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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에 부치는 편지

2016-10-05 / 73 회차

전선에 부치는 편지



잊지 마세요! 기도를

취적리교회 배 명 자 집사님

메말라 있는 마음
차가움 있는 곳에
필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자투리처럼 느껴지는
잠깐의 시간도
주님께 붙들리면
주님 나라의 부흥과
어느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됩니다.

눈을 들어
주님이 가리키시는 곳을 바라보세요.
그곳엔 분명
기도를 통해서 이루고 싶으신 뜻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한계가 있습니다.
기도에 잠들어 버린 그 어느 날
작은 여우가 찾아오면
바닥을 드러내고 넘어질 수밖에 없지만

영혼을 일으켜 세워
기도의 문에 서서 주님을 부른다면
주님의 권능의 손이
그 모든 시험들 속에서
붙들어 주시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그 일하심을 멈추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기도가 살아있어야
영혼이 설 수 있고
서 있는 곳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일으키며 세우는 힘이 있답니다.

기도의 문에서 하루를 여시고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기를 시작한다면
잃어버린 시간이 아닌
주님의 응답,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가는
잊지 못할 시간을 살게 될 것입니다.

잊지 마세요! 기도를….

전선에 띄우는 마음의 편지

김 명 희 집사님

사랑하는 형제님들!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투화 끈을 조여 매며 받는 고된 훈련들과 쏟아지는 잠을 뒤로하고 밤이슬 맞으며 긴장감속에 서는 보초…
젊음의 소중한 시간들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그 값진 수고와 땀의 무게를 너무도 잘 알기에 사랑하는 형제님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마음으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보냅니다.

사랑하는 형제님들!
저희 교회에서는 목사님과 교회 식구님들이 날마다 국군 장병들을 마음에 품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한분 한분이 마음으로 정성껏 쓰신 편지를 끝까지 마음으로 읽어주세요.
한 편 한 편 글을 읽어갈 때 여러분들의 마음에 새겨지고, 뚜렷하고 단단하게 세워져 가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는, 전방 철책을 오가며 군복무 하는 아들을 둔 엄마로서 수고하는 여러분들을 떠올리며 사랑하는 아들에게 말하는 심정으로 권면의 편지를 써내려 갑니다.

사랑하는 형제님들!
지금까지 어린이, 청소년시절을 지내고 군 입대 전 청년의 시절을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학업에 내몰리고,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을 바라보면서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가슴을 부여잡고, 작은 마음 둘 곳 없어 고민하며 많은 분들이 그렇게 지내왔을 줄 압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인생길을 누구와 함께 가고 있는가?
또, 유일한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계시는지요?
여러분의 인생의 길을 그 예수님과 함께 걷지 않으시렵니까?

예수님은 형제님들을 너무너무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예수님을 조용하게 불러보세요!
그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보세요!
예수님께서 조용히 다가오셔서 외롭고 힘들 때마다 그 손길로 붙들어 주시고, 나 혼자 힘으로 이겨낼 수 없던 것 해결해 주시고, 참된 길로 이끌어 주시는 행복한 경험을 하실거예요.

그 예수님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가시므로 형제님들의 삶이 바뀌고, 인생이 바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셔서, 값지고 의미 있는 삶을 사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밤에도, 내일 새벽에도, 사랑하는 형제님들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할거예요. 사랑하는 형제님들이 예수님께 속한 뚜렷하고 견고한 자로 서서, 남은 군 생활 신실한 주님의 군사가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단순함의 값진 시간

정 형 모 집사님

아랫녘보다
한 계절 앞서가는 철책.
시월이면 벌써 두툼한 방한복 두르고
예나 지금이나
저 북방한계선을 강한 눈빛으로
감시하고 있을 초병.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35여년 흘렀지만
손 내밀면 마치 닿을 것 같은
나의 초임지인 북녘 오성산 마주한 ○○관측소.

후방의 소식도, 왕래도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 닫힌 환경은
오히려 단순함 속에서
내 주님을 깊이 묵상하는 값진 시간들이었지요.

살면서 몸이 힘들고 영혼이 지칠 때면
그때 주께서 친히 가르쳐주셨던
그 단순함을 되새기면서
오늘까지 이 길 주님 모시고 걸어왔네요.

오늘도 전방에서 수고하시는 나의 형제들.
시대가 바뀌고 환경도 변하여
군이 예전 같지 않다고들 하지만
여전히 그대들은 조국의 최후 보루이며
주의 강한 용사로 서 보는 최상의 훈련장입니다.

한날 한날을 복무 다하는 그날까지
단순한 마음으로 오직 주님 한분 의지하면서
끝까지 맡은 소임 잘해주시기를 부탁드려요.

저희는 후방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형제를 위해 기도하렵니다.

하늘 길

김 아 가 권사님

내 주님 안은 나의 집
전, 주님의 집
그 집에 비밀스런 하늘 길 있으니
자유로이 넘나듭니다.

전, 오늘도 천국의 축복을 담아 나릅니다.
저기 저 동네에도
가난한 할머님이 사시는 마을에도
저 전선에도…
내 주인님은 인자로우셔서
아낌없이 주라고 하십니다.
돈없이 값없이.

병들어 안타까워 우는 이웃에게는
위로의 마음을 쏟아 내립니다.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내 주인 집안의 모든 것은 흘러나옵니다.

전, 오늘도 새로이
이 길을 사랑하며 찾아갑니다.
내 주인님이 그리우면 달려가 그 품에 안깁니다.

이 길을 벗어나면
그 어떤 것인지를 전 너무 잘 압니다.
옛 믿음의 조상들이 다져놓고 걸어가신
비밀스런 하늘 길.

전, 오릅니다.
오늘도 쉼없이…
그 언젠가 이 길은 걷히고
내 사랑하는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맞대어 뵈올 것입니다.
사모하며 그날을 기다립니다!
이 하늘 길 걷히울 그날을…!!

그의 순례자(나의 옷, 나의 신발, 나의 장막, 나의 음식)

사람들은 지나치지 않더라도 내 마음에 맞는 옷을 입고 내 옷이라 부르고 싶어합니다. 신발도 그러합니다. 물론 자기가 사는 집도 굉장하지는 않지만, 자기 마음에 꼭 맞는 그러한 집을 갖고 싶어 할 줄 압니다. 날마다 먹는 음식도 자기에게 알맞고, 자기 마음에 드는 음식을 원할 줄 압니다.

우리는 출애굽기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는 12장만 읽어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 못하고 상상도 못한 사랑이었습니다. 만약 출애굽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뜻을 그들이 안다면 말입니다.

일년 된 어린 양, 그것도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이 나와 우리 가족을 대신하여 피흘려 죽임 당하였다는 것은, 염소나 어린 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실상을 알고 보니 독생자의 십자가의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안에서 “어린 양을 불에 구워 먹되 머리도, 내장도, 정강이도 먹어라. 그리고 무교병도 먹어라. 그리고 쓴 나물도 먹어라.”는 말씀의 의미를 빛 가운데서 우리가 깨우쳐 안다면,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정말 놀랍게 알아갈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참으로 깨우친다면 실상이 되어갈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내가 힘입으므로, 그 부활하신 주님은 나의 지혜와 나의 심장과 나의 곧음과 강함이 되어주시고, 내가 언제나 바라볼 수 있는 나의 맑음이 되어 주십니다.

주어진 고난과 시련 속에서는 나 혼자가 아니고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므로, 고난은 힘든 것이 아니라 쓴 나물 먹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렇게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것 사실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의 백성들이 입는 옷과 신는 신발과 살아가는 장막과 그리고 먹는 음식은 어떠했나요?
우리가 그 점을 헤아려 볼 때, 그것은 정말 상상 밖의 일들입니다.

옷은 새로 입히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지 않고 낡아지지 않도록 보호하셨답니다. 신은 그 광야 길을 아무리 걸어도 닳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곳은 물론 그러한 여건 속에서 그들도 감당하면서 갔겠지만 장막이었습니다. 천막생활이었습니다. 그들의 음식은 늘 일정하게 만나를 먹었습니다. 우리가 그 음식에 관해서 자상하게 알지는 못해도 애굽에서 먹던 음식보다 못했다는 것은 뚜렷한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독생자를 주실만큼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그들이 입고, 신고, 잠자고, 먹는 생활의 기본적인 것에 관해서는 왜 그렇게 초라하게 하셨을까요?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실 뿐 아니라 지혜로우신 분이 틀림없으신데 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고, 때론 장막 문 앞에 앉아서 울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의 그 뜻하심에 관해서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실상을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그 사랑은 우리 위한 남김 없는 최상의 사랑이었습니다.
그것도 곁에서 지내주신 정도가 아니라 죽음으로의 피! 다시금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속할 수 있는 어린 양의 고기! 살아계심으로 우리와 헤어짐이 없는 한 몸 됨 속에서의 지혜와 주님의 살아있는 심장과 곧음과 강함! 그리고 언제나 내 주님을 바라보므로 마음이 부패하지 아니하고 맑음 속에 살 수 있는 이 놀라운 은혜!

여러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겪는 고난 속에서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함께하여 주시기에, 넉넉한 마음으로 그 고난을 가벼이 여기며 지나갈 수 있는 이 놀라운 은혜!
그러한 사랑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히시고, 신기시고, 잠자게 하시고, 먹이시는 것은 왜 그렇게 초라하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 대하여 분명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늘 그렇게만 먹이시고, 입히시고, 신기시고, 잠재우시는 분은 아니시라고요!
분명히 그들이 가나안 복지에서 주님의 은혜로 승리하고 난 이후에 살아갈 때, 그들은 좋은 옷도 입을 수 있었을 줄 압니다.
그들이 그 가나안 복지에서 살던 집은 그들이 지어 놓은 최상의 집이었습니다.
그들이 먹는 음식에 만나는 없어졌습니다. 가나안 복지의 그 좋은 과일들과 곡식으로 인하여서 그들의 삶은 풍요로웠습니다.
그들이 신는 신발도 결코 초라하지 아니했을 줄 압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왜 그러하셨을까요?
임시 견디라는 것일까요?
아닌 줄 압니다.
우리가 나의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이 아니라면, 결코 진정한 삶이 될 수 없음을 깨우친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냥 제가 좀 더 잘할 테니 하나님은 지시하여 주시고 도와주셔요.”라고만 한다면, 우리의 생활은 절대 변화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면, 호세아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이 풍성하면 풍성할수록 더욱더 패역한 자가 되고 만다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틀림없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나를 부인하고 주님과 연합하고, 오늘 나에게 오는 고난과 가난과 시련과 연약함과 갖가지 어려움은 나의 십자가로 짊어져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 한분을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내 주님 따라갈 그때, 우리의 영혼은 빼앗김이 없고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우리가 내 환경을 보고 탄식하고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하는 우리가 아니 되고, 주님 마음에 합한 아름답고 능하고 경건 되고 강한 자로 서서,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움 없는 그런 자로 걸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점이 우리 영혼 속에 각인되고 형성 되도록, 주님은 광야에서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와 같은 일을 섭리하시고 우리에게 착용시키시면서 이끄셨음을 아는 것은 정말 필요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입고, 신고, 먹고, 잠자는 이 모든 것이 참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얼마나 파리한지요!
영혼은 얼마나 초라한지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물론 우리가 가난하게 살고, 초라하게 입는다고 하여서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먼저 말씀드린 것처럼, 때가 되어 다윗이 궁궐의 삶을 살더라도, 왕복을 입더라도, 왕의 진미를 먹더라도, 왕의 신발을 신더라도, 우리 하나님은 나무라지 아니하셨을 줄 압니다.
문제는 우리 영혼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다듬어져야 되는 것만은 틀림없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점에 주님과 함께 합한 자로 준비된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함께하시기가 얼마나 쉬울까요!
우리는 주님 주시는 그 은혜를 얼마나 값지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어느 의미에 있어서 우리는 겉의 것 먹고, 겉의 것 마시고, 겉에 것 입고, 겉의 것 신고, 겉의 것을 가지므로 잠자는 것보다는, 주님 한 분께 우리의 온 관심과 마음이 매어달리기를 우리 하나님은 정말 원하시는 줄 압니다. 이 점이 형성되기까지 말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비참함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아끼고 두둔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이것은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내가 참 사랑할 분은 내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참으로 의지할 분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내가 온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고 사랑하며 따라갈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어떠한 곳이라도 주님과 함께라면 쉴 수 있고, 평안해 할 수 있고, 강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함이 얼마나 복 되고 좋은가요!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주님이 내 목자이시면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내 먹는 것, 내 입는 것, 내 잠자는 것, 내가 살고 머무는 곳, 다 주님의 허락하심 속에 주님과 함께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마음으로 올바르게 익혀가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힘주어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데 오늘 나의 가는 길에서 내 먹는 것, 내 입는 것, 내 신는 것, 내가 사는 장막, 참으로 초라할지라도 만약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우리 마음에 깨우쳐 안다면, 정말 이런 감탄스러운 고백을 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주님! 내 온 관심을 주님께 두고, 내 온 마음이 주님께 속하여 주님을 향하도록 이렇게 섭리하여 주신 것이 너무 놀랍고, 너무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은 나에게 너무 알맞은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줄 압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읽을 수 없지만 사무엘 상 23장, 24장, 25장, 26장에서 엔게디 동굴에 머물러 있는 다윗, 헤렛 수풀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다윗이 그가 입는 옷에 대해서는 정말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조금 찢어져도 그만입니다. 허름해도 별것 아닙니다.
신발 또한 그렇습니다. 먹는 것도 겨우겨우 끼니만 이어도 그만입니다. 장막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다윗이 주님께 속하여 있고, 주님 의지하고 있고, 주님 모시고 있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밝음이 있다고 할 때, 다윗은 아름다웠습니다.
다윗의 영혼은 참으로 맑고 정결하였습니다.
다윗은 강하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보암직한 다윗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옷으로, 먹는 것으로, 신는 신발로, 사는 삶으로, 하나님 앞에 불평할 이유 없었습니다. 바로 그것은 우리 하나님의 섭리하심 속에 주신 최상의 것이라고 보아야 할 줄 압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 형성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느덧 주님을 피난처로 알다보니 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내가 아니라 주님 안에 내가 있고, 어느덧 나를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주님을 의지하고, 스스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도 아닌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이점을 생각하므로 영혼이 평안하고, 영혼이 기쁘고, 영혼이 강하고, 자유가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인 것입니다.

오늘 보잘 것 없는 이런 것들 때문에 내 마음이 주님과 멀어지고 이런 것에 속해 있다면, 그것은 요한 계시록 3장의 라오디게아 성도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비참합니다. 곤고하고 가련하다고 했습니다. 그 곤고하다는 말은 처참하다는 뜻이고, 가련하다는 것은 정말 불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은 가난하였습니다. 영혼은 벌거벗은 자였습니다. 영혼은 눈먼 자였습니다. 겉의 것은 좀 가지고, 먹고, 입고, 살고 있을지 몰라도 영혼은 엉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환난이 있고 궁핍이 있고 핍박이 있었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요하다는 말의 의미가 단순하게 그 무엇만 가리키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내 영혼이 기름지고, 내 영혼이 행복하고, 내 영혼이 강하고, 내 영혼이 맑고, 내 영혼이 경건 되고, 내 영혼이 힘이 있습니다.
마음이 주님과 함께여서 전혀 위축당하지 않는 것, 이것과 라오디게아 교회 형편하고 어찌 바꾸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주어진 길은 어느 의미에서 이렇게 제한됨이 많은 것 틀림없습니다.
입는 옷 늘 그 옷이고, 음식도 여러분이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 없고, 여러분의 잠자리도 여러분이 자고 싶은 곳에서 마음대로 자는 것은 아니고, 물론 예전보다 훨씬 더 생활들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신발도 여러분이 신고 싶은 대로 신을 수 있는 신발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두다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는 일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려운 여건으로 생각하면 자유롭지 못하고 불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좋은 기회로 삼아 본다면 내 진정 속하고, 내 진정 사랑하고, 내 진정 영혼에 참된 근거되시는 나의 진정한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로 알아차린다면, 엄청난 유익과 보화를 발견할 줄 압니다.

여러분, 잠깐만 생각해 보세요.
주님께 속하여 주님을 가까이 하고 경배하던 솔로몬! 참으로 겸손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신뢰하고, 자기 먹고 싶은 대로, 자기 입고 싶은 대로,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솔로몬은 우리가 쳐다보기도 싫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늘 초라하게 살라는 뜻은 추호도 아닙니다. 내 영혼에 형성되는 것은 바르게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울이 왕 되기 전에 그는 농부였습니다.
입는 옷 변변치 못했을 것입니다.
신발 그러했을 것입니다.
먹는 생활 단조로웠을 것 같습니다.
그의 집안은 보나 안보나 단출한 집안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모셨습니다.

아름다움이 있었고요. 부모에게도 아름다운 자녀였고요. 그가 마을 사람들이 보아도 참으로 맑고, 참으로 생기 있었습니다. 그리고 먼 곳에 있는 형제들이 어려움 당했을 때는 아주 강한 용사답게 일어서는 그 모습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요!
그러나 왕위를 먹어버리고, 왕위를 입어버리고, 왕위에 앉아버리고, 왕위를 자기의 권위로 신어 버렸을 때 그는 정말 비참한 자였습니다.

전선에서 오늘 주어진 사명은 적지 아니하면서도 단조로운 생활속에 서 있는 여러분!
우리는 고마움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일과는 결코 단순하지 아니할 줄 압니다. 우리는 모두 감사함으로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며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위에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군복무 기간을 마치시고 다시금 자유로운 분위기로 돌아간다면, 여러분은 먹고 살고 입는 이 모든 것이 다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세요!
디모데 후서 3장 말씀처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 돈을 사랑하게 마련이고요. 쾌락을 좋아하게 마련이랍니다. 자기를 용납한다면 정말 어긋난 길로 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교만하고요, 그 사람은 부모를 거역하고요, 쾌락을 하나님보다도 더 좋아한답니다.

이 말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쾌락이 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쾌락을 그 무엇인 것처럼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이러면 벌써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이상한 모습입니다. 자기에게 신뢰 두고, 자기에게 마음 두었을 때 변해버린 이상한 모습입니다. 사람은 그 점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마치 이웃집에 불이 나서 새로 집을 짓고 살아간 먼 후일에는 그 일을 잊어버리고 살듯이, 창세기 6장, 7장, 8장의 홍수의 심판과 창세기 19장의 유황불의 심판은 역사상으로 분명히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애써 잊고 살고자 합니다.

사람이 생각 없고 참으로 이성이 없는 짐승처럼, 오늘 나의 나됨은 전혀 없이 자기의 삶은 정말 엉망이면서, 자기를 사랑하고 바로 그것을 자기 하나님 삼고 살며 어둠의 길, 불행의 길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군복무로 여러분의 삶이 묶어져 있는 이 기간! 참으로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므로 여러분에게 독생자 예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참 좋은 기회 주셨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내 인생에서 내 삶의 의지 되시고, 내 삶의 상담자 되시며, 내 영혼의 참 빛 되어 주시는 분이 누가 있었나요?
나사렛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정말 그러한 분이 되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때라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이시고요, 내가 상담할 수 있는 분이시고요, 나의 힘 되어 주시고요, 홀로 외로울 때 진정 내 사랑이 되어 주시는 나의 구주요, 나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이 결코 짧지 않는 군복무 시간 동안 이점을 깊이 있게 발견해서 주님을 모신 삶으로 이 사회에 돌아오신다면, 그리고 그 삶을 잊지 않는다면 결코 여러분의 인생은 실패하지 아니할 줄 압니다.
진정한 내일이 있고 먼 후일이 있는, 오늘도 나를 상실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사는 값진 삶이 우리에게 있을 줄 압니다.

전선에서 이 나라의 어려움을 짊어지고, 북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결코 평안한 소리 아니고 불안한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여러분은 뒤로 물러서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굳건하게 서서, 내 조국과 후방에 있는 가족들과 후방에 있는 여러분의 친지들을 지키고자 서 계신, 여러분의 그 단단한 마음에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감사와 더불어 죄송한 마음을 드립니다.
그리고 이날도 주님의 은총과 선하심이 여러분 위에 임하기를 온 마음으로 두 손 모두어 주님께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정말 복된 시간!
정말 유익된 시간!!
내 평생의 삶의 기초를 잡는 놀라운 시간되시기를 정말 기원합니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여러분!
스쳐가는 말이 아님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참된 내용임을 기억해 주십시오!
여러분에게 다시 오지 못할 정말 중요한 시간으로서 이 시간을 맞이하시기를 원합니다.

행복한 당신의 양으로

오 선 영 집사님

나의 선한 목자 예수님!
이 따름에는
지나온 걸음 집착하지 않고
내일을 위해 오늘을 성실히 살아 볼
가치 있는 삶이 있습니다.
주님이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한 이곳에
비록 사랑하는 가족 곁에 없고
익숙했던 내 모든 생활 없지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과 안식 있기에
영혼 솟아오름과 주님 기쁘시게 하고픈
빈들판 향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번거롭고 어지러운 이 땅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지만
또 가야 할 순례의 길에
지팡이와 막대기로 진두지휘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끝까지 가렵니다.

주님을 목자 삼고 가는 길에
나와 세상을 이기게 하시고
내 모든 형편 형통하게 하시며
천국의 유업을 넘치도록 주심에 감사가 됩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양 경 주 집사님

믿음직스러운 군 형제님들!
유난히도 무더운 지난여름이었지만, 아랑곳 아니 하시고 국가방위를 위해 얼마나 수고하심이 많으셨는지요?
지금은 계절의 변화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각종 훈련과 전투 준비로 수고하심은 더해 가시겠지요?

형제님들!
북녘 땅의 예측 못할 행동으로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전역을 연기하고, 정해진 휴가를 뒤로하고 조기 귀대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여러분의 가슴속에는 분명 “내 조국” 할아버지의 나라를 지키겠다는 불타는 신념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습니까?

그러한 신념 앞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응원하는 국민이 많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군 생활이 자기를 점검해 볼 수 있는 얼마나 좋은 곳인지요.
통제되고 절제된 생활 속에서 인내심을 키우고, 보고 싶은 부모님께 대한 그리움을 자아낼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많은 군 장병들이 군대에서 새롭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다는 놀라운 사실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군종형제님과 군목님과 믿음의 지휘관님들과 믿음의 간부님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님들!
군 생활이 빈들판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라고 생각하지 마셔요!
빈들판에 혼자인 것 같지만, 곁에서 손 내밀어 주시고, 동행해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등 뒤에서 여러분을 밀어주고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예레미야 29장 13절)란 말씀처럼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찾으실 때, 예수님은 여러분들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일요일(주일)이면 군부대에 있는 교회에 나가셔서 생명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배우고 알아가고 만나시기 바랍니다. 혹시, 믿음을 갖지 않은 군 형제님들이 계신다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기회!
그것은 군대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깨어있는 삶

윤 효 정 장로님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한밤을 지새우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훈련과 작전으로 수고하시는 사랑하는 형제님들의 땀과 수고로 후방의 부모 형제들은 안정된 가운데 각자의 삶에 충실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저는 군복무 중 보람된 일도 많았지만 골리앗을 만난 것처럼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비무장지대 안에서 지뢰밭 가운데 서서 발을 움직일 수 없을 때, 추운 겨울 눈보라로 시야는 흐리고 꾸불꾸불한 급경사 내리막길 빙판도로에서 타고 있던 작전 차량이 미끄러질 때도, 예수님은 함께해 주셨고 보호해 주셨고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깨어있는 삶을 살기 위해‘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아 장사지내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므로,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마음으로 듣고 순종할 때,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오늘의 삶의 무게가 무거워 일어설 수 없나요?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워 걸을 수 없나요?
나의 좋으신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태복음 11장 28절)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주시고 쉼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 모시고 깨어있는 믿음의 삶을 살므로 소망과 영광이 있는 삶 사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의 나의 삶을 인도하여 주시는 내 예수님

사람들이 삶을 경영하고 또 나름대로 자기의 발전을 위하여 무척 애를 태우며 힘쓰고 있습니다만, 분명히 우리는 누군가 나의 삶을 정확하게 인도하여 주시는 분이 없음에 관해서 때때로 탄식하며 괴로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오늘 이 세대를 바라보실 때, 사람의 이러한 모습이 진정 우리 하나님의 뜻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2장 앞부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죄에게 발목 잡히지 말고’
죄에게 발목 잡힌다면 우리는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늘 죄에 이끌려 가는 그러한 길뿐입니다. 또 한편 꼭 필요치도 않고, 꼭 내가 짊어지지 않아도 될, 그러한 무거운 짐은 짊어지지 말라고 권하십니다.

우리가 그 많은 자격증을 다 따야 합니까?
우리가 그렇게 많은 언어를 다 습득해야 합니까?
저는 꼭 필요한 것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다 필요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러므로 죄는 아니라도 나에게 꼭 필요한 그 이상의 것을 갖지 않고자 마음을 간결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면 내가 죄에게 발목 잡히지 아니하고, 내가 쓸데없는 많은 것에 이끌려가지 않는 자라고 한다면, 무언가는 내 삶에 핵심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내가 속하고, 오늘 내개 주어진 조그만 일과를 성실히 살아갈 그런 삶이 정말 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히브리서 12장에서 그 점에 관하여 말씀하여 주십니다. 히브리서 12장을 좀 더 읽다 보면 우리는 이런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점에 나의 온 마음을 기울여 힘써가지 않는다면, 망령된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내가 정말 어처구니없는 그런 일을 했을까? 왜 내가 보아도 참으로 한심스러운 그런 길에서 나의 시간과 나의 마음과 나의 뜻을 기울였을까?’라고 한탄하듯 말하게 됩니다. 한심스럽고 망령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 히브리서 12장 말씀은 우리가 이 참 길에 집착하지 아니할 때는 쓴 뿌리가 나서 우리를 휘감는답니다.
이것은 좀 어려운 말씀이라서 쉽게 이해치 못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주님을 가까이하고자 참으로 주님께 가까이 다가온 자라고 한다면, 이 말씀의 의미를 애매하지 않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젊음이 있습니다.
동시에, 이 젊음이란 패기와 용기가 있고 나름대로 갖가지 좋은 면도 갖추고 있는 것 같지만, 젊음의 배후에는 어두움과 죄악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쓴 뿌리가 젊음 속에 뿌리 박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이 쓴 뿌리에 기회를 주어서 이 쓴 뿌리가 나의 삶을 좌우하도록 해 놓는다면, 정말 그 쓴 뿌리가 우리를 휘감아버리고 마는 것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내용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정말 좋은 뿌리가 아닙니다!
좋은 근거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참된 마음으로 서가는 것은 얼마나 귀중한 일일까요!

많은 젊은이들이 유망해 보이고 때로는 희망찬 길에 서 있는 사람인데, 쓴 뿌리가 은연중에 그의 삶을 휘감아 버려서 그의 이름도, 그의 지나온 경력도 다 허무한 것으로 팽개쳐지도록 만들어 버리는 일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읽을 수 있는 줄 압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남의 일로 알아서는 결단코 아니 됩니다!

우리 각자의 영혼 속에, 우리의 젊음 속에 이런 쓴 뿌리가 있는 것,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해답이 없나요?
그러면 인생은 해답이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제가 미리 말씀드린 오늘의 우리 삶을 인도하여 주시는 주님께 속하여서, 그분의 인도하심 속에 우리가 겸손하게 순종하여 간다면, 이렇게 가슴 칠 일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쓴 뿌리에 휘감기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속하여 예수님께 이끌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이란 것은 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너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악에 발목 잡히지는 않나요?
그리고 쓸데없는 것에 내가 기우뚱거리며 살고 있지는 않나요?
그리고 내가 탄식할 만한 그런 삶으로 빠져들지는 않나요?
그리고 멀리서 오는 것보다 내 속에 있는 쓴 뿌리가 나를 휘감아서 나로 하여금 사람의 형상을 만들지 못하도록 이끌리는 일은 없나요?

이것은 내 몸이 아무리 건강하고, 겉으로 볼 때 내가 아무런 것에 구속된 것이 없는 자 같아 보일지라도, 오늘 여러분과 제가 이 땅에 있다면 실상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마음으로 생각한다면, 이러한 삶에서 내 진정한 구주를 원할 것입니다. 나의 진정한 구원자를 원할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구원자!
내가 죄악에 속하지 아니하고, 무의미한 이런저런 것에 이끌려 가지 아니하고, 나에게 정말 꼭 필요한 그리고 이 시간 나와 함께하시며 오늘 나의 삶을 이끌어 주실 진정한 분이 필요치 않나요?
히브리서 12장은 바로 예수님을 이러한 분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저는 힘주어 증언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진실한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진정한 구원자로 모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슴 치며 괴로워합니다.

만약 우리 마음에 양심을 버리고 착한 마음을 버린 사람이라면 오늘도 내 발을 죄악에 담그고, 내 손을 어두움과 맞잡고 살면서, 그냥 웃으며 지나갈 수 있을 줄 압니다. 이것은 사람의 모습이 참으로 아니라고 말해야 할 줄 압니다.

해답이 없는 것 아닙니다.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참된 해답을 마음으로 구하여 본다면, 바로 그것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십자가에서 친히 담당해 주시고, 그리고 내 선한 목자 되셔서 그 몸으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시고자 다가오신 귀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정말 신뢰할 것 못 되고 정말 어려움 속에 사로잡히기 쉬운 우리 육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 때문에 이 어두운 세대 가운데서 잠잠히 예수님을 앙망하는 그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바랄 수 있는 유일한 믿음이고요, 유일한 소망이고요, 유일한 기대감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주님을 앙망하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나에게 나의 주님으로 다가오셔서 내가 속할 수 있으며, 내가 의지할 수 있으며, 오늘의 나에게 참된 믿음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 믿음은 막연한 죄악도 아니고, 또 필요 없는 것들도 아니라, 우리가 꼭 마땅히 오늘 행하여야 할 그 참된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나의 목자이신 주님께서 허락하여 주시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주요”라는 말씀의 의미는 이런 믿음을 우리 속에 창조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궁리하는 그런 궁리가 아니고 나의 주님께 속하여 귀 기울일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생명 속에서 이런 살아있는 믿음을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속하여서 주님과 함께하는 마음으로 그 믿음을 붙들고 순종하여 갈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여 주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믿음대로 우리 삶을 밝게, 우리 삶을 자유롭게, 우리 삶을 값지게 그리고 마땅히 걸어갈 길로 그리고 마침내 그 주신 믿음대로 결과가 이루어질 수 있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길로 걸어갈 때 우리는 진동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합니다.
요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쓴 뿌리가 우리를 감을 수 없습니다.
탄식하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런 삶으로 이끌어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끓어오를 수 있는 줄 압니다.
또 한편 가슴 속에 더 불붙는 마음이 있다면, “예수님! 남은 길도 이런 길속에서 주님을 더 따르고 싶습니다. 주님을 더 가까이하면서 순종하고 싶습니다!” 이 말이 여러분과 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히브리서 12장 마지막 부분은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이것이 우리에게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삶이 없습니다. 정말 삶이 없습니다!
만약 오래전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 예수님께서 지금도 보좌에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증으로, 그 손과 발에 상처 가지신 그 모습으로 지금도 우리를 주목하며 마음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주님 아니 계신다면, 우리 인생은 희망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젊음이 있고 건강이 있지만 죄악에 발목 잡힌다면, 도리어 건강하지 못한 때보다 더 후회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건강이 있고 나름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별로 가치 없는 그런 것들에 우리의 시간을 보낸다면, 결과적으로 볼 때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하는 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주어진 삶에서 뚜렷한 삶의 길로도 인도함 받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시간 지나고 난 이후에는 한탄할 것입니다. 한탄할 것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았지?’라고 하며 한탄할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 또 한 가지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얼마나 강인한지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얼마나 나를 강하게 사로잡는지요.
나의 육신 안에 뿌리박은 쓴 뿌리가 말입니다!
그 쓴 뿌리가 우리를 휘감아서 원치 않는 길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나의 주님께 속한다면, 우리는 가슴 칠 일 없습니다. 쓴 뿌리가 우리에게 역사하지 못합니다. 주님과 함께 영광의 길 걸어갈 수 있습니다. 누가 이 깊이 있는 의미에 대해서 우리의 고민을 알아주나요?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사회에 나온 후에 삶이 너무 분요해서 나의 어떠함을 돌아볼 수 있는 여가가 없는 삶 속에서 쫓겨 다닐 그때가 아니라, 지금 하나님께서 섭리해 주신 오늘 이 중요한 시간에, 예수님께 속하고 내 삶의 진정한 목자 되신 그분의 인도하심 속에 살아갈 수 있는 이 놀라운 관계를 여러분이 가져 보신다면, 너무 값지고 중요한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전선의 아침저녁은 벌써 싸늘함을 느끼는 오늘의 시간입니다. 어쩌면 한겨울보다도 늦가을이 여러분의 몸에 차가움의 고통을 더 느끼게 한다는 것을 아마도 여러분은 너무 잘 아실 것 같습니다.

내 진정한 구주이신 주님께 돌아오므로 잃어버려진 자가 아니고, 내가 원치 않는 빼앗긴 삶이 되지 않기를 원하여 봅니다.
예수님께 돌아와서 나를 찾고, 이 땅에 사는 나의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이 값진 시간이 여러분의 지금 시간이 되시길 정말 원하여 봅니다.

여러분!
오늘도 이 글을 읽으시면서 가볍게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날도 여러분을 부르시고 이날도 여러분을 향하여 계시는 그 예수님께 마음의 눈을 드시고, 예수님을 향해 다가서시는 여러분 되셔서, 주님과 여러분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져 가시기를 참으로 원합니다.
정말 뜻 깊은 시간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