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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나의 빈들판

2017-01-21 / 74 회차

조그만 나의 빈들판



주님 당신 안에서

취적리교회 배 명 자 집사님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땅
은밀하신 주님 안이
내가 서 있을 곳입니다.

이곳에 서서 앙망하는 주님은
나의 구원, 나의 생명, 나의 기도,
나의 사랑이 되어 주십니다.

요동치 않는 시온 산,
주님의 전통의 화살,
레바논의 백향목, 물가에 심긴 나무…
주님 안에 서 있는 자가 가질 수 있는 이름이요
주님이 붙들어 주시는 삶입니다.

우리의 입에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의 혀가 필객의 붓이 되고
찬양이 가득 차도록 일하여 주시는 주님!!

주님 당신의 사랑으로 띠 띠고 일어서서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죽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을 위해 일어선 내 삶이
기도의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삶이고 싶고요.

나를 내려놓고 십자가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발등상.
나를 위해 그 무엇 쌓아가지 아니하고
남기지 않는 일어선 순례자.
주님의 군사의 강한 삶이고 싶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내 영혼이
가장 안전하게 지킴 받을 수 있고
주님을 위한 삶이 멈추지 않고
계속 뻗어 나아갈 수 있는,
주님 당신 안에서
행복한 웃음 머금고
주님 당신 계신 천국을 향해 달려가는
이 순례의 길에 서서
당신의 일하심을 조용히 도와갑니다.

오늘의 기도

영광 영서교회 김 병 수 목사님

예수님! 간구합니다.
오늘도 주의 말씀이 내 속에서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게 하옵소서!

내 속에서 내 생각, 내 지식, 내 판단
보이는 것들이 달음질하지 않고
위로부터 내려온 것만 달음질하게 하소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 여인의 믿음이
내 속에서도 종일 달음질하게 하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데반 집사님의 마지막 기도가
내 속에서도 평생 달음질하게 하소서.

오늘도 내가 만든 집,
세상이 만들어 준 집 앞에서 서성거리지 않고
주의 장막에 거하여
주의 장막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게 하소서.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오늘도 내 주님 얼굴 구하며

함양 마천교회 김 양 중 목사님

언제나 한결같이 얼굴빛 비춰주시며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서 주시고자 하시는
그 주님 향해 오늘도 내 주님 얼굴 구하며
정함 있는 자세로 서갑니다.

내 주님 얼굴 구함 속에
주님 한 분 전부 삼고 주님께만 잠기어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으로 살아가는
행복 있고요

내 주님 얼굴 구함 속에
잠들어 살기 쉬운 말세의 고통 하는 때
기름 등불 준비하며 깨어 살아가는 밝음 있고요

내 주님 얼굴 구함 속에
주님 향한 양 된 자세 흐리지 아니하고
주님 알아드리며 따를 수 있는 좁음 있고요

내 주님 얼굴 구함 속에
기드온 삼백 용사처럼 좋은 군사로 일어서서
이기는 자로 그의 나라로 살아가는 강함 있고요

내 주님 얼굴 구함 속에
백합화처럼 주님과의 생생한 사랑 피어올라
그의 정결한 신부로 살아가는 기쁨 있고요

내 주님 얼굴 구함 속에
어머니 가슴에 포근히 깃들어있는 젖 뗀 아이처럼
피난처이신 주님께 숨는 안식 있고요

내 주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마음에 임하여 오는 참된 부요이기에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다정하게 부르시는 그 음성 따라
오늘도 그의 백성으로 조용히 서갑니다.

내 주님께 새롭게 나아감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원주 열린교회 원 광 호 목사님

옛사람이 내 주님의 십자가로 끝이 나고, 내 주님의 부활 생명으로 움이 돋고 순이 났다 하여도, 내 주님께 새롭게 나아감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과 사랑의 꽃이 활짝 피어 향기를 토한다 해도, 그 사랑의 열매가 조금씩 영그는 것이 보인다 해도, 내 주님께 새롭게 나아감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내 주님과의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불길 같이 타올라 많은 물로도 끄지 못하고, 홍수라도 엄몰치 못하기까지, 내 주님께 새롭게 나아감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라헬의 묘실 곁에서 잃어버렸던 진정한 나를 찾은 후에,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께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기까지, 내 주님께 나아감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내 주님께 새롭게 나아가 산 사귐 가운데 염소 새끼 세 마리라도 이끌 수 있는 힘을 얻고, 오늘 내 먹을 양식도, 섬김의 길에 나눠 줄 양식도 넉넉히 얻고, 내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한 삶은 내 주님께 새롭게 나아가는 자에게 베푸신 은혜이지요.

그 후에 하나님의 산에 이르러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자, 무론 대소하고 함께 새 노래로 우리 하나님께 찬송할 그때까지, 내 주님께 새롭게 나아감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룻의 발자취 따라

함평 천성교회 정 찬 규 선교사님

룻의 발자취 따라
결코 떠날 수 없는 언약적인 마음으로
내 주님께 속함을 오늘도 선택함으로
나는 부인하고 내게 주신 십자가는 지고
내 주님 한 분 철저히 따르렵니다.

룻의 그 발자취 따라
허락해 주신 믿음을 따라 나아감으로
친히 일하여 주시는 주님께 속한 밭 되어
지키시며 보호하시는 내 하나님의 손길과
내 주님의 자상하신 사랑의 돌보심 안에서
나눌 것이 있는 풍성함을 거두고 싶습니다.

룻의 그 발자취 따라
내 주님의 원함을 알아드리며
그 사랑의 명령을 기꺼이 순종함으로
다만 내 주님께서 친히 존귀함 받으시는
그 귀하신 뜻을 이루는 자로만 서가렵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이 삶을 내게 주시는
신실하신 내 주님을 한없이 기대하렵니다.

땅끝 시간

공주 목양교회 전 중 우 목사님

오늘날은 사람들이 「땅 끝」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땅 끝」시간을 잃어버린다면
주님과의 참된 관계를
놓치기 쉽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평범하고
겉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가운데 사는 삶이든,
오늘 문제가 많은 환경과
어려움 가운데 사는 삶이든,
보이는 세상을 기초로
갖가지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는 삶이라면,
정말 계수할 것도 남길 것도 없는
헛되고 무의미한 삶이 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주님을 기초로 삼고,
주님 모신 마음으로
주님만 의지하고 바라보는
땅 끝에 선 마음이라면,
주님과의 사귐 속에서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땅 끝에 선다는 것은
고린도후서 1장의 말씀처럼
자기 신뢰하지 아니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는
그런 마음 자세를 갖는다는 것이겠고요,

어제의 어떠함이나
내일의 염려 가운데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만 주님 섬기는 마음으로
오늘, 지금 이 시간을 사는 삶입니다.

땅 끝에 선다는 것은
오늘도 보좌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주어진 삶이 어떠하더라도
열린 보좌에 매여서 기도하고 간구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 가운데 사는 삶이고,
나를 거절하고 십자가로 건너와서
주님 안에 자리 잡고
산 제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
오늘 내가 서 있는 곳이 땅 끝임을 자각하고
주님 안에 자리 잡고
주님만 바라보고 앙망하며
주님 기쁘시게 하는 삶이
참으로 지혜로운 삶인 것 같습니다.
오늘의 땅 끝에 선 자로
주님과 함께 길 가고 싶습니다.

내 마음에도

수원 소망교회 윤 선 교 목사님

시편 131편에서
젖 뗀 아이의 중심이 어미 품에 있듯이,
큰일이나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에
힘쓰지 아니하고
내 마음도 주님, 당신께 있습니다.

사무엘하 2장에서
왕의 자리보다도 주님 사랑하는 마음에
헤브론으로 향한 다윗처럼,
내 마음에도 주님, 당신이 나의 전부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이경이든 삼경이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는 종과 같이,
내 마음도 주님, 당신께 묶여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생명이 되시는 주님 안에 자리 잡은 요한처럼,
내 마음에도 주님, 당신을 추구함이
나의 모든 것입니다.

계시록 14장에서
산새가 깨기 전 시온 산에 선
주님의 사람들처럼,
오늘도 작은 산봉을 오르며
내 마음도 주님, 어느새 당신 곁입니다.

멈출 수 없는 오늘 길

밀양 용평교회 손 흥 세 목사님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이 시간.
나그네는 주저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잠시 서 있는 이 땅.

바라고 또 바랄 이는 내 주님뿐
모두 내려놓고
내미는 손 외면할 수 없네.

오늘도 세상에 버려진 애굽 소년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작은 마음만은 간직하고
바람은 불지만 주저앉을 수 없기에
주님께서 가라 하시는
참된 길로만 달려간다네.

그 길로만 따를 때
참된 소망, 참된 안식으로
주님과 나의 관계만을 빼앗기지 않는 이 길
멈출 수 없는 길.

오늘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작은 언덕 길모퉁이에 서서
시온 산에 솟아오르네.
주님을 노래하면서….

그날의 기다림과 설렘

대전 산정교회 오 도 균 목사님

주님과 나의 관계 속에
생생한 사귐이 뚜렷하게 인정되고 시인된다면
기다림 속에 설렘.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요!

아브라함은 정오 시간
장막 어귀에 앉아 주님 안에 자리 잡는 마음으로
내 주님 기다리는 설렘 속에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 복이 있다는 말씀이
이루어짐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나요.

다윗의 길 가운데 유다 헤렛 수풀에서
보이지 않는 주님 안에서 주님께 향하여
어린아이처럼 바라보는 마음과
주님께 꽉 매여 있는 단순한 마음으로
서 있는 모습은
극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 기다리는 설렘과 영혼의 안정감은
더욱 넘쳤던 것 같습니다.

그릿 시냇가의 엘리야는
적지 않은 시간 주님 모시고
다음 길 알 수 없지만,
주님 안에 자리 잡아 자유로운 영혼으로
어린아이처럼 주님 기다리는 설렘 속에
하늘 보좌 바라보며
주님을 인식함이 강할 때
갈멜 산의 영광은 가까웠지요.

사도 바울 선생님도 주님 모시고 차분하게
다음 길 인도하시는 기다림과 설렘 속에
드로아에서 임하여 온
주님의 음성에 순종해 간 걸음은

빌립보 지역의 크신 역사하심과
지진 속에 옥문이 열리는 역사는
주님 모시고 영혼이 주님 은혜 이슬 젖어갈 때
주님과 함께 귀한 사역 감당할 수 있었지요.

주님 언제 오실는지 많은 기다림과 설렘 속에
향유 준비하고 기다린 여인처럼
뜨거운 마음으로 2월 집회 준비해 간다면,
그날 오시는 분들을 향하여
주님 모시고 정성껏 섬겨 본다면,
각 심령 속에 조그만 부흥이 모여
이 땅에 산 위의 동네가 숨기지 못하는
생명의 빛을 바라는 교회가
하늘 바람, 성령 바람 속에
은혜의 이슬에 젖어가는
진정한 부흥을 기다림과 설렘의 성회가 되겠지요.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묵상하며
그날 베풀어 주실 그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려 봅니다.

(들릴라로 인하여)바디로 단단히 짜인 삼손의 머리털!

여러분!
우리가 쉽게 읽을 수 있는 빌립보서 4장에서 내 영혼이 이런저런 염려로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내 힘이 되어주시는 빌립보서 4장 13절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하는 말씀은 불가능할 줄 압니다.

별로 보잘것없이 보이는 염려라도 그 염려가 우리 마음을 번거롭게 할 그때는 우리가 힘쓰기 곤란할 것입니다. 마땅히 내가 주님 보시기에 합하게 살아감으로 주님이 주신 관용 있는 마음으로 형제를 대하지 못하고, 주님 보시기에 합한 마음으로 삶을 꾸리지 못하는 스스로 좁아진 마음이라면, 주님께서 나에게 힘 되어 주시는 은혜 속에서 만족하다는 말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힘으로 삼고 할 수 있다는 말도 불가능할 줄 압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 안에서 그 어떤 여건 속에서도 항상 기뻐한다는 것, 이런 상황 속에서 쉽지 아니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 같은 강한 힘을 가진 자 아니라 할지라도 내 주님께 합한 자로. 오늘의 나의 삶 속에서 내 주님을 내 주님답게 모시고 사귐 하며 주님 보시기에 알맞은 삶을 꾸려간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빌립보서 4장 말씀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포로로 사로잡힌 자의 말이 아니라 참으로 이기는 자의 목소리인 것 같습니다.

또 한편, 내가 어떠한 형편에든지 만족할 수 있다는 기쁜 고백과 더불어 빌립보서 4장 19절 말씀처럼, 그 영광 가운데 풍성한 대로 나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수 있는 이 생활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간다면 우리 각자가 누릴 수 있는 은혜일 줄 압니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이런저런 염려와 주님 모시고 주님 보시기에 합하게 살지 않는 보잘것없는 생활들이, 주님과 나 사이의 이 영광스런 힘과 주님 모신 기쁨과 만족과 평안과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오늘 내가 처한 곳이 그 어디라 할지라도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시는, 그 놀라우신 은혜 가운데서 살지 못하게 합니다.

흡족한 그의 백성으로 서가는 것을 가능케 만들어 주실 나의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이 은혜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염려 속에 붙잡혀 있고 내 하나님 보시기에 이런저런 올바르지 못한 삶으로 잡혀 있는 것을 별것 아닌 양 생각한다면,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백성이란 이름으로 살고자 할지라도, 실제적인 힘이 없고 실제적인 자유가 없습니다.

예레미야 45장의 바룩처럼 주님을 떠난 사람 아니고 나름대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주님의 사람이지만, 그가 평화롭지 못하고 자유롭지도 못한 때는 그 역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초라한 삶으로 전락하기가 참으로 쉬운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 4장은 사도 바울 선생님이 감옥에서 그런 값진 삶을 살고 있으면서 우리에게 권하고 있는 귀중한 내용인 줄 압니다.
좋은 환경과 여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살아계신 주님 되어주시고 우리 하나님의 하나님 되어 주심이 합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 뚜렷해서, 기쁨과 평강이 충만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가두고 괴롭히는 그들에 대해서도 불쌍히 여기는 주님의 관용이 있는 넓은 마음으로, 그리고 지치고 피곤해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능히 할 수 있는 모습으로, 주님으로 인하여 생생하게 서 있는 모습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요!

오늘 여러분과 제가 사는 곳이 사도 바울 선생님이 계셨던 그런 침울하고 어두운 감옥이 아니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지치고 피곤해하며 서 있지 못하기가 쉽습니다.
또한, 염려에 짓눌려 있고 만족하지 못하고 할 수 있다고 하기보다는 할 수 없는 미약한 자로 서기가 참으로 쉬운 것 틀림없습니다.

오늘의 그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주님 되어 주시지 않음이 아닙니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만 주시고 우리에게 놀라운 나의 하나님 되어 주시지 않으시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합한 자세로 삶을 바르게 정돈하여 본다면, 이 놀라운 은혜는 우리에게 생생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이 감옥에 갇혀있는 그 생활 가운데서 빌립보서 1장은 ‘복음의 진보가 있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을 가두어 놓고 지켜보는 간수나 죄수들이, 그가 외치는 예수 믿으라는 이 한마디 말 때문에 믿은 것은 절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의 삶을 볼 때, 영혼이 너무 밝고 자유스럽고 행복해하는 그런 모습 속에서, 사도 바울 선생님이 모신 주님 그리고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고 실제적인 분이심을 분명하게 보았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아는 빌립보의 오래전에 있었던 그 간수는 아니고, 우리가 아는 빌립보에 함께 갇혀 있었던 죄수들은 아니지만, 사도 바울 선생님이 계신 곳에 지진이 난 것 아니라도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사도 바울 선생님의 생활을 통하여 증거되는 살아계신 주님을 듣고 싶어 했을 것 같습니다.

오래전에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잠들었다가 지진 때문에 깨어 그 옥문 안을 들어와서 무릎 꿇고 참된 길을 묻던 그 간수는 아니라도,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사도 바울 선생님을 보는 간수들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 간수가 묻고 사도 바울 선생님이 대답하는 말을, 다른 방에 갇혀 있는 죄수들은 못 들었을까요? 들은 분도 있고 못 들은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말은 이렇게 전달되어 갈 것 같습니다.
“간수가 떨며 한 말은 뭐라고 한 것 같소? 그리고 조금 전에 기도하고 찬송했던 그분은 뭐라고 한 것 같소?”
옆에 가까이 있던 죄수를 통해 또 죄수를 통해 전해진 그 소식은 정말 듣고 싶은 소식이었을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 가까이 있었던 죄수들과 간수들은 정말 밝아 보이고 행복해 보이고 자유스러워 보이는 그분의 얼굴 보면서, 그분이 마음으로 믿는 주님, 그분이 참으로 경외하는 하나님을 그들도 믿고 경외하고 싶은 마음이 꽉 찼을 것 같습니다.

어느 특별한 하루만 아니었습니다.
늘 그런 모습이었고 늘 그런 얼굴이었습니다. 기쁨이 가득한 얼굴. 평강으로 충만한 얼굴. 오늘도 무언가 참되게 살아드리고자 하고 경건 되게 살고자 하고 참으로 정결한 삶을 살아가실 뿐만 아니라 무언가 의롭게 살아가고자 마음 쓰시는 그분. 사랑하고자 다가서시는 그 모습.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게 기쁨 되게 살고자 하시는 그 모습. 그들의 마음에 감동되지 않을 수 없었을 줄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사도 바울 선생님만이 가져야 하는 그런 은혜는 결단코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의 주님이시고 이 세상에서 오늘 우리가 사는 삶의 기촛돌 되십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의 그 하나님은 오늘도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우리를 헤아리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보살피고자 하시는 놀라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의 주님 향한 자세 속에서 귀중한 것을 헤아려 보길 원합니다.
우선, 빌립보서 1장에서 사도 바울 선생님은 그 귀하신 주님께 다가서서, 오늘 육체가 부딪히는 것보다도 내 영혼이 주님 안에 자리 잡을 뿐만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께서 나의 생명 나무로, 나의 유일한 주님처럼 내게 살아주심을 믿고, 나는 그분을 향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주님을 존귀하게 하고자 하는 이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 묶어진 이런 언약적인 마음은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요!
나의 주님께 이렇게 묶어진 언약적인 마음!
“주님! 오늘 내가 있는 것, 육체가 있는 것, 주변의 세상이 어떠해도 나는 주님께 속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나에게 있어서는 주님이 전부이십니다. 내게 살아주시는 주님! 그리고 나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주님을 존귀케 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런 언약적인 마음!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언약적인 마음을 갖지도 않는데 우리 영혼에 그 언약이 살아 있겠습니까?
시편 25편에서는 주님의 그 자비로움을 구할 때 주님을 경외하는 온유한 자세로 주님을 바라보고 앙망하는 이런 합한 자세일 때 주님의 주님 되심이 살아있는 그런 은혜로 임하여 옴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내 주님을 향하여 이런 살아있는 언약을, 한 때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오늘 이 시간 내가 속하여서 붙드는 나의 주님과 나 사이의 언약으로 붙잡아 보는 것 정말 필요할 것입니다.
언약을 전 마음으로 붙들 때 주님은 나에게 살아계신 주님으로, 살아계신 나의 목자로, 나의 모든 것으로 다가와 주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두 가지 읽을 수 있는 것은, 양이 주님을 향하여 언약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먼저이며, 주님은 그자에게 선한 목자 되어 주심을 뚜렷하게 보여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 안에 믿음 두고 영혼에 안정감을 느끼지도 못하고, 내가 주님을 정함 있는 마음으로 앙망하며 기다리지도 아니하고, 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이끌려 가버리고 만다면, 주님의 선한 목자 되어 주심이란 것은 우리에게 임하여 오기가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언약적으로 주님이 내 목자이심을 믿고 안식하면서 잠잠하고, 내 영혼이 주님을 내 주님으로 되새겨가면서, 참으로 영혼에 힘을 얻고 주님을 온 기쁨으로 기다리고 있는 이!
이런저런 좋은 생각과 좋은 소식이 와도 주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다 아니라고 거절하여 피하고, 주님의 인도하심만 기다리는 그자에게 주님의 인도하심은 틀림없이 임하여옵니다.
주님은 함께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고, 빼앗기지 아니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들어가도 생명을 얻고 나아가도 생명을 풍성히 얻을 수 있는 이 놀라운 생활은 언약적인 자세 속에 가능함을 분명히 읽게 됩니다.

빌립보서 2장 말씀처럼 우리의 생각이 조금만 흐트러진다면 원망과 시비는 언제나 있을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돌보셨음에도, 아침에는 만나를 먹었음에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이 주님께 고정되며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바라보는 정돈된 좋은 눈이 안 될 때, 그들은 원망도 많았고 시비도 많았음을 읽게 됩니다.
참으로 내 주님께 속하여 주님 가까이 바라보는 눈!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바라보는 이 눈!

마태복음 6장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께 연합된 자로 주님과 함께 하나님을 향해서 이 좋은 눈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어둠이 많고 문제가 많은 곳에서도 우리 영혼은 빛으로 충만할 수 있고 그의 은혜 속에 충만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런 정돈된 마음일 때 우리가 하고 싶은 것 무슨 일입니까? 주님 모시고 주님과 함께 하나님 기쁘시게 살고 싶습니다. 주님과 함께 행복한 마음으로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복종하고 싶습니다.

곁에 어떤 일이 있든 원망할 것 없습니다.
시비 걸 것 없습니다.
주님께 속하여 하나님 바라보는 복된 영혼!
고난이 있고 몸이 연약하더라도, 주님을 향해서 성실한 마음으로 가는 이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언제나 영혼이 밝고, 자유가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길 갈 수 있음을 빌립보서 2장은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빌립보서 4장적인 삶을 생각하기 위해서 하나 더 빌립보서 3장 말씀을 조금은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새롭게 주님께 언약적으로 묶어지기 위해서 사도 바울 선생님이 마음 쓰셨던 것을 오늘 여러분과 저도 마음 쓰고 있습니까?

내게 유익한 모든 것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고 잃어버린 것으로 간주하고, 뒤에 있는 좋았던 것 괜찮았던 것 어제 여리고 성의 승리도 다 뒤로 잊어버리고, 오늘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참예하여 주님과 하나 된 자로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주님의 돕는 이로 내 주님의 주시는 그 마음 따라 주님과 함께 달려가고자 하는 이 마음!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요!

이러한 마음에 묶어지고자 힘써 갈 그때 우리는 새롭게 예수님 안에 생생한 자로 서가서 빌립보서 4장적인 이 놀라운 삶을 우리 생활 가운데 남길 수 있을 줄 압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해야 할 줄 압니다. 주님을 모시고 서가는 이러한 삶은 정말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는 정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번거롭지 아니하고 자유로움 속에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힘을 붙들고 살기 위해서 성서 몇 군데를 간단하게 좀 더 헤아려 보기를 원합니다. 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이 영광을 오늘도 정말 가지고 싶습니다.

우선 사사기 13장부터 16장까지는 삼손에 관하여 기록된 귀중한 내용입니다.

삼손은 우리에게 아무 관계 없는 특별한 사람으로 밀쳐놓을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 10장의 주님께 연합되어 그 믿음에 서 있는 자에게는 묵상해 볼 내용으로, 히브리서 11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곳에 에녹도 나옵니다.
내가 주님과 연합된 믿음이라면 에녹도 생각해볼 만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노아도 나옵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있습니다.
나 스스로는 생각도 못 할 그런 귀한 분들이겠지만, 주님께 연합되어서 내 주님께 속하여 있고, 주님을 나의 구주 나의 주님 나의 힘으로 앙망하면서, 내 주님만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굉장한 분들도 주님과 함께 묵상하라고 오늘 성서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는 줄 압니다.

아브라함!
그의 놀라운 삶도 주님 안에 속하여 주님만을 나의 힘, 나의 주님, 나의 모든 것으로 앙망하면서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고자 한다면, 오늘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본인 것입니다.
이삭도 그러합니다.

마침내 주님께 속한 야곱은 우리에게 그나마 조그만 교훈은 되겠지요.
그러나 더 나아가 이곳에서 삼손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라면 삼손을 생각해볼 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주님께 속함이라는 이 놀라운 삶이 되어있고, 내 주님 안에 믿음을 두고 있고, 주님을 앙망하고, 내 주님 사랑하는 마음과 섬기는 마음으로 내 영혼이 충만하다면, 삼손과 기드온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지나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상관없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삼손에 관해서 많은 말씀 할 여유가 없기에 짤막하게 이 말씀만 들추어내어 보고자 합니다.

주님과의 참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이가 칡넝쿨에 묶어진다고 해서 그가 사로잡히겠나요?
성서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는 참 귀합니다.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인하여 큰 어려움이 임해 와서 우리를 꽁꽁 묶어도, 주님과 나의 관계가 잘 되어 있다면 불에 타버린 삼 줄 끊듯이 끊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르밧 여인에게는 그 기근 때의 삶이 전혀 그를 묶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모시고 함께 사는 그 영혼은 자유와 힘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에 하나님께로부터 칠 년 동안 어려운 환난이 와도 주님을 모시고 사는 수넴 여인에게는 해당될 사항이 없다고 하나님께서 피하게 해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 모시고 주님과의 관계가 잘 되어 있으면, 그 어려움 속에서도 이기게 하시거나 아니면, 필요 없는 것에 관계하지 않도록 자유를 주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자연적인 여건이 어떤 어려움으로 다가와도 주님 모신,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있으면 쉽게 이긴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줄로 삼손을 묶었습니다.
우리가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은 이상한 일들, 새로운 일들이 우리를 묶으려고 할지라도 주님과 나의 살아있는 관계라면 그것도 불탄 삼 줄처럼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2017년도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새로운 일들이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 관계없습니다. 주님과 나의 관계만 생생하다면, 겨우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긴다는 로마서 8장 37절 말씀과 항상 이긴다는 고린도후서 2장 14절 말씀이 우리에게 가능할 줄 압니다.

오늘 저는 삼손에 관해서 세 번째 말씀을 중점적으로 말씀하고 싶습니다.
삼손은 잠자는 가운데 들릴라로 인하여서 그의 머리가 베를 짜는 데 사용되는 바디에 엮어지고야 말았습니다. 머리가 바디에 묶여 있으므로 삼손은 일어나서 바로 힘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암시하는 이 귀중한 교훈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라고 말하면서, 나의 생각과 나의 마음이 오늘 내 생활에 다가온 이런저런 것으로 꽉 묶여있다면 힘쓰기 어렵습니다.

시편 40편의 다윗은 “주님은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셨다.” 조금 더 읽어보면 “주님께 귀를 기울이면서 주의 뜻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조금 더 가다 보면 그의 생각이 대단히 혼란스러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내 반석 삼고, 주님께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뜻 가운데 사는 다윗인데 왜 생각이 그렇게 암담하고 어두우며 마음이 사라지고 있나요? 그것은 주님과 다윗 사이에 생각이 바르게 정돈되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앞에 있는 것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두 가지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근거 위에 서서 주님의 빛 가운데 주님을 찾고, 늘 주님의 빛 가운데 사는 자! 그리고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구원에 대해서 기쁨으로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정돈된 마음이어야 영혼이 자유로운 것입니다. 힘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앞에서 말한 두 가지가 잘 되어있다 할지라도 내가 주님을 찾아서 주의 빛 가운데 살고, 주님의 끊임없는 구원을 기대하고 믿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 축복된 마음이 아니라면, 우리 마음은 암담하여 캄캄하고 우리 마음은 사라진다고 할 수 있는, 이런 암담함 속에 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삼손은 주님을 자기 주님으로 헌신했던 그 머리들이 다 붙잡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어진 삶을 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근무지에서나 가정에서나 착실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의 근무지 일과가 온통 저 바디에 엮여 있는 것처럼,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이 묶여 있다면 힘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 모시고 참된 사랑으로 돌아보고 다스리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수많은 일이,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사로잡아버린다면 힘없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내 주님께 다가와 나의 주님과 나 사이의 사귐 속에서 주님을 모신 주님의 사람으로, 우리 영혼이 고린도전서 7장 말씀처럼 집안의 수많은 일이 있어도 참으로 주님만 기쁘시게 할 자처럼 영혼이 정돈되어 있다면, 가정을 은혜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주님 주신 믿음으로 넉넉하게 해결해 갈 수 있습니다.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 바벨론의 도 방백이고 나라 국무총리급의 위치에 있지만, 그들이 그 일만 착실히 하려고 했다면, 생각이 묶어져서 무슨 일을 제대로 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다니엘서 1장, 2장, 3장, 6장 그리고 9장에서 읽을 수 있는 이들의 마음은 주님 한 분께 사로잡히고, 주님 한 분 모신 영혼으로서 마치 문제와는 스스로 관계없는 자처럼 주님께 붙들린 마음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와 영광 속에서 주님과 함께 남은 일을 꾸려가는 참으로 힘 있는 이들임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일들이 얼마나 필요한가요?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얼마큼 되었다 할지라도, 삼손 잡으러 왔던 유다 사람 삼천 명 같이 내 영혼이 포로 되어 있다면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지만, 오늘도 조용한 주님과 나의 시간을 가지고 에담 바위틈에서 내 주님 모신 사귐 속에 깨어 있던 삼손이라면, 형제에게는 사랑으로 붙들려 줄지라도 블레셋 사람 천 명을 해치울 수 있는, 주님이 내 힘이 되는 이 생생함이 오늘 우리에게도 참으로 가능한 줄 압니다.

여호수아 23장은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대적 천 명을 쫓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힘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과 함께한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 24장은 내 주님을 가까이하며 내 주님을 섬기는 자로 설 때, 주님을 멀리하지 않고 주님을 반역하지 않는 참으로 영광스런 주님의 사람으로 서가는 것이 가능함을 말씀하여 주시는 줄 압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정말 소중합니다.
여러분! 내 주님 찾아 나아간 요한복음 18장의 감람산처럼, 내 주님과 함께 가지는 조용한 기도의 시간 없이 우리 영혼이 내 주님 모신 강한 자로 서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8장처럼 날마다 시간마다 새로이 내 주님 찾는 마음이어야 주님을 만나 뵈옵고 주님을 위하여 사는 이 뚜렷한 삶이 가능합니다.

아니면 오늘 우리가 주어진 환경과 여건 속에서 내 주님 이름으로 내 주님과 함께 십자가 짊어지고 주님을 착실히 따르는 주님의 사람으로 서기보다는,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는 아니라 할지라도 도망가 버리고 부인해 버리는 주님 보시기에 합하게 살지 못하는 우리로 서고야 말 줄 압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 속에서 내 주님께 사로잡히는 것이 얼마나 귀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9장 말씀처럼 오늘도 여러분과 제가 복음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서 있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네 어머니라” “아들이니이다”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권속다운 생활은 우리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조용하게 주님의 십자가 앞에 가까이 다가서서 내 주님께 참예하고 부활하신 주님께도 참예하므로, 주님 안에서 주님의 어머님을 나의 어머님으로, 주님의 제자인 나로서, 한 권속 된 마음으로 참 사랑할 수 있는 이 아름다운 생활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가까이 다가서는 자만이,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가질 수 있는 놀라운 은혜인 줄 압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요한복음 20장 말씀도 한마디 짚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예수님 없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처럼 슬퍼하는 그들이어야 주님을 만날만한 그런 사랑의 만남이 가능합니다. 무덤을 찾아간 이도, 시체를 달라 한 이도, 예수님을 지독히 사랑한 이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 아니면 아닙니다.
무덤을 떠나고 싶지 않은 그 마음과 주님의 시체라도 달라 하는 그 마음과 슬픔 속에서 갈 곳 없는 그러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이에게 오늘도 주님은 다가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시고, “이 세상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하시는, 진정한 소명이 있으며, 오늘도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 주님 주시는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을 줄 압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하는 마음은 단호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씀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존재할 때, 주님 사랑할 것 외에는 내게 의미가 없을 만큼 주님 사랑하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나의 오늘, 나의 이 시간! 이런 마음으로 다가설 때 우리는 주님께 사로잡힌 자가 되고 요한의 아들이란 참으로 미숙하고 연약하고 어리석은 그런 자 아니고 예수님 사랑하는, 주님께 사로잡힌 자로, 그 은혜 이슬에 젖은 자로 설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돕는 이로 주님 마음을 기쁘시게 하면서 죽기까지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 짊어지고 따라가는, 내 주님을 온 마음으로 기쁨으로 따라가는 주님의 사람으로 생생하게 사는 것이 가능할 줄 압니다.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근신하므로 오늘도 주님과 함께 빛 가운데 살면서 예수님 모시고 사는 이 마음을 가지고 있고,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나의 구원으로 바라보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우리 마음이 정비 되어 있지 않다면, 마음이 상처받고 생각이 어두워져서 어떻게 데살로니가전서 5장 말씀처럼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주님의 돕는 이로 힘 있게 살 수 있겠나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내 주님 앞에 조용히 다가서서 주님과 나의 삶을 바르게 정돈하는 이 조그만 한 시간의 빈들판, 때론 두 시간의 빈들판은 빈들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으로 충만하며 주님의 뜻 이룰 수 있는 온전한 은혜로 채움 받게 됩니다. 또한, 주님과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참된 준비의 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조그만 빈들판의 귀중성을 새삼 달리 이야기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알아차릴 것 같습니다.

내 생각이 오늘도 어지럽고 혼란스럽나요?
사무엘상 22장부터 26장까지 다윗의 영혼이 주님께 속하여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의 빛 가운데 있는 마음으로 나의 주님과 그렇게 정돈되었을 때는 누구도 그를 해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강한 자였고, 그는 사랑 있는 자였고, 그는 아름다운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혼란스러워서 ‘이러다간 사울 왕의 손에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바디에 엮어져 가듯 혼란스러울 때, 다윗은 뜻하지 않는 길로 도피하는 어리석은 삶으로 나아가고야 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누가 여러분과 제가 내 주님을 오늘 나의 머리로 삼는 이 삶을 방해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막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기는 자로! 넉넉한 자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삼손처럼 깨어있지 못하고 잠들어 버리므로, 여러분의 생각이 원수가 준비해 온 바디에 엮어져서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복잡하게 묶여 나의 주님과 정돈된 마음과 정돈된 생각이 아니 될 때, 내 영혼이 주님 모신 밝음과 내 주님 사랑하는 강한 마음과 주님 섬기고자 하는 불붙는 마음으로 아니 될 때, 우리는 아무런 힘을 못 쓰는 그런 초라한 우리가 되고야 말 것 같습니다.

사무엘상 7장에서 그들이 전 마음으로 주님께 속하고, 날마다 새로이 주님을 전 마음으로 앙망하면서, 그 은혜에 젖어 주님 사랑하는 불붙는 마음이었다면, 사무엘상 8장에서 보잘것없는 사람을 왕으로 구하는 이런 어리석은 길에 서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와 동시에 주님께 속하여 있고 주님의 은혜로 새로워지고 강하여지고 나의 주님 향하여 불붙는 마음으로 있는 그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라 말해도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강하고 능한 왕 같은 제사장이란, 능한 주님의 사람으로 생동감 있게 주님의 위로와 기쁨 되는 자로 길갈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제 다가온 2017년!
우리의 생각들이 초라하지 않기 위해서, 원수에게 사로잡혀 있고 물려있는 우리 마음과 생각이 되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새로이 조용한 빈들판을 찾고 주님과 나의 삶을 온 정성껏 꾸려가시기 원합니다.

그래서 이기는 자로!
그래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그래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영광스런 고백을 드리면서, 주님과 함께 하나님 모신 영광스런 자로 하루하루 시간시간 전진하여 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조그만 빈들판 삶의 귀중성을 깊이 있게 묵상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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