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28 / 75호
    조그만 나의 빈들판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배 명 자 집사님
    주님 보좌 가까운 곳
    땅 끝에, 빈들에, 산봉 위에 서서
    무릎으로 바라보는 주님은
    뜨거움입니다. 강한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자기에서 일어서서
    주님만 내 사랑으로
    주님만 내 생명으로 붙든 마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짊어지고서라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조용히 들려오는
    세미한 그 음성 놓칠까봐
    자기는 거절하고
    근신의 옷을 입고 사귐의 등불을 밝힙니다.

    내 사랑! 내 생명!!
    주님을 향한 사랑의 불 꺼트리지 않기 위해
    비천한 나를 쳐서
    시온산성
    추구의 산에 오르기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내 작은 마음에 붙들려 주시는 주님!!
    주님 한분을 내 사랑으로
    내 생명으로 붙들어 가는 것 말고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내 인생길에서

    내 사랑! 내 생명!!
    주님을 위하여 일어선
    좋은 군사의 삶은
    귀 뚫은 종의 삶은
    주님의 돕는 자의 삶은 살아가고 싶습니다.

    내 사랑! 내 생명 되신 주님!!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멘! 아멘!!
    Chapter I.
    진실한 삶(매임과 숨음)
    김 선 순 집사님
    회리바람 타고
    주님께 솟아오른 엘리야,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으로
    뚜렷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주셨던 그분이
    그릿시냇가 빈들에서, 
    가난한 사르밧 과부댁에서
    그토록 잠잠히 말없이
    주님 앞에 보내는 시간들은
    어설픈 마음으로 보낸 시간 아니었습니다.
    결코, 작은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주님 한 분께 매임의 소중함이
    얼마나 진실한 삶인가를
    주님 안에 피하여 숨은 자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은 보여주셨습니다.

    사자와 곰과 골리앗과의 승리보다
    자기를 벗고 주님께 피하여 숨은
    다윗의 조그만 빈들 은밀한 시간
    주님께 매임을 더 크게 여겨주신 주님은
    다윗의 뿌리로
    그의 인격으로 살아주셨습니다.

    주님 한 분께 매임으로
    무익한 나도 주님께 이끌릴 수 있고
    한 사람 주님께 매임으로
    온 이스라엘에 얼마나 큰 축복이 되는가를
    신실하신 하나님은 보여주셨습니다.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한 자가 보이지 않아
    크게 울던 계시록 5장의 사도 요한.
    늘 품에 기대었던
    주님이 떠나가신 이 땅에서지만
    더 친밀하게 그의 주권으로 함께해 주신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의 보좌에
    불붙는 마음으로 매여 온 요한.

    주님이 보일 때까지
    주의 말씀이 보여지기까지
    주님 나라의 일이 멈추어지지 않기를
    얼마나 크게 울며
    주님의 돕는 이로 서 가시는가요!
    신실하신 하나님이
    이 일을 온전하게 이루고 계십니다.
    Chapter II.
    깨어있음의 귀중성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깨어있음의 귀중성을 정말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은 깨어있음의 축복을 많이 누리지 못한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 줄 압니다. 깨어있음은 사도 바울 선생님의 말씀으로 보아도 정말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우리라도 주님께 다가와서 주님 안에 자리 잡고, 내 주님을 내 주님처럼 바라보는 그런 진지한 자세가 없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새 힘이 되어주지 못하실 것입니다.

      깨어있음의 의미는 나로 하여금 주님을 주님답게, 그리고 순간순간 새롭게 붙들어가도록 만들어 주며, 우리로 하여금 주님 한 분을 내 구주 내 주님으로 언제나 모시고 사는 삶으로, 우리 삶을 인도하여 주십니다. 얼마나 축복된 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데살로니가 전서 5장의 이 짤막한 말씀을 바꾸어 말해본다면, 내가 깨어있지 않으면 주님을 나의 심장의 방패로 붙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것과 부딪치기 쉬운가요!

      그런데 주님이 나의 믿음과 사랑의 흉배가 되어주신다면, 우리 심장은 주님 의지하는 마음과 주님 사랑하는 이 자유로움 속에 거할지언정, 염려나 근심이나 두려움이나 아니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한 이런저런 것으로 우리 마음이 더럽혀지지 아니할 줄 압니다.

      또 한편, 오늘을 살고 있는 이 주어진 환경과 여건 속에서 우리 생각은 얼마나 번거롭고 어지럽기 쉽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향하여 끊임없이 깨어있는 마음이라면, 구원의 투구를 쓰게 된답니다. 이곳에서 흉배나 투구는 철저하게 우리에게 도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주님께 대하여 깨어있지 아니하고 세상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끌려갔습니다. 그 마음은 이제부터 어떻게 되어 갈 것인가에 관해서 우리는 추측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다음 그들이 생각하고 도모하는 것은 악한 것이었습니다. 벌써 버려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주님과 함께 의논하는 이런 생각과 마음이라고 한다면,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처럼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마음이 우리 생각과 마음을 언제나 주장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17장에서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권력을 삼는 그 영혼은 사막 가운데 있는 떨기나무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주님을 떠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복된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좀 더 읽다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에서 ‘생명수’란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 주님이 우리에게 빛 되시고, 참으로 흡족한 은혜 되어 주시는 것에 관하여 표현한 말씀은 정말 많습니다.

      그것은 가만히 있으면서 그냥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니까’라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하여 깨어있으므로 가능하다고 데살로니가 전서 5장은 강조합니다.

      깨어있으므로!
      여기서 항상 기뻐하는 것은 단순하게 주어진 현실을 알지 못한 그런 사람의 생각이 아닙니다. 주님이 진정 내 구주와 주님 되어 주시기에 그 점에 깨어있다 보니, 오늘 주어진 어려운 세상 속에서도 우리는 주님 모신 맑고 정결한 은혜 속에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영혼이기에 주님과 나 사이의 끊임없는 사귐은 참 쉽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주님!
      내가 함께 자고, 함께 깰만한 사랑하는 나의 주님이시기에 그분께 부탁한다는 것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깨어있는 자는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답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된다는 말입니다.
      깨어서 나의 주님을 이렇게 바라보며 그의 은혜를 구하는 마음일 때, 우리 하나님의 돌보시는 손길은 우리 생활 속에 임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주어진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 주님의 손길이 요한복음 10장과 15장처럼 가깝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남은 삶에 관해서 스스로 염려하고 걱정할 것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더 정밀하게 이야기한다면, 내 온 영과 혼과 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주님을 향하여 깨어있으면서,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런 마음이 되어 있다면, 우리 영혼이 주님과 나 사이에 사랑의 불이 꺼지지 않는 이런 사랑의 관계 속에 있다면, 우리가 주님 마음을 헤아리고 주님 보시기에 합하게 살고자 하는 이런 마음만 되어 있다면,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온 영이 깊이 있는!
      보통 사람들은 이 영이란 말의 의미에 관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끝나 있기에 죽어있는 형편일 텐데 그래도 우리의 영은 성령님의 교제 속에 살아있습니다. 혼이라 할 수 있는 우리 마음과 생각은 필요 없고, 혼란스럽고, 어지러움에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정돈되어서 맑고 경건하고도 참신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 수많은 일에 부딪힐 수 있는 우리 몸도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는, 이 깨어있음!
      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요!

      우리가 짧게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 믿도록 허락하셨다는 것도 감사하고. 주님 모시고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함께 살도록 허락하셨다는 것도 귀중합니다.
      그러나 정말 감사한 것은 내 주님을 향하여, 우리 하나님을 향하여 언제나 깨어있도록 하심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언제나 우리에게 끊임없는 은혜와 사랑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염려가 아니고 깨어있음입니다.
      걱정이 아니고 깨어있음입니다.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깨어있음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을 향하여 깨어있으면 됩니다! 깨어있음의 귀중성! 정말 놀라웁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은 자신만 깨어있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으므로 제대로 삶을 살지 못하는 형제를 바로잡을 수도 있고, 힘이 없어하는 이를 붙들어 줄 수도 있고, 마음이 약한 분들을 위로해 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말만 하는 그런 상담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의 실상이 있기에 값진 섬김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깨어있음의 귀중성!
      우리 각자가 마음속에 깊이 있게 헤아려 주시기를 원합니다. 깨어있음의 귀중성!!
      Chapter III.
      주님 따라가는 자로
      김 창 조 형제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4)

      이 세상 삶 가운데 있을지라도
      나의 마음은 주님 한 분 바라보며
      언약적으로 주님께만 매여가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겠지만,
      나의 어떠함을 주목함이 아닌
      부활하신 주님을 주목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근거 삼을 때는
      마음속에 넉넉함과
      생기를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 굴복과 순종을 배워가는
      이 귀한 시간.
      나의 약함과 강함
      나의 모든 것 부인하고
      주님께 피하여 속하며
      주님의 이끄심을 따라가는 자로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이 땅에서 주님 연고로 작은 고난 있다면
      주님 믿고 인내하며
      나에게 이루어 주실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마음 두며
      이 시간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 속에서도
      주님 따라가며
      주님의 손 안에서
      주님의 기쁨 되는 자로 서 가고 싶습니다.
      Chapter IV.
      뚜렷한 예수사람으로
      임 경 오 형제님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벧전 1:8)

      주님!
      비록 제가 주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당신 얼굴빛 뚜렷이 압니다.
      지금은 저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지만
      내 마음속 당신 사랑
      더 뚜렷해지기만 합니다.

      나는 흐려지고 당신은 점점 뚜렷하게!
      오늘도 나 자신 돌아본다면
      당신이 흐릿해지겠지만
      나를 부인하고
      당신의 십자가 내 마음속에 새겨볼 때
      당신의 그 사랑 점점 더 뚜렷해져 옵니다.

      주님!
      당신 향한 이 마음 흐려지지 않게 하소서.
      못된 나는 사라져가고
      당신만은 더욱더 뚜렷하여서
      당신의 형상 내 안에 만드시옵소서.
      뚜렷한 예수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Chapter V.
      유일한 길
      배 현 화 자매님
      오늘도 내 유일한 길이 되시는 예수님!

      길가는 가운데 환경이 나를 불러 세우고,
      세상과 내 육도 잠시 쉬었다 가자 하지만
      주님!
      쉬어야 한다면 시편 23편 말씀처럼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주님 품 안에서만
      주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머무르고 쉬고 싶습니다.

      주님!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마음에 느껴지는 것
      나 스스로가 다스릴 수 없지만,
      주님이 비춰주시는 빛 가운데 보고 듣고
      마음으로부터 오는 주님의 원하심을 느껴가며
      길 걸어가고 싶습니다.

      오늘도 내 예수님 한 분 뵙고파
      올라가는 시온의 언덕,
      그 길 놓치지 않고
      힘차게 걸어가고 싶습니다!
      Chapter VI.
      가장 좋습니다
      김 지 연 자매님
      불러 본 많은 이름보다
      예수님 그 이름이 나는 가장 좋습니다.

      크게 들려오는 이 땅의 많은 말보다
      세미한 예수님 음성이 나는 가장 좋습니다.

      아늑하고 편해 보이던 나의 처소보다
      차가운 바닥,
      예수님과 지새웠던 그 한 밤이
      나는 가장 좋습니다.

      잡힐 것 같아 보이던 수많은 기회보다
      진정한 해답되어 주시는 예수님의 좁은 길이
      나는 가장 좋습니다.

      손짓하는 수많은 기쁨보다도
      예수님 함께하시는 십자가의 그 길이
      나는 더욱 좋습니다.

      예수님 없이 대단히 싸워보는 것보다
      그 품으로 피함이 나는 가장 좋습니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보다
      예수님 안에 느린 듯 멈춰선 그 시간이
      나는 가장 좋습니다.

      아무것 아닌 것 같아 소홀히 하고 있나요?
      모든 것 되어주시는
      예수님과의 시간이 나의 전부입니다.
      Chapter VII.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정 반 석 형제님
      군대가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전쟁이 일어나 치려 할지라도
      오히려 안연하였던 다윗.

      그가 구한 단 한 가지 일!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의 얼굴을 찾습니다.
      주님, 환난 가운데 건짐 받기만을
      구하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 오직 당신의 부활의 영토에
      서기만을 구합니다.

      미디안 광야에서의 철저한 잃음 속에서
      진정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게 되었던 모세처럼,
      나의 남은 길속에
      비록 잃음이나 빼앗김 있을지라도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렵니다.

      오늘의 나의 삶,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저 천성에 속한 것임을 잊지 않도록.

      주님! 오늘도
      이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소서.
      주님! 오늘도
      내가 주님 품에 안기므로 안연하렵니다.
      Chapter VIII.
      발바닥으로 밟는 이들
        여호수아 1장 3절 말씀에는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라고 하시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다른 복잡한 말씀은 없고 발바닥으로 밟는다고 하시었습니다.

        여호수아 5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부터 여호수아가 들은 아주 소중한 말씀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라는 것이었습니다. 너의 신발을 벗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신발을 벗으면 발바닥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 1장이나 여호수아 5장에서 암시하는 말씀은 꼭 같은 말씀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여호수아 1장에는 땅을 얻는다고 말씀하였고, 여호수아 5장에는 앞에 있는 전쟁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엄청난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 신발을 벗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주신 유업을 얻고, 주어진 길속에서 이기는 삶으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영광스런 삶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짤막한 말씀에 귀를 기울여 유의하여 보는 것이 참으로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입고 자기를 신고 이 땅을 걸어갈 때는, 이 세상을 어느 의미에 있어서 지저분하고 더럽다는 말로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귀중하고 더 소중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서 요단강 건너갈 때 그들이 자기를 입은 마음이었을까요? 자기를 신은 마음이었을까요?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이 그들을 겸비하게 만들어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는 그러한 마음으로, 하나님 경배하고 하나님 모신 마음이었을까요?

        민수기 24장과 25장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이 자기를 인식할 때는 유혹에 이끌려가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한 길을 걸어갔던 그 싯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버리고, 마치 흙인 양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버린 내 하나님을 인식하는 그 마음 자세로 요단강을 걷고자 할 때,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놀라움이 있었습니다.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내려놓고 내 주님 모신 마음으로만 요단강을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마치 마른 땅처럼 말입니다.

        나를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부정한 것입니다. 내 힘이 있고, 내 지혜가 있고, 내 강함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은 부정한 것입니다. 또한 대적을 인식하는 것은 두려움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쟁을 이긴다는 것은 다 벗어버리고 내 하나님만 인식하는, 신발을 벗은 마음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자로 내려놓고 내 하나님을 인식하는 마음입니다. 그곳에 있는 것이 빛이고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민수기 말씀에서 쓰러진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자기로 서서 모세에게 말하다가 문둥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내려놓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그 무엇인양 알았습니다.

        민수기 16장에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도 자기를 그 무엇인양 붙들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땅 속에 들어가고야 말았습니다. 민수기 20장의 모세와 아론도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자로서의 그 자세가 아닐 때,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하는 그러한 실격자로 전락하고야 말았습니다. 자기를 입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내려놓고 그곳에서 주님만 바라볼 때,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나를 바라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볼 때 그곳에 믿음이 있습니다. 주님 주신 빛이 있고 믿음이 있는 그 마음은, 대적이 우리 밥처럼 가볍게 보입니다. 그곳에 이김이 있습니다.

        슬로브핫의 딸 다섯 명은 다 어린 소녀들입니다. 민수기 27장에서 그들은 자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내 주님처럼 바라보고 모신 마음에는 다 확신이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해서 ‘이 광야는 이길 수 있다. 그리고 가나안복지 전투도 이길 것이다. 하나님은 틀림없으신 분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라는 믿음이 온 것입니다.
        모세도 잘 알지 못하지만 다섯 명의 소녀에게는 믿음이 왔습니다. 그래서 나아가서 구하였습니다. 여호수아 17장에서 그들은 기업을 얻게 됨을 읽게 됩니다.
        오늘도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버리고 내 주님만을 내 모든 것으로 앙망하며 바라보고 있는 이들! 이들은 발바닥으로 밟는 그 모든 땅을 얻게 된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이후에 여호수아 5장 말씀만 봐도 여호수아가 신발을 신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르긴 하지만 여호수아 6장에도 7장에도 그들은 다 신발을 신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만은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나를 내려놓고, 오직 내 주님만을 나의 모든 것으로 경배하듯 겸손히 바라보는, 이러한 자에게 믿음은 주어지고 이기는 자가 되고 경건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대적만 이기는 줄 아세요?
        어둠과 죄악도 이기고, 우리가 부딪친 모든 환경도 이깁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길가는 것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오늘 자기를 인식하는 사람 부정한 사람입니다. 자기를 인식하는 사람 패배자입니다.
        아이 성에서처럼 대적을 바라보고 가벼이 여겨도 실패하겠고, 대적을 바라보고 두려워해도 여리고 성의 승리는 없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간다면, 우리의 걸음걸음이 하나님의 유업과 내 주님 모신 영광의 길 걸어갈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언제나 벗은 발로 땅을 밟는 그러한 마음으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의 걸음이 주님만 모든 것 삼는 그러한 마음으로!
        영광스러운 천국까지 주님을 모시고 생생한 믿음을 가진 이 놀라운 걸음을, 평강 속에 걸어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Chapter IX.
        당신의 말씀은
        양 승 관 집사님
        주님!
        새롭게 주어진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지만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는 마음 품고
        당신의 말씀을 듣고자
        빈들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혼돈과 공허의 땅 위에
        명하여 주신 당신의 말씀은
        조화로움과 기쁨과 안식의 땅으로
        새롭게 창조하셨듯이

        사망과 흑암의 땅 위에서
        어찌할 바 몰라
        하늘 향해 바라보는 자에게
        당신은 말씀으로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길과 진리의 빛이 되어 주십니다.

        광야,
        시험당하시던 그곳에서
        기록된 당신의 말씀은
        어둠의 유혹을 이기고
        자기의 연약함에 무릎 꿇지 않는
        거룩한 그의 아들로 영광되게 세워 주셨듯이

        이날도 빈들에서
        내게만 허락해 주신 당신의 말씀은
        나의 강함, 나의 능력,
        나의 완전함이 되어 주시며,
        내가 누릴 영원한 축복의 유업이 되십니다.
        Chapter X.
        슬기로운 처녀
        조 병 례 집사님
        기름 등불 들고
        주님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처녀들

        세상의 어떤 것보다
        귀하고 소중한
        주님만을 가슴에 품고
        그리움의 심지 위로
        사랑이 타올라

        고요한 밤
        두 눈이 젖도록
        간절히 기다릴 때
        “보라 신랑이로다!”라는
        음성 들려옵니다.

        어두움이 둘러싼
        삶의 빈들판
        혼돈의 땅 끝에

        내 작은 영혼도
        세상이 꺼치지 못할
        뜨거운 사랑 품고
        그리움의 등불로 서서

        고대하던 나의 주님 오실 때
        혼인날의 기쁨에 참여하는
        믿음의 사람이고 싶습니다.
        Chapter XI.
        추 수
        박 성 우 형제님
        농부가 가을의 추수를 기다리듯
        오늘도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열매 맺기까지 기다려주시고
        끊임없는 사랑으로 보살펴 주심에
        참 감사합니다.

        때로는 서리 같은 세상의 번잡함이
        우리를 얼어붙게 하지만
        서리 맞은 단풍이 봄꽃보다 붉어지는 것처럼
        주님 한 분께 매여갈 때
        고난과 환난은
        주님 향한 붉은 마음을 더 짙게 새겨줍니다.

        종소리를 멀리 보내기 위해
        종은 더 아파야 하고,
        한 줌의 알곡이 되기 위해
        곡식은 온 삶을 헌신하듯,
        주님의 유익된 자로 속하기 위해
        오늘의 삶과 그 속의 고난들도
        주님의 타작마당에 벗어버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영토 안에
        자리 잡고 싶습니다.
        Chapter XII.
        빈들과 그의 성전
          우리가 이사야에서 읽을 수 있는 네 왕은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입니다.
          이들은 다 유다의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에 관해서 나름대로 생각은 하는 왕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짧게 말씀한다면, 웃시야 왕은 하나님의 성전을 가벼이 여기고 행하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아들 되는 요담은 하나님의 성전이 무서워서 자기 평생토록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요담도 팔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왕위에 앉아 있다가 이 땅을 떠나고야 말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아하스 왕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가를 자상하게 보여준 표적이었습니까?
          그렇지만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나의 임마누엘로 늘 모시고 사는 나름대로의 강함과 복스러움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왕은 되지 못했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내 하나님 보시기에 합한 성전된 삶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전된 삶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그에게 분명하여서 주변의 연합군들이 쳐들어와도 ‘내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신다.’는 이 강한 마음으로 흔들림 없이 넉넉하게 이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한편 주님 모신 경건 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므로 죄악 가운데서 무너져 버리는 그 처참한 모습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성전된 삶! 그 점이 있었을 때 임마누엘은 우리에게 현실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사야 36, 37, 38, 39장에서 읽을 수 있는 히스기야 왕은 때론 하나님의 엄청난 도움을 얻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의 결국도 별 것 없는 처참한 삶으로 끝나 버릴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을 이사야 39장에서 읽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전쟁과 질병의 위기 속에서 건져주실 뿐만 아니라, 십오 년이란 참으로 하나님 함께 하시는 구원의 손길 속에 살 수 있는 귀한 약속을 받았습니다만, 그의 남은 인생은 참으로 뜻 깊은 삶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히스기야 왕이 성전된 삶! 내 하나님을 모시고 내 하나님을 향하는 이 담대함과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는 참된 경건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 하나님은 십오 년의 약속도 하루하루를 놀랍게 영광스럽게 이어주실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도 영광을 주셨을 줄 압니다.

          어느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던 웃시야 왕을 비롯하여 네 왕이 다 하나님의 성전에 속한 생활을 참되게 살지 못하므로, 다 비참한 길로 간 것 같습니다.
          성전!
          그 점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라 부르시면서 놀랍고도 엄청난 은혜로 건져주시었습니다.
          오늘 이 어려움, 다음 또 다른 새로운 어려움이 있는 그 광야길에서 하나님께서는 함께하시며, 그들을 품으시고 구원하여 주시었습니다.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여 주시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약속의 땅에 도달하지 못하고 맙니다. 겨우 여호수아와 갈렙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나중에 태어난 이들이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다른 이유보다도 출애굽기 마지막 장에 나오는 마침내 하나님께서 보시기 원했던 성전에서, 회막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백성이 내 하나님께 참마음으로 속하고, 내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면서, 내 하나님을 모시고 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간다면, 광야에서 무너질 이유가 없습니다.
          내 주님 모신 강하고 경건된 삶으로 나아간다면, 가나안의 전투도 어려운 것 아니고 즐거움과 기쁨 속에 진행하여 나아가는 것이 가능할 줄 압니다.

          가나안 복지의 부요와 평화가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다시금 어두움과 죄악 속에 가라앉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아름답고 경건 되게 그리고 강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성전된 삶으로 나아갈 때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그의 백성을 향하여 우리 하나님께서 참으로 붙들어 세우시고자 하시는 것은 성전된 삶이었습니다.
          이 성전된 삶의 귀중함을 놓아 버린다면, 애굽에서 나온 그들은 하나도 하나님 보시기에 합한 자로서 삶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후일에 베벨론의 포로로 갔던 그들이 돌아왔을 때, 안정감이 있고 나름대로 괜찮은 넉넉한 삶이 있는 바벨론을 뒤로 두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근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학개서에서 읽을 수 있는 성전입니다. 에스겔서에는 주목해 보고 희망으로 바라보는 성전이었습니다.
          성전!
          그들이 주목해 보는 참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 볼 수 있는 이 애굽에서 나온 이들과 바벨론에서 나온 이들이 성전을 준비해 가는 과정을 볼 때, 애굽에서 나온 그들은 광야에서였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서 나온 이들도 학개서에서는 삭막하고 어려운 기근이 든 광야 같은 여건 속에서 우리 하나님을 향한 성전을 건축하기 원하셨습니다.

          참된 성전의 의미는 우리 가슴속에 스쳐가는 어떤 축제 같은 그런 종교의식이 아니라, 내 인격이 온 마음으로 속하고 온 마음으로 향하고 온 마음으로 살아갈 나의 중심의 뼈가 되는, 그와 같은 것임을 출애굽기 40장도 그리고 학개서 말씀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줄 압니다.

          나보다도 주어진 환경보다도 내 주님께 속함을 정말 귀히 여기고, 내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내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더 강하게 가져보는, 그것이 참된 성전입니다. 그것이 우리여야 된다는 의미인 줄 압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이 성전의 의미를 놓아버리고 있다면 하나님 백성의 의미는 다 상실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애굽에서 나아왔든 아니면 바벨론에서 나아왔든, 그래서 짓눌리고 어려움 있는 곳에서 나아왔든 아니면 평화롭고 안정감이 있는 곳에서 참된 의미를 추구하며 나아왔든, 그 결국의 귀중한 것은 성전됨에 우리의 의미를 두어야만 옳을 줄 압니다.
          성전! 그 점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요!

          하나님의 백성이 먼 열국에 흩어져 있더라도 절기를 좇아 예루살렘으로 오는 것은 성전 때문이었습니다.
          성전! 그 점에 관해서는 우리가 정말 온 마음을 묶어 볼만한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의 일생 속에 보잘 것 없는 베들레헴의 양치기로서 삶을 꾸려갔었던 그 초라한 다윗에게 세상에서의 영광은 무엇일까요?
          골리앗을 이긴 것입니까?
          유다의 왕이 된 것입니까?
          그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 입니까?
          아니면 그가 더 나아가서 주변에 있는 많은 나라들을 점령해서 나라를 넓히고, 그 모든 나라 전체의 왕이 된 것입니까?
          결단코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의 삶 가운데서 이런저런 과정은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어려운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주님 가까이 하도록 이끌어 주셨고 그 길이 구원의 길이고, 그 길이 다윗의 영혼이 참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임을 거듭거듭 각성시키고 있음을 읽게 됩니다.

          주님 떠나면 그는 이상한 사람 되고야 맙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께 속하면 주님 모신 평온함이 있고, 강함이 있고, 경건됨이 있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이 있습니다. 이곳에 이김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주신 참된 사랑으로, 환난 당하고 빚지고 억울하고 원통한 세상에서 발붙이기 어려운 그들의 진정한 이웃도 되어 줍니다.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어둡고 악한 것은 거절하고, 경건 되며 참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가 주님께 속함이란 것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의 진정한 다윗됨은 주님께 속하고, 그 주님을 앙망하고, 모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그분의 법을 좇고, 그분의 허락하심을 따르고, 그분이 주신 믿음 속에 살아가는, 진정한 삶이었습니다.

          어느 의미에 있어서 다윗은 자기 일생에 성전을 짓지 못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존전 앞에 나아가서 우리 주님께 속함으로 인하여, 마치 성전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뵈옵듯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고, 경배하고 있는 그러한 모습들을 시편에서 종종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성전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다윗은 벌써 경험한 것인 줄 압니다.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시편 63편의 성전이라는 말씀과 시편 27편의 성전이라는 이런 말씀들은 다윗이 아직도 성전을 짓지 못하였지만, 그의 영혼은 주님께 속하여 주님을 모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주님을 가까이 하므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이 자세를, 우리 하나님께서 성전처럼 귀중히 여겨 주시고 다윗은 이것을 정말 소중한 성전된 삶으로 알아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때가 되었을 때 솔로몬으로 인하여서 성전을 짓습니다마는, 그 솔로몬이 주님을 가까이 하고 참으로 주님을 모신 마음과 경배하는 마음으로 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이 실상을 놓
          아 버렸을 때, 솔로몬은 성전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우상에게 이끌려 가고 사람에게 끌려가는, 그런 이상하고 비참한 자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주님께 속하여서 내 주님 주신 은혜 속에서 주님을 한없이 기뻐하고, 그 은혜 가운데서 주님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경건 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며, 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서 보는, 그래서 은혜를 구하고 그래서 지혜를 구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마음 써 보는, 이런 진정한 이면적인 주님께 속한 성전된 삶이 아니라고 한다면, 칠년 동안 지은 성전이라도 솔로몬은 쉽게 벗어나 버리고야 맙니다.

          그리고 자기의 삶에 온통 관심을 두게 되고, 자기에게 관심 둔 그 삶은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이끌려가고 우상에게도 이끌려가며, 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런 자라기보다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하나님의 진노를 자아내는 그런 자로 전락해 버리는 줄 압니다.

          이제 우리가 조금만 더듬어 본다면, 사실은 출애굽기 광야 생활에서도 우리 하나님 가까이 하는 삶으로 이끄시고, 참으로 주님 가까이 하도록 이끌어 주신 것은 진정한 성전된 삶으로 인도하신 길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나온 이들도 기근 속에서 참마음으로 내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내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 짓고자 하는 이 뜨거운 마음으로 산에 올라가 나무 잘라다가, 초라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는 마음으로 성전 짓고자 하는 마음!

          학개서 뒷부분에 나오는 내용처럼, 내 마음이 나 자신에게 기울어지지 아니하고, 내가
          주려 있을지라도 떡이나 국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다른 어떤 식물에 끌려가지 않는, 쉽게 말하여서 나의 육신의 원하는 것에 이끌려 가지 아니하고, 주님을 중심 삼고 주님께 이끌려 가는!
          오늘의 이런저런 어려움을 십자가로 여기면서 짊어지고서라도 주님을 따라가는 이점이 얼마나 귀중한 성전인가를!

          사실 그래서 학개서 말씀도 우리의 이면적인 마음이 주님과 가까우므로 주님을 위하고, 주님을 섬겨가는 성전된 삶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줄 압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성전의 의미는 벌써 조용히 깊은 마음으로 더듬어 본다면 우리가 알아차릴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빈들과 그의 성전”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헤롯 성전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그 곁을 지나갈 때는 그 성전의 웅장함에 감탄하여 “선생님! 좀 보세요!”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사십육 년 걸려 지은 성전인데 그 당시도 완성된 것이 아니라 지어져 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학개서 성전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이 어려워서 짓다가 멈추어선 모습이 아닙니다. 그 성전을 헤롯 성전이라고 부를만큼 헤롯왕이 넉넉하게 가진 것으로 지어가기에 그것은 사십육 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지어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헤롯을 ‘여우’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성전을 지어줌으로 하나님 백성들의 마음을 이끌어 가는 교활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장에서 “헐어버리라. 다 헐어버리라. 내가 삼일 만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곳에 주님께서는 그런 성전이 아닌, 진정 부활하신 주님!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 자신이 성전되어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을 주목해 보아야 할 줄 압니다.
          이것은 정말 엄청난 것입니다!
          헤롯 성전. 그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나름대로 베드로 성당이나 저 유럽에 있는 큰 성전처럼, 사람들은 그렇게 크게 만드는 성전을 그 무엇인양 종교성으로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예수님 빈들에 계시지만, 그곳은 사람 사는 곳도 못 되고 그 무엇도 없지만,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의 말씀은 그들의 마음을 얼마나 새롭게 해 주었을까요?

          주님의 말씀은 그들의 영혼만 새롭게 한 것 아니었습니다. 때론 이런저런 질고로 병들어 쓰러져 가는 그들까지 새롭게 세워주시었습니다. 주님은 피곤하여 먹을 것 없고, 주린 배로 힘들어하는 그들까지도 먹여서 보내주시었습니다.

          빈들에 아무 가진 것 없이 예수님께 나아왔지만, 주님께 속하여 있으므로 마음도 맑아지고, 어느덧 예수님이 내가 의지하고 내가 사랑하며 내가 모시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분처럼 마음에 느껴지는 이것은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것일까요!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벳바게 맞은편 마을에 있던 어느 사람이 주님을 위하여 사람이 타지 않은 나귀를 준비하였는데 예수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그분의 영혼이 어떠했습니까? 주님의 제자들도 그분을 잘 알지 못하고, 그분도 예수님의 제자들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보아서, 예수님을 많이 따라 다닌 분은 결단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분은 아마도 빈들에서 아니면 또 다른 곳에서 우리 예수님께 나아가서 주님의 말씀을 들은 분임에는 틀림없을 줄 압니다.

          마음에 진정한 것 없고, 그 무엇 없는 그 마음이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으로 임하여 오는 그의 말씀을 들을 때, 영혼이 맑아지고 영혼 속에 주님이 내 마음속에 심을 수 있는 내 주님, 내가 품고 싶은 내 주님!
          어인 일인지 의지하고 싶은 내 주님, 사랑하므로 마음에 가지고 싶은 내 주님!!

          이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신 놀라운 역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는 우리 예수님 말씀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심으로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도 마음속에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품고 산 것 같습니다.

          이상하리만치 세상의 염려가 그의 마음을 점령하지 못하고 세상의 유혹과 어두움이 그 마음을 점령하지 못하고, 그의 마음속에 주님 모신 그 밝은 마음으로 나의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영혼은 밝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끄러움 없는 마음으로 살아오면서, 이젠 주님 위하여 조그마한 가난한 삶이지만 섬김까지 준비하고 싶어했던 그런 자인 줄 압니다.

          여러분!
          이런 생활은 다른 말은 안 해도 벌써 주님을 주님답게 모시고 살고, 주님을 주님답게 경배하며 살고, 나의 주님을 섬기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자를 무슨 말로 표현할까요? 벌써 주님께 합한 성전이라고 할 수 있을 줄 압니다.

          내 영혼 속에 주님이 내 주님 아니시고,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나의 힘 안 되신다면, 우리는 다 짓밟힌 생활 되고야 맙니다. 원하든 원치 아니하든 우리는 어둠과 죄악과 갖가지 세상의 그 무엇에 짓밟히고야 맙니다!

          주님을 내 주님으로 모신 그 마음은 이렇게 짓밟히지 아니하고 내 하나님 경배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싶은 마음까지 돋아납니다.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성전된 마음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준비한 것은 안 받으시고, 사무엘상 15장의 이런 번제와 제사는 안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 보지 않은 나귀 한 마리를 그 사람의 사랑으로 주님께 드리고자 했을 때, 주님은 그것을 기꺼이 받으셨고 그것을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신 줄 압니다. 그의 섬김은 주님 앞에 소중한 섬김이 되었다는 뜻인 줄 압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우리가 조금만 헤아려본다면 주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마음이나, 예수님 위하여 다락을 준비한 사람의 마음이나, 다 이와 같이 주님을 주님답게 모시고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참으로 성전된 마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복음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예수님의 성전되심을 잠깐 말씀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엄청나게 소중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헐어버리라. 내가 삼일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할지라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성전에 포함된다면 가능합니다.
          성전에 들어가기 앞서서 우리를 정결케 씻어 주시는 주님의 보혈의 은총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나간 허물과 죄를 다 씻어주시는 놀라우신 보혈의 은총이, 십자가로 말미암은 보혈의 은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을 향하여 적합하지 않는, 우리 하나님께 정말 받으심직 하지 못한 못된 우리 자아! 정말 잘못된 우리 자아! 우리 속에 선한 것 거하지 않는 우리 자아! 이것을 처리해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용서해 주시고 구속해 주시는 은혜도 있거니와 이와 같은 못된 나를 불살라 버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우리 주님의 무덤으로 나를 장사지내 버릴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씻어주시고 지나간 모든 허물과 죄를 담당하여 주시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 십자가는 내 하나님 보시기에 적합하지 않는, 하나님 앞에 기쁨 되지 못하는, 우리 하나님께 참마음으로 순종하기에 적합하지 않는, 이 못된 나를 처리하여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이 그 무엇으로도 이런 것에서 자유롭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어떤 댓가를 지불한다 해서 지나간 죄를 용서받을 수 있나요? 아닙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의 피로 인하여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함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합한 자가 되어가나요?

          하나님 앞에 받으심직 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 경건 되며, 우리 하나님 앞에 신실하며, 우리 하나님 앞에 의로운, 이런 아름다운 자가 될 수 있나요?
          우리는 금식함으로도 불가능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아니 됩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만이 이런 우리를 제거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삼일에 일으키리라. 삼일에 일으키리라.”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 마음이 연합할 수 있으며, 예수님의 생명에 동참한 자로, 예수님의 그 밝으신 빛 가운데 속한 자로, 주님과 함께 새 피조물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할 수 있는 참된 성전인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회막 지성소 안에 속죄소가 있나요?
          그 안에 법궤가 있었나요?
          그 법궤 안에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었나요? 그 법궤 안에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있었나요? 그 법궤 안에 십계명을 기록한 두 개의 언약의 돌이 있었나요?

          그러나 여러분!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속하다 보면 속죄소를 의미한 주님의 구속의 은총은 우리에게 가능하고요. 그리고 놀라우신 주님 안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주님의 심장이 우리 법이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
          오늘도 주님과 나의 사귐 속에 감추인 만나로서, 참으로 우리 주님 주시는 새로운 우리 영혼의 만나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됩니다. 이곳에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처럼 말입니다.

          오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이 실존을 가지고 우리 하나님을 향하여 정말 놀라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헤롯의 성전은 백성들의 마음을 겉으로만 잡아놓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인하여서 부활의 영토로 가신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은 오늘 여러분이 참된 마음으로 주님의 구속을 원하고, 못된 나를 처리해 주기를 바라고, 자기를 부인해 버리고, 참마음으로 나의 주님께 속하고자 한다면, 오늘도 살아계신 성전된 주님께 속함을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이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곳에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다.
          이곳에 내가 살아갈 생명의 법이 있습니다.
          이곳에 오늘도 주님께서 주신 살아있는 감추인 만나가 있습니다.
          나의 주님 모신 행복한 마음과 만족한 마음으로,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값진 우리로 하루하루 시간시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줄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빈들과 그의 성전”이라고 했을까요?
          오늘도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조용하게 빈들로 나아가서 십자가의 그 은총과 주님의 부활하심을 묵상하여 갈 그 때,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은 “내 안에 거하라!”라고 불러주실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그의 말씀을 지키고 그의 원함을 이루어 드리며, 그의 명하심에 순종하는, 성전된 삶을 여러분과 제가 놀랍게 경험할 수 있을 줄 압니다.

          보이는 이런저런 것은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전의 의미는 결단코 아닙니다.
          주님! 부활하신 주님 자신입니다.
          그 안에서 오늘도 주님의 어떠하심을 힘입어 갈 때 우리가 약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아니하고, 은혜 속에 강하고, 그의 사랑의 교제 속에서 행복하고, 하나님 앞에 기쁨 되는 그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능력으로가 아닙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은 오늘도 여러분과 저에게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삶을,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칭찬받을 만한 값진 삶을 가능케 해 주시는 줄 압니다.

          새롭게 날마다 조용히 빈들로 나아가서, 주님과 나 사이에 이 새로운 사귐 속에 성전된 주님께 속하고, 나의 주님 주신 은혜와 그의 붙드시는 생명 속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의 성전으로 살아가는, 한 분 한 분 되시기를 원합니다.

          빈들과 그의 성전!
          조용히 더듬어 가므로 놀라운 삶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유다의 왕이었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이 왜 다 실패했는가는 성전에 적합하지 않는 자였습니다. 다윗이 아름답고 강하고 경건하였을 때는 주님께 속하였을 때였습니다.

          오늘도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께 속하여 가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기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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