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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조그만 나의 빈들판

2012-07-14 / 58 회차

7월 조그만 나의 빈들판



당신의 흔적을 남기는 자

취적리교회 배 명자 집사님

아무런 메아리소리
들리지 않는 것 같은 하늘에
손바닥만 한 구름 일어날 때까지
내 사랑 당신 곁을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노을진 저 석양의 하늘처럼
붉게 물들여지도록
그렇게 당신 곁에 머물겠습니다.

나의 하늘의 창이 닫히지 아니하도록
나의 하늘의 창이 심판을 위해 열리지 아니하도록
나의 하늘이 잘 보이는 곳
하늘 샘 흐르는 빈들을 찾아
당신을 만나겠습니다.

따르는 길이 그 어떠하든
당신께만 관심 두겠습니다.
그리고 영혼들을 향해 우시던
당신의 마음을 붙들겠습니다.


맑고 청명한 나의 하늘에
먹구름 일게 하는 내 자아, 내 욕심
십자가로 가져가겠습니다.

주님!
조용한 부름에도
메아리처럼 금세 응답으로 다가와 주시고
당신 앞에 있기만 해도
부요해지고 행복해지는 마음은
보잘것없는 날 향하신
당신의 따뜻한 마음을 담은 축복인 것 같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따르렵니다.”
이 고백이 어떤 길에서도
멈추지 아니하는 자로 살기 위해
날 사랑하신 갈보리 산 십자가의
당신을 잊지 않으렵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날에
당신의 흔적을 남기는 자로 살고 싶습니다.

주님의 생명으로

영서교회 김 병수 목사님

거친 들 모퉁이에서
주님의 생명으로 지금 일어섭니다.

무너져버린 나의 근거들
아쉬움 없이 던져버리고
오늘도 주님의 생명으로
시온의 기초를 다져갑니다.

삭풍이 지나간 길목에서
주님의 생명을 오늘도 은혜로 느낍니다.

지금 주님의 생명을 붙들고
주님의 생명을 노래하며
주님의 생명으로 달려갑니다.

영혼 가득히 밀려오는 하늘의 기쁨,
주님의 생명 속에서 누리며
주님의 생명으로 묶인 과거를 정리하고
주님의 생명으로 지금 성소에 들어갑니다.

주님의 생명이 있어
지금 나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주님 사랑

이 상인 집사님

문 열어
주님 바라봅니다.

유치찬란한 인생도
덤덤해지며
바람 같은
자유를 갈망하고

가슴이 먹먹하여
쓸어내리지 않으면
숨도 못 쉬는
폭풍 같은 세상

당신의
그리움 핀 눈웃음으로
나를 가두어요.

문 열어
주님 안아주신
쿵쾅대는 이 가슴으로
기쁘게 사랑하며 달려가렵니다.

긍휼을 구하는 기도

안디옥교회를 섬기시는 곽 일귀 목사님

내게 다가오신 주님 향하여
전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옹알이는 첫마디,
“주님! 긍휼하심을 구합니다!”
인자와 긍휼로 옷 입으신 주님 옷자락에 숨기듯
보듬어주시기를 간구하는 외마디,
“긍휼을 베푸소서!”

언제부터인가 몸에 밴 듯한
철없는 아이의 어리광을 보옵니다.
주님 긍휼 아니시면
견딜 수 없고 살아갈 이유 없어
응석받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매일의 삶에서 주님 느끼고 싶어
긍휼을 구합니다.
매일의 삶에서 주님 가까이,
주님과 친밀해 지고 싶어 긍휼을 구합니다.

주님 안에 삶의 이유도,
목적도, 의미도 넉넉한데
다른 것에서 무얼 얻으려 하는지
자꾸만 엉뚱한데 기웃거리는
어리석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소유 넉넉한데
자꾸만 부질없는 것에 미련 있는 듯
갸우뚱거리는 내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주님 입혀 주신 옷이 너무나 편안하고 가벼운데
자꾸만 화려하고 무거운 다른 것으로 옷 입으려
주춤거리는 어리석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주님!
주님의 보혈을 내게 떨어뜨려 주십시오.
육체의 원함을 이루려
쉼 없이 분주한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주님으로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행복한 사람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

주님!
오늘도 주님의 긍휼을 힘입기 원하여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니다.
지금 제가 앉아 있는 이곳이
주님의 보좌이고 주님의 발치이길 원합니다.
주님의 발치 아래 머물며
주님의 시선과 마주하던 마리아를 떠올립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죠?
“마리아가 가장 좋은 편을 택했다”고요…

솔직히 주님!
제가 너무 분주했어요.
입도 뻣뻣해지고
마음판도 가물은 땅처럼 푸석해졌어요.
은혜의 빗줄기로 적셔 주십시오.
촉촉한 생기를 입혀 주십시오.
마른 땅처럼 사모했다고 고백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눈물이 빗물 되어 내 가슴에 흐르기까지
긍휼을 입혀 주십시오.

나의 두 렙돈

신 규환 집사님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주님!
제가 가진 것으로, 제 능력으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세상의 지식과 제 머리를 동원해
무엇인가 주님께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은 그저 그 자리에 있는 채)
자신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였지만
주님께서는 자기 가진 전부인
두 렙돈을 넣은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도모한 것은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이 도모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도 같다고 칭송되었지만
그것은 빈 껍질이었고
빌립 집사님을 따라다니면서도
그 마음에는 자기 자신이 그저 남아 있었습니다.
세상의 과학기술이 큰 능력이라 칭송받아도
주님 계시지 않는 곳에는
마술사 시몬의 안타까움만이 남아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대단한 세상의 능력을
원치 않으심을 알겠습니다.
저의 밑그림과 구상과 도모를 모두 내려놓고
그저 흰 지면을
주님의 손 바라보며 바치고 싶습니다.

제 마음의 蝕(식)이 주님의 빛을 가리지 않도록
제 마음의 두 렙돈을 드릴 때
주님의 얼굴빛 비춰주시고
주님의 생명으로 채워 주옵소서.

내 주님 모신 장막

조 경숙 집사님

옛길과 오늘의 길 속에
달라진 것 많아 보이지 않지만
이 땅에서
내 주님 모신 장막 생활은 더욱 가깝습니다.

결코, 굉장하거나 견고해 보이지 않는 장막.
그러나 그 터는 흔들리지 않은 주님이시기에
나그네 길에서 이런저런 어려움 감당하는
주님 모신 잠잠함 있습니다.

그 안에 많은 것 있어 보이지 않지만
장막 밖에서는 맛볼 수 없는
생명과 평강은 작은 가슴으로 흘러옵니다.
이 가슴으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붙들고 길 갑니다.

장막 전체를
따뜻함과 온유함으로 감싸 안으신 주님의 사랑!
그 안에서 내 주 한 분 모신 홀로는
더욱 뚜렷해집니다.
주님 사랑에 매인 홀로인 그의 사람은
이 땅에서 강하고 담대한 자라고 일컬음 받습니다.

소망 되신 주님이 장막의 주인이시기에
주님의 뜻, 주님의 원하심 헤아려드려
오늘은 이 길,
내일은 저 길로 장막 치며
그 길에 순종하며 재촉하고 싶습니다.

오직 내 주님 한 분만을 모신 장막,
이 땅에서 내가 거할 유일한 거처입니다.
갈급함으로 이 장막은 빼앗기지 않는 자로
언덕 위의 홀로 선 하늘 사람이고 싶습니다.

주님 생명 주심에 감사드리며

마천 교회 김 양중 목사님

처음 저에게 복음이 명료하지 않았을 때, 주님 생명은 막연히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였고 제 믿음생활의 참된 평안과 기쁨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예수 믿는 자다운 의로운 삶 산다 했지만, 그러나 그곳에 참된 힘이 없음도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은혜로우신 주님 저에게 긍휼 베풀어 주심으로 생명으로 다가와 주셨을 때, 비로소 이 땅의 삶을 참되고 값지게 사는 것은 주님 생명으로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주님 보내셔서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제가 주님께 속하여 주님 생명으로 사는 그곳에서만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께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함이라고…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하심처럼 날마다 내가 죽음에 넘기워 질 때 참으로 주님 생명을 뚜렷이 제게 나타내 주신다 함이 어찌 그리 감사한지요!

주님 생명으로 살아가던 엘리사 선지자가 수넴 여인의 생명 잃은 아들에게 눈, 입, 손 맞추었을 때, 어느덧 그 생명 전달되어 다시 소생함을 얻은 것처럼 제 마음속에 묵묵히 주님 추구해 감으로 주와 함께가 영적 실상이 될 때, 주님은 오늘 하룻길 생명으로 내 안에 살아주시는 존귀하신 나의 주님이심에 찬양을 드립니다.


‘가고 또 가도 뿌연 먼지~’ 노래 부르듯, 주님 벗어나 다른 곳에 마음 둔다면 어느덧 제 안에 주님 생명 희미해져 가겠기에 오늘도 좁은 길 걷듯이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주님과의 동행의 삶을 추구해 봅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날마다 주님을 사모하며 그리워함으로 주님과의 생생한 삶 이어져 갈 때, 오늘도 은밀 중 주님 앙망하며 주님께 굳게 매인 삶 이어가 볼 때, “나는 부횔이요 생명이라”말씀하신 주님의 그 부활 생명으로 옷 입혀 주시는 시간이 됨에 감사를 드립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듯, 주님 생명을 좇아 사는 삶이 아니라면 주님 마음 시원케 해 드릴 수 없고, 주님께 합한 삶 아니 되겠기에 오늘도 단호히 나를 벗어버리고 주님께 속해 주님 생명으로 살아가기만을 더욱 가슴 깊이 새겨봅니다.

나아가 주님!
제가 감당하는 일도 무슨 커다란 일 생각하기보다는 주님께서 제 안에 생명으로 일해 주실 주님이시기에 저를 기쁨으로 주님께 내어드려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주의 종, 주의 도구만 되기를 원해 봅니다.
그것만이 진정 주님 나라의 유익을 가져오는 참된 사역 될 수 있음을 확신하면서…

당신께만 귀 뚫린 자로

임 경오 형제님

주님 앞에 조용히 엎드릴 때
십자가 그 사랑 생생해지고
기대감으로 주님 뜻 품게 하시니
하루 길 시작도 감사가 됩니다.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안타까움 밀려오는 것 사실이지만
감사하며 깨닫게 하신 예수님께
귀 기울여 가기 원합니다.

순간순간 그 뜻 헤아리며
부지런히 귀 기울여 갈 때
하나하나 일러주시는 주님!
당신 뜻 온전히 이루어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도 주인님 사랑하므로
귀 뚫은 종처럼
오직 당신께만 귀 뚫린 자로 세우소서!

나의 이름

최 경화 권사님

주님 앞에 조용히 엎드릴 때
십자가 그 사랑 생생해지고
기대감으로 주님 뜻 품게 하시니
하루 길 시작도 감사가 됩니다.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안타까움 밀려오는 것 사실이지만
감사하며 깨닫게 하신 예수님께
귀 기울여 가기 원합니다.

순간순간 그 뜻 헤아리며
부지런히 귀 기울여 갈 때
하나하나 일러주시는 주님!
당신 뜻 온전히 이루어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도 주인님 사랑하므로
귀 뚫은 종처럼
오직 당신께만 귀 뚫린 자로 세우소서!

날마다의 새로움과 그 댓가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온전히 성숙하고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작거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로 하여금 생명을 댓가로 지불케 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재창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끊임없는 매일의 돌보심만이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편에서, 우리가 새사람을 입을 때, 우리의 옛사람은 벗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왔던 삶을 형성하는 자신의 본성의 모든 기질들과 습관들과 쾌락들은 제거 되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엄청난 값의 진주(그리스도)를 소유하고자 한다면,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남으로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우리는 팔아야 합니다.
만일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그가 걸어왔던 길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그는 자신을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는 모든 죄뿐만 아니라 필요하고, 합법적이거나 소중한 것일지라도 죄의 계기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는 (죄의 계기가 될 수 있는) 그 눈을 빼버리거나 그 손을 찍어버려야 합니다. 만일 그가 ‘끝없는 생명의 능력’안에서 살고자 한다면, 그는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리고자 그것을 미워해야 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지한 일입니다.
특별히 속사람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바울은 ‘겉 사람이 후패하는 것이 ‘속사람을 새롭게 하는 것’과 동반되어야 하며,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의 모든 서신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을 포함해,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교회들에게 능력과 축복 속에 어떻게 그리스도의 생명의 비밀이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여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 4:10~12)

우리 몸 안에서와 다른 이들을 위한 우리의 사역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생명을 직접 충만하게 경험하는 것은 그의 고난과 죽으심 안에서의 우리의 참여함에 달려 있습니다.
속사람을 새롭게 하는데 있어서 ‘겉 사람의 희생과 죽음’이 없이는 큰 기대에 미칠 수 없습니다. 그 생명이 하늘의 것으로 채워지기 위해 이 땅의 것에 대해서는 비워져야만 합니다.

두 번째 본문 안에 그와 똑같은 진리가 있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
오래된 집은 새로워질 수 있는데, 여전히 그것의 옛 모습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된 것이 너무 완전해서 사람들이 그 변화에 놀랄 수 있습니다.
성령에 의해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방법이 전적으로 다른 완전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결국, 육적인 마음은 없어지고 영적인 지각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골로새서 1장 9절, 요한일서 5장 20절)

이 변화는 본성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댓가 없이는 얻어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라." 우리는 이 세상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워질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세상 안에 있으며, 우리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는 미묘하고도 만연한 세상의 영향력을 받게 됩니다.
또한, 세상은 여전히 본성의 누룩처럼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 무엇도 그것을 제거할 수 없지만, 하늘의 생명으로 우리를 채우시는 성령의 강한 능력은 그것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들로 하여금 우리를 강하게 붙들며 주관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신성한 변화는 위에 계신 그분의 형상으로 우리의 마음이 매일 새롭게 되는 것이며, 이 세대를 본받았던 모든 자취로부터 우리가 자유롭게 되기를 추구해 온 만큼 확고하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부정적인 말씀은 "변화를 받으라" 는 긍정적인 말씀처럼 강하게 강조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영과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소유하기 위해 다툽니다.

오직 전자가 인식되고, 부인되고, 내던져질 때만이 하늘의 영은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으며, 새롭게 하며, 변화시키는 그분의 축복된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온 세상과 모든 세속적인 정신은 포기 되어져야 합니다. 전체 삶과 자기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잃어진 바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속사람을 매일 새롭게 하는 것을 망설이거나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우리는 많은 댓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참으로 우리가 성령이 모든 것을 하시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그 새롭게 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단순하고, 자연스럽고, 건강하고, 즐거운 하늘의 성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내면의 방은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이루신 것과 지금 행하고 계시는 것과 우리가 아는 것을 그가 행하실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매일 갈망하는 곳이 됩니다.

날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신 복되신 주님께 우리 자신을 새롭게 내어드려야 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한복음 7:38).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것은 매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축복된 진리들 중의 하나가 됩니다.

(번역에는 정 찬규 집사님께서 수고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