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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조그만 나의 빈들판

2012-10-06 / 59 회차

10월 조그만 나의 빈들판



가을 편지

윤 선 교 목사님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은
주님, 우리를 향한 보고픈 당신의 얼굴입니다.

고운 단풍으로
섬세하게 물들여 가는 따뜻한 가을 햇살은
주님, 우리를 향한 말 없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알알이 영글어 가는
대자연의 풍성한 결실은
주님, 우리를 향한 넉넉한 당신의 마음입니다.

주님 보좌 그리워 잠 못 이루는 밤,
내 영혼에 소리 없이 내리는 새벽이슬은
주님, 우리를 향한 자비로운 당신의 손길입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어느새 우리의 마음은 꽉 찬 가을 편지 되어
주님, 채부(遞夫)보다 더 빨리
당신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 작은 마음에 살아주신 주님

김 훤 자매님

주님, 보이는 것이 제겐 전부가 아닙니다.
주님, 들려지는 것이 제겐 전부가 아닙니다.

주님, 저의 맘속에서
저를 위해 살아주시는 주님을 봅니다.
주님, 주님을 위해 머리 숙인 기도 속에서
주님을 알아갑니다.

주님, 목사님과 식구님들의 기도와 섬김 속에서
주님, 제 맘속에서 울어주실 때도
그 아픔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요.

저도 주님을
더 많이 찾고 가까이하고 싶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 푸르른 하늘 향해 말입니다.

새벽 이슬

영동에서 김 현 섭 집사님

주님!
새벽 시간 창을 열면
새벽이슬이 저를 온통 사로잡습니다.
새벽별 되신 주님께
오늘도 무익한 나를 맡기고 싶습니다.

주님!
하늘 은혜의 이슬로 이 땅이 세워지듯
이 문둥이인 나,
오늘도 하늘 이슬을 간구합니다.
우리가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도
찔레 울타리보다 못한 삶입니다(미가 7:4).

주님!
주님의 그 이슬이 나의 삶을 적셔 주시고
주님의 그 이슬이 나의 호흡 되어 주시고
그 이슬이 씨앗 되어 주님의 열매 맺기 원합니다.

주님 향해

유 오 순 집사님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엇에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거하라”(미가서 6:3)

주님!
십자가에 나의 못된 육을 처리해 주시고 부활로 새롭게 옷 입혀주셨음에도 주님 때론 주님을 괴롭게 하는 저를 봅니다.

주님!
끊임없이 나리우는 밤이슬 같은 은혜로 저를 세우셨음에도, 그 사랑 가슴 조이며 길 가다가도, 주님 마음 헤아리지 못해 주님 마음 괴롭게 합니다.

주님!
이러할 때마다 탄식하시며 간구하시는 주님….
이 지나는 삶과 알지 못하는 앞길, 주님 얼굴 보이지 아니할 때도, 주님 찾으며 제가 죽어야 할 자임을 고백합니다.

다시금 주님 얼굴 찾으며 주님 은혜 속에 젖어갑니다. 주저앉는 걸음 곤두세우고 늘어뜨렸던 손도 정돈해봅니다.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 시온에서 주님 마음 괴롭히지 않도록 기쁘시게 할 것을 헤아려봅니다. 주님 안에서 돕는 자로 주님의 맘을 다시금 흐트러지지 않도록 말입니다.

주님!
제가 서 있는 곳이 후미지고 골짜기일지라도 저 가냘픈 코스모스가 하늘만 바라고 있는 것처럼 주님 향해 짙은 맘으로 주님 그리워하며, 주님만 바랄 것입니다.

조그만 빈 들판

오늘의 빈 들판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해에 들어서서 빈 들판이 제때 시간을 맞추지 못한 것에 관해 먼저 여러분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지난 7월에 나왔던 빈 들판도 조금 늦은 감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조금 늦은 10월 초순경에 빈 들판이 나아가게 됨에 대해서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9월의 정오의 묵상 시간을 생각하다 보니 여러분에게 마음에 여유가 있을 것 같아서 시간을 조금 늦추었습니다. 넓은 이해 있으시기를 먼저 구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엘리야가 열왕기상 17장에서 사르밧 과부댁으로 가기에 앞서 그가 어디에 머물러 있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 나라 사람과 아합 왕도 엘리야를 찾지 못하겠지만, 주님께서 지켜보시는 그 엘리야를 여러분과 저에게 성서에서 말씀하여 주시기에 그는 그릿 시냇가에서 주님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먹는 것은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살았던 생활보다 못하였으면 못하였지 나은 것 없었습니다. 그래도 주님과 함께란 이 행복은 그로 하여금 맑고 상쾌한 마음으로 그리고 뜨겁고도 행복한 마음으로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신 줄 압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흐르는 시냇물 마시고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과 고기 먹으면서 하루하루 삶을 꾸려갔던 그 엘리야, 주님과 함께란 삶의 뿌리 속에 행복과 자유를 갖고 인적이 드문 그곳에서 삶을 보내었던 엘리야, 주님께서 사르밧 과부댁으로 가도록 부르시었습니다.

우리는 갈멜 산으로 나아간 엘리야가 어디에 있다가 나아갔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아합 왕은 몰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몰라도, 우리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댁에서 3년 넘는 긴 기간 동안 머물러 있다가 나아간 줄 압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나의 주님 모신 경건된 생활,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사귐 속에서 그는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갈멜 산에서 내 하나님의 엄청난 그 사역에 동참했던 엘리야. 주님께 뿌리내리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며, 나의 주님 모신 것이 생활화된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 갈멜 산에서 일어난 그 놀라운 사건 앞에 사람의 마음이 안정감 있게 있기는 쉽지 아니할 것 같습니다.

광야를 주님과 함께 걸어왔으며 주님과 함께 요단 강 지나와서, 이제 주님과 동행하므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던 그들도, 그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 앞에 그들의 마음이 안정을 찾지 못했음은, 다음 길갈로 나아가는 그들의 자세가 주님과 그들 사이에 정돈되지 못하였음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엘리야의 생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님과 함께’라는 이 조용한 삶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알아야 할 줄 압니다. 갈멜 산이라는 엄청난 사역만 우리가 추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놀라움이 임하여 와서 수많은 백성이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오는 이 엄청난 사건보다 더 귀중한 것은, 우리 각자가 나의 주님께 뿌리내리고 조용히 주님과 나와 함께 사는 이 삶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갈멜 산의 사역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깊은 관심을 두고 다가온 것 사실이겠지만 그러나 진정한 주님의 벗 되었던 엘리야를 잃어버린 주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분명히 그릿 시냇가에서 엘리야는 주님의 벗이었고 엘리야의 벗은 주님이었습니다. 사르밧 과부댁에서도 엘리야는 주님이 벗이었고 엘리야의 벗은 주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멜 산을 통과하고 난 이후에 그 엘리야와 진정한 벗 된 사귐을 잃어버렸을 때, 주님의 아픔은 어떠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돌아온들 엘리야처럼 그렇게 주님께 다가설까요?
엘리야처럼 그렇게 주님께 속하여서 나의 주님 얼굴 구하며 주님과 함께를 기뻐하는 사람들이었을까요?
아가서에서 ‘왕후도 많고 비빈도 많고 수많은 배후의 사람들 많아도 나의 신부는 오직 하나이구나!’라고 하신 말씀 가운데서 주님의 그 마음을 표현하듯, 엘리야의 마음은 주님을 향하여 다가서 있는 마음이 정말 그러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엘리야가 주님을 향하여 진정 그러한 마음으로 다가서지 못하였을 때, 엘리야는 안타깝게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누운 자처럼 누워 있었습니다. 그 엘리야가 천사가 가져다주는 떡과 물을 마시고 또 가져다주는 떡과 물을 마시고 사십 주야로 행하여 호렙산에 도달하였을 때,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가슴 아픈 마음이었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편 51편의 다윗의 통회는 가슴 아픈 통회였습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친근한 마음을 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솟아나는 생명수의 맑음과 우리 주님 주시는 그 의로운 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그리고 이웃들 보기에도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의 영의 감동하심을 좇아 주님과 동행하며,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그 삶을 가졌으며, 그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시시각각으로 끊임없이 기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슴속에 주님 주시는 자원하는 사랑의 마음을 좇아, 내 주님 모시고 섬겼던 그 친근한 주님과의 사귐을 잃어버렸던 다윗! 다윗이 주님을 잃은 동시에 주님도 다윗을 잃은 줄 압니다.

이것은 정말 가슴 아픈 사건이라고 말해야 될 줄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주님을 잃은 순간에 주님도 나를 잃었다는 것을 기억해 보십니까?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갔을 때, 이 ‘내 아들은 죽었으며 이 내 아들은 잃어버렸다.’라고 말한 아버지의 마음은 떠나간 아들보다도 가슴 아픔을 훨씬 강하게 느끼고 있었음에 사실일 것 같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사십일 동안 걸어왔던 엘리야에 대해서 참으로 반가이 맞아 주는 말씀이라기보다는 가슴 아픈 말을 토하여내시는 우리 주님!

여러분!
그 길을 모르셨나요? 그 길을 모르셨나요?
어디 천사가 자기 마음대로 떡과 물을 가져다주었나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 길을 말없이 지켜보신 주님!
주님은 그 아픈 마음으로 그 얼굴을 가리우시고, 그 음성을 멈추시며, 친구와의 사귐을 멀찍이 지켜보시었던 주님!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과 나의 사귐을 가볍게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프고 통탄할 일인가를 우리는 마음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시간, 조그만 빈 들판이라는 이 귀중한 의미를 곱씹기 위해서 열왕기상 21장 말씀을 통하여 빈 들판의 중요한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열왕기상 21장에서 아합 왕이 이세벨의 간계를 근거 삼아 나봇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이제 그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내려간 때였습니다.
이곳에서 엘리야가 아합 왕을 향하여 다가서는 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명하신 명령을 좇아 나아간 줄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곳에서 엘리야가 이번에는 어디서 나아갔습니까?
열왕기상 17장에서 이스라엘 나라를 향하여 ‘내 말이 있기 전에는 이스라엘에 우로가 내리지 아니할 것이라’라고 말한 엘리야가 길르앗에 우거하였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릿 시냇가에 있었으며 갈멜 산에 나아가기 전에 사르밧 과부댁에 3년 넘게 머물러 있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내려가는 아합 왕을 향하여 다가서는 엘리야는 도대체 어디서 왔다는 말입니까?


그릿시냇가, 아닙니다.
길르앗이라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사르밧 과부댁일 리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서 엘리야가 왔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열왕기상 21장 말씀을 읽어볼 때 도무지 그 내용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주목하여 뚜렷하게 짐작해 볼 내용은 있는 줄 압니다.
그것은 주님께 속함이라는 살아있는 관계 속에 삶을 꾸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로뎀나무 아래 눕듯이 그렇게 쓰러진 삶을 살다 온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나의 주님과의 생생한 삶속에 있다가 마침내 주님의 보냄을 받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사람으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심판을 가지고 나아간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가 어떻게 지내왔을까요?
그릿 시냇가의 생활을 우리가 아는데요. 길르앗에 우거했다는 이 한마디 속에 그는 참으로 요단동편에서 내 하나님 모신 강함으로 살았음을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가 사르밧 과부댁에서 얼마나 경건하게 살았으며 내 주님 모신 삶을 살았는가는 우리가 넉넉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엘리야가 지금은 도대체 어디서 왔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열왕기상 19장과 열왕기상 20장을 지나고 난 이후에 21장입니다. 우리가 열왕기상 20장만 읽어 보아도 그것은 짧지 않은 세월이 지나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합 왕이 이제 갈멜 산을 지나고 난 이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32명의 왕을 거느리고 자기를 향하여 에워싸듯 공격하여 올 그때, 그가 하나님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그 권위를 좇아, 마침내 아람 군대를 무너뜨렸으며 그들을 패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이기었던 아합 왕, 그리고 무너져 갔던 그들이 모든 군사를 보충하여서 다시 한 번 공격하여 와서 아람 군대와 두 번째 싸움을 치렀을 때도 또다시 이기었던 아합 왕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아람 군대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두고 난 이후에 그들이 물러가서 그들의 전열을 준비하고 난 이후에 다시 한 번 공격하여 온다는 것은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음이 틀림없을 줄 압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처음 전쟁을 통하여 혼이 난 줄 압니다.

‘이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다. 저들의 하나님이 함께하여 주신다.’라는 것을 느껴 본 두려움이 꽉 찬 마음이었는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서 그런 마음을 잊어버리고 그들의 신을 부르며 나른해진 그 마음 가운데 다시 한 번 그 어두움의 마음이 그들에게 다가온 줄 압니다. 공격해 볼만하다는 어두운 마음 말입니다.
그러므로 열왕기상 20장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러간 줄 압니다. 열왕기상 21장 말씀은 '그 일 후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엘리야는 도대체 그동안 어디에서 살았다는 말입니까?
엘리야는 어떻게 지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그 사람의 사는 삶이 그의 인격을 나타낸다고 말해야 할 줄 압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3년 동안의 드러난 엄청난 사역보다 나사렛 목수로서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조용한 삶을 꾸렸던 평범한 그 삶을 등한히 여긴다면, 이것은 3년 동안의 그 놀라운 사역에 대한 근본적인 뿌리를 캐어내지 못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엄청난 이 역사는 바로 주님께서 나사렛 목수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더불어 살아간 삶이 하나님과 더불어 그 엄청난 사역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신 줄 압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서 짧지 않은 긴 날 동안 영화롭게 살다가 백십 세에 이 땅을 떠나갔습니다만, 하나님 보시기에 성실하고 빈틈없이 아름답게 살 뿐만 아니라 애굽 사람들이 보아도 존경스러운 삶을 살아간 것은, 종살이 감옥살이에서 나의 주님 모신 삶을 그의 뼛속 깊이 새기었기 때문인 줄 압니다.

삶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엘리야를 생각할 때 갈멜 산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그가 드러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이 엄청난 예언에 앞서서, 주님과 함께 사는 이 삶을 주목해 보는 것이 귀중합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남조 유다 사람으로 북조 이스라엘에 가서 예언하는 것은 짧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과 더불어 양 떼 치는 사람으로, 뽕나무 배양자로, 주님과 함께 사는 생활은 짧지 않은 삶이었습니다.

내 주님 모신 삶이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자기 사람으로 인정하시며, 그를 내세워서 내 하나님의 뜻을 우리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신 줄 압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과 함께 나의 삶을 정돈하여 보는 빈 들판의 의미는 엄청나게 귀중한 일인 줄 압니다.

사실 엘리야는 주님을 떠날 수 없는 마음으로 그릿 시냇가에 가서 주님께 이끌려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10장 말씀처럼 언제나 목자의 음성이 있어서 그 음성 따라갈 때 주님과 함께 사는 생활은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12장 말씀처럼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고 난 이후에 ‘나를 섬기는 자는 나 있는 곳에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여 주시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릿 시냇가를 고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라.’라고 하시면 주님과 함께 그곳에 머물기 위해서 주님을 따라가야 하므로 그렇습니다.

아무리 주님과 함께 조용하게 지내는 그 삶이 좋아도 주님께서 ‘갈멜 산으로 가라.’ 하시면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함께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므로 그러합니다.

사실 우리가 출애굽기 40장과 민수기 9장의 주님을 모신 완성된 회막처럼, 내 주님 모신 이러한 영혼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나 스스로 머물 수 없습니다. 때로는 하루도, 때로는 이틀도, 때로는 1주간도, 때로는 한 달도, 때로는 1년도, 아니 때로는 수년도 주님과 함께 머무는 마음으로 동행하며 길가야 될 줄 압니다.

우리가 열왕기상 21장의 엘리야를 주목해 볼 때 두 가지 값진 의미를 명료하게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은 '너는 일어나 내려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그릿 시냇가에 있는 엘리야에게 ‘일어나 내려가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 시돈 땅 사르밧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르밧에 머물고 있던 엘리야에게 내려가라 말씀하신 적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내려갈 땅이 아니므로 그러합니다.

‘아합 왕 앞에 보이라.’는 주님의 명하심에 순종하여 나아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열왕기상 21장이나 열왕기하 1장 말씀을 읽다 보면 엘리야에게 ‘너는 내려가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왕기하 1장에서 ‘내려가라’고 말씀하실 때 엘리야는 산꼭대기에 앉아 있는 엘리야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 볼 수 있는 값진 것은, 엘리야의 삶이 흔들림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산 위에!’ 산 위에 자리 잡은 자로 있었음에 틀림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서 ‘일어나 내려가라.’는 말씀이나 열왕기하 1장에서 ‘일어나 내려가라.’는 말씀이나 같은 의미로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제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나 사르밧 과부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솟아오른 그 어떤 곳에 자리 잡아 온 자임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곳! 조용한 그곳!!
나의 주님을 향하여 내 주님 모신 마음으로 솟아올라 있는 엘리야! 그가 사람 만나기를 좋아할까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람과의 대화를 좋아할까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의 주님 향하여 솟아올라 내 주님 향하는 마음, 내 주님 모신 마음, 나의 주님과의 끊임없는 사귐 속에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엘리야의 마음이었을 줄 압니다.

열왕기상 21장에서 우리가 또 한 가지 얻을 수 있는 값진 것은 엘리야가 아합 왕의 궁전과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너는 내려가라.’
그렇다면 어디로 내려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이사야 7장 말씀을 읽다보면 아하스 왕이 지금 예루살렘성을 벗어난 저 큰 길가 세탁자의 밭이 있는 그 곁, 큰 못이 있는 그 곁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그 아하스 왕을 향하여 이사야 선지자를 보낸 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지칭하시면서 ‘그리로 가라.’고 말씀하여 주시었습니다. 이사야가 그곳에 나아가는 것은 어려운 길이 아니었으며, 결코 알지 못하는 길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에 있는 빌립집사에게 ‘너는 가사로 가는 광야로 가라’고 하실 때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주님과 동행하며 길 갔습니다만, 한참 길가고 난 이후에 마침내 그 앞을 지나가는 병거를 볼 수 있었으며, 성령께서 가라사대 ‘나아가라’고 하신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길을 맞추어서 만나도록 조정하여 주신 줄 압니다. 어쩌면 에디오피아 내시가 병거로 오고 있는 그 속도와 빌립집사님이 일어나서 주님은 성령님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걷는 속도를 맞추신 줄 압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21장의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지금 저가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내려갔다.’라고 하신 말씀은 그가 포도원으로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내려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봇의 포도원으로 내려가라는 뜻인 줄 압니다.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다는 말입니다. 왕궁과의 거리가 절대 먼 거리가 아닐 줄 압니다. 그 산에서 내려와 다가서기에 그렇게 먼 길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목해 볼 수 있는 것은 그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내려가서 아합 왕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나봇의 포도원 근처였을 줄 압니다. 그러면 왕궁이 가까운 곳이었다는 뜻인 줄 압니다.

그는 그곳에서 아합 왕을 향하여서 ‘네가 죽이고 취하였느냐?’그리고 장차 하나님의 심판이 그 집안에 임하여 올 것을 남김없이, 그리고 가감 없이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주목하여 볼 수 있는 값진 의미를 찾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내려가라’는 이 말씀 가운데 엘리야가 자리 잡은 곳은, 솟아오른 곳이었으며 인적이 드문 조용한 산이었음이 틀림없었을 줄 압니다.
그러나 그곳은 나봇의 포도원과 그렇게 거리가 먼 곳이 아닙니다. 아합의 궁전과도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적이 드문 곳, 그리고 쉽게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엘리야가 자리 잡고 있으면서 내려다보고 살았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가 처한 그 외로움 속에서 주님 앙망하며 주님으로 충만케 된 줄 압니다. 주님으로 충만한 줄 압니다. 주님으로 흡족한 줄 압니다.

끊임없는 사귐 속에 하늘의 이슬은 그 영혼을 적셔 준 줄 압니다. 가슴에 끓어오르는 말씀은 주님을 향하여 더욱 사랑하며 주님을 위하여 신실하게 살아갈 마음이 더 강하였을 것 같습니다.
내 주님 한 분 모신 마음으로 넉넉한 마음인 줄 압니다. 그는 아합 왕의 궁전도 내려다보고 살았을 것 같습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사는 생활도 내려다보며 살았을 것 같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만나주시는 부활의 영토에 서서, 영광스런 보좌의 주님을 끊임없이 나의 사랑하는 주님으로 앙망하며 끊임없이 바라보며 산다면, 우리는 세상의 왕이라도 내려다볼지언정 두려워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들을 결단코 부러워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의 주님 모신 마음과 나의 주님과 함께하는 이 흡족한 마음과 솟아오른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서갈 수 있을 줄 압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절부터 5절은 이 땅을 떠나고 난 이후의 일일까요? 아니면 이 땅에서 주님을 모시고 살아간 성도의 발자취일까요?

여러분!
이 땅에서 주님을 그렇게 모시고 그렇게 살아간 이들인 줄 압니다. 엘리야를 줄 세워 놓는다면 이들 가운데 설 수 있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어린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선 자입니다. 부활의 영역에서 내 주님과 함께 일어선 자입니다. 천국에서는 섰다고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 땅이기에 주님을 향하여 서 있는 마음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들은 어린양과 하나님을 끊임없이 주목하기에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을 쓴 것이 있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땅이기에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정절 있게 따라가는 것을 귀중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있기에 수많은 소리가 들려와도 거기에 귀 기울이지 아니하고 주님의 음성 듣고서 새 노래 부르는 이 삶을 귀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이기에 나의 주님께 속한 어린양과 하나님께 속한 첫 열매로 주님의 것으로 고백하는 이 마음이 귀한 줄 압니다.
이 땅에 있기에 우리가 주님의 빛 가운데서 그 생명 속에 살아가기에 거짓됨 없고 흠이 없는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귀중하게 여겨질 줄 압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나의 주님께 속하여 서서, 아가서 4장의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표현되어 있는 갈보리 십자가의 죽음의 큰 산과 그 이후에 온 부활의 조그만 유향산으로 표현되어 있는 우리 주님의 부활의 영역에 솟아올라야 할 줄 압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아주 먼 곳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주님 안에서 나의 주님 사랑하며 내 주님 앙망하는 그 마음 있어서 오늘 주님과 함께 이 영토에 자리 잡고, 때론 보냄 받은 길로 걸어간다 할지라도, 나의 주님 바라보는 그 눈길이 강하고 내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강하여야 할 줄 압니다.

엘리야가 내려갈 때는 주님의 사람으로 강한 마음을 품고 내려가듯, 우리가 주님을 향한 이 강한 눈길과 강한 마음의 순종을 가지고 나아가 본다면, 주님께 속한 그의 천사 같은 사람으로 우리가 순종하며 길 가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줄 압니다.

엘리야!
그는 갈멜 산의 그 우렁찬 소리 속에 머물고 싶지 아니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기를 잃을 뿐이었습니다.
그가 조용하게 속하여서 다시 한 번 내 주님께 속함의 솟아오른 동산에 서서, 솟아오른 산봉 위에 서서, 나의 주님 앙망하면서 내 주님 모시고 서 있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은 것이 엘리야의 진실된 중심이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이 땅에서 힘 있는 그의 사람으로, 때론 우리를 보내실 적마다 그의 살아있는 빛과 소금으로, 나의 주님 보시기에 온전된 그의 걸음으로 길 갈 수 있으려면, 오늘 우리가 자리 잡은 부활하신 주님의 영토 안에서 시온 산처럼 솟아올라야 합니다.

나의 주님의 영토에서 오늘도 영광스러운 보좌의 주님을 가까운 나의 주님으로, 내가 정말 사랑하며
부르는 나의 주님으로 모실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선 자로, 우리 주님과 동행하는 자로, 우리 주님께 이끌리는 자로, 여러분과 저의 생활이 흔들림 없이 길 가는 것이 가능할 줄 압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이 내용을 통하여
엘리야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장소는 말하지 않더라도 능히 짐작해 볼 수 있는 이 내용을 주목해 보면서, 오늘 여러분이 사는 생활에 잠겨버리지 말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향하여 솟아오른 부활의 영토에서 나의 주님 앙망하며, 내 주님 모신 이 삶의 영토를 가지고 있으면서, 오늘 여러분의 가정을 섬기고 여러분의 주어진 근무지에서 섬기고 여러분의 주어진 생활 속에서 주님과 더불어 동행하며 섬겨보는 영광이 있기를 원합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네가 어디에 있느냐?’
오늘도 여러분과 제가 주님과 함께 이 값진 영토를 주님 안에서 소유하고 언제나 앙망하면서 그 은혜에 젖어있는 자로, 하늘의 은혜와 사랑에 흡족한 자로, 강한 자로 그리고 이기는 자로 나아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을엔 기도하게 하소서

이 문 직 선생님

가을엔 기도하게 하소서.
주님의 맑은 사랑으로 영혼을 씻고
정결한 마음으로 경건히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저 높고 푸른 하늘 보좌에 계신 우리 주님 향하여
어린아이같이 기도하게 하소서.

사랑의 주님이시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환란과 고난을 이기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내 이웃을 더욱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생명 다하도록 주님 함께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별빛 쏟아지듯 환한 주님의 은혜에
날마다 날마다
진정으로 감사를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로우신 주님!
이 가을엔 생명들에게 풍성함을 주셔서
넉넉한 마음을 지니게 하소서.
예쁜 알곡이 빛을 발하듯
생명들에게 아름다운 빛을 주소서.
가슴 조용히 여미고
주님의 음성, 천둥소리처럼 크게 듣게 하소서.

세상에서 묻혀 온 낡은 겉옷 떨쳐 버리고
모든 것 주님께 맡기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 기다림과 그리움에 사무친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가을엔 기도하게 하소서.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 겨울이 춥지 않도록
뜨거운 마음으로 이 가을엔 기도하게 하소서.

앞선 이를 따라서

이 상 분 권사님

패괴한 온 땅에 강포가 충만하여도
잣나무와 역청의 일에 신실하며
묵묵히 구원의 길을 열어갔던 이가 있었고요.
매일 죽노라고 고백하는 주님의 돕는 자가
사도 바울만은 아니니,
세상의 횡포가 사람의 사랑을 식히는 날에도
인내를 시험하는 한낮의 햇살을 인하여
전능자의 그늘 아래 숨을 줄 알며
방주를 준비하는 이는 언덕 위에 있어야지요.

그래야지요.
세미하게 다가오는 말씀은 생명이지요.
작은 자는 사소한 일에도 두려워하지만,
순종과 추구는 언제나 기쁨의 길로 향했지요.
일찍이 버려져 죽음에 넘겨졌을 자이었건만
아름다운 소식의 연고로
구원의 우물물로 소성함을 입었으니
이 일은 포기하지 못하지요.
길에 장애가 있고 환경의 우겨 쌈이 있어도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긴 이들처럼
사랑하는 이를 들고 주께 나아가야지요.

남은 날은 십자가 이후의 시간이지요.
내게 대하여 죽은 나를 영원히 잠들게 하고
큰물로 부딪혀오는 세상의 탁류에
말씀을 붙들며 버티어 서야지요.
아무리 두려워 보여도 두려워 말라 하시니,
언약의 말씀을 붙들며 포기하지 않아야지요.
능히 헤엄칠 강물을 만날 때까지
이 한 길 따라 한 걸음씩 좇아가야지요.

식구님들과 늘 함께

사이판에서 주 호 준 집사님

올해는 유난히 각 나라에서 그 땅의 지도자가 되고자 나름대로 공약도 내놓고, 목표를 제시하며 목소리를 높이며 이 고장 저 고장을 옮겨 다닙니다.
또한, 사람들은 혹시나 다가오는 날들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며 삼삼오오 모여 사람에게 기대해 보는 것 같습니다. 늘 반복되는 일인데도 말입니다.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을 씻겨 주시고, 참된 길로 이끌어 주시는 주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사는 길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사랑 많으신 주님, 겸손하신 주님, 온유하신 주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이 길이 참 감사합니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들은 주님 사랑에 이끌리어 이 땅의 사람을 구하고자 산골로, 시골로, 섬으로, 군부대로 섬겨 가는 일들이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주님!
오늘도 우리가 추구하고 따를 유일한 분 주님!
이 땅 어디에 거하든 환경에 굴하지 아니하고, 하늘 바람에 힘입어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길 가는 나그네의 푯대입니다.

한 분 한 분을 위해 기도하시고 섬기시는 식구님들을 형제 삼고, 한 권속으로 길 가는 은혜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주님 나라 백성답게 의로움, 선함, 거룩함으로 살아드리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8장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하는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셨습니다.

언제나 저에게 힘이 되시는 주님!
제 삶을 주관하여 주시고, 제 걸음을 인도하여 주시는 주님! 오늘도 제 마음을 다스려 주시고, 주님의 명하심에 민감하도록 도와주소서!
주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사랑하며 따르는 식구님들과 늘 함께 길 가렵니다.

기름 준비하고 그날을…

사이판에서 하나 엄마

올해는 유난히 각 나라에서 그 땅의 지도자가 되고자 나름대로 공약도 내놓고, 목표를 제시하며 목소리를 높이며 이 고장 저 고장을 옮겨 다닙니다.
또한, 사람들은 혹시나 다가오는 날들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며 삼삼오오 모여 사람에게 기대해 보는 것 같습니다. 늘 반복되는 일인데도 말입니다.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을 씻겨 주시고, 참된 길로 이끌어 주시는 주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사는 길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사랑 많으신 주님, 겸손하신 주님, 온유하신 주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이 길이 참 감사합니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우리들은 주님 사랑에 이끌리어 이 땅의 사람을 구하고자 산골로, 시골로, 섬으로, 군부대로 섬겨 가는 일들이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주님!
오늘도 우리가 추구하고 따를 유일한 분 주님!
이 땅 어디에 거하든 환경에 굴하지 아니하고, 하늘 바람에 힘입어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길 가는 나그네의 푯대입니다.

한 분 한 분을 위해 기도하시고 섬기시는 식구님들을 형제 삼고, 한 권속으로 길 가는 은혜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주님 나라 백성답게 의로움, 선함, 거룩함으로 살아드리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8장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하는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셨습니다.

언제나 저에게 힘이 되시는 주님!
제 삶을 주관하여 주시고, 제 걸음을 인도하여 주시는 주님! 오늘도 제 마음을 다스려 주시고, 주님의 명하심에 민감하도록 도와주소서!
주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사랑하며 따르는 식구님들과 늘 함께 길 가렵니다.

빈 들에서

김 아 가 권사님

어둠 내린 빈들
사랑의 불 밝힙니다.
내 님 이 밤 어두워도
내 밝은 불 보시곤
낸 줄 아십니다.

조용히 다가오신, 익숙한 그 음성!
오! 내 사랑!
네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쇠하여 가는 이 땅의 모든 것
서편으로 기울어도
오! 주님!
이젠 빈들에 익숙해진 예수 사람!!

이 밤도
절 지나쳐 가시지 않으신 주님!
그 옷자락에 매여
날이 새어갑니다.

새날엔
오! 내 사랑!
너는 빨리 달리라 이르신다면
님 가신 동편 하늘가로
온 맘 다해 달려갑니다.
오! 주님! 나의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