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24 / 77호
    전선에 부치는 편지<조그만 나의 빈들판>
    주님 따르렵니다!
    서 영 진 집사님 (할아버님)
    ※ 다음 글은 얼마 전 '우리들 소식,에 실렸던 서영진 할아버님의 글입니다.

    주님! 오전 일찍 마음을 가다듬고
    ‘어떻게 하면
    주님을 좀 더 가까이 따라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주님 가슴 속에 묻혀 살 수 있을까?’
    생각을 무지 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많이 늦었습니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주님 생각하고
    주님 더 사랑하고
    주님 더 의지하고
    주님 더 따라가고자 합니다.

    내가 주님 마음에 합하게 따라가지 못할 때는
    식구님들이 걱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도해 주시는 식구님들이
    끝까지 저를 밀어주시는 것 알고
    감사가 많이 됩니다.

    주님께서 끝까지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구합니다.
    Chapter I.
        어느 주일 아침에 제가 교회에 와서 이 「우리들 소식」을 읽었을 때 정말 마음이 찡했습니다. 지금 건강은 움직일 수 없는 참으로 그러한 건강임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주님을 향하여 지금 추구하며 애쓰시고 계신 할아버님의 맑고도 아름다운 영혼이었습니다.
        어느 누구가 가만히 있어서 이러한 영혼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께서 "무지 하였습니다."라고 하실 때, '무지'는 '정말 많이'란 뜻인 줄 압니다. 정말 쉼 없는 전투 속에서 지금 주님을 의지하고 가까이 모시고자 하는, 참 좋은 영혼임에 사실인 것 같습니다.
        누가 이것을 감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정말 내 영혼의 수많은 전투를 통해서, 지금 주님의 은혜 속에 가지고 있는 참 아름다운 밭이라고 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지금은 3월입니다.
        제목을 <전선에 부치는 편지>로 할 때가 아닙니다. 사실 전날에 사용하던 대로 <조그만 빈들판>이란 이름으로 소식을 보내어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만 특별히 이 3월에 <전선에 부치는 편지>라는 이름으로 <조그만 빈들판>을 보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달에 글 쓰신 분들은 다 연로하신 분들입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일이 싸워야 될 전쟁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굳이 「전선」이란 낱말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평범한 나의 생활 속에 있는 것 같아도, 나의 영혼이 주님을 의지하고 전투하지 않는다면 가라앉아버리고 쓰러져버리고야 마는 것이 너무 명료한 사실이기에, 우리는 그냥 평범한 「나의 집」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오늘도 내 주님 의지하고 싸우는 「전선」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이 엄청난 전투를 이겨갈 수 있을까요? 우리의 할아버님, 할머님들께서 오래전 다윗이 주어진 환경의 어려움 때문에 나의 구주 나의 주님 되신 주님의 도우심을 요청하고 주님을 강하게 갈망했던 것 못지아니하게, 주님을 갈구하고 기대하지 않는다면, 벌써 두 손 들어 항복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내 주님을 앙망하는 눈길이 별로 힘이 없다면, 그것은 싸우고자 하는 자가 아니라 적군에 포로 되고자 벌써 굴복한 자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영혼에 힘이 없는데 어떻게 감당을 할 수 있나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전투하듯 마지막으로 새 힘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셨던 예수님의 기도. 갈보리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길에서 그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붙드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로 고요하고 평온함 잃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어린양의 그 온유하고 안정된 영혼을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 보시기에 길을 걸으셨던 우리 주님.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치열한 여섯 시간의 전투 속에서도 어둠과 그 어떠함에 결코 굴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아름다운 산 제물로 아니 죽음의 제물로 가시었던 우리 예수님.

        그렇습니다. 그것을 치열한 전투가 아니라고 누가 말하겠습니까? 생각 없는 사람들만이 별 것 아닌 양 가볍게 말하겠지만, 그 내용을 살펴본다면 엄청난 전투가 그 속에서 벌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었습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2장에는 우리 주님을 가리켜서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죽음으로 돌아가시는 것 같아보여도 그 이면적인 실상을 헤아려본 이들은 주님의 온전한 승리였음을 가리켜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젊은이들이 자기의 건강을 신뢰하고,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역량을 믿고, 이 세상을 향해 덤비듯 나아갑니다만 그것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미리 말씀하신대로 그것은 죽는 길이고, 그것은 잃어버리는 길임을 너무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 얕잡아 보지 마셔요!
        그 배후에 있는 어두움의 영을 가볍게 생각지 마셔요!

        내 구주 되신 주님 없이는 어떤 젊은이도 살아서 돌아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올 때 한 말이 무슨 말이었습니까? 재산을 잃은 것은 그만두고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라고 하는 것은 가벼운 말이 아닌 줄 압니다. 온통 어두움에 쓰러지고 어두움 속에서 헤매었던 날들임을 고백하는 말인 줄 압니다.

        우리 육으로 이 세상 향하여 나아가서 무엇을 얻어온다고요? 이루어 본다고요?
        어리석은 생각하지 마세요!
        엄청난 「전선」인 것입니다!
        그곳에서 살아오기가 쉽지 아니할 것입니다!
        아니 불가능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내 주님 신뢰하며 나의 주님의 붙드시는 은혜를 기대하며 나아가지 않고서는 그것은, 그것은 전혀 생각지 못할 일입니다.

        저 막강한 아말렉을 향하여 지치고 피곤한 사백 명과 함께 지금 다윗이 전투한다고 생각해 보셔요.
        그것이 될 일입니까?
        내 사랑하는 가족들이 다 빼앗겨서 그들의 수중에 포로로 잡혀있는 이 비참한 현실에서 싸우지 아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싸워서 승산을 헤아리기도 어려운 처절한 여건입니다.

        오늘 이 땅에 있는 우리의 젊은이, 우리의 가족들, 우리의 사랑하는 이들이 사실 아말렉이란 그 엄청나고 강한 어두움의 세력 가운데 붙잡혀 있지는 않은지요?
        아니 눈감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제 정신 들어 하나님의 자비로움 가운데 제대로 본다면, 그들이 어두움과 죄악 가운데 붙잡혀 있는 것 틀림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치열한 전투를 위해서 남아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봄이 온다는 3월에 주님을 의지하므로 승리의 참된 근거 되시는 주님과 함께 오늘도 전투함으로, 사로잡혀 있는 저 수많은 영혼들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올 수 있다면, 우리는 전투가 치열하더라도 주님 의지하고 진행할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지키고 있는 저 휴전선만이 전선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과 제가 처한 우리의 삶의 현장도 엄청난 전선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제가 다시 한 번 이 치열한 전선을 생각하며 우리의 마음을 정돈해보기 원합니다.

        참으로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
        연세가 드신 할머님께서 나름대로 주님을 향해서 제법 먼 길을 오셔서 기도회에 참여하시기도 하시고, 주일이면 교회에 다가오시는 성실한 분이 계시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그가 어떤 어려움을 길에서 부딪친 것이었습니다.
        제가 자상하게 말할 형편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부딪친 그 일은 어쩌면 주님 의지하고 지나쳐 넘어가면 그만이겠는데 그 부딪친 후유증이 너무 컸습니다. 주님 의지하고 감사함으로 넘어간다면 그 치열한 전투 속에서 주님으로 인한 승리를 얻었겠습니다만, 그 일로 인해서 홀로 사셨던 할머님께서 아랫녘에 있는 자녀에게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가까운 도시까지 찾아가서 할머님을 만나 뵙고자 애를 썼습니다만, 자녀분이 길을 열어주지 않기에 참으로 애타는 마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어떤 형편에 계신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아니 세월이 제법 흘렀기에 살아 계신지 아니면 어떠한 모양으로 계신지 전혀 아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는 그 어려움이 있을 때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속한 마음으로 그 전선을 바르게 대하였더라면, '참된 승리자였을 텐데 그리고 빼앗기지 아니하였을 터인데…'라는 이 아쉬움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연로하신 분이라고 해서 전선이 없다고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주님을 나의 피난처로 나의 요새로 삼고 나의 의지하는 하나님께 굳건하게 속하여 서야 합니다. 내 주님과 함께 오늘의 남은 길을 전투해 가는 우리 할아버님, 할머님이셔야만 다가오는 시련 속에서도 주님께서 지켜주심으로 빼앗기지 아니하고, 주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은혜의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확실하고, 가능하다고 우리는 힘주어 말할 줄 압니다.

        이름만이 아닙니다.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여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 서영진 할아버님의 글을 되새기고 싶습니다.
        “오늘도 주님 가까이 의지하고,
        주님 품에 안기고자,
        그 가슴 속에 살고자 무지 생각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어디 모르시겠습니까?
        저는 품어주실 것 같습니다.
        천국의 은혜로 그리고 주님께서 친히 함께하여 주실 것 같습니다. 그 품을 그렇게 의지하고 그렇게 구하는 할아버님의 영혼을 주님은 나 몰라라 하실 분이 정말 아닙니다! 빼앗기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전선! 결코 나약한 것 아닙니다.
        정말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께 속하여가는 귀한 시간이셔야 합니다.

        우리의 할아버님, 할머님!
        오늘도 예수님 의지하고 예수님을 젖 뗀 아이가 어미 품을 갈구하듯이 추구하는 마음이 아니라면 우리는 흘러 떠내려갈 것입니다. 주님을 향하고 주님의 자비로움을 구하는 강한 마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의 그 어떠함에 흘러 떠내려갈 것입니다.
        전날에 아름답고, 전날에 강하였고, 전날에 주님의 이름으로 섰던 그 모습은 찾아보기가 쉽지 아니할 것입니다.
        오늘은 전쟁터입니다.
        이러함을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은 그가 쓴 천로역정 뿐만 아니라 그가 쓴 <거룩한 전쟁>이란 이 책도 성도의 삶은 분명히 전쟁임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너무 어렵게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어떠한 자세로 어떻게 주님께 속하여 오늘도 주님과 함께 나아갈 수 있는가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민수기 6장에서 주님께 속한 사람의 마음가짐이 단단합니다. 육신의 그 어떠함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주님께 속한 마음이 참으로 뚜렷하고 명료하고 철저함을 기억해 봅니다.

        여러분!
        그 사람이 그런 마음을 품는다고 해서 자기 혼자만 그 마음 품는 것입니까? 그런 마음으로 주님께 정함 있는 마음으로 다가갈 때,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하여 마치 연약한 자가 구원을 갈망하듯이,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자가 주님의 도움을 요청하듯이, 나의 주님을 그러한 마음으로 추구하고 앙망하는 이에게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민수기 6장에서 그 내용이 이어져 갑니다만 10장까지는 그 내용을 주목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10장에서는 이제 하나님께 즐거운 제사 드리는 날과 또 하나는 이 세상에서 참으로 뜻하지 않는 전쟁이 일어나서 대적을 향하여 나아가는 날, 이 두 날에 관한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평범한 날에 내 주님이 가깝지 않다면, 나의 주님과 함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산 제물 되어 제사드리는 그런 값진 시간은 절대 갖지 못합니다. 그리고 내 주님과 가깝지 않다면, 전쟁의 날에 주님 함께하여주시는 그 음성이 있으므로 내가 온 기쁨 속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유업을 기대하면서 나아가는, 그런 삶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평범한 날에 주님께 속하고자 온 마음을 써 본 이는 오늘 전쟁의 날에도 주님과 함께 기쁨이 있는! 기대감이 있는! 힘이 있는! 승리가 있는! 그러한 삶을 기대해 볼 수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할아버님, 할머님들께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젊은이들에게도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 수많은 젊은이들의 얼굴은 참으로 얼굴이 아닙니다. 그 얼굴은 정말 빼앗긴 모습입니다. 무너진 모습입니다.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줄 압니다.
        우리의 할아버님, 할머님들도!
        그리고 우리의 젊은이들도!
        오늘 내 주님을 향하여 이러한 마음은 철저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의 어린이, 우리의 청소년이라고 하여 그들이 육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그들이 어두움에 휩싸이지 않는다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이상 주님의 품 안에서 주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살아가고자 전투하듯 내 주님과 함께를 구하는 이 마음이 철저해야 할 줄 압니다.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과 환경을 인식하고 오늘의 주어진 삶 속에 어떠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는 안 됩니다!
        그 누구라도 그 누구라도 스스로는 안 됩니다!

        우리 할아버님, 할머님!
        가시는 길이 그냥 평탄한 길이라고 생각지 마세요.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길은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속하여 전투해야만 내 영혼이 빼앗기지 아니하고, 내 영혼이 거칠어지지 아니하고, 내 영혼이 주님을 모신 행복과 자유가 있고, 우리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참 좋은 영혼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너진 영혼으로, 주님과 함께란 이 행복과 이김과 자유를 갖지 못하는 그러한 영혼으로, 오늘 삶의 커다란 의미를 찾기가 곤란할 것입니다.

        「전선에서」란 이 의미가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를 깊이 있게 생각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길은 남아 있는데, 아직도 우리의 이 땅의 삶은 끝나지 않았는데, 벌써 포기해 버렸나요? 벌써 주저앉아 버렸나요? 힘이 없나요?
        이것은 불행하기 짝이 없습니다.
        주님만 나의 어머니 같은 보금자리가 되어 주시고, 주님만 내 영혼의 힘이 되어 주시고, 조용한 주님의 얼굴빛이 내 영혼 속에 있고, 그분의 평강이 내 영혼 속에 있다면 우리는 분명하게 오늘도 이기는 자로서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하지 아니하는 느슨한 마음!
        허리띠 풀어버린 마음!
        내 생각과 마음이 흐트러져 있다면, 차라리 전쟁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벌써 빼앗긴 삶을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전선에서 뜻깊은 소식 들을 수 있기를 바라고 싶고요. 주님과 함께 이 뜻깊은 전투에 참예함으로 끝까지 승리의 길을 걸어가시는 한 분 한 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하여 오셨던 주님! 억눌린 자에게 해방을 주러 오셨던 주님!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던 주님! 처참하고 가난한 자에게, 가련한 자에게 진정한 행복과 부요를 주시고자 오셨던 주님! 그리고 우리의 길을 주님과 함께 은혜 속에 걷도록 준비해 주시고자 오셨던 주님!

        봄이 오는 이 삼월에 보좌의 주님이 우리 한 분 한 분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셔서 내 구주, 내 주님으로 서 주신다면 누가복음 4장의 그 엄청난 내용을 오늘 우리 각자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 주실 줄 확신합니다.

        어려워 보이는 기근 속에서의 사르밧 여인.
        그러나 주님과 함께란 삶으로 정비하고 있는 이상 그의 전선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행복도 있었고, 찬양할 수 있는 마음이었고, 영혼에 힘도 있었겠으며, 주님을 영화롭게 섬기는 마음으로 삼년 육 개월의 그 기근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넉넉하게 지낼 수 있었을 줄 압니다. 아니! 그 이후에 아무리 풍년이 오고 환경이 좋다한들 주님과 함께가 아니면, 이 복된 영혼은 우리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사르밧 여인은 주님 나라 갈 때까지 주님으로 인하여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줄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수넴 여인은 기근도 없고 또, 집안에는 삶을 준비해 주는 남편도 있다고 해서 싸울 바가 없습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얼마든지 그의 영혼도 어두움에 붙잡힐 수 있습니다.
        그것 가지고 어떻게 영혼이 만족합니까?
        그것 가지고 어떻게 영혼이 밝고 생기 있습니까? 우리 영혼이 만족하지 못하고 물 없는 집이 된다면 어두움은 들어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 가지고 내 영혼이 행복해 할 수 있습니까? 주님과 함께가 아니라면 우리의 영혼에 어두움은 찾아오고야 맙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은 밝았습니다.
        행복했습니다.
        더 바랄 것 없는 마음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요함속에 지루하기 쉬운, 이렇게 저렇게 조용히 다가오는 나름대로의 어려움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주님과 함께 서 있었습니다. 그는 엘리사가 들려 보아도 언제나 밝은 얼굴로 무언가 섬김 하고자 하는 복된 영혼으로 서 있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이러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 없는 환난을 면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수넴 여인에게 칠년 환난을 피하게 해 주셨듯이 말입니다.

        아지 못하는 땅에서지만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 길에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붙드심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영광은 틀림없이 함께할 줄 압니다. 블레셋이라는 적진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자유가 있고, 행복이 있고, 하나님의 붙드심이 있는, 이 놀라운 삶을 살았던 수넴 여인!
        우리가 이러한 것을 마음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정말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생각하고 더듬어 보는 아비가일이 만약에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만 생각한다면,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괜찮은 사람의 역할은 결단코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가 마음 품는 것 보십시오.
        끼니 걱정해야 하는 다윗 곁으로 다가가기를 어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그의 종들의 발 씻길 자로 생각하는 것은, 벌써 그가 그러한 여건 속에서 주님 보시기에 정말 합한 자로 주님께 속하여,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알고 서 있기에 영혼의 밝음이 있고, 영혼의 강함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어두움 속에서 사는 여인이 아니라, 영혼에 임하여 오는 주님의 사랑이 있기에 주님의 백성으로서 주님과 함께 삶을 살아갔던 아비가일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영혼이 피곤하다면 섬김할 것을 자상히 헤아리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오늘 주어진 여건이 대낮에도 술에 취하여 있는 그런 집안일지라도, 주님과 함께 뚜렷하게 서 있으므로 주님을 섬기는 자로서의 보람과 행복을 가지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그의 사람으로서 하루하루 시간을 지내갈 수 있는 줄 압니다.

        보이는 오늘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의 나라와 그 날입니다.
        아비가일은 "당신이 왕위에 서게 되는 그 날 저를 생각해 주십시요."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마는, 우리는 주님께서 영광의 왕으로 오시는 그 날 우리를 알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주님의 사람으로 주님 곁에서 주님 모시고 살면서, 주님 섬기는 그 영광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줄 압니다.
        주님 모시고 주님과 함께!
        그 얼굴빛 가운데서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가며 섬기는 오늘의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이 넉넉한 은혜를 가지고 깨어만 있다면 이것이 우리에게 가능할 줄 압니다.

        늘 생각해 보아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바실래 할아버지를 잠깐 묵상하고자 합니다.
        바실래 할아버지!
        연세가 여든이었습니다만 영혼에 힘이 있습니다. 세상이 할아버지의 영혼을 휘감아가지 못합니다. 오늘 별일도 아닌 세상의 이런저런 소문 때문에 영혼이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그 무슨 주님을 주님답게 모시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에게 전선은 형성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실래 할아버지!
        지금 피난 온 다윗을 주님께 속한 마음을 따라 잘 섬긴 바실래 할아버지. 그의 영혼 속에 주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에 밀려오는 세상의 두려운 소식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어떤 어려움이라도 각오하고 주님을 섬겨가는 참으로 강한 용사 같은 할아버지셨습니다.
        재산이 있어서 절대 아닙니다.
        그것 가지고 그렇게 섬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 속함이란 이 전쟁 속에서 벌써 이겨있는 자이기에 내 왕 되신 주님을 따라, 오늘은 어려움 속에 처한 다윗을 정성껏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고마워할 만큼 말입니다!
        주님께 속함이란 이 강함이 있을 때만이, 내 영혼이 주님으로 인하여 이기는 자일 때만이, 이 땅에서 주님을 알아드리고 주님 마음 좇아서 뜻깊은 섬김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사르밧 여인, 수넴 여인, 아비가일, 바실래 할아버지! 환경은 다 다릅니다만 다 전투적인 마음이 아니라면, 주님의 은혜 가운데 주님께 속하여 바르게 서기는 곤란할 것입니다.

        할아버님, 할머님!
        우리 귀하신 한 분 한 분!
        지금은 전투하는 시간입니다.
        꿈꾸는 것처럼 살지 마세요!
        그냥 어리석은 마음으로 시간 보내지 마세요!
        '나에게 무슨 의미 있는 시간인가?'라고 생각지 마세요!
        단단한 마음으로 오늘의 마음을 올바르게 이끌어 간다면, 디모데전서 5장 말씀에서 홀로 되신 할머님께서 주님을 내 주님으로 모시고 내 주님을 향하여 밤낮 기도에 힘써 갔듯이, 주님을 향하여 깨어있는 영혼일 때 영혼에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에 주님의 은혜가 있기에 죄송합니다만, 그는 환난 당한 자를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있고, 도울 수 있는 기도가 있습니다. 또 한편 내가 가까이 돌아봐야 될 가까운 이들, 내 주변에서 내가 살펴주어야 될 일들은 주님의 은혜 가운데 감당하면서, 이런저런 더 나아간 섬김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의지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주님께 속하여 있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바라보는 그 강한 마음이 있고, 그분과 나 사이에 밤낮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귐이 있을 때, 우리의 영혼은 주님을 섬기며 살아있는 자로서의 영광이 있음을 말씀하여 주시는 줄 압니다.
        이런저런 것을 기웃거리며 구경하고 세상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사도 바울 선생님은 '살아있는 것 같지만 죽은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죽은 자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아직 이 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죽은 자의 형상으로 살아갈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내 주님 향해서 더 뚜렷하고 더 명료하게 서 가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주목하는 이사야 40장 말씀 가운데 여러분과 제가 오늘 길을 스스로 걸어간다면 걸어갈 있는 힘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백성은 주님 안에 자리 잡고, 주님만을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내 모든 것 삼습니다. 그리고는 주어진 생활 속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나의 주님으로 그리고 내 모든 일과 가운데서 주님을 나의 구주로 앙망합니다.

        부딪치는 문제가 많습니다.
        부딪치는 일과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님을 앙망한다면 하나님의 축복하심 속에 우리의 영혼은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솟아오른답니다. 걸어가도 달려가도 곤비치 않고 피곤치 않답니다. 새 힘을 얻는답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이 온전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분이 되어 주시는가를 말씀하여 주십니다.

        이사야 41장도 그러합니다.
        부딪쳐오는 어려움들이 많은 이 세상이지만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므로 기쁨 속에 안정감이 있고 조용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어떤 어지러움과 혼란으로 다가와도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조용히 주목하며 내 주님으로 모시고 친근히 해가므로 힘을 얻게 됨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자로 주님을 알고, 이 세상에서 많은 것 보여도 보지 못한 채, 수많은 소리 들려와도 듣지 못한 채, 내 주님만을 향하여 다가서는 우리의 삶을, 주님은 이사야 42장에서 주님을 위하여 이 땅에 있는 자라고 여겨 주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붙들어 주시고, 지켜 주시고, 축복하여 주심을 알게 됩니다.

        세상의 그 모든 것 있어도 영혼에 느껴오는 삭막함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취하고 살지만 영혼은 사막이고 광야입니다.
        그러나 이런 영혼은 보좌의 주님께서 이끌어 주신 은혜로 물댄 동산 같고, 사막 가운데 시냇물의 흐름이 있는 곳처럼, 광야 속에 주님이 주시는 생수가 솟아남을 힘 입어가며, 찬양하고 감사하며 주님 뜻하신 길을 오늘도 걸어갈 수 있는 줄 압니다.

        〈전선에 부치는 편지〉라는 이 첫째 글에서 다시 한 번 우리 서영진 할아버님의 글을 읽으면서 오늘의 전선에서 단단한 마음 품어가므로 우리 할아버님처럼 참 좋은 영혼으로 주님의 은혜 속에서 이겨 가시는 우리 할아버님, 할머님 그리고 우리 젊은 형제들, 어린이, 청소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님 따르렵니다!


        주님!
        오전 일찍 마음을 가다듬고
        ‘어떻게 하면
        주님을 좀 더 가까이 따라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주님 가슴 속에 묻혀 살 수 있을까?’
        생각을 무지 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많이 늦었습니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주님 생각하고
        주님 더 사랑하고
        주님 더 의지하고
        주님 더 따라가고자 합니다.

        내가 주님 마음에 합하게 따라가지 못할 때는
        식구님들이 걱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도해 주시는 식구님들이
        끝까지 저를 밀어주시는 것 알고
        감사가 많이 됩니다.
        주님께서 끝까지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구합니다.

        서 영 진 집사님(할아버님)
        Chapter II.
        늘 기도드리며
        김 순 례 권사님(96세)
        주님!
        지금까지 은혜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한 몸 가누기 힘이 들지만
        남은 여생
        주님 한분만 사랑하며
        기쁘시게 하며
        내 주님의 나라와 잃어버린 영혼들 위해
        늘 기도드리며 살고 싶습니다.

        내 본향
        저 천국 집에 불러주실 그때까지
        주님만 의지하며
        믿음으로 그날을 기다리고 싶습니다.

        그날까지 함께해 주실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Chapter III.
        그리운 나의 주님
        이 희 용 권사님(86세)
        주님! 뵙고 싶습니다. 그립습니다.
        나의 선한 목자 되어 주셔서
        오늘까지 인도하시고
        붙잡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운 나의 주님!
        주님은 내 주님이십니다.
        자나 깨나 오직 내 주님뿐입니다.

        예수님!
        나 같은 죄인을 택하여 불러주시고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날마다 할머님반 기도회에 나아가
        함께 기도하며
        은혜 받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정말 주님께 나가는 이 걸음
        가다가 쓰러져도
        기도의 군사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예수님!
        날마다 귀한 말씀 듣게 해 주시고
        식구님들을 통하여 이렇게 사랑해 주시니
        식구님들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이옵니다.
        연약하지만 아프다는 핑계 대지 않고
        주님 모시고 이 걸음
        끝까지!
        잘 달려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Chapter IV.
        밧모 섬의 사도 요한
          여러분!
          우리가 잘 알듯이 밧모섬의 사도 요한은 젊은 요한이 결단코 아닙니다. A.D. 94년경이라 하여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신지 60여년 지난 때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무척 연로하신 할아버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한계시록 1장에서 "나 요한은 그의 종이요"라고 자기를 그의 주님의 종으로 표현할 때, 힘없는 말이 아니고 강함이 있는 말이었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라고 말할 그때도 힘이 있었습니다. 그 힘은 살아계신 주님께 참여하므로 인한 힘이었습니다.
          "나 요한은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사랑하는 주님께는 어떤 여건 속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고 참여하며 그의 사람으로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할 때 주님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이 길에서만은 축복해 주시었습니다.

          시편 35편에서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라고 할 때, 다윗에게 부딪치는 그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시편 35편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의 길이 밧모섬에 귀양 가 붙들려 있어서 참으로 어려워도 그는 주의 종으로는 살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참여하여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은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나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겠다. 이 일은 나 스스로의 일이 아니다. 주님께 참여하는 그 일이라면 나는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참여하겠다.'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십자가는 짊어지면서도 주님께 속한 사람의 길은 걷고 싶어하는 요한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밧모섬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그날은 주일이었습니다. 이날 주님의 날, 우리 주님 부활하신 날이란 것도 사도 요한의 마음속에 생생하지만, 지금 그 은혜와 그 어떠함이 그에게 멀지 아니한 것도 사실이겠습니다만,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라는 이 짤막한 말씀은 참으로 귀중한 말씀입니다.

          '성령 안에 있었더니'
          우리가 사도 요한의 글 가운데서 요한복음 14장이나 요한복음 16장이나 요한1서 2장에서 주님께서 그의 보혜사 성령님으로 관여하여 주시는 자는 어떤 자인가요?
          그것은 주님께 온 마음으로 참여하여 있는 자가 요한복음 14장도 15장도 오늘의 보좌에 계신 주님의 그 인도하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처음에는 다가오셔서 육신의 모습으로 그 음성 들려주셨다면, 지금은 보이지 않으시지만 믿음으로 추구할 때 보혜사 성령님을 통하여 주님의 마음을, 주님의 명하심을, 주님의 뜻하심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이기는 자에게 큰 비중을 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이기는 자는 주님으로 인하여 이기는 자인데, 자기로 인하여 이기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님께 속하여 주님을 의지함으로 이겼는데 그 자가 지금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 10장에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의 사랑이 주님이시라면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이 누구이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어두운 데서 내가 네게 이르는 것'
          '귓속으로 듣는 말'
          이것은 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속삭여 주시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 2,3장)
          내가 주님으로 인하여 오늘의 환경과 여건을 이겨갈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께 귀를 기울일 때 주님은 성령님으로 우리에게 임하여 오시고 속삭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었다. 나는 주님의 마음을 안다. 나는 주님의 뜻하심을 알아차리고 있다. 지금 주님 마음과 함께 가고 있다.'
          이러한 참여함 속에 있는 사도 요한!
          우리가 이런저런 어려움이 많더라도 사도 요한에게 살아있는 이런 낱말들만은 우리에게도 살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맘대로 잘 수 없고, 내 맘대로 일할 수도 없고,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없는 밧모섬에 갇혀 있어도,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의 종! 너희의 형제!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얼마나 값진 모습입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일 수 있고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다 갈 수 있는데, 주님과의 관계가 살아있지 않다면 그것은 사데 교회처럼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가운데서 오늘도 주님 주시는 불로 연단한 금 같은 믿음이 지금 내 맘
          속에 살아있고, 주님 주시는 흰옷이 나의 생활이 될 만큼 살아있고, 주님 보시는 안목이 나의 안목이 될 만큼 살아있고, 내가 많은 것이 자유롭지 못하고 많은 이들과 헤어져 있지만, "주님과 함께는 생생합니다!"라고 한다면 살아있는 자 아닙니까? 아무리 이런저런 여건 속에 있을지라도 살아있는 자 아닙니까?

          이곳에서 사도 요한의 그 어떠함에 관해서 귀중한 한 마디를 인용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10장에 나오는 사도 요한입니다.

          우리가 예레미야 1장을 보면 예레미야가 1장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을 모신 삶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란 말씀은 주님 모신 삶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레미야가 1장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부르시고자 하실 때,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며 주저하는 모습을 읽게 됩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는 나이가 여든 살로서 어리다고는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면서도 거절했습니다.
          사실 모세는 출애굽기 3장에서 가시덤불에 불붙어 있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보면서도, 출애굽기 4장에서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과 손이 문둥이 되는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0장에서의 사도 요한은 우리가 아는 대로 분명히 모세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고, 예레미야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연로하지만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주님, 너무 연로해서"라고 하는 말 없었습니다. "제가 지금 이 형편 속에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런 말 없었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면서도 그렇게 말했고, 예레미야도 주님 모신 삶을 살았기에 고난과 어려움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어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이 말씀에 대해 한 마디 말도 없었을까요? 우리가 이 점을 들어보고자 함은 참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서 마태복음 25장에서 다섯 달란트로 열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한 달란트를 더 맡겨준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 달란트는 조그만 것 아닙니다. 엄청난 재산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더 맡겨준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다섯 달란트 가지고 온 정성과 온 힘을 다해 열 달란트 남겼다고 할 때, 한 달란트 더 맡으라고 한다면 이제 더 못하겠다고 우리는 손사래를 칠 줄 압니다. 그러나 여기 착하고 충성된 종은 아무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서 한 므나로 열 므나 남긴 종에게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한 므나는 그렇게 큰 재산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그럴만한 어떤 기본적인 그 무엇은 되어서 그것을 가지고 열 므나까지 남기는 일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라고 하실 때, 내가 임의로 고을들을 주장해서 내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권세를 부리는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맡기지도 아니하셨을 것이고, 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도 아니었습니다만, 이 사람은 주님의 유익만 위하여 착실히 살아온 사람이기에 아무런 불평이 없었습니다.
          "너무 어렵습니다."라고 한다거나 "감당 못하겠습니다." 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레미야도, 모세도 어려워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예레미야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 길인가를 압니다만, 그는 주님을 섬기는 길에서 물러나고자 한 적은 없었습니다.
          모세의 길도 어려웠습니다. 백성들이 너무 괴롭힐 때, "하나님 내가 이들을 낳았습니까? 나를 데려 가십시오."라고 말한 적은 있습니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온유함으로 그리고 백성들에 대해서 온유함으로 대부분의 삶을 꾸려간 것 같습니다. 쉽지 않은 일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예레미야는 어려워했던 그 일을 이곳에 있는 사도 요한은 나이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렵다.' 한다거나 '제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는 말이 왜 한 마디도 없었을까요?

          요한계시록 1장에서 그의 종으로서 꽉 매여 있는 마음일 때, 사도 요한은 두 가지를 분명히 아는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그들처럼 자기를 전혀 신뢰하지 않고 자기에게 비중을 두지 않는, 자기의 무익함을 아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께 속하여 주님의 붙드심과 주님의 어떠하심을 아시는 것 같습니다. 자기에게 신뢰를 두지 아니하고 주님께 신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곳에서 우리는 엄청나게 놀라운 내용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젊다면 무엇을 할 만합니까?
          우리에게 다가온 전쟁을 해볼 만합니까?
          누가복음 14장은 "네 가진 것 다 버려야 된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 속하여 주님으로 인하여 서고자 한다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착하고 충성되다는 말씀은 정직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좋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계점에 부딪치고 나의 그 어떠함을 알아간다면, 좋은 마음보다는 낙심하고 절망적인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신뢰를 두지 아니하고 주님께 근거를 둔 마음은 좋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 속하여 주님으로 인하여 살아가는 이는 그 은혜 속에서 찬양할 수 있을 줄 압니다.
          굴복하고 비참한 그런 종이 되어버리기보다 주님께 속한 주님의 종으로! 주님께 속한 주님의 사람으로! 굳건하게 서고,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 향하여 살아있는 삶을 살 수 있을 줄 압니다.

          봄이 다가옵니다.
          아니 봄기운이 벌써 우리 곁에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옛 사람 가지고, 낡은 우리를 가지고, 내가 지금도 입고 있는 육체를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한다는 말입니까?
          진실된 마음을 가져 보아도 예레미야 1장의 예레미야의 말 외에 무슨 말이 나올까요?
          진실된 마음을 가져 보아도 출애굽기 4장의 모세의 말 외에 무슨 말이 나올까요? 우리는 순종하여 나아가기를 주저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17장에서 우리에게 두 마디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무익하다는 것'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한다.'
          무익한 자가 오늘 내 주님 나라와 내 주님께 속하여서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한다는 이 말씀은 엄청난 일인 것입니다. 양떼를 먹이고, 밭을 잘 갈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살고, 경건되게 살고, 신실하게 살아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삶을 산다는 말입니까?
          무익한 자가 예수님께 속하여 주님 주시는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해볼 만합니다.

          저는 강점을 두며 말씀할 것입니다.
          왜 사도 요한은 이곳에서 필요 없는 군말이 없나요? 그것은 주님과 함께 길을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나로 서지 아니하고, 주님께 속하여 주님으로 인하여 사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가시고자 한다면 주님의 가지로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 적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연로한 가지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나의 참 포도나무 되어 주시고 하나님 나의 농부 되어 주신다면, 기쁨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사도 요한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2018년의 새로운 봄이 우리에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자기를 신뢰하며 살아왔나요? 이러한 마음으로 주께 매인 삶을 살아왔다면, 우리가 육체를 입고 있지만 우리의 비중은 100%가 주님입니다.
          무익하다는 말은 정말 해당사항이 아닙니다.
          자기는 사랑할만한 것도 아니고, 신뢰할만한 것도 아니고, 기대할만한 것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주님만이 우리에게 그런 분이십니다.
          사랑할만한 주님!
          기대할만한 주님!
          그리고 전적으로 맡기고 희망을 가지고 순종할만한 나의 주님!

          우리는 사무엘상 15장의 이 말을 지금 이렇게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어리더라도 내 주님을 믿는다면 귀를 기울이세요. 믿음에 속해서 귀를 기울이세요. 여러분이 아무리 어리고 그 어떠하더라도 주님께서 이끄신다면 순종만 하세요. 주님께서 듣는 것을, 순종하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던가요!
          그것은 근거가 주님이신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 위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주님을 믿는 믿음에 서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길에서 주님으로 인하여 나약한 마음 없기를 원합니다.

          자기를 생각하는 사람은 늘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이런 마음으로 속하여 살고자 한다면 열매를 조금 맺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더 많은 열매의 길로 가고, 주님의 붙드시는 은혜 가운데서 풍성한 열매의 길을 걸어간다고 요한복음 15장은 약속하여 주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네 면류관을 빼앗기지 못하게 하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벌써 면류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이름이 퇴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날에는 참으로 이러했는데 지금은 이러다.' 그 말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 속하여 성실된 마음으로 주님을 향하여 서 간다면 그 이름에 걸맞은!
          아니 더욱더 영광스러워져 가는!
          퇴색할 바에야 무엇 하러 처음부터 그 이름을 가집니까?

          오늘 여러분과 저의 2018년도가 2017년보다 못한 해가 된다면 왜 살겠습니까?
          나의 무익함이 생각될 때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 전적으로 믿음을 두고 사랑하는 우리 주님께 매여서 우리 주님의 돕는 이로 물러가지 않는 마음으로 서 본다면, 2018년의 다가오는 시간들이 우리에게 정말 값지고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
          그 착하고 좋은 마음의 근거는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주님 자신입니다!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 자신입니다!
          신실함의 근거도 주님 자신입니다!

          2018년!
          우리는 주님께 집착하므로 착하고 좋은 종으로, 주님 기뻐하시는 참 좋은 종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길에 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Chapter V.
          날마다 날마다
          이 정 례 권사님(86세)
          느지막하게 예수님께 나아왔는데
          부르실 그날까지
          부끄러운 자가 아니라
          주님 앞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주님의 사람으로 서기를 원합니다.

          주님!
          날마다 날마다
          주님 함께하여 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 감사합니다.
          모든 말도 지혜 속에 하게 해 주시고
          날마다 날마다
          빈들판의 소나무를 보면서
          소나무처럼 그저 하늘만 쳐다보고
          주님께서 부르시면 숨는 자가 아니라
          “주님, 여기 있습니다!”하며 달려가는 자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이 나그네 길 속에서 후회는 없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 한분만 잘 모시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날마다
          주님 기다리는 귀 뚫은 종처럼
          주님만 바라보며
          남은 시간 항상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Chapter VI.
          모든 것 다 아시는 주님!
          김 영 심 권사님(84세)
          사랑하는 예수님!
          당신은 저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부족하고 허물 많은 저를
          사랑으로 품어 주시고
          평안한 마음을 주셔서
          주님만 위해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할머님 기도 용사들과 함께
          나라를 위해
          선교사님들을 위해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기도하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의 육신은 날로 쇠하여 감을 느껴도
          속사람만큼은 힘이 있는
          주님의 사람으로 섬기며 살 수 있도록
          은혜로 붙들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은 우리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오니
          남은 길은
          더욱 남김 없는 마음으로
          사랑하며 섬기며
          길가고 싶습니다.
          주님! 긍휼 베풀어 주옵소서!
          Chapter VII.
          참 좋은 판단
            사실 고린도전서 2장 말씀을 주목하다 보면 우리가 귀중한 진리를 캐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절대로 우리 스스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말씀만 읽어보아도 어느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가리켜 말씀합니다. 그것은 옛날만이 아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설 수 있는 참된 비결은 고린도전서 2장 2절 말씀처럼, 오늘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관해서 우리가 온 마음으로 매여 간다면, 그래서 어제의 나에게 속하여 있지 아니하고 오늘 주님께 사로잡힌 길로 가고자 한다면,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아닙니다. 주님께 사로잡혀감으로 그러합니다.

            물론 이곳에서 참으로 살아계신 주님께 사로잡혀가는 이는 생각만 아니고, 문자만 아니고, 고린도전서 2장 말씀처럼 주님의 영에 속한 자입니다. 오늘도 참 포도나무에 속할 때 진짜 속하였다면 포도나무의 진액이 흐르듯이 예수님의 생명, 예수님의 그 영의 이끄심에 마음이 하나로 묶어져 살고 있음을 가리켜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정말 가져야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말씀도 주님과 합한다고 하면서 그 말씀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라는 말씀으로 분명히 우리에게 이끌어 주십니다. 겉으로 '하나다.'라고 해 놓고, 호적상으로는 '하나다.'라고 해 놓고 속은 전부 별개로 스스로 살아간다면 이것은 진정한 하나가 아닙니다.

            "주님과 연합한 자는 한 영"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주님께 연합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생명과 주님의 영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주장해 주시는 그러한 길로, 이끌려 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님께 온 마음으로 연합된 자를, 성전된 주님께 속한 자를 고린도전서 6장 마지막 부분은 '성령의 전'임을 가리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 영에 속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로서 주님께 사로잡혀 왔고 예수님의 생명과 예수님의 이끄시는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라고 한다면, 그 특징은 주님께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마음에 주의해 갈 때, 주님으로 인하여 참 좋은 판단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주님께서 나의 주가 되신다면, 나의 주가 되시는 그분의 판단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엄청나게 훌륭한 사람인 것입니다. 값진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주님의 판단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나 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말씀처럼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는 비참한 것입니다.

            "좋은 판단을 가진다!"
            이것은 우리의 명석함에 의한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경험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살아계신 주님께 속하여 있으므로 살아계신 주님으로 인하여 그분이 나의 머리가 되시고 나의 주가 되셔서, 내 영혼 속에 주시는 생명으로 인하여 오는 참 좋은 판단인 것입니다.
            이 판단을 가진 자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 좋은 판단이 없습니다.
            달리 바꾸어 말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지금 사랑하고 있는 자가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좋은 판단을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귀중한 일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이런 좋은 판단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엄청나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 속에 살던 아브라함은 어느 날 자기 종을 불러서 메소포타미아로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정말 귀하게 주신 선물인 이삭을 위해서 아내를 택하여 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아브라함이 자기 스스로 생각한 시점도 아니고, 그 내용도 아브라함이 스스로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데려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 같으면 이런 여건 속에서 절대 따라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일생을 맡기고 살아갈 남편 되신 분인데 어떻게 보지도 않고 따라가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보화를 가져왔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문둥병 든 환자인지, 그 사람의 몸이 성하지 못한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부자는 부자이지만 절대 따라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이끌려 사는 이라면, 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마음이 있어서 오는 그 사람이 참 좋은 돕는 자란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 이끌리는 그 사람이 가장 좋은 돕는 이인 것입니다. 주님께 이끌려 오는 그 사람! 사람을 보고 오는 그 사람은 절대 좋은 사람 아닙니다. 별 것 없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곳에서 하는 판단은 주님 주신 판단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끌려 오는 돕는 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맞이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좋은 판단입니까! 어려운 판단 같아 보여도 얼마나 좋은 판단입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끌려서 이러한 판단을 생활 구석구석에서 선택하며 따라갔습니다.
            그가 일생을 마쳤을 때 그 아들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네 아버지 아브라함은 내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한 때만 아닙니다. 언제나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듯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내 권고를 받아들였다."
            자기 생각 좇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조용하게만 이야기해도 그것을 귀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좋은 판단 아니겠습니까?
            "내 명령을 지켰다."
            주님께서 명령하시면 절대 흔들림 없이 그 명령을 좇아갔습니다.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다."
            그가 살아간 생활의 규모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길로 좇아갔습니다. 그가 아무리 재산이 많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장막생활을 살라고 하신다면 장막생활을 살았고, 그가 아무리 자기 집이 좋아도 주님과 더불어 사귀는 빈들판적인 사귐을 갖자고 일깨워 주시면, 그는 창세기 21장에서 늘 그렇게 행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것이 그의 법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얼마나 좋은 판단입니까!
            "그 음성, 그 권고하심, 그 명령, 그의 율례와 법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살아계신 주님의 판단을 가지고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이곳에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근함은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강한 말 한 마디를 하고 싶습니다.
            내가 만약에 나의 육신에 이끌려 간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주님께 이끌려 가서 주님의 마음을 좇는 사람이라면, 내 영혼 속에는 언제나 좋은 판단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참 좋은 판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보다도 아들과 딸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한다면 그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 아닙니다.
            내가 육신에 속하여 있으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마세요. 이러한 사람은 나를 십자가로 벗어버리고 주님께 연합된 자인 것입니다. 주님께 연합해서 주님께 이끌리는 자인 것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섬김을 주신다면 허름한 옷을 입고 오는 엘리야라도 주님의 판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인 줄 알아차릴 것 같습니다.
            엘리사의 옷도 그러한 옷이었을 것입니다. 수넴 여인도 주님께 속하여 있다면 주님의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인 그 엘리사를 알아볼 것 같습니다.

            허름한 옷을 입고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왔을 때,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겉모습을 보고 나귀의 구유를 내어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옷이나 모양이 그런 분밖에 안 되어 보여도 말입니다. 그 속에는 주님이 계시고 그 위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는 사람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께 속하여 주님의 판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내 집이 아무리 초라한 집이라도,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방에 모실 것 같습니다. 중히 여기면 모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만 모셨다면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서 보잘것없는 나귀 구유, 그것은 영광 받은 것 아닙니다. 그것은 존귀함 받은 것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겉으로 볼 때는 큰 형제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형제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주님께 속한 이 좋은 판단이 있다면, 주님께 속하고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형제를 알아 줄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알아 줄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이 좋은 판단은 우리에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이 좋은 판단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0장에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내가 주님께 속한 강한 마음이 있고 그 속에서 내 주님이 주시는 판단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순간에 '어떻게 살아날까?'라는 방법은 구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내게 주시는 최상의 기회입니다.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입니다.
            그래서 달리 나 자신의 목숨을 연장해 보려고 꾸무럭꾸무럭하지는 아니할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5장은 주님을 내 삶의 주님으로, 내 삶의 뿌리로 붙든 사람은 '예와 아니오'를 바르게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판단이란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실하게 그 길을 좇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좋은 판단을 가진다는 것은 너무 귀중합니다!

            엘리사는 열왕기하 13장에서 자기가 이 땅을 떠나갈 죽을병이 든 줄 알았습니다.
            그의 영혼은 강한 영혼이었습니다.
            이제 주님께 간다는 것입니다.
            이 길을 통하여 간다는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면 절대 강한 영혼이 못 됩니다. 자기에게 다가온 왕은 자기의 얼굴에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엘리사는 울지 않습니다. 왕의 처신하는 것이 온전치 못할 때 엘리사는 노할 만큼 강했습니다.

            지금 내가 죽음으로 가고 있는 순간이라도 주님을 향해서 강한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 판단은 정확합니다.
            죽음을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피하려고 하면 어처구니없는 길로 가게 됩니다. 어리석은 길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좋은 판단이 없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길이라면, 나는 갑니다!'라는 마음으로 얼마든지 이런 강한 영혼을 가지고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묵상을 하다 보면 우리에게 도움 되는 생각이 많이 있을 줄 압니다.
            강한 영혼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조금만 더 말씀을 살펴보면, 고린도전서 5장에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영혼이 강하지 않습니다. 강한 판단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판단이 강하지 못합니다. 7장도 강한 판단이 없습니다.
            강한 판단이 없다는 말씀은 비참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 내가 주님을 향하여 이런 마음 갖고 있나요?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고린도전서 4장에서 사도 바울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우리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고전 4:3)
            왜냐하면 사도 바울 선생님은 주님께 속하여 주님을 내 주님으로 모시고 주님의 판단을 가지고 살고자 주님의 판단을 기다리며 살아가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얼마나 온전하고 강한 마음입니까!
            이것은 사도 바울 선생님만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께 온 마음으로 다가와서, 예수님을 내 구주 내 주님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다 이런 판단을 가져야 될 것 아니겠어요?

            그가 고린도전서 5장에서 가지는 판단은 무엇입니까? 이방인보다 못한 삶을 가진 그 자는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6장에는 무엇이라고 판단하십니까? 그런 일을 세상에 가서 묻느냐? 차라리 형제를 위해서는 내가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느냐?
            이 얼마나 강한 판단입니까!
            하나님 앞에 있는 판단입니다.
            하나님을 중심한 판단입니다.

            7장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자가 강한 판단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슬픈 일 있어도 밀쳐놓을 만큼!
            기쁜 일이 있어도 밀쳐놓을 만큼!
            내게 이런저런 물건을 사고 무엇이 있을 때도 밀쳐놓을 만큼!
            이런 강한 마음 아니면 오늘 우리의 생활 속에 흔들립니다! 주어진 여건 속에 밀려갑니다!

            고린도전서 7장은 주님께 속한 좋은 판단 얻기 위해 아내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아내와 남편 사이가 불화하지 않고 화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향한 강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심지어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주님께 속해 가라는 것입니다.
            이 정도여야 좋은 판단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싸우라는 것 아닙니다.
            할 수 있으면 헤어짐 없이 사랑 가운데서 삶을 꾸려가라고 권하는 사도 바울 선생님이십니다. 그런데 주님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좋은 판단을 위해서 이런 강한 마음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이런 강한 판단이 아닐 것 같으면 고린도전서 13장의 이러한 말씀은 절대 나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이것은 주님과 나의 관계를 얼마나 중히 여긴다는 말씀인가요! 그 사랑이 얼마나 귀하다는 말씀인가요!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주님과 나의 관계를 얼마나 귀중히 여긴다는 말씀인가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 사랑을 차곡차곡 더듬어가며 말씀하는!

            여러분, 주님과 나 사이에 이 강한 삶이 있을 때 우리의 판단은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너무 나약하게 살지 맙시다.
            예수님이 내 구주 내 주님이시라면 말입니다. 강한 마음을 가지므로 주님으로 인한 좋은 판단 있기를 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4,15,16장.
            사실 신앙은 이렇게 주님께 강한 마음으로 매인 자가 혼란됨도 없고, 흔들림도 없고, 땅 끝에 선 그 어려운 길을 주님 섬기는 돕는 이로 착실히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영광이 여러분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강한 마음을 품어보지도 못하고 이 땅을 떠나간다는 것은 너무 서글픈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내 주님 되어 주시고 내가 그분의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이것 때문에 강한 마음! 강한 판단!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예비해 주시는 우리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영광인 것 같습니다.
            이 길에 서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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