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귐의 창 > 조그만 빈들판

우리들의 소식

조그만 빈들판


본문

조그만 나의 빈들판

2016-03-20 / 71 회차

조그만 나의 빈들판



사귐의 창

취적리교회 배 명 자 집사님

작은 일의 날을
살아간다고 해도
빈 들,
빈 마음 되어 부르면
목마르지 않은 그 이름!!
죽음보다 강한 사랑
나의 주님!! 예수님!!

일급수 섬진강 물보다 더 맑고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향하도록
어린 나를 연단해 주시는 주님

조용히 흐르는
섬진강 물길 따라
달리는 열차 안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사귐의 창을 열고
내 사랑!! 내 목자!!
내 사모하는 주님을 부릅니다.

주님은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로
작은 겨자씨로 내게 오시지만
시간에, 일에
쫓겨 사는 삶이 아닌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일어서면

그 일하심은
그 열매는
결코 작지 않음을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배워갑니다.

십자가 건너서
주님의 시간을 달리고 있는
잊지 못할 사랑하는 님들을
작은 자의 가슴에 품고

나도 주님의 시간을 달음질하고자
일어선 순례자 되어
주님이 보내시는 길에
주님의 뜻을 심기 위해

조용히
또 일어섭니다.

헤아림

손 흥 세 목사님

좁다란 논두렁에는 벌써 움이 돋고
싹이 솟아오른다.
시리고 매서움엔 개의치 않고
어느새 새파란 잎들이 올라왔다.

어쩌면 잠자고 있을 영혼들에게
속히 일어나라고 재촉하는 것 같은 바람소리
굉장한 소리는 아니지만
얼른 일어나서 주님의 사람 위치에 서서
이 한길로만 서라고 하는 것만 같다.

길을 걷는다.
듬성듬성 꽃이 한가득 피어
일찍이도 노래를 하고 있었다.

꽃으로 환하게 기쁨을 준다.
그리고는 시간이 흘러
변함없이 열매 허락할 것을…

내리쬐는 이글거리는 볕을
사람들은 싫다고 멀리하겠지만
그 열매들은
작렬하는 그 뜨거운 빛이 없으면
맛이 없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감사함으로 빛을 받아들인다.
아주 즐거움으로….

우리 또한 혹독한 시련이 올 때
자꾸만 벗어나려 하지만
내 주님의 깊으신 사랑이 깃들어진
아주 크고 넓으심을 헤아려 볼 수 있음을….

주님을 모셔야지요

부산 수민교회 이 상 분 권사님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이가
내 삶의 뜰에 찾아오셨으니
주님을 모셔야지요.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살아나신 이와 함께
나도 죽고 나도 살아났으니
주님을 모셔야지요.

그 입의 말씀으로 이김을 주시고
불꽃같은 눈,
빛난 주석 같은 발로 내게 오셨으니,
새벽별 바라보며 주님을 모셔야지요.

긍휼과 소망의 주님은
밝으심으로 나를 깨우시고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시고
세상에서 왕 노릇하기까지 가르치시니,
하나님 전의 기둥이 되어야지요.
주님을 모셔야지요.

나의 부요는 순종의 아멘이고요.
주님만이 나의 의가 되시며,
주님만이 내 삶의 실상입니다.
사랑의 주님,
주께서 내게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니,
주님을 모셔야지요.
온 마음 다해 주님만을 모시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요한복음 5장에서 읽을 수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하여 주기를 기다리는 적지 않은 여러 사람이 있었습니다만, 그 가운데서 삼십팔 년 된 병자만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건강한 몸으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금 두 번째 그를 만나주셔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귀중성을 스쳐 지나갈 때가 많습니다. 때론 이 말씀의 의미를 무거운 짐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줄 압니다.
‘몸은 건강하지만 내 마음대로 살 수 없구나. 온 힘과 정성을 다해서 죄 범하지 않기 위해서 정말 애써야겠구나.’ 때로 이런 마음이라면 ‘건강해도 별로 행복한 것 아니야.’ 여전히 결코 가볍지 않는 마음으로 또, 이길 수 없는 그 어둠과 죄악 때문에 괴로운 짐을 얼마든지 질 수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그 깊은 의미를 알아본다면 그것은 엄청난 축복이 그 속에 들어 있는 줄 압니다.
왜 삼십팔 년 된 병자에게만 찾아오셨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애매한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이는 연못의 동함을 기다렸을지 몰라도 이 삼십팔 년 된 병자는 벌써 그 점에 관해서는 포기한 자였습니다. 자기를 옮겨줄 이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온 유대 땅, 예루살렘, 갈릴리에 나사렛 예수의 소문을 모르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더군다나 병든 몸으로 있는 그들에게 나사렛 예수님의 소문은 얼마나 귀하게 들렸을까요?
그는 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도, 한낮에 아무런 희망 없는 멍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그 예수님 보내 주세요!’란 조용한 마음의 부르짖음이 그의 영혼 속에는 가냘프지만 아마 이따금 이어져갔음이 틀림없을 줄 압니다.

요한복음 1장의 무화과나무 아래서 어떤 마음을 나다나엘이 품었는가를 보셨던 그 예수님은,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주님 기다리는 것도 분명히 읽으신 줄 압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그에게 하신 말씀은 단순했습니다.
“네가 원하느냐?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는 자기를 옮겨줄 이가 없다고 말하면서, 낫고자 하는 의욕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즉시 그를 바라보시며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여 주시었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제가 그다음의 귀한 축복을 분명히 누렸으면 합니다.
요한복음에 이 귀중한 내용이 기록된 것은 보좌에서 우리를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도 이런 은혜를 주시기 원하기 때문인 줄 압니다.

우리가 땅끝에 서 있는 자로서 이사야 45장처럼 진실하게 주님을 앙망한다면, 오늘의 평범한 일과 생활 속에서도 내게 진정한 참된 생명과 힘이 될 수 있는 주님을 앙망한다면, 아마 여러분은 구원과 힘을 얻을 수 있을 줄 압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는 삼십팔 년 된 병자에게 스스로 몸을 움직여 보라는 것과 오늘 우리가 스스로 죄를 이기면서 일어서고, 이기면서 걸어가고, 이기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보암직한 삶을 살아가라는 것과 꼭 같은 내용이라고 보면 틀림없을 줄 압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죄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녹록한 상대가 아닙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하며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는 상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자로 주님을 잠잠히 바라보고 소원하며 기다렸던 것처럼, 오늘 여러분과 저의 몸이 멀쩡하고 오늘 주어진 환경이 어렵지 않아도 스스로 일어설 수 없고 하나님 보시기에 스스로 행할 수 없고 하나님 보시기에 스스로 걸어갈 수 없는 그러한 우리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참되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없는 우리임을 알고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한 마음으로 주님을 앙망한다면, 주님께서 틀림없이 여러분이 의지하고 사랑할 수 있는 주님으로 다가오셔서 새롭게 오늘 길 속에서 일어설 힘을 주실 줄 압니다.
새롭게 주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생명의 빛을 주시고 우리의 길 속에서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아니하시고 정말 주 없이 살 수 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갈구하는 우리와 함께하여 주심을 분명하게 우리가 힘입어 갈 수 있을 줄 압니다.

요한복음 5장의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처음 취한 자세나 그다음 그가 건강한 몸으로도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그런 마음으로 주님을 앙망한다면, 에녹과 함께 살아주시던 그 주님은, 저 감옥 속에서도 요셉과 함께 살아주시던 그 주님은, 오늘 여러분과 저의 주님이 되셔서 내가 의지하고 내가 붙들 수 있고 내가 앙망할 수 있고 내가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나의 주님으로 다가와 주실 줄 압니다.

우리는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이 말씀의 의미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고자 하시는 진정한 마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그 말씀과 마찬가지로, “네가 이제는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살고자 하느냐?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답게 살고자 하느냐?” “주님, 원합니다마는 나 스스로 어쩔 수 없습니다.”라는 마음으로 주님을 앙망한다면 주님은 오늘도 우리 곁에 서셔서 “일어나 함께 가자!”라고 우리를 불러 주실 줄 압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은 이러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자로 어두움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게 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우리에게 더 중한 것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어둠도 죄악도 우리를 점령하고 우리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험악한 형편이 되고야 말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이 그러합니다.
아무리 집이 청소되었지만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이 아니면 그러합니다. 이곳에 숨겨져 있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마음, 우리와 함께 우리의 주님으로 동행하여 주시고자 하시는 주님!
다윗이 아무리 건강해도 주님이 내 목자 되셔서 주님께서 오늘 내게 주시는 삶이 아니라면, 그는 제대로 삶을 걸어갈 수 없음을 시편 23편에서 고백합니다.

오늘도 제대로 삶을 꾸려간 이는 한결같이 고백합니다.
“주님! 나에게는 주님이 한때의 구주가 아니라 떠날 수 없는 나의 구주입니다. 오늘도 나의 빛이시요, 나의 생명이시요, 나의 동행자이십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조용한 마음으로 전날에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서 막연하게 주님 바라보았지만, 이제는 조용한 빈들로 나아가서 한적한 시간을 선택해서 주님 앞에 조용히 무릎 꿇고 주 없이 걸어갈 수 없는 그러한 마음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홀로 어둠 속에 이끌려 가도록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실 줄 압니다.

여러분!
한때 보였던 주님의 얼굴이 아니라 오늘도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가서 주님 없인 살 수 없는 나임을 고백하고 그러나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과 함께 일어서기를 원하는 진실한 마음이라면, 주님은 내 우편에 서셔서 나로 하여금 요동치 아니하고 내 마음의 기쁨, 내 삶의 소망으로 그리고 진정한 나의 기쁨으로 함께하여 주실 줄 압니다.
오늘의 빈들판 찾는 심령이 이러하기를 원합니다.

새 언약

영광 영서교회 김 병 수 목사님

주님!
오늘도 언약에서 벗어날 수 없어
광야를 향하여 달리고 달렸습니다.

주님!
오늘도 깨끗한 손으로 언약을 붙들기 위해
손을 씻고 또 씻었습니다.

주님!
오늘도 언약 아닌 것 볼까 봐
시선의 높이와 각도를
조정하고 또 조정했습니다.

언약에서 벗어난 말 새어 나올까 봐
내 입의 파수꾼을 세우고 또 세웠습니다.
오늘도 언약을 마시고 먹고 입겠습니다.

지금 나를 이끌어 라헬의 무덤 앞에 세우고
“너 저것 보이지. 너도 조심해!”라고
외쳐 보고 싶습니다.

주님!
오늘도 언약이면 족하겠습니다.
주님!!
살기 위해서 언약에서 벗어나느니
더욱 살기 위해 차라리 언약 안에서 죽겠습니다.

주님의 보좌에 강하게 매여 살기 원하여…

함양 마천교회 김 양 중 목사님

사랑하는 주님!
풍성하신 인자하심 가운데 허락해 주심으로 인하여 감격스럽고 뜨거운 마음으로 보내었던 진토리 동산에서의 시간들….
참으로 주님 보좌의 귀중성과 보좌에 집착해 매여 살아가는 그 은혜와 영광스러움을 가슴속에 깊이깊이 깨달으며 인식해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아마도 주님께서 창세기 28장의 야곱에게 땅에서 하늘까지 닿아있는 사닥다리의 꿈을 보여주신 까닭은“너는 이제 하늘 보좌에만 매여서 그곳에 집착하여 살아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아간 걸음 속에 보좌에서 눈을 떼어 땅에 매여 보내었던 시간은 참으로 무의미하게 느껴졌음이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베풀어주신 인자하심 속에서 새롭게 보좌의 소중성을 깨우쳐 주심으로 인하여 강한 집착 속에 정함 있는 마음으로 참으로 주님 보좌에만 ‘매여 가고 매여 가리라!’ 입술을 깨물듯이 그리고 가슴속에 인을 치듯이 아로새겨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사도행전의 알맹이적인 내용이 “주님 보좌의 주권”이라 말씀하시듯이 참으로 제 인생의 알맹이적인 내용도 주님 보좌의 주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요한 계시록의 사도 요한이 오직 주님의 보좌에 집착해 살아갈 때 주님은 언제나 그에게 생생한 오늘의 주님으로 서 주시었듯이, 저 또한 주님의 보좌에 대한 철저한 집착과 매임 속에 주님과의 언약이 오늘! 지금!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러한 삶을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아비가일, 바실래 할아버지, 수넴 여인, 사르밧 과부…. 비록 그분들이 평범한 백성이었을지라도 보좌에서 흘러나온 판단 따라 그토록 섬세하고 아름다운 순종의 길 걸어갔던 것처럼, 그분들이 주님의 보좌에 굳건히 자리 잡아감으로 주님과의 동행이 마치 요한 계시록 19장에 나오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 같았듯이, 제 삶속에서도 보좌의 판단 만큼은 애매하지 아니하고 밝음과 맑음 속에 주님이 입혀주시는 옷만을 온전히 입고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날마다 십자가로 나를 벗어 던지고 부활하신 주님만을 나의 참된 터전 삼고, 주님 보좌를 부단히 앙망하며 자리잡아감 속에 보좌로부터 임해오는 겨자씨 같은 믿음 부여잡고, 주님을 잘 알아드리며 주님께 합한 자로, 주님께 기쁨 드리는 자로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강한 마음으로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보좌에 매임이 아니라면 아이 성의 패배, 다윗 왕의 실족, 엘리 제사장의 파멸 같은 불행과 비극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보좌의 주님께서 이끌어주시며 다스려 주시는 삶이 아니라 막연히 나로서 살아가는 삶이라면, 이 땅을 살아갈 이유와 의미가 없겠기에 주님 보좌에만 매여 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하기에 저에게 변함없는 한량없으신 긍휼 베푸셔서 날마다 보좌의 은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날마다 보좌의 판단으로 저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보좌의 주권에만 집착하여 살아가도록 날마다 제 심령을 일깨워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루하루 제 삶속에 오직 주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너무나 놀랍고 풍성하게 베풀어주시는 긍휼과 은총에 찬양과 감사를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아멘.

내 생명 되신 주님

천성교회 정 찬 규 선교사님

주님!
비록 대적에게 쫓겨 다니는 형편에서도
다윗의 영혼이 지쳐 피곤해 하기보다는
어려움 당한 그일라의 형제들을 위해
나아가 싸워주고자 하는 것은
당신의 생명이 그의 내면에
잔잔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고요.

그의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어떠함은 돌아보지 않으면서
다시금 주님께 물으면서라도
그 생명의 원함을 따르고자 하는 것은
내 주님 당신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생명의 이끄심 속에
비록 큰 승리를 가져온 그곳이라도
결단코 머무르지 아니하며
그를 쫓아오는 대적에 대해서도
어제의 승리로 싸우려 하지도 아니하고
또 다시금 주님 당신께 귀를 기울이는 것은
오직 주님의 생명에 이끌리고자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한 다윗에게
그가 위해 싸워준 형제들로부터 배반당하는
필요 없는 아픔은 맛보지 않도록
그를 쫓아오는 대적의 손이 미치지 못하도록
주님은 강한 요새가 되어주시면서
그의 생명을 지키어 주시었죠.
참으로 주님은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주님!
이처럼 다윗의 발자취를 따라
내 주님 당신의 생명이 변함없이
항상 내 영혼 속에 흐름으로
나는 잊어버리며 부인하면서까지
주님 당신의 생명의 이끄심을 따르렵니다.
이 길속에서 당신의 시대를 살아드리며
당신의 나라로 힘있게 뻗어가고 싶습니다.
아멘! 아멘!!

주님을 앙망함

부산 수민교회 황 경 례 집사님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시 34:5)

“주님을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10)

주님!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주님을 앙망할 때 강한 것 같습니다.
주님을 앙망하는 자만이
광채를 입을 수 있고,
주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의 존재 의미도
나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길도
오직 주님을 앙망함 가운데입니다.

오늘도 새 언약 속에서
주님을 앙망해 감으로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는 자로
주님 안에서 허락하신 그 어떤 길도
주님 안에서는 감사하며 가고 싶습니다.

영광의 길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시 34:5)

“주님을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10)

주님!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주님을 앙망할 때 강한 것 같습니다.
주님을 앙망하는 자만이
광채를 입을 수 있고,
주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의 존재 의미도
나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길도
오직 주님을 앙망함 가운데입니다.

오늘도 새 언약 속에서
주님을 앙망해 감으로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는 자로
주님 안에서 허락하신 그 어떤 길도
주님 안에서는 감사하며 가고 싶습니다.

성전에 오른 날

김 아 가 권사님

조용한 시간
내 주님을 찾는 마음으로
택하여 오른 성전.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하시며
아버지 집에 머무셨던
내 주님의 마음이 가까웁습니다.

오! 주님!
나의 성전 되신 내 주님 안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감미로움이
부요와 행복이 가득 찬,

찬미의 제사로
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이 땅의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복되고 값진 시간들.

며칠 전 폭포수 같은 은혜에 잠겨
해같이 밝던 귀한 주님의 백성들
이젠 보냄 받은 그곳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터 위에
언약으로 굳게 서서
내 주님 모신 보배로운 삶을
살아가시도록 간구하므로
내 주님의 보좌 앞에
귀하신 한분 한분들을
받들어 올려드려 봅니다.

내 주는 내 주님을 찾아
내 주님께 종일 종야
이렇게 매여 있는 비천한 종에게
값진 일들도 맡기십니다.

구로 하듯 간구함도
잃어버린 고려인 연로하신 어르신께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일도 허락하여 주십니다.

오! 주님!!
내 주님 오시는 날 이 모든 분이
“거룩한 백성이요,
주님의 구속하신 자요,
찾은바 된 자”란 말씀을 듣기까지
내 주님 곁에서 신실하게
무익하지만 섬겨가고 싶습니다.

오! 주님! 나의 주님!!
아멘! 아멘!!

우리가 언제나 깊이 묵상할 두 가지

여러분이 정말정말 중하게 생각하고 가슴 깊이 있게 새겨야 할 두 마디 말씀!
시편 78편 마지막 부분에는 하나님께서 요셉의 장막을 싫어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을 택하지 아니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 장막을 싫어하신다. 그리고 나의 삶을, 나의 길을 그분이 택하여 주지 아니하신다.”
그러면 우리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어도 주님을 가까이하는 요셉을 주님은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는 요한복음 15장 말씀처럼, 주님은 그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택하여 세우셨습니다.
어디 요셉 스스로 한 일이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택하여 주신 일이었습니까?

바로에게 꿈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고요, 그 꿈을 해석하도록 해주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바로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요셉을 택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택하도록 섭리하셨기 때문인 줄 압니다.
그러나 요셉을 싫어하신다.
요셉의 장막을 싫어하신다.

다윗에 관해서도 사무엘 하 5장이나 6장이나 7장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얼마나 다윗의 장막을 기뻐하시는가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을 기뻐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택하여 주시므로 다윗의 세대를 지난 그다음 후손들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 귀중한 의미를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무엘 하 11장이나 12장 그리고 사무엘 하 24장에서 다윗의 장막을 싫어하신 것 같습니다. 그 장막을 어찌 주님이 기뻐하실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택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왕으로 앉고, 자기 육체의 원함을 좇아 어둠과 죄악된 길로 가는 다윗.
사무엘 하 24장은 어둠과 죄악까지는 보여주지 아니했지만, 주님을 택한 것 아니고 주님께 속한 것 아니고 주님 바라보며 주님을 나의 힘 삼지 아니하고 주님을 기뻐하는 것도 아니고 주님은 문밖으로 외면당하신, 아마 교회로 친다면 라오디게아 교회 같겠지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말하면서 주님을 문밖에 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다윗은 구 개월 이십 일이나 주님을 힘으로 붙들기보다 그가 소유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헤아리고 있는 다윗.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기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문밖에 둔 라오디게아 교회를 주님이 기뻐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나사렛 예수님이 아무리 초라한 목수라도 이 세상의 것 가진 것 없어도 아버지 안에 거하기를 제일 기뻐하시고, 아버지 하나님 모시기를 제일 기뻐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을 제일 기뻐하시고,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심을 생명처럼 기뻐하셨기에, 나사렛 예수님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결단코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는 요셉을 싫어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를 창세기에서 유추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48장만 묵상하다 보면 무언가 더듬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보다 가족에게 마음이 많이 매여 간 그 요셉! 그렇습니다. 요셉이 창세기 48장에서 겉으로 볼 때 흠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 야곱은 주님의 마음을 알아도 요셉은 그냥 육신적으로 알아볼 뿐이었습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택하는 모습이 그러합니다.
창세기의 이 내용을 먼 옛날 요셉이나 다윗에게만 국한된 말로 생각지 마시고요, 오늘 여러분과 저의 삶 속에서 이 말씀의 의미를 적용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시당하고 오해받고 버림받은 차가운 그 감옥생활 속에서 요셉은 애굽 어느 곳에도 어느 사람에게도 마음 둘 곳 없고 주님 한 분 안에 자리 잡아 있는,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기쁨 될 수 없고 주님 얼굴만이 그의 기쁨인, 주님과 함께 행하는 것만이 그의 기쁨인 그리고 주님 섬기는 자로서 오늘 조그만 행복을 가져보는 그 요셉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 요셉을 기뻐하셨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때 요셉의 장막은 요셉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아무것 가진 것 없었습니다. 주님은 요셉과 함께 사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러한 요셉을 택하셔서 자기의 축복의 도구로, 자기의 영광의 도구로 사용하시었고 택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장막을 기뻐하시었고, 애굽을 살리는데 애굽의 어두움 속에서 하나의 빛을 보여 줄 수 있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요셉을 택하시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것은 주님의 제자들이 이 땅에 보냄 받아 가서 주님의 축복을 이웃에게 전해 주는 열매 맺는 비결을 가르친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고난과 죽음, 이런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주님의 뜻하시는 그 좋은 열매를, 축복을, 은혜를 그들을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사실 이 땅에서 이것처럼 의미 있는 택함 받은 그릇은, 택함 받은 길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용해 주신다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자들은 이렇게 택함을 입었을까요?
명료합니다! 요한복음 15장 앞부분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는 이 말씀처럼 제자들에게 기쁨 되는 것 있었을까요?
이 온 세상에서 “내가 참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거하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여러분! 이런 말씀보다 더 큰 기쁨이 제자들에게 있었을까요?

“내가 주님 안에 거할 뿐만 아니라 주님 말씀 속에 늘 살아간다. 그리고 주님의 원하심을 기도한다. 이루어드린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므로 주의 명령 속에서만 살아간다.”
이것처럼 기쁜 것 있을까요?
없습니다! 없습니다!
주님이 택하셔서 세우시는 자는 바로 이런 자입니다! 바로 이런 자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참 포도나무인 것을 내가 그렇게 기뻐하지도 아니하고, 예수님께 스쳐 지나간 정도이고, 새벽 기도하는 정도이고, 늘 포도나무 가지로 그분 안에 붙어살기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아니하고, 예수님 말씀만 구하고 예수님 안에 거하기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아니하고, 세상의 어떤 다른 뜻도 없이 포도나무의 뜻만을 나의 뜻으로 언제나 품어볼 마음도 아니고, 내가 오직 사랑하여 순종하고 싶은 것이 주의 명령이라는 것도 아닌데 내가 주님 위하여 열매 맺고는 싶어 한다면 그는 잘못된 사람입니다.
그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진정 예수 사람은 아닙니다!
주님! 내가 당신께 보냄 받아 나가기에 앞서서 당신께 속하여 당신께 사로잡힌 이것 이상, 내게 원하는 바 없습니다.

아모스는 원래 목동으로서 이런 자였고요, 주님은 남조 유다 사람인 그를 북조 이스라엘 사람에게 보냈습니다.
호세아는 이렇게 주님께 매여 살았기에 그는 긴 날 동안 주님의 사람으로 섬길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성전된 주님께 속함을 얼마나 기뻐하며 얼마나 정한 마음으로 붙드는가를 주님은 아십니다. 그러기에 이사야 6장에서 주님은 그를 보내십니다.

내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과 함께 연합하고 나의 주님 기뻐하는 이 뜨거움이 없다면 우리는 그렇습니다.
그 장막! 주님 싫어하실까요?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면 주님도 내 안에 거해 주신답니다. 싫어하지 않으시지요. 내가 주님께 속하여 주님의 돕는 이로 그렇게 살기를 원할 때 주님은 우리를 자기의 가지로 택해 주신답니다. 그리고 보내신답니다.

이 짧은 두 마디 말이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오늘이고, 그것이 이 주간이 되고, 그것이 이 달이 되고, 이 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불붙는 마음으로 “그 장막을 싫어하신다. 택하지 아니하신다.”가 아니라 “내가 그 장막을 정말 기뻐한다. 그리고 나는 그를 택한다.”
이 두 마디가 우리에게 생생하기를 원합니다.

이 땅에서

조 병 례 집사님

흙으로 살고 싶습니다.
말없고 빛없는 검은 흙이기에

다만 그 안에 참 겨자씨 품어
생명 속에 살고픕니다.

속 깊은 무한의 사랑으로
당신께 들린 흙일뿐이지만

비추이는 얼굴 빛, 환한 미소
영혼의 숨소리가 들립니다.

은밀한 사귐 속에 엄존하시는 손길로
창조의 날 취하셨던 땅 위의 당신 사람

타오르는 사랑과 뜨거운 눈물로
순전한 하늘 닮은 흙으로 살고픕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

요한복음 3장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육신으로 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란 뜻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진정한 ‘주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과 제가 이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 관한 정말 소중한 몇 가지 말씀을 전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데살로니가 전서 1장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 선생님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너희는 틀림없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희 가운데 나아가서 복음을 전할 때 큰 환난도 있었지만, 환난 가운데서도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 속에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복음이란 내용만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 가운데서 증거하였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복음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입니다. 그가 복음을 스스로 증거했다면 “이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인가? 아닌가?”를 절대 알 수 없었을 줄 압니다. 그는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복음을 전하였기에 그 기쁜 소식이 성령의 은혜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전달되어져 온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모르긴 하지만 우리가 사도 바울 선생님이 이 말씀을 그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내용을 볼 때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정작 본인들은 그렇게 그 무엇을 강하게 못 느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자주 장사 루디아 아주머니가 강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이것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입니까? 틀림없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성령의 보냄을 받아 주님을 증거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루디아 아주머니가 마음으로 느낀 것은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라고 기록된 이 정도였습니다.
단순했습니다.
큰 무엇을 느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분이 증거하는 예수님께 관해서 마음으로부터 영접하고 싶은 마음이 든 줄 압니다. 단순한 그것이어서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역사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말씀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심으시고 역사하시는데, 우리 마음으로는 감동된 마음이 있겠지요. 어느 정도의 감동은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겨자씨처럼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저는 한 마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에 주님의 역사가 너무 강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이 열왕기 상 19장의 강한 바람처럼, 강한 지진처럼, 강한 불처럼 오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영접하였다면 그것은 인격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 앞서서 먼저 보냄을 받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특징은 엘리야의 심령을 가진 것은 틀림없는데, 엘리야처럼 큰 권능과 이적을 행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능력 속에 말씀한 것은 틀림없었습니다. “회개하라!”라고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그 당시에 회개하러 온 사람은 세례 요한의 영감이 넘치는 그 음성을 들은 사람들만 왔나요?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 말이 이어져가고 또 그 말이 말을 이어가서, 조용하게 들려주었던 그 말을 들었던 이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물론 역사하신 줄 압니다. ‘내가 이렇게 있으면 안 되지.’ ‘하나님께서 주신 참 좋은 기회다.’라는 마음도 들었을 것 같습니다.

회개하는 것이 마음 편할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로 한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보아야 더 인격적입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내가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내가 없는 회개는 곤란한 것입니다. 진정한 내가 없는 영접은 곤란한 것입니다. 그분이 무서워서, 그분이 놀라워서, 그분이 두려워서, 그것은 진정한 영접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이건 옳지 않지.’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시는 이런 조용한 속삭임 같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느끼지도 못할 만큼의 그런 감동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나 요단강으로 나아가서 자복하고 그들이 세례 받은 줄 압니다.
천국이 어떻게 열려가는지 가르쳐준 이가 세례 요한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격으로 돌이켜 오라는 것입니다. 오지 않는 사람은 도리가 없습니다. 영접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하실 때 내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감동해 주시는 은혜는 있겠지요.

여러분!
주님 없이 살았던 내 허전한 마음속에 어느덧 마음속에 조용히 비추는 마음이 ‘저분이 내 주님이시다. 저분이 내 주님 같다. 내가 의지할 수 있고 내가 참으로 사랑할 수 있고, 내가 온 마음으로 따라갈 수 있는 분 같아 보인다.’이런 정도의 세미한 감동이면 족합니다. 조용한 권고이고 결정은 내가 해야 진정한 영접입니다.

만약 어떤 처녀분에게 위협한다거나 아니면 돈이나 어떤 권세나 다른 그 어떤 것으로 다가온다면 그는 진정한 신랑감이 못됩니다.
옆에 사람이 너무 강권함으로 가도 글쎄요, 그것이 올바른 인격적인 강권 정도가 아니라 너무 졸라대는 그 무엇 때문에 가도 그것은 온전한 것이라 보기는 곤란할 것 같습니다.
권함은 있을 수 있겠지요.
강권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결정은 내가 사리를 분별해서 내 마음이 해야 합니다. 내 마음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주님을 영접함의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접하실 때 육으로 난 것 같지 않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새 생명을 주시기 원합니다. 그것은 육으로 태어났을 때 가진 생명과는 다른,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으로 오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겨자씨처럼 세미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요한 일서 2장 말씀처럼, 요한 일서 5장 말씀처럼, 요한 일서 1장 말씀처럼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말씀처럼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무슨 생명이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 마음속에 우리 주님으로 허락해 주신 순간이고, 우리는 영접하는 순간이고, 그것은 거듭나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육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예수님을 내 주님, 내 생명으로 영접한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거듭남이란 의미가 어떠한가를 말씀했습니다.
물론 이 때 성령님은 역사하고 계시는 순간입니다. 여러분이 성령님을 강하게 느낀다는 것은 보증하기 곤란합니다. 인격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조용한 감동은 올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하셨지 어두움 속에서 빛을 믿으라고 주님은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때 조용한 빛이 온다는 말씀이 요한복음 12장 35절일 줄 압니다.
그것이 세미한 빛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 믿고, 그때 주님을 내 생명 삼고 그 주님을 향해 결정적인 자세로 따라가는 것이 필요할 줄 압니다.

제가 지금 잠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다음의 귀중함입니다.
첫 번째 ;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고 해서 데살로니가 전서 3장, 4장, 5장에서 가만히 있어도 그들이 괜찮아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3장에서 사도 바울 선생님은 아주 어려운 낱말을 사용하십니다. 만약에 택함 받은 너희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너희가 3장에서 이런 중요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수고했던 그 귀한 일들은 헛된 일이 되고야 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 가운데 환난은 다가왔는데, 그 환난은 내 키보다 크고 나를 삼키고도 남음이 있는 강한 거센 파도 같은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 안에, 생명 되신 내 주되신 주님 안에 믿음으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저버리고 가버린다면 죄송합니다만 그 엄청난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육으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요한복음 1장 12절은 우리에게 안타까운 사건이 되고 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환난을 허락하셨을까요? 주님을 믿는 믿음에 뚜렷하게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거듭났나요?
새 생명을 영접했나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 속에 서 있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 속에 안식이 있고, 그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지요!
그리스도인이 이 점을 생각지 않는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두 번째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고 하십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거듭나게 하셨다고 하십시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육체를 좇아서 참으로 어두움과 불의한 일로 살아갔다고 하십시다.
고린도 전서는 주님께서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거듭나게 했던 이들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선생님이 고린도 전서 6장에서 하신 말씀은 “이러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방인 보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6장 말씀은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가 타락할 수 있음을, 성령의 비췸을 얻고 참으로 하늘의 은총의 어떠함을 맛본 이들도 얼마든지 육에 속하여 타락할 수 있음을, 히브리서 10장 마지막 부분도 침륜에 빠질 수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니라”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거룩은 내용이 명료합니다.
내가 아무리 거듭나도 육신에 속해서 육신을 따라 살면 더러운 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불의한 길로 가고야 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믿음 둘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주님 이끄시는 그의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순종하면 우리 생활은 거룩합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께 다스림 받는 순종.
그것이 거룩입니다!
예수님께 합하게 이끌려 가는 생활.
그것이 거룩입니다!
그것 외에는 거룩은 없습니다.
있다고 말하면 속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조금만 생각해 보셔요.
나는 주님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함께 살아가고 주님의 영에 순종함으로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벗어나서 이런저런 방법으로 또, 어떤 능력으로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단코 하나님의 길이 아닙니다! 속임입니다!
이 참된 거룩의 길에 있을 때 주님 안에서 주님께 순종하기에 우리는 또한 주님의 그 이끄심을 좇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형제 사랑도 가능합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솟아난다는 말입니다.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한 가지 더 거듭난 자가 마음 써야 될 일이 있습니다. 나는 성령으로 거듭났으니 괜찮다고 한다면 사도 바울 선생님이 탄식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에서 우리가 거듭난 사람이라고 한다면 예수님 안에 믿음을 두고 서야 될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근신하고 깨어 있으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거룩하게 살 뿐만 아니라, 형제 사랑도 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의 주님을 향하여 언제나 이렇게, 언제나 이렇게 주님과 함께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깨든지 자든지”
그 말씀은 우리 생활 전체를 총칭해서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과 함께 이렇게 “깨든지 자든지”가 된다면 우리는 항상 기뻐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우리 온 영과 혼과 몸이 주님의 돌보심과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불붙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거듭난 자. 성령으로 거듭난 자.
의미를 잘못 오해해서 혼란스러운 생각이 있으면 너무 불행하겠습니다. 주님 모신 이 복됨 속에서 신앙의 참된 정진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날까지! 그날까지!!
이 값진 길에 서서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났기에 더 조심하며, 주님 안에 믿음으로 서고, 주님 안에서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예수님 향하여 언제나 깨어있는 이 놀라운 삶을 꾸려가는 복됨이 있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Total 0건 1 페이지
조그만 빈들판 목록
번호 날짜
게시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