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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나의 빈들판

2015-07-01 / 69 회차

조그만 나의 빈들판



사귐의 창

취적리교회 배 명 자 집사님

하늘 이슬 마르지 않는
산봉 위에서
내 사랑! 주님을 향해
붉어진 마음은
하늘 보좌를 향해 열려 있는
내 작은 사귐의 창을
더 부지런히 열게 하고

보잘것없는
나를 버리고
부활의 영토에 서서
주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며
주님 향한 그리움으로 젖어가고

그리움
기다림 속에
조용히 타오르는 불꽃은
기도의 집이 되어갑니다.

나를 위해 살고 싶지 않기에
내 사랑! 주님의 나라에
나의 손길이
나의 순종이 필요하지는 않은지
이 사귐의 창을 통해
조심스럽게 살펴갑니다.

흔들지 마라!
깨우지 마라!
사귐의 창을 열고
젖뗀 아이 어미 품 찾는
그리움 가득한 사랑의 마음은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한 사랑입니다.

다니엘에게
이 사귐의 창은
그의 생명줄이었고
그의 삶을 살아가는 의미였듯이

오! 주님!!
나도 이 사귐의 창에서
믿음의 선진들 속에서
살아주셨던 불꽃같은 삶을
조용히 배워가고 싶습니다.

강하렵니다! (여호수아 1장에서)

천성교회 정 찬 규 선교사님

주님!
다만 주님 당신의 마음과
형제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자
십자가 건너 부활의 영역에 서는
이 마음 강하렵니다.

주님! 오늘도
나는 없고 주님만 내 안에 사시는
주님 모신 영광스러운 길 되고자
“발바닥으로” 오늘을 걷는
이 마음 강하렵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의 생명의 원함을 가지고
주님의 영에 이끌려 살아가고자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이 마음 강하렵니다.

오~ 주님!!
날마다 이 길에 서서
내 주님 한 분 존귀케 하며
내 주님 뜻 이루고자
내 주님을 따르며 섬기는
이 마음 강하고 또 강하렵니다.
아멘! 아멘!

서 있는 주의 종

취적리교회 정 명 훈 전도사님

창세기 24장에 아브라함의 늙은 종.
자기의 이름이 무엇이라
기록되지도 아니한 늙은 종.

주인 되신 아브라함의
보냄을 받아 나아가는 모습 속에 형성된 것은
하나님은 늙은 종의
완전한 주인님의 하나님이 되어 계셨습니다.

보내신 이의 뜻만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고자
기도 속에 마음을 정돈하여 묶어보며
그 뜻을 이루어 드리기 전에는
자신을 위한 그 모든 것들은 거절하며
보냄 받은 곳에서
오직 주인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속히 그 주인님께로만
돌아가고자 하는 늙은 종.

잠시 이곳은
주님께서 제게 나그네로 보내 놓으신 길.
제 삶이 늙은 종의 삶이 되어
주인님 되시는 내 예수님께만 매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그 뜻
신실히 이루어 드리다가
속히 돌아갈 내 주님 계신 본향을 향해
오늘 이곳에선 서 있습니다.

깨어 있는 종으로

조산교회 양 성 우 전도사님

주님!
이 밤 깨어 주님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나의 마음이 주님의 이름으로
젖어들기까지 말입니다.
먼 길 떠나신 주인님 돌아오심을 기다리는 종이
깨어 있는 마음으로 그 밤을 불 밝히듯,
사랑하는 나의 주님께 속함의 길로
주님 오심을 사모하는 오늘 길에 서고 싶습니다.

주께서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오시던 날 밤
작은 마을 베들레헴은 잠들었지만,
빈들에서 깊은 잠 이루지 못하고
양떼 곁에서 몸 뒤척이던 목자들에게
그 주님 허락해 주셨듯이
내 주님으로 오시길 기뻐하시는
오늘의 주님을 향해
온 맘으로 깨어 있는 자 되길 소망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깨어 있으므로
한낮에도 주님 섬기는 영광을 누렸듯이,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주인님의 마음을 온전히 이루어가기까지
깨어 있는 종으로 쉼 없이 달려갔듯이,
주님 위해 일어선 당신의 종으로
수종 들고 싶습니다.

온전하게, 더 철저하게…

최 재 호 목사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갈수록
마음에 솟아나는 생각은
내 주님께 온전하게
더 철저하게 입니다.

온전하게, 철저하게
이것 아니면 내 삶은 주 앞에 가치 없고요.
온전하게 철저하게 일 때만
주님이 잘했다 칭찬해 주시며
내 주님의 즐거움에 참예케 하실 줄 압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이
감옥에 갇혀서도
달리고 달려가는 모습을 봅니다.

“주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위에서 부른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이제 다 된 것 같고,
이제 다 끝난 것 같은 상황에서도
내 주님을 향하여
온전하게 철저하게 달려가는 모습이
오늘 내가 취해야 할 바른 자세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새롭게
주님께 온전하게, 철저하게
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날마다 나의 생명이 되신 주님!

조 경 숙 집사님

주께서 주신 가장 값진 것
날 위해 돌아가 주시고
지금도 함께 살아 주시는 그의 고귀한 생명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늘 새롭게
그 생명만을 덧입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오! 주님! 내 주의 생명 안에서 만입니다.
내게 허락하신 이 생명 안에서는
저 빈들의 이름 모를 작은 들꽃이어도 좋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며
주님의 꽃으로 서 있는 지극히 작은 들꽃!
주님도 그에게
굉장한 그 무엇을 바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만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 한가지면 만족해하실 것입니다.

내 주님의 생명 안에서
저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변함없이
그리고 굳게 그 안에만 서 있길 원합니다.
그 중심 뚜렷하고 흔들림 없이
주님 향해 높이 솟아오르고 싶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서 앞서 보여 주셨던 삶!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의 생명만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감당하셨던 주님!
주님!
저도 주님이 허락해 주신 당신 안이라는 이곳에서
그러한 삶만을
오늘도 온 정성껏 살아가고 싶습니다.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김 성 관 집사님

주님의 것으로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제겐 주님 곁,
주님 품 안이 전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따를 것입니다.

이 밤
주님 품 안에 잠겨가는 제 마음이
참 그러합니다.
주님! 그립습니다.

아브라함의 그 마음처럼

홍 정 권 집사님

아들 이삭을 양 잡듯
하나님께 제사드리려던 아브라함의 마음은
먼저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께 순종하고픈
주님 향한 그의 어떠함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도록 허락하심은
나를 향한 그 사랑을 보여주시는
주님의 마음임을…

그 십자가에
내 대신 못 박혀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저 보좌에 오르셔서 오늘도 나에게
그 뜨거운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 향하여 뜨거웠던 아브라함의 그 마음처럼
주님 모시고 온전한 순종의 삶 살고 싶습니다!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찌어다

유 순 옥 집사님

아들 이삭을 양 잡듯
하나님께 제사드리려던 아브라함의 마음은
먼저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께 순종하고픈
주님 향한 그의 어떠함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도록 허락하심은
나를 향한 그 사랑을 보여주시는
주님의 마음임을…

그 십자가에
내 대신 못 박혀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저 보좌에 오르셔서 오늘도 나에게
그 뜨거운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 향하여 뜨거웠던 아브라함의 그 마음처럼
주님 모시고 온전한 순종의 삶 살고 싶습니다!

허락하심

문 수 연 전도사님

허락하심 가운데 움직인 어린 다윗.
물맷돌로 거대한 골리앗 넘어뜨릴 수 있었지만
스스로 움직인 유능한 장수였던 다윗은
아기스왕 앞에서 미친 척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락하심 가운데 움직인 말이 어눌했던 모세.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냈지만
스스로 움직인 므리바의 반석에서 물을 낸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허락하심 가운데 움직인 베드로는
물위를 걸었지만
스스로 서자마자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어려도, 능력 없음도,
어떤 환경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허락하심 가운데 있다면
내가 아닌, 허락하여 주신 그분께서 일하시고
당신의 뜻대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전쟁에 능한 장수여도
능력 있는 지도자요, 건장한 일꾼이어도
스스로 움직인 결과는 참담함입니다.

허락하심 가운데만 길 가므로
허락하여 주신
그분의 고난과 영광에 동참한 자로
끝까지 달려가고 싶습니다.

이 하루도

양 승 관 집사님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지만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아니하고자
새로이 그 동산,
나의 주님 품에 잠겨봅니다.

독수리가 40년 후에 자기를 새롭게 함 같이
익숙했던 모든 것들
경험 속에 지식들
내 안에 자리 잡은 나의 모든 것을
십자가 앞에 벗어버리고
씻기운 자로 그 품에 자리 잡습니다.

주님! 제가 귀를 기울입니다.
나로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주님! 제가 앙망합니다.
나로 그 얼굴 보게 하소서.

오, 주님!
이 하루도
오직 당신만을 내 가슴에 심기운 자로
당신만을 향하여 살아드리고 싶습니다.

은혜 이슬

정 경 진 형제님

주님!
강한 바람, 지진, 불
세상이 주목할 만한 시끌벅적한 것들 없어도
세미한 음성,
당신의 은혜에 젖은 마음
간직한 자이고 싶습니다.
가뭄에도 청청한 가지이고 싶습니다.

조용한 시간
주님 앞에 자리 잡고 앉을 때마다
은혜의 이슬에 젖게 하옵소서.
메마르기 쉬운 영혼에
촉촉한 생기를 머금은 은혜를 내리어 주소서.

당신께 나아가
당신 앞에서 무엇을 할지 알지 못해
잠잠히 있을 때…
기도할 힘도, 기도제목도, 말씀도
새록새록 임해옵니다.

죽음도 빼앗지 못할 기도 시간
다니엘처럼 그렇게…
열린 창 너머
주께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도성!
예루살렘 향하여!
주께 감사하게 하옵소서!

추 구

배 경 옥 집사님

지극히 값진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 앞에 부어드린 한 여인은
오직 주님을 사랑하고 따름이
그의 전부였습니다.

짙붉은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가신 주님이 그리워
떠날 수 없는 마음으로 그 무덤가를 찾아 간
한 여인의 온 생명은
오직 주님 자신이었습니다.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온 여인의 온 추구도
주님의 음성, 주님의 얼굴빛이었습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조용히 속삭여 주시는
내 주님의 얼굴빛을
새로이 구하고 찾고 싶습니다.

내 주님의 멍에에 매여
그 사랑의 언약 안에 굳게 서서
그 보좌 앞에 자리 잡은 자로
내 주님 마음 알아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도 내 주님 향해 온 마음으로
추구의 날개를 달고
그의 비둘기로 힘 있게 날아오르고 싶습니다.

조그만 빈들판

우리가 예레미야서 38장, 39장의 주변만 읽어보아도 그 당시 예루살렘 성은 갈대아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있어도, 왕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애굽으로부터 도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분명하게 전달되었습니다. 살고자 한다면 갈대아 사람들에게 ‘항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내용을 조금만 구별하여 생각해 볼 때, 애굽의 도움을 얻는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시드기야 왕을 비롯하여 각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 자기의 지금 서 있는 위치를 흔들림 없이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전하신 소식은 ‘항복하라’였습니다. 지금 너희들이 서 있는 그 위치는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고, 하나님과 참으로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사람도 못 되는, 정말 아무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철저히 자기를 갈대아 사람들에게 빼앗겨 버리는, 어쩌면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러한 자가 되므로, 새롭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는 그러한 길에 서도록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 29장을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 거역하는 그들을 바벨론으로 보내셨습니다만, 우리 하나님의 뜻은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내일이 없는 오늘, 하나님 보시기에 어긋난 길에 서 있다가 망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 자체를 주체할 수 없는 사로잡힌 포로의 길로 걸어가도, 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참으로 가까이 구하여 감으로 내일이 있고 소망이 있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참된 삶을 누려가는 진정한 주님의 백성의 길에 서도록 인도하시고자 하심이, 우리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있는 그대로 서서 애굽의 도움만 얻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지금 어려움 속에 휩싸여 있는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대부분의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길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귀중한 뜻을 주목해 본다면 창세기 26장의 이삭에게 기근이 들어도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머물라 그리하면 내가 너와 함께 거하여 너를 축복하리라”라고 약속하십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마라.”
이삭은 창세기 26장에서 나의 주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제대로 서 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이삭은 괜찮아 보이고 먹을 것이 넉넉해 보이는 애굽보다도, 어려워 보이지만 주님이 지시한 땅에서 나의 주님을 의지하고 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구하는 것이 마음속에 훨씬 좋게 생각되었습니다.

우리가 예레미야 42장과 43장에서 읽을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와 뜻 가운데서 마침내 무너진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다시 애굽을 향하여 내려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을 가까이 의지하고 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속에 머물라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명료하게 말씀해 주셨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 나의 주님께 속하여 보이지 않는 나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앙망하며 사는 이 생활보다, 평안이 있어 보이는 애굽으로 가고 싶어 했던 것을 예레미야 42장, 43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계속해서 보이는 것만 추구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의 비참함을 우리가 읽을 수 있겠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도착했지만, 그곳에 기근이 들었을 때 쉽게 애굽으로 내려가 버린 것을 압니다. 그는 그곳에서 아내를 잃어버릴 뻔했지만, 우리 하나님의 권고해 주신 은혜로 다시금 새로운 길로 일어서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때의 아브라함은 주님을 향하여 견고한 마음으로 내 주님을 의지하고, 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앙망하면서 내 하나님 앞에 그의 사람처럼 서기에는 그의 영혼이 정돈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미미한 아브라함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뜻으로 본다면 여러분과 저의 영혼이 오늘 부딪치는 갖가지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이사야 31장 말씀처럼 애굽으로 도움을 얻으려고 내려가기보다는, 그다음 장인 32장 말씀처럼 내리쬐는 폭염이 있고 불어오는 강풍이 있을지라도, 내 주님께 속하여 주님의 보호하심과 사랑 속에 있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그의 백성의 참된 길인 줄 압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이러한 것을 의미 있게 곱씹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창세기 46장에서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 브엘세바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모습을 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주셨습니다. 이때 부르시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내가 다시는 너를 야곱이라고 부르지 않겠노라는 창세기 35장의 그 이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잊어버리셔서 그러할까요? 결단코 아닌 줄 압니다. 역시 야곱입니다. 그래서 야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창세기 46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라.”“나도 너와 함께 내려가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우리 하나님의 깊은 중심이 어떠하실까요? 아직도 이 세상의 그 무엇에 마음과 생각이 흔들릴 수 있는 야곱입니다.

나의 주님 한 분 의지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견고하게 설 수 있는 그러한 야곱은 아니란 말씀입니다. 나이가 백 서른 살이라도 말입니다.
보이는 것에 흔들릴 수 있는 그러한 야곱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야곱을 애굽으로 내려 보내시면서 그가 애굽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의 주님을 가까이함으로, 주님께 곧은 마음으로 서갈 수 있도록 연단시켜 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마침내 창세기 48장에서 이 세상의 보이는 그 무엇에 이끌리기보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그가 의지하는 유일한 분으로, 보이지 않는 주님을 그가 참사랑 하는 유일한 사랑으로 붙들고 있는 야곱을 보게 됩니다. 이 창세기 46장, 48장, 곧 이은 49장 사이는 적어도 십칠 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간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 굳건하게 서기 어려운 그 야곱을 차라리 애굽에서 연단시켜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통해서는 아버지와 분리의 위치에 서 있으면서 사랑하여 드리므로 야곱으로 하여금 주님 안에, 주님 안에 온 마음으로 자리 잡아가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마침내 그가 이 땅을 떠나갈 때, 그의 중심의 뼈는 분명히 아브라함과 이삭을 장사지낸 저 막벨라 동굴로 가고 싶어 하였고, 그 중심을 요셉에게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이끌어 올리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러한 야곱의 영혼은 결코 이 땅에 주저앉아 있고 쓰러져 있는 야곱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주님께 그리고 주님의 집에 나아가 있는, 속하여 있는 야곱임을 분명히 우리는 주목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앙의 길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은 정말 소중합니다.

애굽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두 군데 정도는 좀 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유다와 이스라엘로 나누어지고 난 이후에 그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을 받은 이가 여로보암인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여로보암이 장차 왕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안 솔로몬은 그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나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람이 아닐 때 어두움이 역사하는 것 틀림없는 일입니다.

이때 여로보암이 피난 간 곳은 애굽이었습니다. 이 애굽으로 피난 간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도 능히 인정해 주실 줄 압니다. 애굽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애굽이 안전해서가 아닙니다. 피난 간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보이지 않는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자비하심을 구하는 마음이었을 것 같습니다. 영혼 속에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는 이런 시간은 정말 소중한 시간이라고 할 것 같습니다.

여로보암은 나라가 남조 유다와 북조 이스라엘로 쪼개져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모시고 살아갈까에 대해 분명히 연단을 받아온 사람임이 틀림없을 줄 압니다.

그런 그가 왕이 되고 난 이후에 보이는 것에 기초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이 있는 유다로 마음이 이끌려 갈까 봐 단과 벧엘에 우상(금송아지)을 만들어 하나님 보시기에 반역된 길로 걸어간 것은, 보이지 않는 나의 주님 보이지 않는 나의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는 저 애굽의 훈련을 가벼이 여겼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여로보암은 악한 왕으로 끝납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주님께 속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까이할 때만이, 참으로 선하고 의롭습니다. 아름답습니다. 보이는 것에 기초할 때 사람은 악한 자가 되고야 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애굽과 연관해서 본다면 마태복음 2장에서 우리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난 가신 것을 기억하실 줄 압니다.
애굽으로 피난 가신 것은 우리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애굽이 좋아서 간 것 아니었습니다. 애굽이 살만해서 간 것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보존해 드리기 위해서 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이었습니다. 이것은 전혀 애굽으로 이끌려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의미로서는 수넴 여인이 이스라엘 땅에 머물지 아니하고 블레셋 땅에서 칠 년 동안 머물러도, 내 주님 모시고 내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 속에 살아간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꼭 이 세상의 이런저런 장소를 가리킴이 아니라, 내 영혼이 주님을 향하여 어떠한 자세인가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좀 더 살기 좋아 보여서 갔나요? 그렇다면 좋은 사람 아니지요. 좀 더 괜찮아 보여서 갔나요? 애굽이 아니라도, 그 어느 땅이라도 좋은 곳 아니지요. 우리 주님의 섭리와 뜻 속에 내 주님 모시고 좇아 나아갔나요? 그 어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울 줄 압니다.

저는 보이는 것에 관한 것과 보이지 않는 나의 주님 의지하는 이 삶을 이야기해 보면서, 잠시나마 룻기 말씀을 통해서 오늘의 조그만 빈들판의 귀중성을 우리의 마음속에 되새겨 보려고 합니다.

이 룻기 말씀을 나누기 앞서서 요한복음 21장 말씀을 조금 되새겨 보는 것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베드로의 이름은 분명히 베드로입니다. 시몬 베드로 또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요한복음 21장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마 제자들에게도 익숙한 이름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베드로를 식사 후에 부르실 때 “요한의 아들 시몬아, 요한의 아들 시몬아,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세 번이나 뚜렷하게, 베드로라는 이름이 아닌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시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요한복음 21장에서 이 의미를 모른다면 불행합니다. 우리는 이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어떤 풍랑도, 어떤 환난도, 어떤 시련도, 정말 그 무엇도 흔들 수 없는 견고한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1년, 2년이 아니고 3년이 아니고, 그가 걸어간 제1차 선교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A.D. 45년경이라고 하는 사도행전 13장에서 그가 이 땅을 마쳐가는 A.D. 67~68년이라고 말하는 주님의 나라로 가실 그때까지, 22년~23년간 그의 길은 정말 거칠고 험악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 바위 덩어리처럼 견고하고 어떤 음부의 권세도 그를 흔들 수 없을 만큼 견고하게 살아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가 주님 앞에서 나약함을 가지고 벗은 자처럼 떨고 있는 고린도 후서 5장만 보십시오. 벗은 자처럼, 갈대처럼 바람에 흔들릴 수 있는 나약한 자로, 감당 못할 자로, 서지 못할 자로, 스스로 어려워하며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때 그의 이름을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정말 반석 같은 주님의 사도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새로운 마음으로 다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이사야 54장에서 나의 주님을 향하여 견고한 부활의 영토에 서서 내 주님과 연합한 그 사람은 나약한 자가 아닙니다. 이 땅에 속한 자는 아니지만, 말뚝을 박아도 견고하게 박는 것입니다. 견고하다는 것입니다. 나약한 마음이 아닙니다. 줄을 띠어도 길게, 휘장을 펼쳐도 넓게 그리고 풍성한 열매를 맺혀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라도 이사야 55장에서 ‘목마른 자’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얼마나 가냘픈 말씀입니까? 내 영혼이 목마르고 내 영혼이 정말 서기가 힘든 이사야 55장의 목마름은 내 육신의 목마름은 결단코 아닙니다. 그러하다면 젖과 포도주 줄 리가 없습니다. 기름 부으심으로 다가오실 리가 없습니다. 내 영혼이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전혀 서기 어렵습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나의 주님을 찾아 나아가서 그 주님께 속하고 그 사랑의 주님과의 진정한 사랑의 사귐 속에서 주님 주시는 은혜의 이슬에 젖고, 내 주님 주시는 신령한 젖으로 채워지고, 나의 주님 주시는 천국의 포도주로 가득 채움 받고, 주님 주신 기름 부음으로 충만할 그때, 우리는 어려움 많고 문제 많은 이 세상이라도 기쁨과 평강 가득한 마음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산, 거듭되는 산 그리고 가시와 찔레를 전혀 어렵게 생각지 아니하며, 정말 견고하고 강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줄 압니다.
이사야 55장이 어느 하루만 겪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54장의 그 놀라운 은혜를 받았던 우리라도 날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1장에서 그 믿음이 견고함으로 칭찬 들을만한 자라도, 베드로전서 2장 말씀에서 새롭게 주님께 나아가서 신령한 젖을 먹어야만 내 영혼이 설 수 있습니다. 새롭게 나의 주님께 나아가서 산돌이신 주님 안에 서야만 우리 영혼이 설 만합니다. 이것 아니고는 우리 영혼이 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날마다 반복되는 일입니다.

이사야 55장 다음 장인 56장을 보세요.
그곳에서 “연합하여 섬기며”라는 말씀은 예전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 일을 가리켜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을 향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6장의 “주님과 연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새로운 마음으로 연합하므로 예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으로 젖은 가운데 한 영으로 묶어진 단단한 마음임을 표현해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쯤 되면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기쁨 가득하고, 안식 가득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섬기고자 한마음으로 오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자는 요한의 아들 시몬은 아닙니다.
이런 자는 베드로입니다.
주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언제나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이 나약함 속에서 깨어! 주님께 속하는, 깨어! 믿음에 굳건히 서는, 깨어! 나의 주님과 연합하는, 깨어! 나의 주님을 정말 사랑하며 그 사랑에 젖어가는 우리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줄 압니다.

이것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잘못 부르신 이름이 아닙니다. 우리를 정확히 현실로 부르신 이름인 줄 압니다. 이 낱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 갈대야.”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갔던 그 삐뚤어진 길, 어긋난 길, 뒤로 넘어졌던 길, 그 길로 걸을 수 있는 너다.” 그 말씀 아닐까요?

오늘 여러분과 제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란 이름 속에서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내 주님께 다가서는 우리여야 할 줄 압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요.
주님을 향하여 시간 내어 나아가시기를 원합니다. 이 갈대로는 아무 일 못 합니다. 이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는 서기 어렵습니다. 이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는 주님의 이름을 존귀케 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세 번 부인하고 가슴 쳤던 그 일이 우리에게 반복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오늘의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반석이 되어 주시고, 나의 구원이 되어 주시고, 나의 산성이 되어 주시고, 나의 영광이 되어 주시고, 나의 소망이 되어 주시며, 내 마음에 진정한 상담자 되어 주시어서 내 주님 모시고 나의 주님과 함께 흔들림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하여 섬겨가는 견고한 우리 한 분 한 분들이 되는 것이 가능할 줄 압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위한 조그만 빈들판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벌써 알아차릴 것 같습니다.
정말 필요합니다. 정말 소중합니다.
참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나온 걸음이 아니라 남은 걸음이, 아니 오늘이, 이 시간이, 내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오늘도 주님 기뻐하시며 주님의 사람으로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참으로 추구하며 나아가는 조그만 빈들판이 우리 각자에게 꼭 있어야 할 줄 압니다.
날마다 입니다!
우리에게 이것 없이 오늘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기억하고 넘어가십시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시간은 제한된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가 제사장의 무리를 이끌고 거기로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도할 시간은 꼭 주셨습니다. 그 기도를 마치시므로 주님은 감당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다니엘은 그가 목숨을 내놓고 기도하고자 작정한다면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그 수많은 고개를 넘어왔던 다니엘이라 하지만 그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틀림없습니다. 보이는 저 사자가 아니라, 베드로 전서 5장에서 “우는 사자 같이”라고 말하는 그 어둠의 사자에게 다니엘이라 할지라도 묶어지고 빼앗기고야 말 줄 압니다. 그러나 그가 작정하고 죽음을 각오한다면 기도의 시간은 가질 수 있습니다.
기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선 시간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러분, 그것을 생활 속에서 고백하기 위해 주님이 주시는 기도의 시간을 정말 소중하게, 때론 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나의 주님과의 사귐만은 갖는, 이 중심 있고 뼈있는 마음만은 있기 원합니다.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보좌를 향한 그 간절한 사무엘의 기도에 응답하셨던 그 주님은 다니엘의 기도에 분명하게 응답하셨고, 다니엘의 기도에 응답하셨던 그 주님은 사도행전의 주님 사람들이 당한 그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도 분명히 귀 기울여 듣고 계시는 것을, 우리는 너무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라는 시편 116편 말씀처럼, 주님은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그러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생존 세계에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 없이 살아갈 수 있으며, 또 한편 이 땅에서 사는 생활이 주님을 섬기는 그의 종된 생활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이 땅을 떠나는 날 “성도의 죽는 것을 귀중히 보시는도다”란 시편 116편의 그 귀중한 의미 속에서 주님께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을 줄 압니다.

여러분! 조그만 빈들판 시간의 귀중성을 가볍게 생각지 않고 정말 소중히 생각하는 한 분 한 분들이 되어가시기를 원합니다.

엘리멜렉이 자기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살아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롯의 처와 꼭 마찬가지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을 벗어 나와서 내 목숨을, 우리 가족의 목숨을 어떻게 유지해 볼까 해서 소돔과 고모라에 둔 그 재산을 돌아보았던 롯의 처와 꼭 같은 자세입니다.

오늘도 여러분과 제가 이 땅에서 안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누가복음 12장의 부자처럼 여
러 해 동안 사용할 물건을 쌓아 놓는 것에서 기인한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1장 말씀을 잘 압니다.
밤중에 찾아온 친구에게 먹일 것이 없어서 이웃집으로 가서 빵을 구했던 그 사람의 형편을 압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약속을 함께해 주십니다.

오늘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의 여건처럼 먹는 것 그렇게 어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런 삶을 살 때 빵을 구한다는 생각이 기도 속에 꼭 필요할까요?
이곳에서 우리의 주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을 기억해 보아야 합니다. “너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언제나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뜻인 줄 압니다.
그렇습니다.
에스겔 36장에서 우리가 언약적으로 내 주님께 속하여 오늘 주님 모시고 살아갈 때 우리의 장래에 대하여 우리 성읍에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나를 먹는 그 사람은 나로 인하여 산다.”는 말씀도 우리 주님께서 강하게 말씀하여 주시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사랑하심으로 자신을 주셨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갈 생활은 돌봐주지 않으실까요? 그것은 정말 그릇되고 잘못된 생각입니다.
“나를 먹는 그 사람은 나로 인하여 살리라!”

누가복음 11장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먹을 것이 있고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표현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의 생활은 나에게 기반을 두고 살아가거라.”
그래서 누가복음 12장 말씀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를 내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허락해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물론 이곳에서 “찾으라 그러면 만날 것이요” 라는 말씀은 내가 오늘도 사랑하고, 의지하고, 따라갈 내 주님을 하나님은 분명하게 허락해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두드리면 열어주십니다.” 오늘도 천국의 다스려 주시는 은혜와 놀라운 은총이, 물론 장차 우리가 나아갈 곳입니다마는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생생하게 역사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얼마나 놀라운 내용인지요! 여러분과 제가 이 놀라움 속에서 삶을 꾸려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엘리멜렉은 잘못했습니다. 어려움 있어도 하나님 연단하시는 섭리 속에서 내 하나님 바라보고 내 하나님 의지하면서 굳건하게 있었더라면, 엘리멜렉의 집안의 몰락은 없었을 줄 압니다.
그곳에 있었더라면 내 주님 모신 복된 마음도 가능하였겠고,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돌보심도 참으로 영혼 속에 확실하였겠고, 가족들도 하나님 안에서 참으로 소망 중에, 평강 중에 길갈 수 있는 삶이 분명하게 있었을 줄 압니다.

어디 엘리멜렉이 떠나간 베들레헴에 있었던 사람들은 다 굶어 죽었나요?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내 주님이 허락하신 땅에서 기근뿐만 아니라 사울 왕의 칼날과 저 사울 왕의 사람들의 많은 칼날이 와도 주님 의지하고 내 주님 바라보고 있는 다윗을 하나님이 보호하여 주셨던 것처럼, 그뿐만 아니라 예레미야서에서 기근, 칼 그리고 염병이 언제나 끊임없이 반복되어 다가오지만, 내 주님 의지하고 내 하나님 은혜를 기대하는 그에게는 주님의 사랑 안에 보호받고, 우리 주님의 사랑으로 지킴 받는 그 은혜가 우리에게 생생할 수 있을 줄 압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필요하다는 말인 줄 압니다.

이제 룻기 말씀 가운데서 귀중하게 생각하고 또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으로 되새겨 보기를 원하시는 것은 선한 양심과 착한 마음을 가진 룻입니다.
가진 것 없고 장래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나오미를 홀로 내보낸다는 것은 그의 양심이 허락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자기 모든 것을 포기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표현된 말은 없을지라도 “어머니께서 굶으신다면 저도 굶겠습니다. 어머님께서 어려우시다면 저도 함께 어려움을 겪고 싶습니다.”라는 이 선한 양심과 착한 마음은 가벼운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생각하고 자기의 그 무엇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종종 자기를 생각한다면, 절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살기는 틀렸습니다. 자기에게 연민을 두는 사람치고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길 간다는 것은 있기 어렵습니다.
“왜 그렇게 강한 어조로 말씀합니까?”라고 말한다면, 복음에서 말씀하는 십자가의 도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장, 에베소서 4장, 골로새서 2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옛사람은 우리가 태어난 그 사람입니다.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 안 해도 좋습니다. 김 씨이고, 이 씨이고, 박 씨라고 하는 그러한 우리인 것입니다. 이 옛사람이 예수님의 죽음에 같이 함께 들어가고, 예수님의 무덤에 함께 들어가듯, 나를 장사지내지 않고서는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룻이 모압에서 다시금 살아볼 만한 꿈은 죽음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나오미와 함께 하나님의 땅, 베들레헴에서 그의 얼굴이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옛사람을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옛사람에게 연연하는 것은 언제나 자유가 없습니다. 죄로부터 벗어나기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르신 부름은 명료합니다.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무덤에 들어간 자로, 그리고는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함께 일으킴을 받은 자로, 룻은 모압 땅에서의 새로운 기대감은 다 죽음으로 끝낸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낸 것입니다! 그리고는 선한 양심과 착한 마음을 가지고 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에 그 얼굴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 새 피조물!
그 사람들은 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자기를 넘긴 사람들입니다. 자기 옛사람을 붙들고서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게 살 수 있습니까?
말도 하지 마십시요! 흉내도 내지 마십시요! 여러분이 금식하고 몸부림쳐 본들!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왜 불가능하냐?”라고 하신다면 성서가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어디 고멜은 굳은 마음으로 생각 안 해 본 줄 압니까?
그가 호세아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결단적인 마음입니다. 그래도 그는 자기의 옛 버릇, 하나님 보시기에 어긋난 길로 갔습니다.
옛사람은 언제나 그 길로 갑니다!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었다고요?
옛사람은 언제나 그 길 걸어갑니다!
‘왜 저 사람 저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옛사람은 언제나 유혹의 욕심을 좇아 그런 구습을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에베소서 4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옛사람은 안 보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진실 되게 참 마음으로 살고자 한다면 십자가로 건너가라고 하십니다.

그다음, 룻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에 돌아왔지만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가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더듬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꼭 나쁜 마음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나? 짐만 되는데…’ 그런 그 착한 마음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 같습니다.
만일 오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오미였다고 한다면, ‘나 때문에 저 젊은 사람 룻이 새로운 삶을 못살고 나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다.’ 라는 마음으로 그도 스스로 목숨을 끝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는 기대감이 없다면 참으로 처참합니다. 얼마든지 죽음을 생각할 수 있고, 어긋난 길을 생각할 수 있고, 그릇된 길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주님의 자비로움을 바라는 마음이 없다면, 사무엘상 25장에서 그가 나발의 아들처럼 자신을 낮추어서 자비를 구하는 그 길을 못 걸어갑니다. 그는 도적질할 수 있습니다. 강도질할 수 있습니다. 도적질하고 강도질하는 것을 나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 하나의 인생을 버리더라도 여기 있는 이 사백 명과 함께 있는 가족들은 살려주어야지.’ 라는 마음을 얼마든지 가져볼 수 있는 일입니다.

일제 시대에 여러 성도님 가족의 주인 되신 분들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일제의 위압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있는 성도님이 그분들의 가족을 돕지 못하게 하다 보니, 제대로 돕지 못했다는 소식을 우리는 이곳저곳에서 많이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가족이 당한 것은 엄청난 어려움이었습니다. 거창의 훌륭한 주님의 사람인 주남선 목사님 가족도 적지 아니한 고난을 겪은 줄 압니다. 돕지 못했습니다. 그때 어떤 감옥에 있던 한 분은 내가 신앙을 포기하고 나아가서 나중에 회개하면 될 것 아닌가! 그리고 내가 나아가서 저들을 도와야지! 그런 마음으로 신앙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나중에 엄청나게 후회했다는 내용을 우리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움은 정말 가능합니다.
오후 다섯 시가 되더라도, 해가 다 넘어가는 시간이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기대해야 합니다. 어쩌면 누가복음 11장의 그 친구는 시장한 가운데서 밤중이지만 ‘내가 이 친구 집에 가면 자비로움을 힘입을 수 있지 않겠나?’라는 생각으로 친구 집에 왔을지도 모릅니다. 그 친구가 가난한 것 몰랐겠습니까? 그래도 ‘자비로움이 있지 않겠나?’라고 생각해 본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은 그런 의미에서 누가복음 11장의 빵을 구하기 위해서 밤중에 나아간 그분을 중보 기도하는 분으로 설명한 적도 있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오후 다섯 시가 아니라 한밤중이라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1장의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고 밤중에 기도하던 성도들을 생각해 보십시요! 도울 길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만입니다만,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움은 그 밤도 임해 옵니다. 열나흘 동안 해와 달과 별 안 보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보좌는 믿음의 근거이고 간구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빌립보 성에 들어가서 실컷 얻어맞고 옥중에 갇혀 있는 깊은 밤이라도 우리는 기도할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로움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포기해 버릴 때는 비참합니다.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마음을 놓아 버릴 때 우리는 정말 비참합니다.
직장을 좀 잃었다고, 가진 것 좀 없다고, 내 장래에 스스로 살아가기가 곤란하다고 이 땅 사람들은 쉽게 자기 목숨을 던져버립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자비로우심!
유다서 1장 21절 말씀처럼,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기대하라는 뜻입니다. 천국 갈 때까지 말입니다.

우리가 이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의 자비로움을 기대한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라고 생각됩니다. 룻은 나오미도 포기하지 않았고 자기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나오미 집안에서 그런 마음을 가졌으면 참 좋았으련만, 이삭 주우러 가지 못할만한 그런 연로한 나오미라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움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날개 아래 피하여 온 우리에게 주님은 그 날개로 덮어주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제 새끼를 그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누가복음 13장 34절)

아프리카의 초원에 불이 나서 바람과 함께 재빠르게 태우다 보니 짐승들이 도망 못 가고 불에 타 죽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서 들닭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때론 그 죽은 들닭을 차보면 병아리가 살아 나온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 뜨거움 속에 죽어가면서도 날개를 퍼덕거리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품으시는 사랑과 긍휼하심을 안다면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곳에 있더라도 말입니다. 우리의 최후가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주님의 긍휼을 바라는 우리 눈은 강해야 합니다! 나약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환경과 어떤 여건 속에 있더라도 우리의 최후가 이 땅에서 끝나는 날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자비를 바란다면, 이사야 57장 말씀처럼 더 심한 어려움 당치 않도록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길이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긍휼은 분명하게 끝날까지 우리에게 있을 줄 압니다.

룻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그 선하고 착한 마음이 자기를 던져버린다거나 주저앉는다거나 불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속에 더듬다 보니 그 가운데서 이삭 줍는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이삭을 주우려고 나아갔습니다.
어디를 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마음이었겠습니다.

성서는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도달한 것처럼 말씀합니다만, 하나님은 주목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막연하게 이 자비를 구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길을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허리 아픈 줄 모르고 부지런히 이삭 줍는 룻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나의 장래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고 저 겨울이 온다면 어떻게 살아갈까? 나의 먼 장래는 정말 어떻게 될까?’생각하기 어렵고 곤란해도,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우리 주님, 우리 하나님은 오늘의 주님이시고, 오늘의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면 오늘의 나의 주님, 오늘의 나의 하나님을 붙들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분명한 것은 주님은 오늘의 나의 주님이시고, 오늘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6장의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라고 하신 하나님은 오늘의 하나님이시란 뜻입니다. 내일이 온다면 또 그날도 오늘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라는 히브리서 13장 8절 말씀의 의미는 오늘에 전적인 엑센트가 있는 내용입니다. 어제 함께해 주셨던 주님은 오늘의 내 주님이요. 그리고 이 땅에 사셨던 그 예수님은 오늘도 영원히 함께 계셔 주시는 그 주님이란 뜻이 계시록 1장의 내 주님에 관한 말씀인 줄 압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셔주실 주님이란 뜻입니다. 생각해보면 오늘의 주님을 붙든 이가 해답을 가진 자인 것입니다.

룻은 오늘을 착실히 살았습니다. 이삭을 줍는 그의 얼굴이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긴 날 할 수가 없습니다. 추수 때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참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움 가운데서 이런저런 불평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더듬고 있었습니다.

나오미가 가만히 있었다는 것 아닙니다. 내 몸이 움직일 수 없고 내 몸이 그 무엇을 할 수 없는 그때라도 나오미가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구할 때, 그의 마음속에 무언가 하나님이 허락해 주실 것 같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 길 같아 보이는 길이 마음속에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곁에 다가온 룻에게 무언가 선하게 허락해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생각났습니다. 사람들이 길도 아닌 길로 너무 많이 걸어갑니다. 길도 아닌 길로 그 무엇인 양 생각하며 나아갑니다.

여러분!
참 길은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목자 되신 주님께 귀를 기울이고 그분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성도가 길도 아닌 길을 그 무엇인 양 가버린다는 것, 너무 초라하고 너무 불행하고 너무 안타깝습니다.
길은 유일합니다. 요한복음 14장의 예수님은 “나는 길이다”라고 하셨습니다만, 낱말의 의미는 “유일한 길이다.” 라는 뜻입니다.

나오미가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구하여 묵상해 볼 때 그에게도 이 좋은 길이 보였습니다. 종일 수고하고도 웃는 얼굴로, 어머님과 함께하는 오늘의 삶이 있어서 행복한 마음으로 온 그 룻을 긍휼에 가득 찬 마음으로 바라볼 때, 그도 행복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초라한 이야기지만 서로 꽃피울 수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길에 관해서 말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나의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거두어서 함께 나누는 오늘 길에 관한 얘기는 거의 다 없습니다. 거의 다 남의 이야기만 끌어온 것입니다. 거의 다 먼 얘기들, 아무 관계도 없는 얘기들만 많습니다. 그러나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속에서 오늘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 생활 속에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는 필요하다면 TV에서 소식을 보고,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어려움 당하는 지역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필요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저 네팔의 어려운 사건에 관해서 몰라라 하는 말은 결단코 아닙니다. 그 소식을 알므로 우리 기도가 될 수 있다면 그것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우리의 시간을 보내고, 그런 것에 관심이 이끌려 간다면 우리는 벌써 궐 난 사람들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이런 자비로움과 긍휼을 이야기할 수 있고, 그 무엇이 없어 보이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기점으로 해서 긍휼을 이야기해 볼 수 있는 이 집은 부요한 집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이 있고, 내일에 대한 소망이 있는 집이라고 할 수 있을 줄 압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길을 좇아서 룻이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 보아스의 집으로 가게 되고 나오미도 함께 나아간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룻기 3장에서 중요한 낱말은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신앙의 궁극적인 의미는 진정 안식할 곳을 찾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의 큰 구원 받은 자가 3장과 4장에서 주님 때문에 안식을 못 얻는다면 그 사람 신앙을 제대로 찾은 사람 아닙니다.

안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도, 12장에도, 10장에도, 13장에도 안식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6장, 8장에도 내 주님 모신 사람은 안식이 있습니다.
주님께 언약적으로 묶어졌고 천국의 집이 내 집으로 생각되고 그 천국의 은혜가 우리에게 가깝다면, 이 세상의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안식이 있습니다.

보이는 이 세상의 것 없는 우리라 할지라도 나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사랑이 사실이고, 오늘도 그런 뜨거운 불붙는 마음으로 보좌에 계신 주님이 내 주님이시고 내가 그 주님과 연합하여 그 언약에 설 수 있다면, 나는 안식할 수 있습니다.
주님 계신 그 천국이 나의 집이고, 그 천국의 은혜가 시편 36편 말씀처럼 우리에게 현실이라고 한다면 나는 안식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그 무엇 없이 홀로 있는 것 같아 보이고, 초라하고 가난한 삶이라도 말입니다. 안식은 넉넉합니다!

보아스, 그는 우리 주님의 그림자입니다.
보아스의 집은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주님 없는 안식이나 천국 없는 안식을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진정한 안식은 주님이십니다.
다윗이 아무리 왕이 된다 한들 안식이 있는 것 아닙니다. 주님 안에 가야 영혼에 안식이 있습니다. 다윗이 아무리 상아로 만들고 백향목으로 만든 왕궁 속에 있을지라도, 안식이 있는 것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천국이 있어야 안식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룻에 관한 한 마디를 룻기 4장에서 인용해야 하겠습니다. 나오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말합니다. 일곱 아들보다 더 나은 자부가 낳은 아들이라고 오벳을 가리켜 말하였습니다.
이제 보아스의 집에 온 지 한 일 년은 된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일 년쯤 되었다고 할 그때 룻의 마음은 하나도 변함이 없습니다. 어머님을 섬기는 그 마음이 변함없습니다.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섬기는 그 참된 마음은 온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속하고 천국에 속하는 것이 왜 우리 영혼 속에 필요하냐면, 내 영혼이 오늘의 조그만 빈들판을 통해서 이사야 26장 말씀처럼 만세 반석 되신 주님께서 내 반석이 되시고, 이사야 27장 말씀처럼 견고한 참 좋은 포도나무 되시는 주님이 나의 포도나무 되시고, 이사야 28장 말씀처럼 시온에 기초돌 되신 주님이 나의 삶의 기초가 되어 주신다면, 요동하고 어지럽고 참으로 견디기 쉽지 않은 이 세상이라도, 우리는 변함없이 주님 모신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주님 주시는 은혜 속에 오늘도 천국의 어떠함을 고백하면서, 나의 주님께 유익 된 변함없는 값진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그만 빈들판을 되새기고자 하는 것은 지금도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안에 거하라”고 불러주시는 그 음성이 살아있기 때문이고, 천국의 보좌에서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자비로우심과 놀라우심으로 역사하여 주실 천국의 집의 그 온전하신 은총이 우리에게 가능함을 우리가 알기에, 오늘의 빈들판의 귀중성을 강하게 묵상하는 것은 정말 필요한 일인 줄 압니다.

주님 모신 우리 한 분 한 분의 마음이 어리석게 주님과 나 사이의 한 시간 시간을 못 갖는 스스로 쫓기는 생활 속에 살기보다는, 내 주님께 나아간 조용한 시간을 가져감으로 내 주님과 함께 오늘 부딪히는 문제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내 하나님의 축복하심 속에 번성함을 이루어 가는, 조그만 빈들판을 가진 놀라운 영광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좋은 포도원.
넓고도 크고 좋은 포도원.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어 보이는 좋은 기업.
그 무엇을 가진 우리가 아니라도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맞이하셨나요?
오늘 이 땅에서 여러분의 장소가 넓고도 크고 좋은 포도원은 아니라도 좋습니다.

주님과 내가 함께 사귈 수 있는 조용한 빈들판!
그것이 어두운 밤 골방에서 기도하는 나의 시간이라도 좋고요. 내 주님과 함께 가져보는, 참으로 나아가서 기도하는 그런 삶이라도 좋겠습니다만, 주님을!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이지 않는 천국을 나의 진정한 안식의 근거로 가지고 싶다면, 오늘도 우리에게 조그만 빈들판은 정말 필요하다는 이 사실을 뚜렷하게 기억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조그만 빈들판을 잊어버릴 때 주님도 잊어버리고, 천국도 잊어버리고 이방인들처럼 보이는 그 무엇을 가지고자 기웃거리고야 말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은 31장으로 나아갑니다.
29장은 주님의 도우심을 받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전심으로 찾을 때 31장의 내 주님께 언약적으로 나아갑니다. 이 31장은 다음 장 32장으로 나아간다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이 땅을, 밭을 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밭을 사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아나돗 땅의 밭이었습니다.
제사장의 밭인 것입니다. 다 빼앗길 때 하나님께서 사라고 허락해 주시는 밭이었습니다.

나의 주님께 언약적으로 묶어진 자가 내 주님을 섬기고자 오늘도 서는 근거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근무지가 그런 곳이었으면 좋을 것 같고요. 우리가 오늘 조그만 쉼을 갖는 가정이 그런 아나돗의 밭과 같았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다음 장인 예레미야 33장 말씀은 오늘 처한 곳이 예레미야가 갇혀 있는 유치장과 같을지라도, 내 주님이 원하시고 내 주님이 행하고 싶어 하시는 그 일을 추구하며 간구했던 것처럼, 오늘도 주님의 뜻 구하면서 그 나라 위하여 섬겨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보좌를 바라보는 우리 마음은 예레미야 35장 말씀처럼 일어선 순례자의 마음이 참 좋습니다. 레갑 족속은 장수한다고 말했지만 일어선 순례자는 영생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보이는 삶보다는 보이지 않는 삶 가운데 우리의 진정한 해답이 있음을 기억하고, 주님과 함께 길 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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