어려운 여건 속에 진실한 증언을 함으로 우리 하나님은 이런 진실한 증언을 통하여서 참된 말씀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런 참된 증언!
          사도 바울 선생님의 진실된 말씀!
          우리가 생각해 보면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실 그렇습니다.
          이 진실한 증언!
          하나님께서 이 길을 통하여 참된 길에 오는 자는 맞이해 줄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서 이 참된 마음으로 다가오는 이 말입니다.

          성서 열왕기상에는 두 여인이 솔로몬에게 다가왔습니다. 살아 있는 아기 하나를 데리고 와서 서로 자기 아기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여인이 비슷한 시기에 아기를 낳았는데 한 여인이 자다가 아기를 그 몸짓으로 짓눌러 죽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살아있는 아기를 자기 아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서로 자기 아기라고 하다 보니 마침내 왕 앞에까지 왔습니다.

          그때 솔로몬이 한 지혜는 솔로몬의 머리로 한 것 아니고요.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구한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아기를 데려오너라. 칼과 도마를 가져오너라. 산 아기를 둘로 쪼개어 나누어줄게!” 솔로몬이 한 말은 그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지혜로서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진정한 선한 양심과 착한 마음을 찾아내신 것이었습니다.

          아기를 깔아뭉개어 죽인 여인은 “네 것도 되게 하지 말고, 내 것도 되게 하지 말라.”는 뜻으로 무덤덤합니다.

          그러나 진짜 아기 엄마는 “아닙니다. 왕이여! 내 아기가 아닙니다. 저 여인에게 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아기의 생명을 살릴 길을 이야기했습니다.

          진정한 엄마!
          솔로몬은 아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과 착한 마음이 살아있는 그것을 찾아내어서 그 어미에게 찾아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양심과 착한 마음을 찾고자 하신다는 그 말입니다. 보신다는 그 말입니다.

          오늘 진실된 마음이 있다면 감옥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목숨이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러분이 아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 사실이지만 살아계시고 그리고 지금도 우리에게 진정한 구세주이십니다.” 지금 그 일로 인하여 자기가 죽음에 처할 수도 있고,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갇혀 있는 삶을 살면서 선한 양심과 진실함에 기초한 이 증언!
          내 동족들을 건져야 되겠다는 이 뜨거운 마음! 그 길을 통하여서 돌아온 사람은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건져주십니다.

          그 증언에 돌아와서 전날에 핍박했더라도, 전날에 무관심했더라도, 전날에 내가 어둠과 그릇됨에 있더라도, 예수님은 내 구주시라는 말을 믿고 돌아와서 참으로 그 주님께 무릎 꿇는다면, 하나님은 그분들 다 건져주십니다.

          솔로몬이 세상을 온통 추구하고 살아서 ‘그것 헛되다.’라고 한 것을, 여러분이 젊음의 시간에 그 ‘헛되다’라고 한 길로 또 가야 합니까?
          나름대로 똑똑하고 용기 있고 그리고 참 것을 추구하는 결단성도 있어 보였던 그 사람이 세상 삶을 나름대로 살아봤지만, ‘허무하다.’ 그리고 나름대로 정치한다고 중심에 서서 사십여 년 간 해 보았지만, ‘허구다.’란 것이 허튼 말입니까! 허구라 할 때에 참으로 우리가 돌아갈 길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12장에는 참 불행한 환경 속에 참 뜻하지 않은 길을 통해서 태어난 솔로몬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태어나게 된 그 중심 동기는 다윗의 죄송한 마음과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나름대로 올바른 마음을 품는,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구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결단코 평탄치 못한 여건 속에서 태어난 솔로몬을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여디디야’라는 ‘사랑한다’는 이름을 주시었습니다.

          저는 솔로몬이 자기가 어떻게 출발했는가를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래도 참 사랑하신다는 이 사랑이 얼마나 긍휼의, 불쌍히 여기는 사랑인가를 안다면, 하나님을 향하여 참 마음으로 삶을 살고자 했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자라면서 참 어린 나이인 청소년 그리고 청년 시기를 지나가면서 이것 몰랐을까요? 알았을 줄 압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살고 싶은 중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솔로몬이 왕이 되고난 이후에 “하나님! 제가 이 백성을 돌아본다는 것 스스로 불가능합니다! 지혜를 주셔야 합니다.” 그 바른 마음이 있다 보니 바른 것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구한 것을 참 기뻐하셨습니다. 많은 부나 장수나 이런 것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살고자 하는 그 마음. 하나님께서는 그 구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왕이 되고 난 이후에만 있었던 마음 아닙니다. 그는 왕으로 자리 잡기 전에도 자기 아버지 되는 다윗이 솔로몬이 지혜로운 줄 알았습니다.
          “너는 지혜로운 자인즉”
          이 말을 다윗이 했습니다. 그의 쭉 지나온 생활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것 안 하고, 어긋난 길에 뛰놀지 아니하고, 하는 일 조그만 조그만 것이 다 참 바른 마음을 가지고 있어 지켜보는 다윗의 마음속에 지혜로 보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 좀 나아 보인다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다윗도 보통 분은 아닌데, 다윗이 보기에도 지혜로워 보여서 어떤 것을 맡겨놓아도 할 정도로 생각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 당신 보시기에 바르게 살고 싶습니다.” 사랑해 주신 이 긍휼 속에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인 줄 압니다.

          솔로몬이 태어나기 전에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네 후손이 성전을 짓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무엘하 7장은 사무엘하 12장보다 훨씬 앞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사가 누구였습니까? 그 왕위를 이어간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솔로몬이었습니다. 다윗이 스스로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찾기를 참 즐겨한 분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한 나라의 일을 맡기는 일을 가볍게 생각했겠습니까! 주님의 뜻을 속으로 많이 구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마음에 완전히 이 땅을 떠날 때가 아니라 그 마음이 벌써 왔을 때 솔로몬이 자라고 있을 그때에 그는 그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 땅을 떠나갈 그즈음인 열왕기상 1장에서 다윗은 그 맘을 변함없이 유지하면서 솔로몬을 왕위에 앉혔습니다.

          지금 저는 여러분과 제가 귀한 것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길에 들어섰다는 것이 굉장히 귀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살아보려는 생각을 가져보는 것이 굉장히 귀중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님들!
          하나님이 날 사랑하든 안 하든 무슨 상관인가! 여러분,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고 나면 언제나 “허무합니다. 허구입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의 온 정신을 다해서 살아봐도 말입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15장에 둘째 아들도 자기가 그릇된 삶을 살려고 나간 것은 아닌 줄 압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길에 들어서고자 한다면 로마서 1장이나 디도서 3장 말씀처럼 아니 성서에 가득 있지요.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그의 사랑의 길에 품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던 누가복음 19장을 생각해 보세요. 그 예루살렘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님보다 생활이 훨씬 더 나은 여건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파멸을 주님은 보셨습니다. 우셨습니다. 해답이 없는 것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을 특별한 경우라고만 생각지 마세요. 우리도, 그럴만한 자가 아닌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길이 오늘도 우리를 참 사랑하시고자 하시는 내 예수님께로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참된 사랑을 알아볼 수도 있고 힘입을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주님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한쪽 편 강도는 그 못 박힌 가운데서도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못 박혀야 될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 고통 속에서도 그를 향하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편 강도는 조롱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예수님 아무런 말 없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이라면 오늘도 보좌의 주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응답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랑 힘입고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중심을 가지고 다가선다면 물론 우리가 이런저런 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어느 의미에 있어서 학개서나 스가랴나 이런 성전에 관한 말씀을 보다 보면, 그 성전 짓는 삶은 곧 내가 그렇게 되어가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다소 어려운 말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참되신 구주 되신 주님과 함께 그 주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님을 존귀히 여기면서 순종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성전 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 살아가지고 “내가 바람을 잡았다. 내가 날들을 헛되게 보냈다.” 이런 말 절대 안합니다. 인정받을 그날에 인정받을만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성전 된 삶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벗어나지 말고, 지나쳐 나아가지 말고, 예수님을 내 구주로 내 목자로 내가 속하여 순종하여 살아갈 분으로 매여 본다면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 합한 성전 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줄 압니다.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서, 그런데 끄트머리는 ‘그것은 허무하다.’ ‘그것은 허구다.’, 여기에 우리 젊음을 불태워서는 안 되겠지요!

          참 마음으로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다가서는, 귀한 것을 생각해 보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저 하늘을 창조하시고 이 땅을 만드셨으며, 우리에게 햇빛과 비를 주시는, 낮과 밤을 운행해 주시는 하나님!

          정말 가까우신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나사렛 예수님을 통하여서 그 사랑을 힘입어 보는, 그 사랑 안에서의 여러분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생각해 갈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원하여 봅니다.

          다윗이 정말 원했던 것이 왕일까요?
          아니에요!
          주님을 섬기고 싶었던 것이에요.
          참된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에요.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삶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습니다!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한 삶, 성전 된 삶이라면, 여러분 본인이 보아도 참 기쁨이 되고 보람이 됩니다.
          절대 허구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절대 바람 잡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이웃들에게도 잔잔한 그리고 조그만 축복들이 되어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내일이 이 길에 있기를 정말 원하여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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