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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나의 빈들판

2019-03-24 / 79 회차

조그만 나의 빈들판



주님만 내 안에 그립니다!

천성교회 박 문 수 집사님

주님!
오늘의 나의 시간시간
정한 마음으로
보좌 향하여 매인 삶

주님!
예수님 보고 싶고 그리워
무덤가로 나간 마리아처럼
오늘 길 주님 그리워
주님께 나가는 삶

주님!
조용히 보내는 지금의 시간시간이
그릿시냇가의 엘리야처럼
주님께만 귀 기울이며
나가는 기도의 삶

주님!
내 주님 한 분만 사모하는 지금의 시간이
행복이요 축복임을 …
그렇게 내 안에
예수님 한 분만 그려갑니다.

주님!
지금의 시간들
주님만 기다리며
주님 주신 달란트 남기는 종 된 삶
주님 오실 때 잘했다 칭찬받는 종 된 삶

주님!
오늘 길 내 안에
사랑의 주님 한 분만 그려갑니다.

그리움

김 숙 현 사모님

사랑하는 주님! 내 주님!
그 옛날 주님 음성 그리워
빈들판에 머물렀던 세례 요한.

주님 품이 그리워서
빈들판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의 그리움은
더욱 젖어갔을 테지요.

아버지 품 그리워서
빈들을 찾으시던 예수님
그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신 것은
아버지 나라와 그의 의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 음성이 들려오는
잠 못 이루는 이 밤
한없는 그리움에 젖어
십자가가 있는 이 빈들이
결코 싫지는 않고
어느덧 사랑하는
내가 머물고 싶은
빈들판이 된 것 같습니다.

주님, 너무나 그립습니다.
내 주여! 내 주여! 아멘.

하루만 사는 마음으로

오 준 녀 권사님(93세)

주님!
오늘도
새로운 하루를 주셨군요.

주님 주시는 십자가는
내가 지고
주님 손 놓칠까 봐 꼭 잡고
주님만 따라갑니다.
주님 제 손 꼭 잡고 이끌어주세요.

하루만 사는 마음으로 삽니다.
주님 모신 마음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낮 시간
할머님 기도 모임에서 나누는
기도 제목으로
함께 기도하며 찬송합니다.

항상 주님 모시고
이러한 마음으로 삽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우리가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사실 지금 갈라디아 교회로 볼 때, 그들이 예수님께서 우리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이 문제를 오해한다거나 이해하지 못해서 사도 바울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말씀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오늘 육신 안에 살고 있는 그 누구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참된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신 놀라운 복음인 동시에 내가 정말 감사함으로 참여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임에 사실인 것입니다.

그 다음,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이 짤막한 말씀은 아주 귀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 선생님은 이 귀중한 내용을 전체적으로 압축해서 지금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나라면 이제 또 내가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알고 계시고, 우리도 복음을 제대로 알았다면 분명히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다시금 자기가 하나님 보시기에 스스로 의로운 길을 걸어가겠다고 하고, 하나님 앞에 나름대로 인정받을 만한 삶으로 걸어가겠다고 하는 것은 너무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그 일이 되지 못할 일임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러한 내가 아니라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주시는 그 놀라운 영광을 누리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게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정말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선생님은 이 내용을 갑작스럽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이라”
당연한 말입니다. 나를 죽음에 넘긴 다음에 내가 또 살아보려고 한다면 안 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살아주셔야 합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어느 의미에 있어서 내가 예수님과 함께 교육을 받고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내가 살아볼 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오산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내가 함께 못 박혔다는 것은 얼마나 결정적인 내용인가요!

갈라디아서를 읽어보아도 사도 바울 선생님이 아라비아 광야로 나아간 것을 읽게 됩니다. 거기서 훈련을 받았다고 해서 이제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나요?
그런 것 절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가 갈라디아서에서 “그 아들을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참으로 그러한 광야 길을 통해서 내 구주 되신 주님을 알아가고자 시간을 보낸 것 사실인 줄 압니다.

그가 진정 고백한 말씀은 이런저런 훈련과 은혜와 은사를 힘입어서 이제 주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 절대 아닙니다. 정확한 사실은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될 나이고, 그다음에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닙니다.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주셔야 한다는 이 귀중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짤막하게 한 가지를 지적하고 싶어서 이 말씀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말씀을 기쁨으로 맞이한 이후에,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이 말씀을 쉽게 이끌어 가 버립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는 2장으로 끝을 맺는 것 아닙니다. 6장까지 전개되어 갑니다.

우리가 그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이 삶을 위해서는 나는 어떠해야 할까요?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귀중한 의미를 인정하므로 갈라디아서 3장 1절이나 5장 24절이나 6장 14절처럼 나를 죽음에 넘겨야 하는 것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 안에 살아주시는 삶을 위하여 그 다음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한 귀중한 내용이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다시금 자기에게 돌아갈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주님 안에! 믿음으로 굳건하게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육신 안에 머문다면 도리 없습니다. 우리를 이끄는 그 무엇에 정말 많이 끌려가 붙들려 매이므로 죄의 종도 되고, 세상의 종도 되고, 연약함의 종도 됩니다.
그러나 나를 죽음에 넘기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 굳건하게 선다면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인지요!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내가 살아갈 생활 속에서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주님 안에 주신 이 영광의 터 위에 굳건하게 서서, 나에게 진정한 삶을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끄시는 주님의 영, 성령님을 좇아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며 말씀한다면,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를 깨우치고 난 이후에 자기에게 돌아오지 말고, 참된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가지로 그의 지체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주님과 연합한 하나된 자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참으로 놀라운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치 요한복음 15장 말씀에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주님의 가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아가는, 그의 이끄시는 생명을 좇아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그 때, 그리스께서 내 안에 살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것은 정말 사실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 과정 사이에는 엄청난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이곳에서 ‘신앙은 나를 죽음에 넘기고 난 이후에 다시 내가 나를 붙들고 사는 것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만, 그 다음 삶의 방식은 갈라디아서 5장과 6장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 안에 살도록 마음을 써야 합니다. 그의 가지로 사는 삶에 온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의 지체로서만 살아가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주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생명으로 힘입게 됩니다. 간증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순서를 정확하게 알아보는 것 잊지 마셔야 합니다.

새봄이 오는 길목에서 주님과 나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해 가므로, 다시금 신앙에 대해서 어려워한다거나 혼란스러워하기보다는 주님과 함께 확실한 길을 걸어가시기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 안에 살아주시므로, “아! 이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하는 겸손하고도 아름다운 삶의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참 포도나무이신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소원!

민 진 선 집사님

주님의 얼굴 늘 뵈오며
그 안에 머물고자 함이
내 한 가지 소원입니다.

주님 안에서
나를 빚어 가시는 그 손길은
아픔이라도 기쁨이고 만족입니다.

단지 주님의 그 얼굴이
그 손길이
그립고 그리울 뿐입니다.

주님!
그 보좌 앞 생명수 가까이 이끄소서.
주님과 함께하는 그곳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천국이요.
주님 함께 하시지 않음은
푸른 초장일지라도 지옥입니다.

나의 간절한 소망은
주님 한 분입니다.

정함 있는 마음

한 명 선 집사님

“그가 나를 죽이실찌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욥 13:15)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믿음으로 내 안에 살아계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못에 각색 병자가 있었어도 38년 된 병자를 찾아와 주신 주님. 38년 된 병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나의 주님께 감사하고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리고 요즘 내 맘에 ‘참’이란 단어가 생각되어집니다. 이 ‘참’이란 예수님 말씀에는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없어져도 우리 주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죠. 예수님의 참된 말씀을 잘 믿고 잘 따라가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그리고 내게 십자가 있지만 주님을 잘 따라가고 싶습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내 목자 예수님

김 안 순 집사님

사랑의 왕이신 예수님은 내 목자이십니다.
“예수님! 저는 아무 것도 모르니 예수님만 사랑하고 예수님 위해 살 수 있도록 이 세대 속에서 주님의 뜻을 바르고 정확하게 가르쳐 주실 목사님을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10년 넘도록 기도하며 찾고 헤매었습니다.

그러다가 29년 전 진토리 교회를 찾았던 수요예배 때 내가 찾던 교회인 것을 알도록 주님께서는, “ …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 속한 자들이니”(계 14:1~4)라는 말씀을 귓속말로 뚜렷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주님의 심장을 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전해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먹고 기뻐 뛰며 지내왔습니다. 요즘은 강한 훈련 속에 육체는 쇠잔해져 연약함 속에 있지만, 끊임없이 돌보시는 주님으로 부족함 없습니다. 자상하게 돌봐주시는 귀한 손길에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감격스러워 주님 품에 안겨 많이도 울었습니다.

몸된 교회의 머리 되신 영광스러운 나의 목자 예수님 그리고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식구님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늘 영광 가득 찬 나의 사랑의 왕, 내 목자 예수님! 그날까지 저 천성 향하여 오르고 또 오를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저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후 1:14)

이와 같은 믿음의 안식

사도행전 12장에는 야고보 사도가 순교한 내용과 사도 베드로가 옥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읽다보면 내일 죽을 사람인데 왜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지키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쇠사슬로 묶어 옥에 가두고 바깥에서 간수가 지키고 있으면 될 것인데, 간수들이 바로 그 베드로 옆에서 붙어 있는 모습을 읽게 됩니다.

우리가 이 내용을 읽다보면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베드로나 사도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천사들이 문 열어주므로 그들이 다음날 성전에서 말씀하고 있었던 그 내용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이 사람들은 잡아두어도 다음날 옥문이 그대로 잠겨 있는데도 없어지므로, 내일이면 죽여야 하는 날이기에 간수들이 베드로 바로 옆에 자리잡아 있고, 밖에서도 간수들이 그처럼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모습임을 봅니다. 얼마나 삼엄한 경계 속에 붙들려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마음은 어떠한가요?
‘전날에는 간수들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주셨는데, 오늘은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간수들이 나를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나를 건져주시겠나? 이제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나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한밤중에 천사가 베드로에게 와서 한 말을 성서는 다섯 가지로 기록하셨습니다.






옆구리를 쳤다. 띠를 띠라. 신을 신으라. 겉옷을 입으라. 따라오너라.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냥 깨워서 밖으로 나갈 것이니 준비해라고만 해도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곳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천사가 나를 따라오라 하는 그 부름을 듣고 베드로가 나아갈 때, 첫째와 둘째 문이 열리고 간수들이 있었지만 아무 상관없이 나갔습니다.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깥에 나가서 천사는 거기까지 인도한 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야 말았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라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짤막한 내용 속에서 베드로가 얼마나 깊이 평안하게 잠들었는가를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잠에 가득 취해 있었기 때문에 옆구리를 쳐야 일어날 정도였고요, 띠를 매라고 해야 맬 수 있을 정도였고요, 신발을 신으라고 해야 신을 정도였고요, 겉옷을 입으라고 해야 입을 정도였고요, 따라오라고 해야 따라갔다는 것은 아직 머리가 제대로 깨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온통 깊은 잠에 빠져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잠결에 많이 취해 있었는가 하면 “천사의 하는 것을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 아닙니다.
“주님은 천국에 계셔도 저는 주님 의지하고 삽니다. 저는 보좌의 주님을 그대로 믿습니다. 주님! 나의 삶은 주님 손안에 있습니다. 지금 이들이 나를 가두어 둔다 해도 아닙니다. 주님! 보좌의 주님은 내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온전한 구주이십니다.”라는 마음으로 있는 베드로를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짧은 내용이지만 베드로가 보좌의 주님을 얼마나 제대로 믿고 있는가를 표현해 줍니다.

피곤하여 그냥 지쳐 쓰러져 있었던 것 아닙니다. 겉옷도 벗어놓고 허리띠도 풀었고 신발도 벗었고 그곳에서 그가 취한 자세는 잔다고 잔 것입니다. 잠이 안 온 것 아닙니다. 시편 127편에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셨듯이 잠을 주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 뒤에는 애굽 군대가 자기들이 볼 수 있는 눈 안에 들어왔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서서 주님을 바라볼 때, 어느덧 마음에 두려움은 사라지고 조용한 평강이 영혼에 채워져 왔었을 줄 압니다.

만약 베드로가 너무 두려워 밤새도록 떨었다면 다음날 일어날 기운도 없고 걸어갈 기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 품속에 있는 아기같이 참으로 잘 잤고 평안했고 넉넉했고 영혼에 힘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30장에서 지치고 피곤하여 브솔 시냇가에 남아있던 이백 명도, 이제 아말렉의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은밀히 숨어 있는 사백 명도, 주님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이런 새힘을 얻었고 주님 의지하여 나름대로 평안한 쉼을 가진 줄 압니다.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이 세상이 얼마나 염려스럽고, 어떠한지는 제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보좌의 주님을 이 땅에 사는 유일한 근거로 안다면, 누가복음 21장 말씀처럼 이 세상 염려에 치우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평안해야 합니다.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 베드로의 걸음은 자기 안에 이끄시는 주님을 따라 정신 차리고 움직인 줄 압니다. 기도하는 마가의 어머니의 집으로 먼저 갔었고, 그들에게 그의 모습을 보이고 난 이후에 어디론가 주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조용히 피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때는 세상의 그런 여건 속에서도 편히 잘 수 있습니다. 세상은 안심하고 있을 곳이 아니라, 주님과의 은밀 속에서 내 주님과 함께 걸어가고 내 주님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12장을 통해서 오늘도 보좌의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안식을 주실 수 있음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주어진 환경이 참으로 어려워도 이 안식 속에서 평안히 잠들 수 있는 행복한 여러분 되시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또 자유 속에서도 주님과의 은밀 속에서 내 주님과 함께 깨어있는 걸음을 걷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원하여 봅니다.
지금 이 때에 말입니다!

주 날개 그늘 아래

오 사무엘 집사님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눅 8:43~44)

12년이나 혈루증으로 고통 받은 여인은 의원들의 치료를 기대하였으나 온 가산을 쏟아 부어도 고침 받지 못했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구하고자 길 가실 때,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를 헤집고 들어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습니다.

‘이 여인은 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고, 고침 받으리라는 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을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wings)을 발하리니”(말 4:2)

‘치료하는 광선’을 영어 성서에는 ‘wings’로 기록되었는데요, 날개라고 번역해도 무방할 것이라 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날개 곧 옷자락만 잡아도 치료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진 여인이 손을 대자마자 즉시 혈루증은 그쳤고, 수많은 무리들의 부딪힘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치료의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시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꾸짖지 않으셨고 오히려 믿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여인의 믿음은 무엇이었고 또 어떤 것을 확신했던 것일까요?
의로운 해이신 예수님이 메시아시라는 것!
생명이신 예수님만 치료해 주실 것이라는 것!
치료의 날개를 가지신
주님만 능력을 베푸실 것이라는 믿음!
주님 날개 그늘 아래에서만
힘과 쉼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이 여인이 그 믿음으로 육적 몸의 회복과 주님 날개 그늘 아래서의 평안을 보장받을 수 있었듯이 나 또한 주님의 자비와 권능을 힘입어 온 영과 혼과 육의 온전한 회복과 주님 날개 그늘 밑에서 참 평안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주님!

홍 유 미 집사님

누가복음 18장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와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면서
가슴을 치던 세리처럼
주님의 긍휼만을 바랄 뿐입니다.

겉모습은 신앙생활을 한다지만,
실상은 내게 속하여 멀리멀리 떠내려가면서
그것도 모르고 있던 자에게
주님은 다시 찾아와 주셨고 …
“네 속에서 일어나
부활하신 예수님 안으로 건너오라.”고
“그 주님 안에 서라.”고
거듭거듭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 주님 안에 믿음으로 서니까
정말 주님이 가까웠고
주님 사랑함이 사실이 되었고
실제로 주님의 세미하신 인도하심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귀하신 주님!
저 같은 자에게도 주님 자신을 허락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바라옵기는 부르실 그 날까지
주님께 속하여 주님만 모시고
주님만을 따라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께서 아무 말 없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귀한 교훈 세 가지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주목하면 주목할수록 성령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주실 줄 압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짤막한 세 마디만 인용해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이란 우리의 삶을 살아갈 때, 짧은 시간 속에서 우리가 지치지 아니하고 지혜롭게 유익을 남기는 생생한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조금만 지혜롭지 못해도 피곤함을 느끼기 시작하고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값진 삶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교훈을 조금만 바르게 적용해 본다면 우리의 하루하루, 시간시간은 참으로 의미 있고 값진 기회가 될 줄 압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주님과 나 사이에 안식 속에서의 여유가 없다면, 가치 있는 삶을 살지 못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사야 30장 15절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라는 말씀은 쉼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얻을 것이요” 이는 영혼의 구원입니다. 물론 주어진 이런저런 것에서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 주시겠지요. 그리고 잠잠하고 신뢰하면 힘을 얻는답니다. 그다음 18절에서는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의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기 전에도 목자이신 주님 안에 속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그 은혜 속에 젖어있는 행복한 양으로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준비되고 행복한 양이 아니라면, 목자가 돌아와 가자고 할 때 비틀거리며 피곤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30장 15절처럼 준비되어 있다면 목자의 인도하시는 그 음성이 올 때, 얼마나 생기있고 행복한 마음으로 목자의 그 부르심에 응할 수 있을까요!

조용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만약 주님께서 오늘 갑자기 부르셔도 생기 있는 모습으로, 근심 없이 자유롭고 힘 있는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 나설 수 있으십니까? 그 음성을 듣고 난 이후에 준비한다면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마음이 준비되어 있다면 벌써 영혼 속에 놀라운 은총이 참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골로새서 3장 15절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고 있답니다.
‘아, 평안하구나.’ 하면서 내 생각이 이런저런 것에 많이 이끌려 간다면, 골로새서 3장 18절 이하에 나오는 우리의 주어진 환경과 여건 속에서 유익되고 충실한 삶을 살기는 불가능합니다. 생각이 나누어지고 어지러운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골로새서 3장 15절 말씀처럼 내 영혼이 주의 평강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언니가 이런저런 일로 불러도 내가 요동치 않고 주님의 발 앞에 앉아있는 베다니 촌의 마리아처럼 평강 속에 예수님을 인식하고 주님 향해 정돈된 마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느덧 주의 말씀으로 풍성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다고 말하면서 성경 문자를 말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다는 말씀은 시편 139편이나 시편 40편의 다윗이 말하는 대로 말한다면, 바로 놀라운 은혜요 보화인 것입니다. 내 영혼이 은혜로 흠뻑 젖어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하고 싶어 하는 이런 영혼이 되어 있다면, 집안의 일로 보냄을 받든지, 아니면 바깥의 일로 보냄을 받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유익된 생활을 살기가 아주 쉽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제대로 준비하는 것은 굉장히 귀중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다면 벌써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요?”라고 하는 마음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어야 유익된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번거롭고 복잡하다면 절대 유익을 끼치는 사람 못됩니다. 사람은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주님께 매임이 철저해야만 영혼이 정돈 되고 안식이 있어서 참된 유익을 끼치는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잠시 우리 예수님의 발자취 속에서 조금만 헤아려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마가복음 4장에서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그 짧은 시간에 ‘바다가 어떻고, 갈릴리가 아름답다.’는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배 고물에서 베개 베고 주무셨음을 읽게 됩니다.

배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다는 것은 실제로 주무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피곤한 것이 아니라 다음 섬김을 위하여 짧은 시간 준비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가르칠 것도 많이 있으셨겠지만 우선 아버지 안에서 이 짧은 시간, 안식을 취하여 두는 준비를 하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 생활 속에 적용 안 되십니까?
정말 적용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먼 길을 심방 다녀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해 있다면 그 먼 길 다녀왔을 때 피곤해 있겠지만, 주님을 묵상하며 때론 주님과 함께 잠깐잠깐 쉼을 가진다면,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어두운 시간에 집으로 돌아온다 할지라도, 생생하게 돌아올 줄 압니다.
주님을 위한 이 좋은 준비!

오늘 생활 속에 근무지에서 어떻게 잘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6장에서 기도 마치고 나오실 때, “이제는 자고 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준비가 되면 예수님 바라보는 가운데서 영혼의 쉼을 갖는 자세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건이 눈을 붙여 조용한 쉼을 갖지 못할지라도 내 영혼은 쉼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배에서 ‘이물’이라함은 배 앞쪽이고요, ‘고물’은 배 뒤쪽입니다. 아마도 배에서 누울만한 장소는 고물일 것입니다. 이물에서는 좁아서 쉬지 못하겠지만, 고물의 그 조그마한 여유 공간 속에서 조용히 아버지를 의지하며 쉬셨던 이 자세!

우리가 이런 자세를 취하여 보는 것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그만 배인데 얼마나 좁겠습니까?
그런데 그 조그만 공간인 고물에 누워 깊이 잠드셨던 주님. 정말 아버지 안에서 푹 주무신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에 익숙한 그 제자들이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라고 할 정도로 배에 물이 가득 들어와도 주님은 주무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 속에서의 쉼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자세를 생활 속에서 익혀 본다면 천성 가는 길에 크게 유익되지 않을까요? 아니 오늘 길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내일 길에서 말입니다.

두 번째로, 마가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서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앞서 가시고 제자들이 주님을 따라갈 때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약 20~30미터 아니면 조금 더 거리가 있든지 그 정도였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을 때 저희는 잠잠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다투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많이 있겠지만 예수님의 이 귀하신 모습을 힘입고 배우고 싶습니다.

그들은 지금 분명히 주님을 따라오고 있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길에서 다투고 있었을 때 예수님은 분명히 아시면서도 관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때 주님은 앞서 가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과 말없이 끊임없는 사귐 속에 길가셨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일일이 관계를 많이 하는 것은 좋은 일 아닙니다. 내 주님 모시고 조용히 앞서가다가 때가 되어 그들을 바로잡고자 할 그때 바로잡아도 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일일이 거기 가 있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한 것 아닙니다. 생각이 온통 이런저런 일과에 묶여있는 사람은 주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을 모신 마음!
주님의 부친 요셉과 주님의 모친 마리아의 신앙생활이 대충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누가복음 2장에서 그들은 주님이 안보여도 하룻길을 길만 가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길 갈 때 아무 생각 없겠습니까? 무엇인가는 생각하며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중심이 주님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의 얼굴빛 가운데서 내 주님을 모시고 주님 주시는 평강 속에서의 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일과에 너무 관계하기보다는 내 주님께 꽉 묶어진 마음일 때, 우리 영혼에 신선함이 늘 있고 주님과 함께 걷는 행복이 있습니다.

제자들도 길에서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라고 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돌아보아야 할 자녀들이나 관계해야 할 일들 속에서 우리가 생각할 꺼리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 한분 가까이 모시고자 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아버지의 독생자로서의 친근함을 유지한 것 같습니다.
우리 이것 배우면 안 될까요?
유익되지 않을까요?
생각이 너무 산만하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교훈이 여러 가지 많이 있겠습니다만, 이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밤이면 감람원이란 산에서 쉬시고, 낮이면 성전에 들어가서 백성들을 가르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1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런 일을 얼마동안 하셨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는 절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아침이면 ‘예수님 또 오셔서 우리에게 그 귀한 말씀 전하여 주실 거야.’하는 마음으로 성전에 나아갔습니다.

서기관들처럼 성경구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생명력이 꽉 차 있어서 듣고 앉아있다 보면 어느덧 영혼에 새로움이 있고, 정말 듣고 싶은 그 주님의 생생한 말씀! 이는 분명 하루만은 아닙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하루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생생한 은혜를 전하기 위한 준비가 무엇이었습니까?
밤이면 예수님은 감람원이란 산에서 쉬셨습니다. 기도하고, 아버지께 가까이 기대면서 쉬셨던 시간인 것 같습니다.
얼마나 좋은 준비인가요?

민수기 17장의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밤에 성소에서의 일입니다.
사무엘이 엘리에게 “저를 부르셨습니까?” 하고 나아갔을 때, 그 거리는 별로 멀지 않다고 봐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무엘은 법궤 곁에 있었고 엘리는 자기 처소에 누워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주님께 기도하며, 주님 내 영혼의 베개 삼고 내 주님 곁에서 쉬는 넉넉한 마음은 다음날 섬김을 위한 참 좋은 준비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벌써 저녁부터 준비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영혼이어야 내일 성전에 가서 설교는 안할지라도 성전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짤막한 세 교훈을 우리가 더듬어 본다면 큰 축복이 될 것 같습니다.

내 주님과의 길

옥 혜 숙 집사님

주님! 주님이시라면
어떤 거친 들도
감사함이고 넉넉함입니다.
높은 산이라도
당신 향한 길이라면
즐거이 오르고 또 오르고 싶습니다.

“매는 다 내가 맞디요.”라고 하신
최권능 목사님의 강한 외침처럼
그 무엇에도 놓칠 수 없는
내 주님과의 길.

주님!
저도 당신의 사랑에 붙들린 자로
당신께 속해 따를 수만 있다면
보이지 않는 작은 자의 길일지라도
내 주님 위하여 기쁨 남기는 자로
잘 살아보고 싶습니다.

주님!
이 복된 길로 이끄심이 감사하고
갇힘 속에서도
견고히 주님 위해 살아가셨던
앞서가신 그분들처럼,
오늘 내 주님 모신 증인으로
주님 향하여 신실히 서 있게 하옵소서.

그 사랑에 힘입어

민 소 애 자매님

주님!
오늘도 주님 얼굴빛 구하고자
주님 발 앞에 엎드립니다.
그 시간 잠잠히 임해오시는
그 사랑에 힘입어 하루를 지나갑니다.

비록 좌우에 물 벽이 서 있고
바로의 군대가 뒤쫓는 길이라 할지라도
밤새 강한 동풍으로 말리시어
내 발걸음만은 가볍게 지키시는
그 사랑에 힘입어서 하루를 지나갑니다.

습하고 어두운 공기와 같은
두려움의 허상이 잠시 나를 감쌀지라도
‘주님이 아신다!’라는 …
강한 빛이 다가오면
어두움은 물러가고
내가 걸어가야 할 하룻길이 보입니다.

주님!
주님의 얼굴빛이 제게 비추일 때
오늘 나의 얼굴이 생기고 이름이 생깁니다.
비록 검은 나의 모습이 밝히 보여
아프기도 하지만
고치고 싸매주시는 그 사랑의 빛 안에
오늘도 거하고 싶습니다.

내 주님과의 살아있는 만남

에스겔 1장에는 그 엄청난 하나님의 영광이 보입니다. 에스겔 3장에서도 에스겔이 1장에서 보았던 그 영광을 보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일어나 들로 나아가라
내가 거기서 너와 말하리라”
여러분! 만남은 ‘말’을 듣기까지 가야 합니다. 보는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 살아있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에스겔 3장에서 “내가 너를 파숫군으로 세웠다”고 하신다면, 여기서 ‘말’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열왕기상 21장에서 보이지 않던 엘리야가 나타나 아합 왕을 향하여 하는 말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라고 했습니다.
이는 파숫군 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지금 살아있는 말인 것입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이런 살아있는 말이 없다면 무슨 파숫군이라 하겠습니까? 잠자는 말만 할 것입니다.

이사야 56장 뒷부분을 보면 몰각한 목자들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귀중한 직분은 있는 것 같아 보여도,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주님께 대해서 전혀 깨어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때론 책망할 수도 있고, 때론 주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해 볼 수도 있을 줄 압니다. 그 앞부분을 보면 성산으로 이끌려 가서 주님과의 깨어 있는 참된 사귐이 있는 것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파숫군이란 말씀의 의미를 주님께서 에스겔 33장에도 에스겔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에스겔 1장이나 3장에서 보였던 영광의 흔적을 에스겔 33장에서는 못 봅니다. 그러나 에스겔 33장의 귀중한 것은 의인되었던 사람이 악인으로 추락할 수 있고요, 그릇된 삶을 살았던 이도 제대로 준비만 한다면 의인으로 값진 삶을 살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엮어서 말씀한다면, 내가 그 영광의 모습은 보지 못한다 해도 주님께 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속하지 않고 어떻게 의롭게 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곧 내가 주님을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에스겔 1장이나 3장의 생활을 날마다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깨어서 주님께 속하여 믿음에 설 수는 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을 갖다보면 우리는 믿음에 선다는 정도가 아니고 살아계신 주님께 사로잡히는, 주님을 옷 입는다는 말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쯤 되면 누가 뭐라 해도 우리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날마다 있어야 할 일입니다.

어제까지 의롭게 살았던 이들이라도 오늘 새롭게 깨어 믿음에 서고, 은혜의 보좌 앞에서 흡족히 젖을 만큼 그 이슬을 내 옷처럼 입을 때, 주님을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세가 되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의롭게 살 수 있겠습니까?

버둥대고 비틀거리기 쉬운 자아가 생생하게 비춰올 때 우리는 어둠과 죄악의 사람으로 드러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에스겔 33장의 이 놀라운 의인의 삶을 살도록 주님은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원하십니다. 지나간 생활 말고요, 어제 생활 말고요, 오늘 내가 이 의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주님으로 다가와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거기서 너와 말하리라”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저 사람 죽는다. 저 사람 망한다.”라는 이런 말씀만 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그의 사랑에 젖게 만드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는 내 영혼에 정말 필요한 젖과 같고 포도주 같습니다. 내 영혼의 기름진 양식도 되고 참된 기쁨도 됩니다. 이것 없이 기름부음이 와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이사야 55장에도 젖과 포도주를 사라는 말씀이 먼저 있지 않던가요? 그 다음에 기름진 것을 취하지 않던가요?
내 주님의 은혜에 흠뻑 젖어있는 우리!
내 주님으로 인하여 내 영혼이 배부르고 만족하고, 내 주님으로 인하여 내 영혼이 기쁘고 행복한, 그곳에서 주님 기쁘시게 하고자 할 때 주님의 뜻이라 할 수 있는 기름진 의미들이 우리에게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에스겔 33장이 의인과 악인에 관한 말씀이라면, 34장은 좋은 꼴 맑은 물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상한 것은 우리가 주님께 속하고 주님을 옷 입을 때는 이 세상에서 더 필요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 주시는 살아있는 말씀, 정말 진실된 말씀, 참된 말씀인 좋은꼴 맑은 물만 있으면 우리는 다 된 것 같고 행복한 것 같습니다.

양에게 목자가 있고, 목자가 주신 좋은 꼴 맑은 물만 있으면 너무 행복한 것 아니겠습니까?

에스겔 33장은 목자이신 주님께 연합하여 묶어진 것입니다.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우리가 그 주님께 속하지 않으면 좋은 꼴 맑은 물을 짓밟아버린답니다. 그것을 경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주님을 향하여 늘 새로운 사귐이 있어서 내 주님께 깨어 믿음으로 속하여 그 주님을 옷 입고, 주님 주시는 좋은 꼴 맑은 물로 행복해 하며 놀라운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주님 주시는 그 말씀은 요한복음 13장의 발을 내밀라 내가 씻어 주리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장에서 좀 더 나아가다 보면, 그 주님은 내 믿음이 되고 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는 말씀도 있습니다. 제가 차곡차곡 말씀할 수 없어 띄엄띄엄 말씀드립니다만, 요한복음 15장에서는 그 주님 안에서 살아가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명하심을 따라 섬겨볼 수 있음도 말씀해 주십니다.

요한복음 13장의 발을 내밀라 그러면 내가 씻어주리라는 말씀과 14장의 내가 길과 진리와 생명이니 나를 믿고 따르라는 말씀과 15장의 예수님 안에서 삶이 정비 되어서 주님 사랑하고자 간절한 마음을 품을 때 명해 주시므로 내가 순종해 보는, 이와 같은 말씀은 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에스겔 3장의 “거기서 내가 네게 말하리라”는 말씀을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씻어주시는 말씀도 되고요,
새롭게 해주시는 말씀도 되고요, 내가 속하고 따라갈 수 있는 주님으로 보이는 말씀도 되고요, 온 마음으로 섬길 수 있는 주의 명령도 그 말씀 속에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내가 네게 말하리라”
우리가 그 조그만 빈들에서 내 주님을 가까이하므로 주님의 은혜가 늘 새로워서, 씻어주시는 말씀을 주시면 얼마나 고맙습니까! 주님이 새로우실 테니까요!
내게 의지가 되고 내가 따라갈 수 있는 빛으로 임해오는 주의 말씀은 얼마나 고맙습니까!

또 한편 그 주님과 나의 관계가 사랑스럽게 묶어졌을 때 나에게 명령하시는 그 명령은 무겁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기쁨으로 따르며 온 마음으로 섬겨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거기서 너와 말하리라”
단순한 말로 생각지 말고 우리에게 해답이 된다고 생각하시면 틀림없겠습니다. 주님과 여러분의 넉넉한 빈들에서의 시간이 늘 새롭고, 늘 복되시기를 원합니다.

무덤가에서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절이라 할 수 있는 주일 새벽, 이른 새벽 무덤가에 왔지만 그 무덤에 막힌 돌이 없는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와서 그들이 살피고 돌아가다 보니, 이제 날이 좀 밝아졌을 시간일 것 같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곳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짊어지고 가실 때, 갈릴리에서 온 많은 여인들이 가슴 치며 우는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정말 기가 막혀서 운다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주님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장사지내고 그 무덤을 향하여 앉아 있던 그들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망연자실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덤에 돌이 없는 것을 보고 놀랜 마음으로 쫓아갔을 그때는 울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 베드로와 요한은 돌아가 버리고 막달라 마리아는 빈 무덤가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잠시 주의해 볼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무덤과는 그리 멀지 않는, 막달라 마리아가 달려가서 소식을 전한 그들이 있던 예루살렘의 그곳.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셔서 “나다.”라고 하실 수 있지 않으셨을까요? 그런데 주님께서 맨 먼저 취하신 자세는 그것이 아니셨습니다.

무덤가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주셨고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소식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무덤가에서 만난 이 만남을 주님께서 귀하게 보시는 것 같습니다. 의미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는 것 같습니다. 이 막달라 마리아의 만남에 우리가 깊은 관심 가져보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식사하시고 난 이후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때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고 사랑하였던 그들인데도 주님은 구별된 질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것은 분명히 구별이 있습니다.
우리가 눈여겨보아도 베드로보다 요한이 주님을 먼저 보았지만 물 위로 먼저 뛰어 내린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그 마음!
자기도 잊어버리고!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하는 잠자는 이들은 ‘내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는데 어떻게 달려가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베드로는 그것도 잊어버렸습니다. 주님은 그 점을 귀하게 보아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때 베드로에게 물으신 그 물음이나, 예수님 때문에 슬퍼서 울며 다른 곳에도 가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직접 가셔서 말씀하셔도 될 텐데 막달라 마리아를 보내어 소식을 전하게 하시는 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교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만남”

예레미야 29장 7절에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라고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것 아닙니까?
예레미야 29장 12절에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이것은 성읍의 문제가 아니고 개인의 문제인데도 부르짖는다면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성읍의 문제도 크지만 나만이 겪는 어려움은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강한 내용은 예레미야 29장 13절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앞에서 너희들이 사는 성읍을 위해서 전심으로 기도하라는 말씀 없습니다. 신앙이 그렇게 뛰어난 사람들도 아니지만 그들이 구한다면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자기만이 겪는 어려움이 있을 때 부르짖는다면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과의 만남은 참 귀중합니다.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이라는 말씀은 반복해서 찾고 또 찾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search”, “seek”라는 말입니다.
아마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은 알아차릴 것입니다. 얼마나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지요! 추구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렬한지요! 그것도 남김 없는 전 마음으로!
예수님의 부친과 모친이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을 때 삼일 동안 그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신앙은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무엘상 10장의 라헬의 무덤에서 집나간 암나귀를 찾았다는 말씀에서 ‘무덤에서’는 아주 중요한 낱말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 바울 선생님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나를 주님 안에서 찾는다는 말씀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서 우는 눈물은 내일이 없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이 부활하신다는 것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게는 주님밖에 없습니다.’라고 하는 이 깊은 중심을 주님은 귀하게 보신 것 아닐까요?
그리고 마리아가 형제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도록 하시는 것은 ‘너희도 이런 정도로 나를 찾는 자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주님의 마음 아닐까요?

마가복음 14장에서 삼백 데나리온의 그 향유를 하나도 아깝지 않게 주님께 쏟아부어버린 여인이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그 여인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였는지에 대해서 주님은 아십니다.
“저가 힘을 다하여” 이는 그가 부요한 가운데 쏟은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삼백 데나리온이 아깝게 보였지만, 전 마음으로 사랑하고 사랑해 온 그 여인에게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하나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랑!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행한 일도 이야기해서 기념하라고 하실 만큼, 이런 사랑이 정상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슬퍼하며 울고 있는 제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렇지만 무덤가에서 울던 그 마리아의 눈물을 더 귀하게 보시는 것 같습니다. 성서는 주님 추구하는 것이 가볍지 않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갈릴리의 그 산을 갈 때, 부활하신 주님과 같이 걸어가면 안 될까요? 삼일 길 되는 그 먼 길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저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제자들이 삼일 길 되는 그 길을 삼일 동안 간 것 아닙니다. 정말 주님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가는 그들은 피곤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 걸음 속에 주님은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산에 갔을 때는 주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주님을 가까이 찾고 있는가를 보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주님을 찾는 마음은 어떠하신지요?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 아닙니까? 누가복음 12장에서 주님 오시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다고 앉아 있다면 주님의 종이 아닙니다. 주님의 종은 서서 기다린답니다.
주님을 향하여 찾는 이 철저한 마음!
깊이 있게 되새겨 보는 것 참 필요합니다.

엘리야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지금 만나고, 지금 모시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지금 주님과의 만남은 추구하지 않으면서 이런저런 주님을 위한 일은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이렇게 만난다면,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 올라간다하라”는 이 엄청난 말씀처럼 살아계신 주님 올라가시면 우리도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어떤 환경과 여건이 와도 우리는 올라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 되어 주십니다. 이것은 주님을 참으로 만나는 이만이 가질 수 있는 엄청난 소식일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소식이 필요합니다.
많은 잔꾀가 섞인 말, 많은 생각들이 함축된 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므로 주님을 만난 이들이 말할 때는 빛이 있고 기름진 은혜가 있습니다.

나에게 둘도 없는 주님을 향해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향해 울고 있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 보이지 않습니다. 꼭 있어야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베드로가 주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자였지만 주님을 볼 때는 바로 겉옷을 두르고 물에 뛰어내렸습니다. 겉옷을 입은 것은 주님을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님께 뛰어든 자세는 지나친 것 아닙니다. 꼭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 향하여 주님을 찾는 이런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 주님은 멀겠습니까? 이런 자에게 이사야 40장 말씀은 늘 생활이 될 줄 압니다. 이렇게 묶어진 마음이라면, 오늘도 나는 주님의 사람이고 주님의 사람인 나에게 주님을 바라보는 것 빼면 아무 것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 주님 바라볼 때, 이웃은 모르고 옆에 같이 있는 형제는 몰라도 내 영혼은 주님을 바라보면서 솟아오르는 마음과 주님과 함께 걷는 마음, 달려가는 마음이 은혜 속에서 능히 가능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 예수님을 만남이 주님 마음에 모자라지 아니하고 주님 마음에 참으로 합한 만남 속에서 예수님을 늘 만나고, 걸어가면서 영광 돌리는 강한 우리가 된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어정쩡한 신앙이 아니라 이런 명료한 신앙생활 되기를 부탁해 봅니다. 조그만 빈들판에서 이런 값진 삶 가지게 되시기를 온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