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29 / 78호
    전선에 부치는 편지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취적리교회 배 명 자 집사님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일까?”라고
    한 번쯤은 고민해 보았던 그때를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이 어려움만 해결해 주시면
    숨은 쉴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어서
    기도로 하나님 앞에 호소했던 그때를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아무것도 아닌 내가 받은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고마워서
    내가 주님을 떠나서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그때를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요?

    긴장감이 감도는 날에도
    마음의 허리띠 느슨하게 풀어놓고
    무심코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작은 날에도
    주님은 잊어버릴 수 없는
    나의 주님으로 만나주신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고 사셔요.

    주님 곁에서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놓쳐버리고 싶지 않은 시간을
    그곳, 빈들에서 마음판에 새겨 가셔요.

    조그만 어려움들 있더라도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잊어버리지 말고
    예수님의 향기 있는 사람으로 살기를
    힘써 가셔요.

    잊어버리지 말고
    놓쳐버리고 후회하지 말고
    오늘, 예수님을 만나셔요.
    예수님을 사랑하셔요.
    아멘. 아멘!
    Chapter I.
    참된 쉼
    김 아 가 권사님
    유난히도 더웠던 올여름.
    이제 그 더위도 지나고 고요한 산속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가 가을임을 느끼게 해 줍니다.
    우리 병사님들! 지난여름 정말 힘드셨죠?
    애써 나라를 지켜주심으로 우리는 평안히 지냈어요. 고개 숙여 고마운 마음 전하고 싶어요.
    그런데 이 무더위만 지나 시원한 가을이 온다면 너무 좋을 것 같았는데… 좋긴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들려오는 흉한 소식들. 나만이 겪는 아픔과 문제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냄. 참 그러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마저 시원케 하며 기쁘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무더운 여름이나 시원한 가을에도 사랑스러운 내 주님 품 안에 기대이고 안길 때만이 우리의 마음은 쉼도 있고 기쁨도 있고 행복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고 하셨지요.
    진정한 쉼! 그리고 자유와 기쁨은 이 세상 어디에서나 그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었고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예수님께로 가야만 얻을 수 있지요.

    우리 병사님들!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으세요?
    ‘내 인생을, 나의 앞길을 지도해 주시고 바른길로 이끌어 주실 분이 내 곁에 계셨으면 참 좋겠다. 때론 바르게 살고 싶은데 왜 나는 곁에 계신 분들과 다투게 되고 미워하고 욕심도 생기고 바르게 살고 싶은데 왜 안 되지?’

    뻔히 ‘이것은 잘못된 길인데…’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이끌려 가고… 참 그래요. 스스로는 안 되셨지요?
    그러나 해답은 그리 멀리 있지는 않아요.
    우리 병사님들이 모르셨던 것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바르게 살 수 없고 방황하는 나를 위하여 나의 선생님으로(요한복음 13:13), 나의 구주로(마태복음 1:21) 내가 참으로 사랑하고 내 인생을 맡기고 살아갈 내 주님, 내 목자로 오신 것이랍니다. 예수님의 갈보리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 주심은 내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못된 나를 처리해 주시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나를 변하여 새사람 되게 해 주시는 놀라운 사랑이셨습니다.

    우리 병사님들의 바른 마음만 있다면!
    ‘예수님! 저는 스스로 바르게 살 수 없어요. 예수님! 저, 그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 저를 받아주세요!’라고 예수님을 지금! 믿기만 하면 된답니다. 돈 없이 값없이 부르신 놀라운 사랑! 우리 지금! 믿음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내 주님으로 영접해 보시지 않으시겠어요?
    놀라운 천국의 기쁨, 천국의 생수, 평안! 넘치실 거예요. 그뿐만 아니에요. 믿는 자에게는 영생도, 천국도 나의 것이 된대요.

    우리 병사님들!
    가던 길 멈추어서 한번 생각해 보시고 결정해 보시지 않겠어요?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님의 품안에 안기시는 한분 한분들 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Chapter II.
    반전 있는 삶
    이 재 흥 집사님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매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띄우셨나이다.”(시편 30:11)

    어느 날 아침 출근하는 길에서 회사에서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즉시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여쭈어봅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에 평강을 주십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회사에 도착해 보니 모든 것이 은혜로 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구원하심입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작은 일, 큰일 만나지만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러한 반전이 있을 수 없음을 느껴봅니다.
    큰 손실을 볼 수 있고 번거로운 일이 발생할 수 있는 일을 주님께서 막아주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은혜로 함께해 주셨다는 마음이 드니 참으로 감사가 됩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주님의 구원으로 반전 있는 일들을 많이 봅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애굽기 14장 13절)

    하나님께 믿음을 두고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다는 갈라져 육지처럼 되고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의 세리의 기도도 그러하고 성경에는 반전 있는 사건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고 주님의 구원입니다. 오늘날 주 예수님께 나아가서 낮아진 빈 마음으로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삶은 주님의 구원함을 힘입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장 12절)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리고 승천하셔서 천국에서 나를 주목하고 계신 주 예수님께 날마다 나아갈 때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Chapter III.
    연단(鍊鍛)
    황 주 훈 집사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기 23:10)

    어느 날 조용한 시골길을 가면서
    군부대 앞을 지날 때
    열에 맞추어 어디론가 이동하는
    군인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주어진 말씀은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

    인내의 시간들 속에 반복 되는
    정해진 일과들…
    불침번 가운데 밤하늘의 별들을 헤아리며
    고향 집 어머님을 그리워하는 시간들 …
    참으로 소중한 시간들이 지나가며
    연단의 과정을 통해
    어느덧 고난에 익숙한 자로
    용감하고 강한 군사로 서게 될 것입니다.

    모든 고통과 시련, 고난을 통해
    다윗의 열쇠가 되시는 주님께
    귀 기울이는 주님의 좋은 군사로
    끝까지 서 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싶습니다. 아멘!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 119:9)
    Chapter IV.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
    곽 육 환 장로님
    사랑하는 형제님!
    세상의 모든 것 부모와 친척과 고토를 떠나 나라의 부름을 받고 지금은 군 생활 속에서 많은 것은 변화되었으리라 봅니다. 육체도 튼튼해지고 생각도 많이 성장한 것을…

    부모님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이제 세상에 나가서는 어떻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도 많으시겠지만, 그 세상과 나의 앉고 일어서는 것뿐 아니라 자고 깨는 조그마한 일들과 큰일까지 우리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운행하신답니다.
    만물을 지으신 만왕의 왕께서 그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셔서, 예수님이 나의 주님 되어 우리를 통치해 주신답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길 속에서 나를 조성하시고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 이 순간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살아가므로 우리의 영혼이 맑아지고 밝아진다면 더 이상 행복한 삶이 있을까요?

    주어진 조그만 시간들 속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착실히 살아간다면, 이 땅에서도 마지막 하늘나라 가서도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보잘것없는 우리 인생이라도 뜻깊은 삶 살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과 함께 힘찬 하루가 되시길 기도드려봅니다.
    Chapter V.
    골리앗을 이긴 다윗처럼
    윤 효 정 장로님
    휴전선 155마일을 연한 철책에서, 또한 바닷가에 크고 작은 파도가 밀려오는 해안 철책에서 매서운 눈초리로 밤잠을 자지 않고 내 조국을 위해 경계에 전념하는 형제님.
    후방 전투부대에서 작전에 성공하기 위해 사격과 기동 전술훈련으로 땀 흘리는 자랑스러운 형제님의 수고가 있기에, 대한민국이 보존되고 후방에서 오늘의 일과에 전념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보고 싶은 형제님!
    성서 사무엘 상 17장에 거인이며 용사인 골리앗을 이긴 목동 다윗이 나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블레셋의 골리앗으로 인하여 위기 속에 있을 때, 목동 다윗은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 속에 깨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싸움에 이긴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 다윗은 블레셋 군대와의 전쟁에서 물맷돌을 던졌을 때, 골리앗의 이마에 박혀 땅에 엎드려져 죽음으로 전쟁에 승리하여 위기의 이스라엘 나라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거인이며 용사인 골리앗을 이긴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능히 할 수 있었고, 승리하였습니다.

    다윗은 작은 일에 신실한 자로 철저히 준비된 자였습니다. 아버지의 양을 돌보는 작은 일을 했지만, 양을 신실하게 돌보았습니다.
    사자와 곰으로부터 양을 지키기 위해 물맷돌로, 맹수가 달려들 때는 맨주먹으로 맹수의 수염을 잡고 쳐 죽이므로 양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습니다.
    목동 다윗은 준비된 자로 골리앗과 싸우는 기회가 왔을 때, 하나님과 함께 넉넉하게 이길 수 있었습니다. 준비된 자에게는 기회가 왔을 때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군이라는 제한된 환경 속에 있을지라도 목동 다윗처럼 예수님을 나의 머리로 모시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깨어 있어 예수님의 인도하심 속에 작은 일에 하루하루 신실한 자로 살아간다면, 형제님의 삶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오듯이 형제님은 예수님 모시고 기회의 주인공으로 예수님의 기쁨이 되는 삶 속에 이기는 자 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9월의 깊은 밤에.
    Chapter VI.
    길은 여기에
    박 은 주 집사님
    후회 없는 진정한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내 생각대로” 아닙니다.
    “내 하고 싶은 대로” 결코 아닙니다.
    이처럼 나 스스로의 날을 살아간 삶의 종국은
    가시나무와 찔레,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일생(一生)이라면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사랑하는 우리 형제님!
    지금도 그 머리에 밤이슬 가득한 채로
    사랑하는 우리 형제님을 기다리시는
    내 구주, 내 주님 되신 예수님께
    지금!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분의 발 앞에 자리 잡아 앉으세요.

    참된 삶은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할 수 있다”는 내 뜻 던져버리고
    예수님을 앙망하며 함께 친근하게 살아갈 때는
    내 모든 곤란 중에 해답 주시는 상담자로,
    나의 길에 선한 목자로 서 주시므로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나의 삶이 된답니다.

    그래서 오늘도
    형제님이 서 계신 거기서
    내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대의 등불로! 소금으로! 향기로!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으로!
    지혜롭고 힘 있는
    이기는 자로서의 강한 삶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Chapter VII.
    전선에 부치는 편지
      유난히도 무더웠던 올 여름도 지나가고 아침과 저녁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선의 가을은 예사롭지 않다지요?
      이제는 그 싸늘함이 어떠하겠습니까?
      때론 한겨울의 추위보다도 더 싸늘하여 그 싸늘함이 우리 몸속에 깊이 파고드는 것을 어르신들은 종종 얘기하곤 하시었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고요, 여러분의 주어진 길에서 진정한 삶의 값진 의미를 가지게 되기를 원합니다.

      성서 예레미야 17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을만한 자기를 가지고 있고, 주어진 환경과 여건 가운데서 짓눌리는 삶을 사는 생활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을 통솔하고 지배하는 여건을 가진 그런 자라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 스스로가 이런 삶을 가지고 있는 내부적인 중심을 얘기할 때, 그는 참으로 마른 땅, 가시덤불 같은 그러한 내 영혼의 마음임을 정확히 말씀하여 주십니다.

      여러 해 전에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지금처럼 여유로움을 느끼지 못할 그때, 저 북구 유럽 노르웨이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는 이상하게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 북구 유럽 노르웨이는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주어진 환경과 여건, 나라의 보살펴주는 돌봄이 넉넉하게 유지되어 있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자살률이 유난히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세계 많은 나라에서 손꼽힐 만큼 괜찮은 여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여건이 그러하고요, 이제는 우리가 외세의 어떠한 짓눌림에 고통 받고 있는 나라는 결코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 있는 이들이 마른 땅 같은, 가시덤불 같은 그러한 영혼을 가졌다고 해서 혹은 어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고 해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깊은 관심을 갖는 그런 나라는 아닙니다. 으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래전부터, 믿을만한 나의 육신과 주어진 환경이 스스로 어찌해 볼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다 해도 내 영혼이 살만하지는 못한 것을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서 이것은 단순하고 메마른 마음, 내 마음이 참으로 자유롭지 못함을 표현했다면 이러한 마음으로 그냥 그대로 삶을 꾸려갈 때, 저 산에 저 들에 저 바다에 있는 그 모든 만물보다도 이런 삶을 사는 우리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부패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오늘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결코 먼 얘기가 아닙니다. 참 가까운 내용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자유롭게 살던 삶에서 벗어나서 제한되고 통제된 삶을 살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지금 여러분의 얼굴은 밝고요, 여러분의 모습은 좀 더 참신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자유를 자기 마음대로 누리는 이들보다 제한되고 묶어진 여러분의 삶이 오히려 더 나음이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정말 여기에서 이처럼 초라하게 사는 삶이 우리 운명일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일까요?

      저는 잠시 하나님의 말씀 마지막 부분에 있는 요한계시록의 앞부분에 나오는 내용을 조금만 말씀해 보고자 합니다. 또 이것은 그냥 얘기가 아니고 정말 사실이기에 한 번 전하여 보고 싶습니다.

      주변을 돌아볼 때 정말 해답 없어 보이는 오늘의 세대임에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말 해답이 없을까요?

      사도행전 1장 말씀에 나오는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

      아마 틀림없을 것입니다.
      옷 모양이나 살아온 삶의 흔적을 본다면 결단코 넉넉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아온 이들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얼마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무덤에 들어가셨던 그 나사렛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문이 온 예루살렘에 파다할 때 그 소식을 들었을 줄 압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천국으로 올라가시므로 지금은 보이지 않으십니다. 하루 이틀 아닌 열흘이 가까워도 보이지 않으시지만, 그분이 남기신 말씀과 그분을 향하여 바라보는 마음 때문에 그들의 얼굴은 시들지 아니했고, 그들의 얼굴은 짓눌려 있지 아니했고, 참된 희망과 자유를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열흘 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들이 가졌던 이 삶의 자세는 무의미한 것일까요?
      종교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글쎄요 한 때의 일일까요? 아닙니다.

      계시록 2장 에베소 교회는 그 보좌의 주님을 사랑하고, 향하고, 기대하는 이런 마음을 실제로 갖지 못하면서 나름대로 신앙생활 한다고 모여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에베소에 있던 성도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교제가 끊어졌다고 말하지 아니하였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정확히 보신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향한 뜨거운 마음의 첫사랑을 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종교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만, 주님과의 사랑의 실질적인 관계는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때는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신 지 한 육십여 년쯤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사실 지금도 저 하늘과 이 땅이 질서 있게 운행되는 것은 하나님의 보좌가 뚜렷하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상하지요. 오늘 해가 지면 내일 아침이 온다는 것을 왜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는지요? 이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올 것을 왜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는지요?

      우리가 조금만 머리 조아리고 생각을 해도 이 우주 속에서 이러한 삶이 유지된다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전능하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 정말 사실입니다.
      그것은 이성적인 머리로 조금만 헤아려 보아도 오늘이 있을 수 없고, 이 밤이 있을 수 없고, 내일이 있을 수 없고, 다가오는 차가운 겨울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혼란과 공허와 짙은 어둠 속에 소멸하여 갈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주어진 환경을 우리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존하여 주신다고 하시는데, 저 사막 가운데 모래땅에 있는 가시덤불같이 마른 우리 영혼이, 참으로 만물 중에 제일 부패해서 보기에 민망하고 차라리 거들떠보기를 원치 않는 이런 마음이 되어버렸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살려두신 의미가 있을까요?

      노아의 홍수는 그냥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찾아보고 찾아볼수록 그 흔적과 발자취는 뚜렷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불바다 된 말씀도 그냥 스쳐 간 이야기가 아닙니다. 흔적을 찾아보고 찾아볼수록 그러한 증거는 더욱더 뚜렷할 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오늘은 왜 우리를 이러한 가운데서 기다려 주시고 참고 계실까요?
      저는 기다려 주시고 계시는 시간임을 압니다. 로마서 1장, 2장이 그러하듯이 성서 베드로 서신에 기록된 말씀이 그러하듯이 우리 하나님께서 지금 하나님 없는 삶을 사는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이라고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명료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뚜렷한 말씀입니다.
      해답이 무엇일까요?
      우리 인생의 해답이 무엇일까요?

      조금 전에 인용한 예레미야 17장 말씀에는 자기를 믿고 그럴듯한 권력을 믿고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그 인생은 그러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의 주님을 내가 의지하고, 내가 가까이하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함께할 수 있는, 내 진정한 구주 내 진정한 주님으로 의지하고 기대할 때는 우리 영혼이 메마른 삶이 아닙니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천국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 속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내면적으로 참된 생명이 흐르고 있는, 아름다움이 있고, 귀중하고 소중한 열매를 맺어가는, 흔들림이 없는, 참으로 겉보다 속이 더 아름답고 축복스러운 이 삶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장의 하늘 보좌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은 너무 뚜렷합니다.
      애매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있는 진정한 내 사랑으로, 내가 인도함을 받고 함께할 분으로 보좌의 주님을 뚜렷하게 바라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이런 말이 우리 영혼 속에 흐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비록 몸은 땅에 있지만, 내가 수많은 문제를 겪지만, 내 구주는 저 보좌에 계시는 주님입니다. 그분은 정말 나를 지켜보십니다. 그분은 정말 나를 아십니다. 그분은 정말 내 삶의 해답이 되십니다.”

      귀하신 여러분!
      오늘도 주어진 임무가 결단코 가볍지 아니하고 여러분의 삶이 제한됨으로 나름대로 묶어진 점이 많아도, 이 가운데서 여러분이 정말 의미 있고 영혼이 참으로 복된 삶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오늘의 우리 삶이 좀 더 자유롭다거나 내게 주어진 여건을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러한 역량에 있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그것은 사망으로 가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부패함으로 가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살만한 땅 노르웨이에서 자살이 그렇게 많았듯이, 오늘 이 땅의 사람들이 무언가 있을 것 같아 보이는 곳에서 무언가 주어진 자유가 있는 것 같아 보여도, 영혼은 지금부터 삼십 년 아니 사십 년 전보다도 더 험악한 내 속사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이때, 우리가 진정한 마음으로 나사렛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내 구주와 내 주님을 이제 내가 요청하고 내가 바라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다가서는 것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요?

      마가복음 13장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어둡고 죄악 많은 세상이라도 아직 기다려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삶으로 돌아올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저 보좌에 계신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던 그 세대에서도 그러하셨던 것처럼 똑같은 마음으로 이 세대에도 그러하십니다. 오늘의 이 세대에도 유일한 나의 구주와 나의 주님은 나사렛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그 주님을 향하여 다가서고자 한다면 주님께서 가로막지 않으실 것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 아니다. 내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마태복음 9장 말씀처럼 주님은 여러분을 기쁨으로 맞이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과일나무를 심고 삼 년이 지나서 열매 맺는 것을 보면 농부는 결정합니다.
      “이 나무는 안 되겠구나.”
      “이 나무는 좀 더 돌보고 정성을 기울이면 보람된 결실이 있겠구나.”

      여러분은 적어도 이 땅에서 이십여 년의 삶을 살아오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 삶의 어떠함을 보면서도, 나무 자체에 관해서 근본적인 마음을 갖지 아니한 채 그냥 그대로 산다면, 삶의 마지막 매듭짓는 순간에도 똑같은 말을 하고야 말 것입니다.

      ‘나란 이 나무는 정말 안 되는 나무였는데…’라고 할 것입니다. 지혜롭고 참된 마음을 가진 이는 ‘안 되겠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스스로 이런저런 것으로는 해답 없음을 압니다.

      우리에게 참된 구주가 계십니다. 아니 전선에 계신 여러분 한분 한분의 구주이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진정한 삶을 살아주실, 여러분이 인생을 맡기고 의지하고 기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여러분의 진정한 주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한 분입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이십니다.

      주님께서 이 세대에 오셨더라도 갈보리 십자가의 의미는 분명히 되새겨질 것이고요, 주님은 우리 때문에 무덤으로 가시겠고요, 우리에게 진정한 삶을 주시기 위해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이 세대도 그런 의미를 우리에게 나타내 주실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있는 그들에게 저 보좌의 계신 주님은 정말 힘이었습니다.
      먼 분이 아니었습니다.
      무시하고 살아갈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듯이 오늘도 영광스러운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정말 귀중한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한마음으로 주님을 향하여 다가서 보는 것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소중할까요?
      삶은 대단히 귀중한 것입니다!

      여러분!
      경상북도의 문경이란 곳을 아실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1년에 한 번씩 문경 도시 전체가 마음을 묶어서 드리는 제사가 있는 줄 압니다. 이 땅에서 삼십 세의 나이로 대령이란 계급을 가지시고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죽음으로 맞이한 그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장군으로 승진한 줄 압니다.

      이제 적군은 밀려오고 어찌할 수 없는 속에서 최후의 방어를 하셨던 그분!
      충실하였습니다. 대령이라면 뒤에 서서 지시만 하고 위험하면 물러가면 될 텐데, 그렇지 않고 현장에 서서 적군과 맞닥뜨려 싸웠던 그분!

      그분 곁에 있었던 분이 그분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을 때, 뒤에 땅바닥에 누우신 모습은 마치 자기의 마지막 자리 잡을 곳을 미리 생각한 것 같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생각한 그대로 그는 이 땅을 떠났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고마우신 분이고, 나라 위해서 목숨을 던진 참 귀하신 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그렇게 이 땅을 떠나가시는 것은 너무 아쉽게 생각이 됩니다.

      오래전 1970년대 초였을 것입니다.
      제가 어느 큰 교회에 예배드리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해병대 대령으로 계신 분이 오셔서 간증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6.25 사변 때 그의 계급은 소위였고 그가 처한 위치는 최전방이었다고 합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은 후퇴하지 말고 그곳을 사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는 뻔히 알았습니다.
      그는 지하 벙커에 들어가
      “하나님! 당신 살아계십니까? 날 좀 살려주십시오.”
      “하나님! 당신 살아계십니까? 날 좀 살려주십시오!”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였답니다.

      이 지면을 통하여 많은 내용을 전하지 못합니다만 그분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해병대 대령이라도 그 고마우신 하나님을 생생하게 간증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누가 무어라 해도 저 보좌의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고 여러분의 구주이십니다.
      여러분이 구주가 없어서, 진정 여러분의 마음을 열고 의지하고 사랑하며 의논하고 함께 살아갈 내 생명의 벗이 없어서 이렇게 초라한 삶을 사는 것 절대 아닙니다. 오늘 이 세대에 진정한 구주와 소망은 예수님뿐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일상생활에 매이지도 아니하고 ‘내가 어떻게 오늘 주어진 일과를 꾸려갈까?’라고 염려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좋은 시기.

      여러분!
      그러나 분명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진정한 구주와 내 진정한 주님은 있어야겠다는 것을 분명히 절감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살아오신 삶의 햇수를 본다면 그 점을 헤아리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습니다. 포기한다면 내 장래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는 것은 원자력 발전소로 인함이 아닙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저 태양이 절대 무질서하지 아니하고 너무 질서정연합니다.
      우리가 정밀하다고 하는 KTX나 비행기보다도 더 정확하게 우리 삶을 운영해 주시는 하나님! 그분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여러분 한분 한분의 구주와 주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요한복음 1장 12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여러분은 무의미하게 살다가 쓰러져 갈 그런 일년초와 같은 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하셔서라도 여러분을 죄악 가운데서 건지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을, 살아계신 주님을 여러분의 구주와 주님으로 허락해 주시어서 그 주님의 돌보심과 은혜로 여러분의 삶이 무너지지 아니하고 서 가시길 원하시는 귀하신 분이십니다.
      오늘도 보좌의 주님은 여러분을 아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을 향하십니다.


      이 중요한 시기!
      세상의 어떠한 문이 여러분에게 열려있다는 것보다도 더 귀중한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이 조용하게 전선에 서 계시면서, 캄캄해 오는 밤 싸늘해 오는 이 날씨 가운데서 그분을 내 구주, 내 주님으로 내 마음의 진정한 벗으로 영접하는 놀라움이 있어서, 여러분의 내일이 새롭고 기대감이 있는, 그런 값진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그러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진정한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Chapter VIII.
          유난히도 무더웠던 올 여름도 지나가고 아침과 저녁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선의 가을은 예사롭지 않다지요?
          이제는 그 싸늘함이 어떠하겠습니까?
          때론 한겨울의 추위보다도 더 싸늘하여 그 싸늘함이 우리 몸속에 깊이 파고드는 것을 어르신들은 종종 얘기하곤 하시었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고요, 여러분의 주어진 길에서 진정한 삶의 값진 의미를 가지게 되기를 원합니다.

          성서 예레미야 17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을만한 자기를 가지고 있고, 주어진 환경과 여건 가운데서 짓눌리는 삶을 사는 생활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을 통솔하고 지배하는 여건을 가진 그런 자라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 스스로가 이런 삶을 가지고 있는 내부적인 중심을 얘기할 때, 그는 참으로 마른 땅, 가시덤불 같은 그러한 내 영혼의 마음임을 정확히 말씀하여 주십니다.

          여러 해 전에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지금처럼 여유로움을 느끼지 못할 그때, 저 북구 유럽 노르웨이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는 이상하게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 북구 유럽 노르웨이는 살기 좋은 나라입니다. 주어진 환경과 여건, 나라의 보살펴주는 돌봄이 넉넉하게 유지되어 있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자살률이 유난히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세계 많은 나라에서 손꼽힐 만큼 괜찮은 여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여건이 그러하고요, 이제는 우리가 외세의 어떠한 짓눌림에 고통 받고 있는 나라는 결코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 있는 이들이 마른 땅 같은, 가시덤불 같은 그러한 영혼을 가졌다고 해서 혹은 어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고 해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깊은 관심을 갖는 그런 나라는 아닙니다. 으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래전부터, 믿을만한 나의 육신과 주어진 환경이 스스로 어찌해 볼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다 해도 내 영혼이 살만하지는 못한 것을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서 이것은 단순하고 메마른 마음, 내 마음이 참으로 자유롭지 못함을 표현했다면 이러한 마음으로 그냥 그대로 삶을 꾸려갈 때, 저 산에 저 들에 저 바다에 있는 그 모든 만물보다도 이런 삶을 사는 우리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부패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오늘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결코 먼 얘기가 아닙니다. 참 가까운 내용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자유롭게 살던 삶에서 벗어나서 제한되고 통제된 삶을 살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지금 여러분의 얼굴은 밝고요, 여러분의 모습은 좀 더 참신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자유를 자기 마음대로 누리는 이들보다 제한되고 묶어진 여러분의 삶이 오히려 더 나음이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정말 여기에서 이처럼 초라하게 사는 삶이 우리 운명일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일까요?

          저는 잠시 하나님의 말씀 마지막 부분에 있는 요한계시록의 앞부분에 나오는 내용을 조금만 말씀해 보고자 합니다. 또 이것은 그냥 얘기가 아니고 정말 사실이기에 한 번 전하여 보고 싶습니다.

          주변을 돌아볼 때 정말 해답 없어 보이는 오늘의 세대임에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말 해답이 없을까요?

          사도행전 1장 말씀에 나오는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

          아마 틀림없을 것입니다.
          옷 모양이나 살아온 삶의 흔적을 본다면 결단코 넉넉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아온 이들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얼마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무덤에 들어가셨던 그 나사렛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문이 온 예루살렘에 파다할 때 그 소식을 들었을 줄 압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천국으로 올라가시므로 지금은 보이지 않으십니다. 하루 이틀 아닌 열흘이 가까워도 보이지 않으시지만, 그분이 남기신 말씀과 그분을 향하여 바라보는 마음 때문에 그들의 얼굴은 시들지 아니했고, 그들의 얼굴은 짓눌려 있지 아니했고, 참된 희망과 자유를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열흘 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들이 가졌던 이 삶의 자세는 무의미한 것일까요?
          종교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글쎄요 한 때의 일일까요? 아닙니다.

          계시록 2장 에베소 교회는 그 보좌의 주님을 사랑하고, 향하고, 기대하는 이런 마음을 실제로 갖지 못하면서 나름대로 신앙생활 한다고 모여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에베소에 있던 성도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교제가 끊어졌다고 말하지 아니하였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정확히 보신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향한 뜨거운 마음의 첫사랑을 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종교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만, 주님과의 사랑의 실질적인 관계는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때는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신 지 한 육십여 년쯤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사실 지금도 저 하늘과 이 땅이 질서 있게 운행되는 것은 하나님의 보좌가 뚜렷하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상하지요. 오늘 해가 지면 내일 아침이 온다는 것을 왜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는지요? 이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올 것을 왜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는지요?

          우리가 조금만 머리 조아리고 생각을 해도 이 우주 속에서 이러한 삶이 유지된다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전능하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 정말 사실입니다.
          그것은 이성적인 머리로 조금만 헤아려 보아도 오늘이 있을 수 없고, 이 밤이 있을 수 없고, 내일이 있을 수 없고, 다가오는 차가운 겨울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혼란과 공허와 짙은 어둠 속에 소멸하여 갈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주어진 환경을 우리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존하여 주신다고 하시는데, 저 사막 가운데 모래땅에 있는 가시덤불같이 마른 우리 영혼이, 참으로 만물 중에 제일 부패해서 보기에 민망하고 차라리 거들떠보기를 원치 않는 이런 마음이 되어버렸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살려두신 의미가 있을까요?

          노아의 홍수는 그냥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찾아보고 찾아볼수록 그 흔적과 발자취는 뚜렷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불바다 된 말씀도 그냥 스쳐 간 이야기가 아닙니다. 흔적을 찾아보고 찾아볼수록 그러한 증거는 더욱더 뚜렷할 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오늘은 왜 우리를 이러한 가운데서 기다려 주시고 참고 계실까요?
          저는 기다려 주시고 계시는 시간임을 압니다. 로마서 1장, 2장이 그러하듯이 성서 베드로 서신에 기록된 말씀이 그러하듯이 우리 하나님께서 지금 하나님 없는 삶을 사는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이라고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명료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뚜렷한 말씀입니다.
          해답이 무엇일까요?
          우리 인생의 해답이 무엇일까요?

          조금 전에 인용한 예레미야 17장 말씀에는 자기를 믿고 그럴듯한 권력을 믿고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그 인생은 그러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의 주님을 내가 의지하고, 내가 가까이하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함께할 수 있는, 내 진정한 구주 내 진정한 주님으로 의지하고 기대할 때는 우리 영혼이 메마른 삶이 아닙니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천국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 속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내면적으로 참된 생명이 흐르고 있는, 아름다움이 있고, 귀중하고 소중한 열매를 맺어가는, 흔들림이 없는, 참으로 겉보다 속이 더 아름답고 축복스러운 이 삶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장의 하늘 보좌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은 너무 뚜렷합니다.
          애매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있는 진정한 내 사랑으로, 내가 인도함을 받고 함께할 분으로 보좌의 주님을 뚜렷하게 바라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이런 말이 우리 영혼 속에 흐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비록 몸은 땅에 있지만, 내가 수많은 문제를 겪지만, 내 구주는 저 보좌에 계시는 주님입니다. 그분은 정말 나를 지켜보십니다. 그분은 정말 나를 아십니다. 그분은 정말 내 삶의 해답이 되십니다.”

          귀하신 여러분!
          오늘도 주어진 임무가 결단코 가볍지 아니하고 여러분의 삶이 제한됨으로 나름대로 묶어진 점이 많아도, 이 가운데서 여러분이 정말 의미 있고 영혼이 참으로 복된 삶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오늘의 우리 삶이 좀 더 자유롭다거나 내게 주어진 여건을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러한 역량에 있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그것은 사망으로 가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부패함으로 가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살만한 땅 노르웨이에서 자살이 그렇게 많았듯이, 오늘 이 땅의 사람들이 무언가 있을 것 같아 보이는 곳에서 무언가 주어진 자유가 있는 것 같아 보여도, 영혼은 지금부터 삼십 년 아니 사십 년 전보다도 더 험악한 내 속사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이때, 우리가 진정한 마음으로 나사렛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내 구주와 내 주님을 이제 내가 요청하고 내가 바라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다가서는 것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요?

          마가복음 13장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어둡고 죄악 많은 세상이라도 아직 기다려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삶으로 돌아올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저 보좌에 계신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던 그 세대에서도 그러하셨던 것처럼 똑같은 마음으로 이 세대에도 그러하십니다. 오늘의 이 세대에도 유일한 나의 구주와 나의 주님은 나사렛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그 주님을 향하여 다가서고자 한다면 주님께서 가로막지 않으실 것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 아니다. 내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마태복음 9장 말씀처럼 주님은 여러분을 기쁨으로 맞이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과일나무를 심고 삼 년이 지나서 열매 맺는 것을 보면 농부는 결정합니다.
          “이 나무는 안 되겠구나.”
          “이 나무는 좀 더 돌보고 정성을 기울이면 보람된 결실이 있겠구나.”

          여러분은 적어도 이 땅에서 이십여 년의 삶을 살아오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 삶의 어떠함을 보면서도, 나무 자체에 관해서 근본적인 마음을 갖지 아니한 채 그냥 그대로 산다면, 삶의 마지막 매듭짓는 순간에도 똑같은 말을 하고야 말 것입니다.

          ‘나란 이 나무는 정말 안 되는 나무였는데…’라고 할 것입니다. 지혜롭고 참된 마음을 가진 이는 ‘안 되겠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스스로 이런저런 것으로는 해답 없음을 압니다.

          우리에게 참된 구주가 계십니다. 아니 전선에 계신 여러분 한분 한분의 구주이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진정한 삶을 살아주실, 여러분이 인생을 맡기고 의지하고 기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여러분의 진정한 주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한 분입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이십니다.

          주님께서 이 세대에 오셨더라도 갈보리 십자가의 의미는 분명히 되새겨질 것이고요, 주님은 우리 때문에 무덤으로 가시겠고요, 우리에게 진정한 삶을 주시기 위해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이 세대도 그런 의미를 우리에게 나타내 주실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있는 그들에게 저 보좌의 계신 주님은 정말 힘이었습니다.
          먼 분이 아니었습니다.
          무시하고 살아갈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듯이 오늘도 영광스러운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정말 귀중한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한마음으로 주님을 향하여 다가서 보는 것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소중할까요?
          삶은 대단히 귀중한 것입니다!

          여러분!
          경상북도의 문경이란 곳을 아실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1년에 한 번씩 문경 도시 전체가 마음을 묶어서 드리는 제사가 있는 줄 압니다. 이 땅에서 삼십 세의 나이로 대령이란 계급을 가지시고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죽음으로 맞이한 그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장군으로 승진한 줄 압니다.

          이제 적군은 밀려오고 어찌할 수 없는 속에서 최후의 방어를 하셨던 그분!
          충실하였습니다. 대령이라면 뒤에 서서 지시만 하고 위험하면 물러가면 될 텐데, 그렇지 않고 현장에 서서 적군과 맞닥뜨려 싸웠던 그분!

          그분 곁에 있었던 분이 그분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을 때, 뒤에 땅바닥에 누우신 모습은 마치 자기의 마지막 자리 잡을 곳을 미리 생각한 것 같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생각한 그대로 그는 이 땅을 떠났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고마우신 분이고, 나라 위해서 목숨을 던진 참 귀하신 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그렇게 이 땅을 떠나가시는 것은 너무 아쉽게 생각이 됩니다.

          오래전 1970년대 초였을 것입니다.
          제가 어느 큰 교회에 예배드리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해병대 대령으로 계신 분이 오셔서 간증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6.25 사변 때 그의 계급은 소위였고 그가 처한 위치는 최전방이었다고 합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은 후퇴하지 말고 그곳을 사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는 뻔히 알았습니다.
          그는 지하 벙커에 들어가
          “하나님! 당신 살아계십니까?
          날 좀 살려주십시오.”
          “하나님! 당신 살아계십니까?
          날 좀 살려주십시오!”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였답니다.

          이 지면을 통하여 많은 내용을 전하지 못합니다만 그분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해병대 대령이라도 그 고마우신 하나님을 생생하게 간증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누가 무어라 해도 저 보좌의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고 여러분의 구주이십니다.
          여러분이 구주가 없어서, 진정 여러분의 마음을 열고 의지하고 사랑하며 의논하고 함께 살아갈 내 생명의 벗이 없어서 이렇게 초라한 삶을 사는 것 절대 아닙니다. 오늘 이 세대에 진정한 구주와 소망은 예수님뿐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일상생활에 매이지도 아니하고 ‘내가 어떻게 오늘 주어진 일과를 꾸려갈까?’라고 염려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좋은 시기.

          여러분!
          그러나 분명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진정한 구주와 내 진정한 주님은 있어야겠다는 것을 분명히 절감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살아오신 삶의 햇수를 본다면 그 점을 헤아리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습니다. 포기한다면 내 장래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는 것은 원자력 발전소로 인함이 아닙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저 태양이 절대 무질서하지 아니하고 너무 질서정연합니다.
          우리가 정밀하다고 하는 KTX나 비행기보다도 더 정확하게 우리 삶을 운영해 주시는 하나님! 그분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여러분 한분 한분의 구주와 주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요한복음 1장 12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여러분은 무의미하게 살다가 쓰러져 갈 그런 일년초와 같은 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하셔서라도 여러분을 죄악 가운데서 건지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을, 살아계신 주님을 여러분의 구주와 주님으로 허락해 주시어서 그 주님의 돌보심과 은혜로 여러분의 삶이 무너지지 아니하고 서 가시길 원하시는 귀하신 분이십니다.
          오늘도 보좌의 주님은 여러분을 아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을 향하십니다.


          이 중요한 시기!
          세상의 어떠한 문이 여러분에게 열려있다는 것보다도 더 귀중한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이 조용하게 전선에 서 계시면서, 캄캄해 오는 밤 싸늘해 오는 이 날씨 가운데서 그분을 내 구주, 내 주님으로 내 마음의 진정한 벗으로 영접하는 놀라움이 있어서, 여러분의 내일이 새롭고 기대감이 있는, 그런 값진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그러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진정한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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