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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나의 빈들판

2015-05-03 / 68 회차

조그만 나의 빈들판



오 늘

취적리 교회 배 명 자 집사님

오늘 길
주님 앞에 있습니다.

에녹의
하나님과의 동행이
오늘 나의 삶이 되어서
온종일을
생명나무 예수님을 붙들며
보좌로부터 임해오는 생명수로
내 영혼 적시고

하늘 생명수 흐르는 강가에서
피곤하고 지친 영혼들이
힘을 얻어가도록 돕고 싶습니다.

주님 십자가의 능력은
나를 바꿔 놓으셨고
주님의 일하심은
섬기는 종으로
나를 일어서게 합니다.

주님!
많은 날 있지만
오늘 하루만이
당신이 나에게 주신 시간이기에

주님 당신 보좌 앞에
기도의 등불 켜고 서 있는 오늘이
삼백 예순다섯 날 되어

주님 당신 행차하실 때에는
나도 당신을 따라
일어나서
노래하는 가객
소고치는 악사
길 잃은 영혼들에게 다가가서
주의 구원, 주의 길 알리는
나팔수 되어
주님 당신의 일하심을 힘껏 돕고 싶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영광 영서교회 김 병 수 목사님

주님!
오늘 저는 이 터가 있어 설 수 있었고요,
​부끄러움 없이 무거웠던 머리를 들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생명 안에서 왕 노릇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터가 되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
​그리고 그날 밤 흘리신 땀방울들,
​골고다 언덕길의 한 걸음 한 걸음,
머리에 쓰신 가시관 십자가와 무덤.
이 모든 것은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떠날 수 없는 나의 터가 되었습니다.

이 터가 주는 평강,
이 터가 주는 그 안식,
이 터가 주는 그 감격을 마음에 품고
다시 이 터 안에 잠기겠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고백이 다윗의 터에서 나왔기에
오늘도 나에게 감격적인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나의 터가 되신 주 예수님!
남은 길도 이 터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림 없게 하소서!!

훨씬 더 쉽지요

원주 열린교회 원 광 호 목사님

내 몸이 아무리 피곤하고 연약하여도
내 주님 꽉 붙들고 깨어 있는 삶이 훨씬 더 쉽지요.
자칫 잠들어 어둠과 죄의 종으로
사는 것보다 말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생생하게 살아계신 내 주님과 함께
풀무 불에 던져지는 것이 훨씬 더 쉽지요.
살아 있으나 죽은 자의 삶을 사는 것보다 말입니다.

비록 내 가진 것 아무것도 없다 하여도
내 주님이 나의 힘이 되는 삶이 훨씬 더 쉽지요.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 하여
내 주님을 문밖에 세워놓는 헛된 부요보다 말입니다.

내 주님 모신 단출함 속에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으로 사는 삶이
훨씬 더 쉽지요.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는 것보다 말입니다.

내 주님의 파수꾼으로 종일 종야
내 주님 앙망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쉽지요.
심판으로 무너진 예루살렘 바라보며
통곡하는 것보다 말입니다.

내 주님 향한 불꽃 같은 사랑 생생하여
사랑하는 독자라도 쪼개어 번제로 드림이
훨씬 더 쉽지요.
날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내 주님의 한량없이 큰 사랑 잃어버려
버림받는 그 길에 서는 것보다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은밀이 좋습니다

함양 마천교회 김 양 중 목사님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사도 바울 선생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하심처럼 은밀 중에 주님을 추구하며, 은밀 중에 주님께 속하며, 은밀 중에 주님 한 분 전부 삼고, 은밀 중에 주님 한 분 차지하며 사는 삶의 복됨과 영광스러움을 뚜렷하게 인식하면서, 저도 은밀 중에 온 마음 다하여 주님과의 관계를 추구하며 주님께 나아가서 그 복됨과 영광스러움으로 살기 원하기에, 그래서 나는 은밀이 좋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 찌어다.” 말씀하심처럼 주님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은밀한 마음으로 주님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임하여 오는 은혜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과의 은밀한 관계를 빼앗긴다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 찌어다.”라는 탄식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은밀은 참으로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유지해 주는 삶의 바탕이기에 그래서 나는 은밀이 좋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제가 주님을 향한 은밀을 추구하지 아니한다면 제 삶 속에 실상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제가 착오 없는 마음으로 주님 한 분 추구한다면 주님께 속함! 주님 모심! 이것이 나의 실상이 될 수 있겠기에 그래서 나는 은밀이 좋습니다.

어쩌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에 어두움과 혼탁함으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안타깝게도 이 소중한 은밀을 빼앗기고 은밀을 소중히 여기지 아니하므로 가슴 아픈 결과가 생기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말씀하시는 바, 만일에 제가 주님과의 은밀한 관계를 조심스럽게 잘 이어가지 아니한다면 어쩔 수 없이 주님의 진노하심을 살 만한 은밀한 죄악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말 것입니다. 반면 주님과의 은밀한 관계는 은밀한 죄악을 멀리멀리 쫓아내 버리겠지요!
그래서 나는 은밀이 좋습니다.

문 닫지 아니하면 골방이 성립되지 아니하듯이 제 가슴 속에 주님 외에 그 무엇을 포함시킨다면 주님과의 은밀한 관계는 성립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주님 한 분 외에 나머지를 거절하는 마음으로 은밀을 원합니다.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하심처럼 나머지 분리된 마음으로 주님 한 분 추구한다면 얼마나 생생한 주님으로 서 주시겠는지요! 잠금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처럼 은밀 중에 주님과의 생생한 관계를 잘 유지하며 사는 삶을 소원합니다.
그래서 나는 은밀이 좋습니다.

은밀 중 갚아 주실 아버지이시기에 일평생 저는 은밀을 소중히 여기며 은밀을 빼앗기지 아니하며 주님과의 은밀을 끝까지 추구할 정함 있는 마음 품어 봅니다. 날마다 은밀 중에 함께해 주실 주님을 믿으며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그래서 나는 은밀이 좋습니다.

나의 노래 나의 주님!

밀양 용평교회 손 흥 세 목사님

산등성 고갯마루 집집이
굴뚝 연기 솟아 오르면
밥 짓는 어머니 사랑은
깊이 담겨진 가마솥 구수함이 변함없는 것처럼
주님께로 날아오른
뜨거운 확증된 마음인 것 같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광야 산속이어도
세세히 속삭여 주시는 한 마디 한 마디
이끌어 주시는 것만 같습니다.

씨 뿌림부터 주님으로 빛 비춰주심은
익어가는 영혼의 열매 되어
보좌 향한 나의 노래는 참 즐겁고
기쁨으로 날아오르는 것 같습니다.

환난 있고 시련 있는 그 어떠함에도
흔들림 없고 견고하게 서 있음으로
말뚝에 매여 있는 주님의 종이고 싶습니다.

레위기 11장의 미끈미끈한 동물들은
사로잡히지 않으므로 부정하지만
부정한 자 아닌 정한 자로 사로 잡혀
주님 쓰시기에 합한 자이고 싶습니다.

땅끝에 선 자

수원 소망감리교회 윤 선 교 목사님

내가 선 곳은 언제나 땅끝입니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요, 눈먼 소경입니다.
그러기에 스스로 길가는 자는 어리석은 자일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목자 삼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참된 지혜인 것 같습니다.

바다 물결같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수많은 세파(世波)에
그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목자가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한 마리 양과 같이,
어미 품을 추구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주님 안이 우리가 자리 잡을 거처요,
온 마음으로 추구할 내 믿음입니다.

인생은 언제나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광야와 같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임을 알고
젖은 마음으로 주님 보좌를 향하여 손을 들 때
주님은 언제나 나의 구주와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오늘 하루가 빈틈없이 추구해야 할 빈들인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
땅끝에 선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지 아니하면
이는 바람에 허공(虛空)을 맴돌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사막의 뿌연 먼지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삶의 시간도
소리 없이 지나가 버립니다.

내일은 우리의 시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이라는 내게 주어진 빈들의 시간 속에서
주님 속삭여 주시는 사랑의 음성을 들으며,
오늘도 새롭게 시작하는 땅끝에 선 자이고 싶습니다.

땅 끝에서 좁음으로

빈들에서 주님을 향할 때
사무엘상 29장의 ‘땅 끝’이 보입니다.
거기서 땅 끝에 서있는 다윗이 보입니다.
그의 사람들과 아기스 왕을 따라 그대로 나아간다면
그가 부딪힐 상황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으로 땅 끝 같아 보입니다.

언약을 맺을 만큼
그처럼 사랑했던 형제 요나단과
그곳에서 적으로 싸워야만 하는 정말 땅 끝입니다.

나아가기 전날 밤…
다윗은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다시금 이 ‘땅 끝’을 통하여
그의 주님께로 돌이키고자 하였을 것이며
밤이 새도록
주님의 자비하심과 긍휼을 구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할 때, 주님은 그로 하여금
그 아찔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이 되어주셨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위급함 속에서도
주님 안에서 힘을 얻을 수 있을 만큼
그의 주님으로 뚜렷이 서 주시었습니다.

이제 빼앗긴 가족들을 되찾아오고자
스스로가 아닌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나아가는 다윗!
그러므로 대적이 눈앞에 보여도
전투로 나아가기 앞서서
그토록 사랑하는 이들을 되찾아 오기 앞서서
그 한 밤을 주님과의 사귐 속에 보내고 있는 다윗!
참으로 주님께 속하여 주님께 연합되어 있는 다윗!
주님은 그러한 그에게
온전한 구원, 온전한 주님이 되어주시었습니다.

승리하고 돌아온 길에서도
브솔 시냇가에 남아있었던 형제들에게까지
노략물을 똑같이 나누고자했던
그 형제사랑의 아름다움!
이제 왕이 될 수 있는 넓음이 열려있다 할찌라도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기를 기뻐하며
주님의 이끄심 속의 헤브론!
곧 내 주님과의 연합!
내 주님만 섬기는 내 주님의 종 됨!

그 좁음을 곧음 속에 선택했던 다윗처럼
오늘의 길속에서
눈에 보이는 땅 끝이 없을지라도
내 주님과의 사귐 속에
내 주님께 속함의 영역을 벗어난다면
‘나’라는 주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으로
치우칠 수 밖에 없다는
땅 끝에 선 마음으로
오늘 또 새롭게 나만의 빈들에서
주님께 연합됨과
주님의 종 됨의 이 좁음을 선택하여 가렵니다.
오직 내 삶의 근거되시는 내 주님을 빼앗기지 않고자 말입니다.

형제라 부르기에 부끄럽지 않게

공주 목양교회 전 중 우 목사님

십자가로 자기를 거절하고
주님 계신 보좌 앞에 자리 잡아
그 다스림 가운데 살아가는 이.

이 땅에는 마음 둘 곳 없어
하늘 바람 불어주는 빈들에서
주님을 전부로 붙들고 있는 사람.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
사람들 앞에 드러나기보다
주님 안에 숨는 것을 더 좋아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숨겨진 것이 더 많은 사람.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여
자기 분수를 지켜가는 사람.

애매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영문 밖에서 십자가 지신 주님 생각하고
형제의 하나 됨을 지켜가는 사람.

자기가 없어서,
자기 생각이나 고집이 없어서
형제와 연합하고 동거할 수 있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사람.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주님 자신’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

자기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능력이나 가진 것 생각하지 않고
형제의 짐을 나누어질 수 있는 사람.

한 식구,
한 형제로 여김 받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고
그 식구 됨,
형제 됨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
형제라 부르기에 부끄럽지 않은
그런 사람으로 길 가고 싶습니다.

주님이 베풀어 주신 큰 은혜의 선물

대전 산정교회 오 도 균 목사님

십자가로 자기를 거절하고
주님 계신 보좌 앞에 자리 잡아
그 다스림 가운데 살아가는 이.

이 땅에는 마음 둘 곳 없어
하늘 바람 불어주는 빈들에서
주님을 전부로 붙들고 있는 사람.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
사람들 앞에 드러나기보다
주님 안에 숨는 것을 더 좋아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숨겨진 것이 더 많은 사람.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여
자기 분수를 지켜가는 사람.

애매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영문 밖에서 십자가 지신 주님 생각하고
형제의 하나 됨을 지켜가는 사람.

자기가 없어서,
자기 생각이나 고집이 없어서
형제와 연합하고 동거할 수 있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사람.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주님 자신’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

자기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능력이나 가진 것 생각하지 않고
형제의 짐을 나누어질 수 있는 사람.

한 식구,
한 형제로 여김 받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고
그 식구 됨,
형제 됨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
형제라 부르기에 부끄럽지 않은
그런 사람으로 길 가고 싶습니다.

주님의 새 부대

부산 수민교회 이 상 분 권사님

고요하고 평온한 일상을 흔드는
바람과 지진과 불의 때마다
산이 갈라지고 바위가 부수어짐에
마음을 빼앗기다 돌아오면,
내내 나의 모든 것을 참아주시던
길고 깊은 사랑의 내 주님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들려주시는 것은
낡은 가죽 부대 이야기.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하셨건만
빛과 소금이며, 향기와 열매는 고사하고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음에
탄식하고 탄식하는 날이면
포도나무 내 주님께서
더 깊은 탄식으로 들려주시는 것은
낡은 가죽 부대 이야기.

한없는 긍휼로 주신 므나를 흘려두고
르신과 르말리아 아들의 일에
자기 부인의 좁은 길을 지나치다 못해
분주하게 길가 밭까지 왕래하면,
향기로운 새 포도주이신 내 주님께서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소리로
들려주시는 것은 낡은 가죽 부대 이야기.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은밀하게 감추어둔 세상에 길든 자아를
다시금 십자가 위에 묶습니다.
주님,
십자가를 벗어난 벼랑 끝을 알게 하시고
내게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주소서.
내 겨자씨 믿음으로 구하오니,
탈취자가 오고 강포자가 이르러도
주님이 내 주님이심은 빼앗기지 않도록
나를 당신의 새 부대로 새롭게 하소서.

기 도

부산 수민교회 황 경 례 집사님

기도는 생명이 되고
기도는 섬김이 되고
기도는 빛이 됩니다.

기도는 힘이 되고
기도로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게 하시고
기도는 나의 호흡이 되며
기도가 축복이 되게 하소서.

기도가 안나와 시므온처럼 열매가 되고
기도는 나의 온 기쁨이 되고
기도가 나의 집이 되기 원합니다.

기도로 세상은 멀어지고 새벽별이 그리워지고
기도로 십자가가 더 가깝게 되기 원합니다.

기도 속에서 주님을 더 사랑하고
기도 속에서 주님께 나 자신을 드리고
기도 속에서 나 자신을 장사지내버리고
주님의 부활에 참여합니다.

기도 속에서 주님을 앙망합니다.
기도 속에서 주님께 속하고,
주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기도 속에서 내 주님을 기다립니다.
오!! 주님.
아멘. 아멘!

나의 예수님, 나의 임마누엘

우리는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된 소년 시절에 부모님과 사흘 동안 헤어져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정확히 말하면 나흘이겠지요.
주님의 부모님인 요셉과 마리아가 무척 애를 쓴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계시지 않아서일까요? 그것은 아닌 줄 압니다.

진정한 의미는 그들이 나의 예수님, 나의 임마누엘로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귀중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나의 예수님으로 나의 임마누엘로 모시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정말 불행입니다. 신앙생활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장과 2장에서 주님의 모친 마리아가 듣게 되는 귀중한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천사로부터 듣게 되는 예수님께 관한 말씀은 그 예수님께서 다윗의 위에 장차 앉게 될 분이시고 야곱의 집에서 영원히 왕 노릇 하실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나의 예수님이 되시지 않는다면 그것이 주님의 모친 마리아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예수님께서 다윗의 위에 앉든 야곱의 집에서 영원히 왕 노릇 한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나의 주님이 참으로 왕위에 앉으시고 영원히 왕 노릇 하시는 것은 대단히 의미 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줄 압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 시므온을 통하여 아기 예수님께 관하여 들려주시는 예언은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라고 예언해 주시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서 십자가 앞에 서 계신 모친 마리아의 심정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슴을 찢는 듯한 아픔이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죽음보다 훨씬 더 아픔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예수님, 나의 주님이 아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아픔이 있었을까요? 그러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도망간 제자들도 그런 아픔은 아니었을 줄 압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떠날 수 없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모친 마리아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었을 것 틀림없습니다. 내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내 예수님이 아니면 주님의 보좌가 상관없고, 주님의 십자가가 상관없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조금만 다가선 마음으로 묵상해 본다면 참으로 소중한 의미가 될 수 있을 줄 압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아무런 상관없는 마게도냐 첫 성인 빌립보 지역의 간수로 있으면서 이제 사도 바울 선생님과 실라를 감옥에 가두어 놓고 졸며 잠들어 있는 간수.
그는 바울 사도와 실라의 기도와 찬송에 의하여서 옥터가 흔들리고 놀라운 변화가 생김으로 인하여서 두려워 떠는 환경이 되었습니다마는, 그 속에서 그가 자기의 잃어버린 상태를 발견하고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라고 말하며 다가왔을 때, 사도 바울 선생님이 전하여 주신 내용은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아무런 상관없어 보이는 마게도냐 첫 성인 빌립보에서 특별히 귀한 직업도 아니고 보잘것없는 직업 같아 보이는, 밤에도 제대로 잠 못 자고 졸고 있는 간수. 그 사람의 의지할 수 있는 주님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사랑스런 아기 예수님일 뿐만 아니라, 이 빌립보 간수에게도 예수님은 주님이 되어 주심을 우리가 주목해 보는 것은 참으로 귀중한 일이라고 생각 됩니다.

그러나 더 소중한 마음으로 사도행전 16장 말씀을 주목하여 본다면, 사실 사도 바울 선생님이 매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그 어려움 속에 갇혀 있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 간수에게 바로 예수님을!
예수님이 그 간수의 주님이 되어주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전하여 주기 위함인 줄 압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입니다!
엄청난 사실입니다!! 그 사람은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놀라운 사실임에 틀림없는 줄 압니다.

우리는 이사야 7장 말씀에서 임마누엘이란 의미를 처음으로 얻게 됩니다.
전쟁 때문에 벌벌 떨고 있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전하여 준 소식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 전쟁 가운데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근거로써 또 그 표적으로써 보여 주신 것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하셨습니다. 이 임마누엘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킨 이름입니다.

우리가 잠시나마 이사야 7장 말씀에서 생각을 하나 정돈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에브라임(이스라엘)과 아람이 연합하여 다가오므로, 거센 물결 같은 이 엄청난 어려움 때문에 벌벌 떨고 있는 이들에게 처녀의 배 속에 있는 어린 아기가 어떤 도움이 된다는 말입니까?
베들레헴에 생명으로 태어나신 그 아기 예수님이 그 어떤 도움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애굽으로 피하여 가서 그 생명을 유지한 우리 예수님의 생명이 어떤 도움이 된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이곳에 주목할 것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베들레헴의 말구유 간에서 아기 예수님을 내 생명처럼 중히 여기고, 그 생명을 위해서 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애굽으로 피난 가도 아기 예수님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애쓰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어 간다면, 그처럼 나의 진정한 구주되시고 주님 되신 예수님을 내 생명처럼 중히 여긴다면, 이사야 7장에서 에브라임(이스라엘)과 아람이 동맹했다 할지라도 승리를 얻도록 하셨듯이,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 예수님을 생명처럼 중히 여긴 그들을 그렇게 지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신다는 의미인 줄 압니다.

그러기에 생명 되시는 그 조그만 아기 예수님이 어떻게 전쟁을 감당하랴?
그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그렇게 소중하게 나의 주님으로 모셔갈 그때, 우리가 전쟁 속에도 승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쟁에서 잠깐 승리만 하면 그만인데 아기 예수님이, 생명 되신 주님이 왜 언제나 함께 계셔야 합니까?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라는 의미는 잉태한 모친 마리아가 잠을 자나 식사를 하나 길을 가나 조그만 일과를 진행하나 언제나 함께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알아차린다면 얼마나 복이 있을까요!
마태복음 1장에서 임마누엘 되신 우리 예수님을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전쟁이 왜 두렵습니까?
우리의 생명이 다 죽음으로 끝날 수 있고 아니면 살아도 사나 마나 한 짓밟히는 삶이 되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어느 의미에 있어서 홍수보다 더 그러하고, 화재가 나서 불타버린 것보다 더 참혹한 광경이 전쟁이라 말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전쟁은 한순간에 끝나는 홍수가 아니고, 한순간 잠깐만 스쳐 가는 화재가 아니고, 짓밟히고 난 이후에 끊임없이 지배를 당하는 참으로 비참한 것이 전쟁인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죄란 것이 그러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립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란 말씀처럼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죽음으로 끝내버립니다.
죄는 그러합니다.

죄는 죽음으로 끝내고 난 이후에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한순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어두움으로, 우리를 온통 세상으로 짓밟아버리고 말아버립니다. 이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전쟁! 그것 못지않게 죄란 것은 우리 인격을 참으로 그렇게 만들어 버립니다.

주님과 나의 생명적인 관계가 끝나버린 것이 말라버린 사막과 같다면, 그것은 죽음을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참으로 그 죄가 인격을 부패함으로 상실해 버리게 하는 내용을 예레미야 17장 말씀은 가리켜 말합니다.

“만물 중에 제일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는 생명력을 상실함으로 사막과 같은 죽어버린 땅처럼 만들어 놓는 동시에 그다음에는 부패함으로 참으로 돌아보고 싶지 않은 엄청난 모습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죄 가운데서 이기는 길이 어떤 길입니까?
주님께서 참으로 우리의 구주 되어 주시고 우리의 생명 되어 주심으로 나의 주님께 속함 속에서 주님의 생명 속에 살아갈 때 우리는 죽지 아니하고, 참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고, 하나님 보시기에 생생한 살아있는 삶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이기는 자는 생생합니다.
이기는 자는 자유를 갖습니다.
이기는 자는 자기 삶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전쟁은 무서워하지만 죄는 별로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죄의 결과는 엄청난 것이라고 해야 옳을 줄 압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할 값진 의미는 죄 가운데 사는 생활이 전쟁으로 초토화된 그것 못지아니하게 엄청난 어려움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예레미야 애가는 정말 어려워 보입니다. 전쟁에 짓밟힌 모습이요, 참으로 기근 가운데 시달린 비참한 모습이요, 예레미야 애가는 정말 어둠 그 자체입니다.

무엇이 그러한 길로 만들었습니까?
예레미야 애가는 우연히 된 것 절대 아닙니다. 죄의 삯으로 된 황폐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자비로우시고 오래 참으시고 참으로 견뎌주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말 그들의 영혼이 견딜 수 없는 마음이라 할 만큼 죄가 사람을 지독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서 생긴 결과가 예레미야 애가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심이라”
우리는 생명 되신 예수님, 백성이란 말씀의 의미처럼 참으로 속함과 더불어 다스림 받고자 하는, 그 가운데서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읽게 됩니다. 천국의 백성은 억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로마서 6장에서 읽을 수 있는 이 생명이란 말씀의 의미는 죄가 우리를 주장치 못하고 놀라운 생명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있는 삶을 살게 된다는 그 놀라운 것을 자상하게 보여 주십니다. 놀라운 내용입니다.

이것은 아기 예수님께 대한 단순한 내용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죽으심과 더불어 또 한편 보좌의 주님께서 왕 노릇 해 주시는 그 놀라움을 누가복음 2장과 1장에서 읽을 수 있듯이 우리 예수님을 아는 자는 자기 마음의 깊은 생각을 들추어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다른 말로 표현하여서 “나의 나됨은 십자가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곧 나의 십자가입니다. 내 가슴속의 어떠함을 참으로 처리하여주시는 주님의 십자가는 나의 십자가입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모친이 십자가 앞에서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의 나됨이 드러남과 더불어 이것이 참된 나의 구원의 해답임을,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해답임을 우리는 알아차릴 수가 있는 줄 압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참으로 임마누엘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떠남이 없는, 언제나 함께하시는 아기 예수님의 생명처럼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연합해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어서 그 생명 속에 살아가는 이 놀라움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사야 7장의 생명이 함께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를 로마서 6장의 복음 속에서는 어두움과 죄의 종이 되었던 우리를 십자가로 벗어버리고, 참으로 살아계신 주님께 속함으로 우리가 임마누엘의 생명을 얻게 되는 그리고 이 생명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그런 마음으로 연합하는 그곳에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되고, 하나님도 우리에게 은혜로 살아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가운데서 우리는 세상도 이기고 환난도 이기고 어떠함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 보시기에 보암직한 로마서 6장 마지막 부분처럼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있는 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께 연합된 마음으로 속하여 있을 때, 저 보좌에 계신 주님은 우리 주가 되셔서 오늘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 주님의 다스리심 속에 있을 때, 우리 주님은 인격적으로 왕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의 생명을 정말 내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고 보좌의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정말 나의 왕이 주시는 평강처럼 소중히 여겨서 그 생명과 평강을 순종해 갈 그때, 주님을 이렇게 소중히 여기며 따라가는 나의 인격 속에 주님은 영광스러운 나의 왕으로 역사하여 주신다는 뜻입니다. 영광스러운 나의 왕으로 역사하여 주신다는 뜻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정말 감탄할 일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이런 생명과 평강의 주님이 되어 주시고 생명과 평강의 왕이 되어 주신다면,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우리의 가는 길에 문제가 아무리 많아도 허물어지지 않을 줄 압니다.
이곳에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으로 살아주시고 우리 주님의 통치하여 주시는 능력은 놀랍게 역사하여 주실 줄 압니다. 놀라움으로, 놀라움으로 임하여 주실 줄 압니다.

이사야 7장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라는 이 단순된 말씀으로 생명으로 함께하시는 주님이 우리 주님 되어 주심을 말씀하셨지만, 이사야 9장은 주님의 통치하심이 임하여 올 때 그것은 놀라움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참된 지혜로운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영존하시는 하나님이 참으로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는 은혜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는 평강의 왕이신 그분의 통치하심이 굳건히 설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놀라웁습니다!
우리가 이점을 마음속에 되새겨 보는 것은 참 소중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마리아의 주님인 동시에 사도행전 16장의 별로 보잘것없어 보이는 그 간수의 생명의 주님 되어 주시는 것도 분명히 알아보았습니다. 아니 그뿐만 아닙니다. 오늘 우리 개인에게도 이런 주님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의 요셉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유일한 복된 길은 그도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하게 살고자 마음 써 가다 보니 마침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요셉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기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온 마음으로부터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며 모시고 산 줄 압니다. 우리 한분 한분들에게 주님은 이런 생명적인 관계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이것이 복음적인 관계로 본다면, 어둠과 죄악에 종살이하던 우리를 십자가로 벗어버리고 그 가슴을 찢는 그 십자가가 나에게 적용되어야 할 바로 나의 십자가임을 알아차리고, 로마서 6장 말씀처럼 부활하신 주님께 속하여 갈 그때, 오늘도 여러분과 저는 주님의 생명에 동참하게 되는 줄 압니다. 또한, 주님이 나의 주가 되시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는 생명 가운데서 우리는 자유로움을 가질 수 있는 이 놀라운 영광을 얻게 되는 줄 압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2장부터 그다음에 나오는 몇 장을 잠시만 이런 관계 속에서 정리하여 본다면, 주님을 이렇게 나의 주님으로 나의 생명으로 붙드는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의 생명을 위하여 나아간 곳이 애굽이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 되어 주시기에 넉넉하게 보존 받고, 마침내 강건함으로 때가 되어 돌아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애굽 같은 세상. 아무리 어렵고 기댈만한 사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거친 세상이라도 우리가 예수님을 이렇게 모시고 살아본다면, 우리도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밝은 마음으로 주님 모신 생명 속에서 애굽을 떠나올 수 있을 줄 압니다.

마태복음 3장 말씀은 우리가 주님을 이런 관계 속에서 모시고 있다면 오늘 이 땅에서 죄를, 불의를, 어두움을 솟구쳐 내는 그런 불행한 자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길이 될 수 있을 줄 압니다. 때로는 우리 주님의 의로우심과 우리 주님의 거룩하심과 우리 주님의 아름다우심과 우리 주님의 능하심의 축복된 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인 줄 압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4장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마태복음 1장처럼 생명적인 관계 속에 잘 매달려 있다면, 이 세상의 어떠한 여건 속에서도 주님을 그러한 나의 주님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켜 가시는 모습을 마태복음 4장에서 읽을 수 있듯이 그 예수님께 연합되어서 그 예수님의 생명을 나의 생명처럼 붙들고 나의 주님을 중히 여기며 따르고 있는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담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렸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님을 나의 생명처럼 따르고 있는 이는, 우리 예수님께서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한때가 아니라 이 땅을 마칠 때까지 아버지와의 언약을 지키며 언약 속에 사셨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언약을 벗어난 자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있는 언약을 지키는 자로 길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우며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마태복음 5장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나 사이에 마태복음 1장처럼 주님을 생명처럼 붙들고 있는 생명적인 관계만 잘 되어 있다면, ‘복 있는 자’란 말씀과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라는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복스럽고 영광스러운 생활이 오늘 우리에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결코 늘 항상 아쉬움 속에 바라보는 그런 내용이 아니라 주님을 생명으로 붙든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 주님의 어떠하심을 마음으로부터 힘입어 가며 놀랍게 행할 수 있는 줄 압니다.

마태복음 6장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마태복음 1장처럼 나의 임마누엘, 나의 예수님, 나의 생명으로 그리고 로마서 6장처럼 복음적인 관계에 매여서 살아가야 합니다.
아담과 여인이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숨었습니다. 요나가 내 하나님의 길을 벗어났을 때는 어려움 속에도 내 하나님을 등지고 배 밑창에 누워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구속의 은총으로 의롭다함 받았던 다윗도 주님을 생명처럼 붙드는 언약 속에 살아가지 아니할 때 하나님을 향하여서 가까운 마음이 아니라 먼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모습을 시편 32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다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을 나의 생명으로 우리 영혼이 제대로 붙들고 있다면,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는 말씀이 얼마나 기쁨이 되며 우리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말씀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열려있는 축복된 마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 사랑하고 우리 하나님 의지하면서, 오늘의 조그만 생활이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사는 생활에서의 그 모든 문제와 나의 내일에 관해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란 이 뜻깊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능히 가능할 줄 압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건지실 자임이시라.” 사실 이를 위하여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건너가시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서 우리의 주님 되어 주십니다. 생명과 평강으로 통치하여 주시는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말씀은 전날 우리 스스로 살던 생활은 바둑이와 꿀꿀이와 같은 생활이라면, 이렇게 주님께 돌아온 우리를 거룩하다 말하고 이제 주님의 생명 속에 사는 것을 진주의 귀중함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구별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더 나아가서 이 땅 사람들이 그 누가 파멸을 원하습니까마는, 자기에게 속해서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어떠함을 좇아 사는 넓은 문과 넓은 길은 다 파멸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십자가로 벗어나서 부활하신 주님께 연합되어서 내 주님의 생명의 이끄심을 좇아가는 그 길은 좁은 문과 좁은 길 같지만, 파멸이 아니라 계속해서 생명과 평강으로 이어져 가는 길임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생하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축복되고 기쁨인지요!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가시와 찔레는 아닙니다. 누가 옛사람 자기를 가지고 가시와 찔레 아니라고 말하겠습니까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를 함께 넘겨버리므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나의 생명, 나의 주님, 나의 임마누엘 되시는 내 주님께 속하여 사는 그 길은 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아름다운 삶을 이어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나에게 끊임없는 생명을 주시는 반석이 되어 주시므로, 주님 모신 그 집은 바람 불고 창수 나고 홍수 난다 할지라도, 흔들림 없이 내 주님 모신 그 삶을 내 하나님 은혜 속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음을 말씀해 주시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요!

마태복음 1장에서 우리가 하나만 더 이어보고 오늘 말씀을 매듭짓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8장 말씀에서 그 주님은 오늘 ‘인자의 머리 둘 곳’이란 말씀의 의미로서 오늘 여러분과 제가 주께 속하였을 때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하여 주시는 나의 머리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보좌의 주님은 오늘도 부활하신 주께 속하여 내 주님을 내 생명 삼고 요한복음 11장 25절 말씀처럼 “주님은 나의 부활입니다. 나의 생명입니다.”라는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상황 속에서도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주께서 우리 머리 되심을 설명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꾀를 낸다는 것이 죽음의 길로 이끌어 갈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여우를 좇고 공중의 독수리를 좇아가는 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그 선하시고 아름다우신 주님을 좇아가는 그 길! 지혜로우며 의로우며 강하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는 영광이 있는 우리 주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나의 예수님, 나의 임마누엘, 나의 생명 되신 주님을 이렇게 붙들어 가므로 이 놀라운 축복이 이 놀라운 은총이 참으로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조그만 빈들판을 날마다 새롭게 우리 마음속에 가져 보고자 힘쓰는 것은 이 놀라운 관계를 우리 마음속에 새롭게 새롭게 다짐하며 정리하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놀라움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오늘 이 땅 위에 있는 사람에게 해답은 없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이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해답 됨을 아는 이는 죄악도 많고 전쟁이 많은 그러한 세상이라도 오늘 나의 예수님, 나의 임마누엘, 나의 생명 되시는 주님의 은혜 속에서 전쟁도 이기고 주어진 어둠과 죄악도 이기며 그래서 언제나 이기는 자란 이 아름다운 이름과 더불어 주님의 순종하는 백성의 영광 속에 설 수 있는 줄 압니다.
이 영광이 조그만 빈들판을 통하여 주님을 묵상해보는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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