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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나의 빈들판
2014-06-28 / 65 회차
조그만 나의 빈들판
땅끝에서
취적리교회 배 명 자 집사님
땅끝에서
내 작은 무릎으로
주님을 붙들고
주님만 마주하고 섭니다.
땅끝에서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
내게는 큰 행복이고
그리고
내 영혼에 주님만 채워갈 수 있다면
어떤 길에서도
조용하지만 뜨거운 사랑의 노래
입술에 머금은 가객 되어
기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땅에서는
부도 명예도 권세도 가진 것 없는
초라한 모습일지라도
땅끝에서
외쳐 부르는 주님은
작은 자의 가슴에
더 큰 부요로 그리움으로 자리 잡습니다.
세상을 뒤로 하고 선 땅끝에서
나의 작은 기도가
나의 작아 보이는 순종이
주님께 기쁨 되어진다면
하늘 향해
소망의 돛 높이 올리고
하늘이슬로 젖어야만 살 수 있는
우슬초 되어
주님! 당신을 앙망하며
당신께 더 깊어진 마음으로
당신 나라를 위해
내 작은 손을 모으렵니다.
내 작은 무릎으로
주님을 붙들고
주님만 마주하고 섭니다.
땅끝에서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
내게는 큰 행복이고
그리고
내 영혼에 주님만 채워갈 수 있다면
어떤 길에서도
조용하지만 뜨거운 사랑의 노래
입술에 머금은 가객 되어
기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땅에서는
부도 명예도 권세도 가진 것 없는
초라한 모습일지라도
땅끝에서
외쳐 부르는 주님은
작은 자의 가슴에
더 큰 부요로 그리움으로 자리 잡습니다.
세상을 뒤로 하고 선 땅끝에서
나의 작은 기도가
나의 작아 보이는 순종이
주님께 기쁨 되어진다면
하늘 향해
소망의 돛 높이 올리고
하늘이슬로 젖어야만 살 수 있는
우슬초 되어
주님! 당신을 앙망하며
당신께 더 깊어진 마음으로
당신 나라를 위해
내 작은 손을 모으렵니다.
다윗의 조그만 빈 들판
사람들은 할 수 있으면 평안하고 광활한 그런 넓은 곳을 선택하는 것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참된 삶은 내가 평안하고,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광활한 그 무엇을 가짐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을 향하여 나의 영혼이 주님께만 집착하는 이 좁음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평안도, 진정한 넉넉함도 주님의 은혜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마음 써 선택할 것은 이 세상의 평안함이나 이 세상의 광활함이 아니라, 내 주님께 속한 좁음. 그리고 그곳에서 내 주님과 나의 사귐의 철저함을 구하는 것이 우리의 이 땅의 삶이 오히려 넉넉하고 이기는 삶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생활의 특징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 볼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그는 이김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도 하나님께서 주신 평온함과 안정감이 있는 그러한 삶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둘 다 주님으로만 그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이 가만히 있다 보면 평안하다, 안전하다, 참으로 넉넉하다고 생각되어 보이는 세상에 그대로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들의 영혼에 말할 수 없는 초라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속하고 나의 주님께 돌아가는 그 좁음 속에서는 주님으로 인한 불로 연단한 금, 주님으로 인한 흰옷, 나의 주님으로 인한 기름 부으심의 안약, 그리고 주님과 함께!
이러한 것이 있는 가운데 그들의 삶은 진정한 참된 부요가 있고, 넉넉한 삶이 있는 것을 우리가 주목해 볼 수 있겠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께 집착함 속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라는 그 부요를 그들의 영혼은 느낄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주님께 대하여 보람찬 삶을 살 수 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하시는 주님의 그 축복스러운 명령의 어떠함을 영혼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나의 부요가 안 되고, 내가 주님과 함께 주님의 돕는 이로 신실하게 살 수 있는 이런 삶이 아니라면 신앙은 아닙니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그 무엇입니다.
그러나 내 주님이 주시는 주님과 함께하는 부요, 내 주님이 주시는 은혜 속에서 주님과 함께 삶을 의미 있게 꾸려갈 수 있는 값진 신실함! 그것 있다면 오늘 여러분, 우리는 삶을 곁 돌아봄이 없이, 방황하듯 그 무엇을 추구함이 없이, 우리는 이 길에 온 정성껏 달려가고자 힘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잠시나마 다윗의 삶을 통하여 짤막짤막하게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서 그 다윗의 삶이 어떨 때 참으로 영광스러운가, 그의 진정한 삶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를 더듬어 보고 헤아려 보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조그만 빈 들판이 예수님 모시고 살고자 하는 이에게는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가를 알아갈 수 있을 줄 압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가 내용이 산만하지 않고 참으로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있으면 짤막하게 말씀을 전개하고자 합니다.
혹시 참고적인 성서가 필요할 때는 여러분이 이 성서를 직접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 사무엘상 16장 내용에서 다윗은 얼마 되지 않은 양떼를 먹이는 조그만 빈 들판이라고 할만한 조용한 그곳에서, 주님 모시고 주님과 함께 신실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생활을 분명히 아버지 이새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밀히 보시는 주님은 아시었고, 사무엘 선지자를 라마에서 보내어 베들레헴 이새의 집까지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닌 줄 압니다.
사무엘이 찾아와 일곱째 아들까지 다 아니라고 말하면서 다윗을 왕이 될만한 기름을 부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 그 조그만 빈들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친근히 하며 주님과 더불어 사는 그 생활은 왕이 될만한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왕이 될만한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내 주님 모시고 오늘의 조그만 빈 들판 삶을 착실히 꾸려가는 이는, 주님의 다스림 속에서 내 주님이 나의 왕이 되어주시는 그 영광 속에 자유가 있는 것은 오늘도 분명한 사실인 줄 압니다.
이새가 다윗을 왕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리 없습니다. 다윗의 형들이 다윗을 왕 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이유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과 함께 신실하게 삶을 꾸려가고 있는 다윗. 그 조용한 빈들에서 내 주님 모신 삶을 꾸려가는 다윗을 왕이 될 만하다고 기름 부으셨습니다.
오늘 내 주님 모신 조그만 빈 들판 생활을 행복한 마음으로 강한 마음으로 내 삶을 집중하여 사는 이는, 어떤 어려움과 시련과 그 무엇에 짓눌릴 자가 아니라, 주님으로 인하여 넉넉하게 값진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왕이 될 만하다고 하셨던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여러분과 제가 힘입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이기는 자 되는 것이 가능할 줄 압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 조그만 빈 들판의 의미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무엘상 17장에서 읽을 수 있는 것 역시 빈들에서 내 주님 모시고 밤을 보내고 나아온 저 전선! 주님은 다윗과 함께하시며 영광을 다윗에게 허락하시는 모습을 우리는 주목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 : 사무엘상 22장~26장까지는 다윗이 갓 선지자의 말을 좇아 유다 광야로 나아왔습니다. 유다 땅으로 돌아왔지만 발붙일 곳 없어서 유다의 빈들로 나아왔습니다.
이곳에서 다윗은 낮에도, 밤에도 정말 유다 광야에서 주님 의지하고 주님 바라보며 참으로 좁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해주신 빈 들판이었습니다.
조그만 빈 들판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2장~26장은 이와 같이 참으로 내 주님께 속한 조그만 빈 들판의 삶을 착실히 살아갈 때 우리는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값진 삶을 살 수 있다고요.
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값진 삶을 살 수 있다고요!”
우리가 사무엘상 22장~26장까지 읽을 수 있는 그 다윗의 생활. 참으로 스스로는 자기 몸 가누기도 어렵지만, 주님 안에 숨은 마음으로 주님 의지하고 주님 바라보고 나의 주님 모신 마음으로 시간 시간을 보내 가는 다윗.
내일은 알지 못하고 오늘 이 좁음 속에서 주님과 함께 삶을 근근이 이어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온 유대 땅에 온 이스라엘 중에 이처럼 값진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빈들에 속한 자로! 오직 주님께만 속한 자로! 내 주님만 나의 모든 것으로 붙들 그때만이 우리는 강하고 아름다운 생활이 가능하다고요. 여기에서 벗어나면 우리가 겨우 삶을 꾸려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려움 당한 이를 도울 수 있는 강한 자 되기 어렵고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그리고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생활은 결코 없는 줄 압니다.
그러기에 갓 선지자가 가리킨 그곳이 참으로 어려워 보여도 내 주님 안에 속한 마음과 내 주님만 의지하고 내 주님만 참으로 사귀어가는 이 조그만 빈 들판의 삶을 우리가 갖추어 가므로 오늘도 아름다움과 능함이 있고,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보암직한 삶을 살 수 있는 이 조그만 빈 들판의 의미를 귀중히 생각해야 할 줄 압니다.
세 번째 : 우리가 사무엘상 30장에서 배울 수 있는 나의 주님께 속한 조그만 빈 들판의 삶의 귀중함은 피곤함과 강함의 차이점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주님을 벗어났던 다윗과 그 육백 명의 사람들은 다 피곤할 대로 피곤하였습니다. 슬프고도 슬펐습니다. 주님 벗어난 그곳에 피곤함과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주님께 돌아와서 나의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의 자비로움 속에 순종하고자 할 그때 사무엘상 30장에서 다윗은 온 밤을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은혜 속에서 지내어가고, 이끄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다음 새벽부터 그날 종일 싸우고 이튿날 해 질 무렵까지 정말 치열한 전투를 해가는!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겨우 싸움하는 정도의 일이 아닙니다. 그 강인한 아말렉들과 함께 치열하게 싸우는 싸움을 생각해 보십시요!
새벽에는 아말렉이 잠들어 있다가, 전날에 춤추고 취하여 있다가 다윗의 무리와 싸워서 그들이 잠깐 몰렸다고 하십시다. 그러나 그날 정오 시간도, 그날 오후 시간도, 다음 날도 그 아말렉이 취하여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온 육의 힘을 동원해서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서 내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의 이끄심 속에 나아가고 있는 다윗과 사백 명의 그 다윗의 사람들을 그들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도망간 이들이 다 생생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숫자만 헤아려 봐도 사백 명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결코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내 주님의 은혜 속에서 한밤을 주님께 사로잡힌 바 될 그때에 우리는 피곤하고 슬픈 자가 아니라 강한 자이고, 능한 자이고, 주님의 어떠하심이 우리에게 흘러넘치는 자 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해서 주님 주시는 큰 구원 속에 잃었던 가족들을 다 찾아오는 큰 기쁨을 얻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내 주님께 매임의 좁은 길 속에 우리는 강한 자 될 수 있고요. 나의 주님 주시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고요. 빼앗겼던 우리 가족을 주님께로 이끌어 올 수 있으며, 그리고 주님 주신 은혜로 선물까지 친구들에게 보낼 수 있는 이 큰 기쁨 있는 모습을 우리가 주목하게 됩니다.
주님 벗어난 길!
살 만하다 생각할지 몰라도 종국은 피곤하고 슬픔의 길입니다.
내 주님께 속한 좁음의 길!
어려워 보여도 그 속에 강함이 있고, 신선함이 있고, 주님 주신 큰 기쁨이 있는, 영광이 있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줄 압니다.
조그만 빈 들판.
내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을 앙망하므로 영혼이 새로워지고, 그래서 스가랴 12장 말씀처럼 주님을 가까이하는 가운데 “약한 자가 다윗과 같고 강한 자는 여호와의 사자와 같은” 주님의 붙드시는 능함과 강함 속에 있는 우리였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네 번째 : 사무엘하 1장입니다.
우리는 사무엘하 1장에서 극도로 어려운 여건을 보내고 있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의 삶을 찾아볼 수 있음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는 정말 찾아보기 어려운,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슬픔을 띤 아름다운 노래를 우리가 들을 수 있습니다.
내 주님께 속한 자만이, 나의 주님께 이끌리는 자만이, 내 주님의 사랑 가운데 다스림 받는 자만이, 오늘 불타버린 성읍이란 이 빈 들판 같은 여건을 불평하지 아니하고 함께 계신 주님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나 스스로 온 힘 기울여서 지쳐버리지 아니하고 내 주님 보시기에 합한 자로서 삶을 꾸려가는 이 진정함이 있을 그때, 우리는 다윗과 다윗의 용사들이 들려오는 소문을 듣고 옷을 찢고 슬퍼하는 그 모습을 읽게 됩니다.
사울 왕과 요나단과 이스라엘 군사들이 저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에게 패한 그 소식을 듣고 옷을 찢고 슬퍼하고 슬퍼하는, 그래서 그 슬픔을 마침내는 노래 부르는 그 모습을 읽게 됩니다.
원수의 죽음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 아닙니다.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길이 열린 것 같아서 이제 소망을 가져보는 그러한 마음도 아닙니다.
주님께 속한 자는 주님 마음을 가지고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참으로 꾸려갈 수 있음을 우리가 주목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사무엘하 1장의 이 모습은 다윗이 오늘의 내 환경이 불타버린 성읍 같아서 황폐한 곳이라 할지라도, 내 주님께 속하여 주님 모신 그 밝은 마음으로 주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님과 함께 살고 싶은 강한 마음으로 내 주님께 이끌려 가는 자만이, 주님 주시는 그 주님의 슬픔을 노래할 수 있고 내 주님과 함께 주님의 그 어떠함을 노래할 수 있는 줄 압니다.
한때 다윗은 수금을 연주하므로 사울 왕을 괴롭혔던 악귀를 물러가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울 왕의 영혼에 진정한 치유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수금을 타는 다윗을 향해 사울 왕이 단창을 던진 것을 볼 때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내 주님께 속하여 주님 주시는 그 마음을 좇아 슬퍼하며, 참으로 애통해하는 이들의 마음속에는 천국의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보시기에도 감동할 수 있는, 정말 그런 아름다움인 동시에, 우리 하나님께 정말 보암직한 그런 삶을 드림과 동시에, 또 한편 주님이 축복해 주신 말할 수 없는 은혜로 인해서 어둠의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가진 그런 자로,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움을 드릴 수 있는 값진 섬김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줄 압니다.
다섯 번째 : 다윗의 조그만 빈 들판을 생각한다면 사무엘하 2장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선택하는 삶이 좁은 빈 들판 같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온 이스라엘은 이제 다윗이 살아있는 줄 분명히 알고 있고요. 그리고 온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에는 은연중에 다윗이 왕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참으로 많았을 줄 압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께 속하여 그가 선택한 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으심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주님과 함께 살아오므로 영광스런 경험도 많이 있지만, 그가 지금 선택하는 것은 내 주님께 속한 유다! 그곳에서 “주님 어디로 갈까요?” 물어보는 다윗! 어떤 의미에서 “주님! 당신께 속함 속에서 당신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하는 마음이 다윗에게 정말 강하였을 줄 압니다.
사무엘하 1장의 이 마음이나 사무엘하 2장의 이 마음은 참으로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과의 연합을 추구하는! 조그만 빈 들판을 선택하는 진실한 마음이라고 말해야 할 줄 압니다.
세상 아닙니다!
그 점을 선택하는 모습 결단코 아닙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7장의 좁은 문, 좁은 길을 걸어가는 이는 한때 아닙니다. 이 좁은 문, 좁은 길이 한때의 간증이 아닙니다. 새로운 길에서 우리가 거듭거듭 새롭게 행하여야 할 귀중한 일입니다.
이를테면 이스라엘 백성이 아지 못하는 종족과 아지 못하는 나라와 더불어 새롭게 가나안 복지의 전투를 해 갈 때, 그들은 새 마음으로 주님께 속하여 주님을 나의 힘으로, 나의 앞서 싸워주시는 분으로 붙들고 나아간 것 사실입니다만, 전쟁이 다 끝나고 난 이후에도 주님께 속한 바른 길 걷고자 한다면, 여호수아 24장처럼 새롭게 나의 섬길 주님을 오늘! 오늘! 그것도 전심으로 택하여야 되듯이, 우리가 주님을 향한 마음은 정말 그러해야 합니다.
오늘 나의 새로운 진정한 선택이 주님이시란 말이 유다라는 말이요. 그리고 “주님! 어디로 갈까요?”란 말은 주님 따르고 싶은 말입니다.
이때 주님은 동행, 곧 내 주님과 연합 속에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헤브론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줄 압니다.
조그만 빈 들판, 조그만 삶!
어떤 의미에서 좁은 문, 좁은 길!
이곳에 주님과 함께 사는 영광 있습니다.
여섯 번째 : 사무엘하 5장에서 다윗의 조그만 빈 들판이라는 의미를 말씀드려 보려고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장로님들이 나아와서 기름을 부음으로 다윗은 온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의 왕위에 자리 잡는 것은 얼마나 영혼이 안정감 없는 길인지 모릅니다.
다윗은 주님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주님과 함께만은 꼭 붙들고 싶었습니다. 왕은 주님의 뜻을 좇아 섬기는 섬김의 자리라고 한다면, 내 주님 자신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은 강하였습니다.
그것은 좁음의 길입니다.
그것은 주님께 참 마음으로 구하는 자에게 허락해 주시는 조그만 빈 들판입니다.
다윗은 안으로 주님의 이끄심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시온 산성이었습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주님을 향하여 솟아올라 내 주님을 모시고 보좌의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예루살렘의 생활이 주님께서 그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원하시는, 진정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이끄심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이 좁음! 이 좁음!
오늘 우리에게 필요치 않나요?
천국의 예루살렘에 가기에 앞서서 요한계시록 14장의 시온 산에 내 주님과 함께 솟아오른 이들의 마음이 그런 마음 아닐까요?
저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께로부터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런 마음으로 내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자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요!
그렇지 않는다면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란 이 넓음 속에서 그의 인격은 틀림없이 무너지고야 말 줄 압니다. 좁음이어야 합니다. 내 주님만 모신 빈 들판 같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솟아올라 주님만 바라보는 그 마음은 내 주님만 바라보는 조그만 빈 들판 같은 마음인 줄 압니다. 이럴 때 영혼 속에 주님과 함께가 생생하며, 내 영혼이 어렵지 아니하고, 내 영혼이 번거롭지 아니하고, 혼란스럽지 아니하고,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빛 가운데서의 자유와 주님이 통치해 주시는 영광이 함께 하실 줄 압니다.
일곱 번째 : 다윗이 선택한 조그만 빈 들판의 의미로서 열왕기상 1장을 인용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다윗의 몸은 연로하였고 이 땅을 떠날 때가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몸은 차가웠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선택한 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어떠한 것이나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 그의 마음과 몸을 평온케 하고 따뜻하게 하고 싶어하지 아니했습니다.
따스함 있고 평온함 있는 그곳에서 그가 선택한 길은 그 무엇이 없어 보이는 빈 들판으로 나아간 것처럼, 그는 보이지 않는 주님을 나의 사랑으로 나의 의지할 주님으로 선택하는 마음이 강하였습니다. 비록 몸은 움직일 수 없는 그러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혼은 주님을 향하여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가 옥중에 매여 있고 주어진 환경 속에 시달려도 내 주님을 향하여 이런 마음이라면, 주님은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주님을 향하여 솟아오르도록 이끌어 주실 수 있는 줄 압니다.
우리가 열왕기상 1장과 2장에서 읽을 수 있는 다윗이 운명하기 직전까지 그가 말한 내용은 강한 독수리 같은 영혼이지 갈대 같고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영혼은 결단코 아니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선택하는 좁음 속에, 세상의 넓음이 아니라 내 주님만이란 이 좁음 속에, 그리고 주님만을 나의 사랑으로! 주님만을 나의 사랑으로! 내가 의지하며 내가 매달릴 나의 진정한 품 안으로 구할 그때, 주님은 그의 영혼을 독수리처럼 강하게! 강하게! 견고하게! 그의 영혼을 붙들어 주신 것을 열왕기상 1장과 2장에서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
떠나기 두렵지 않은, 그리고 마무리 짓는 일을 결코 어설프게 끝내지 않는 넉넉함 속에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그렇습니다.
사실 다윗의 일생 속에 우리가 분명하게 더듬어 본 바로는 주님께 참으로 속하여 가는, 내 주님만을 붙드는 조그만 빈 들판의 그 어떠함을 붙들어 보는 강한 자세여야만 세상의 보이는 것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오늘도 여러분과 제가 나약하지 아니하고, 주님 보시기에 강하고, 능하게 아름다운 자로 살아가는 것이 능히 가능할 줄 압니다.
오늘 세상의 보이는 것, 세상의 보이는 그 무슨 일들 아닙니다. 다 우리를 피곤케 하고 어렵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만 속함이란, 참으로 주께서 부르신 그 참된 은혜의 길 속에서 내 주님께 사로잡힘이란 이 조그만 빈 들판의 삶을 추구하여 갈 그때,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셨던 복음은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움직일 것이며,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의 영혼 속에 생생한 주님이 되시며, 다윗의 그 아름답고 생생했던 생활처럼 오늘도 여러분의 생활 속에 주님께 영광 돌리는 생활이 능히 가능할 줄 압니다.
다윗의 조그만 빈 들판!
오늘 우리는 깊이 있게 묵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을 향하여 나의 영혼이 주님께만 집착하는 이 좁음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평안도, 진정한 넉넉함도 주님의 은혜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마음 써 선택할 것은 이 세상의 평안함이나 이 세상의 광활함이 아니라, 내 주님께 속한 좁음. 그리고 그곳에서 내 주님과 나의 사귐의 철저함을 구하는 것이 우리의 이 땅의 삶이 오히려 넉넉하고 이기는 삶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생활의 특징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 볼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그는 이김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도 하나님께서 주신 평온함과 안정감이 있는 그러한 삶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둘 다 주님으로만 그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이 가만히 있다 보면 평안하다, 안전하다, 참으로 넉넉하다고 생각되어 보이는 세상에 그대로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들의 영혼에 말할 수 없는 초라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속하고 나의 주님께 돌아가는 그 좁음 속에서는 주님으로 인한 불로 연단한 금, 주님으로 인한 흰옷, 나의 주님으로 인한 기름 부으심의 안약, 그리고 주님과 함께!
이러한 것이 있는 가운데 그들의 삶은 진정한 참된 부요가 있고, 넉넉한 삶이 있는 것을 우리가 주목해 볼 수 있겠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께 집착함 속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라는 그 부요를 그들의 영혼은 느낄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주님께 대하여 보람찬 삶을 살 수 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하시는 주님의 그 축복스러운 명령의 어떠함을 영혼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나의 부요가 안 되고, 내가 주님과 함께 주님의 돕는 이로 신실하게 살 수 있는 이런 삶이 아니라면 신앙은 아닙니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그 무엇입니다.
그러나 내 주님이 주시는 주님과 함께하는 부요, 내 주님이 주시는 은혜 속에서 주님과 함께 삶을 의미 있게 꾸려갈 수 있는 값진 신실함! 그것 있다면 오늘 여러분, 우리는 삶을 곁 돌아봄이 없이, 방황하듯 그 무엇을 추구함이 없이, 우리는 이 길에 온 정성껏 달려가고자 힘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잠시나마 다윗의 삶을 통하여 짤막짤막하게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서 그 다윗의 삶이 어떨 때 참으로 영광스러운가, 그의 진정한 삶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를 더듬어 보고 헤아려 보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조그만 빈 들판이 예수님 모시고 살고자 하는 이에게는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가를 알아갈 수 있을 줄 압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가 내용이 산만하지 않고 참으로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있으면 짤막하게 말씀을 전개하고자 합니다.
혹시 참고적인 성서가 필요할 때는 여러분이 이 성서를 직접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 사무엘상 16장 내용에서 다윗은 얼마 되지 않은 양떼를 먹이는 조그만 빈 들판이라고 할만한 조용한 그곳에서, 주님 모시고 주님과 함께 신실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생활을 분명히 아버지 이새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밀히 보시는 주님은 아시었고, 사무엘 선지자를 라마에서 보내어 베들레헴 이새의 집까지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닌 줄 압니다.
사무엘이 찾아와 일곱째 아들까지 다 아니라고 말하면서 다윗을 왕이 될만한 기름을 부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 그 조그만 빈들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친근히 하며 주님과 더불어 사는 그 생활은 왕이 될만한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왕이 될만한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내 주님 모시고 오늘의 조그만 빈 들판 삶을 착실히 꾸려가는 이는, 주님의 다스림 속에서 내 주님이 나의 왕이 되어주시는 그 영광 속에 자유가 있는 것은 오늘도 분명한 사실인 줄 압니다.
이새가 다윗을 왕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리 없습니다. 다윗의 형들이 다윗을 왕 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이유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과 함께 신실하게 삶을 꾸려가고 있는 다윗. 그 조용한 빈들에서 내 주님 모신 삶을 꾸려가는 다윗을 왕이 될 만하다고 기름 부으셨습니다.
오늘 내 주님 모신 조그만 빈 들판 생활을 행복한 마음으로 강한 마음으로 내 삶을 집중하여 사는 이는, 어떤 어려움과 시련과 그 무엇에 짓눌릴 자가 아니라, 주님으로 인하여 넉넉하게 값진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왕이 될 만하다고 하셨던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여러분과 제가 힘입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이기는 자 되는 것이 가능할 줄 압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 조그만 빈 들판의 의미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무엘상 17장에서 읽을 수 있는 것 역시 빈들에서 내 주님 모시고 밤을 보내고 나아온 저 전선! 주님은 다윗과 함께하시며 영광을 다윗에게 허락하시는 모습을 우리는 주목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 : 사무엘상 22장~26장까지는 다윗이 갓 선지자의 말을 좇아 유다 광야로 나아왔습니다. 유다 땅으로 돌아왔지만 발붙일 곳 없어서 유다의 빈들로 나아왔습니다.
이곳에서 다윗은 낮에도, 밤에도 정말 유다 광야에서 주님 의지하고 주님 바라보며 참으로 좁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해주신 빈 들판이었습니다.
조그만 빈 들판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2장~26장은 이와 같이 참으로 내 주님께 속한 조그만 빈 들판의 삶을 착실히 살아갈 때 우리는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값진 삶을 살 수 있다고요.
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값진 삶을 살 수 있다고요!”
우리가 사무엘상 22장~26장까지 읽을 수 있는 그 다윗의 생활. 참으로 스스로는 자기 몸 가누기도 어렵지만, 주님 안에 숨은 마음으로 주님 의지하고 주님 바라보고 나의 주님 모신 마음으로 시간 시간을 보내 가는 다윗.
내일은 알지 못하고 오늘 이 좁음 속에서 주님과 함께 삶을 근근이 이어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온 유대 땅에 온 이스라엘 중에 이처럼 값진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빈들에 속한 자로! 오직 주님께만 속한 자로! 내 주님만 나의 모든 것으로 붙들 그때만이 우리는 강하고 아름다운 생활이 가능하다고요. 여기에서 벗어나면 우리가 겨우 삶을 꾸려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려움 당한 이를 도울 수 있는 강한 자 되기 어렵고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그리고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생활은 결코 없는 줄 압니다.
그러기에 갓 선지자가 가리킨 그곳이 참으로 어려워 보여도 내 주님 안에 속한 마음과 내 주님만 의지하고 내 주님만 참으로 사귀어가는 이 조그만 빈 들판의 삶을 우리가 갖추어 가므로 오늘도 아름다움과 능함이 있고,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보암직한 삶을 살 수 있는 이 조그만 빈 들판의 의미를 귀중히 생각해야 할 줄 압니다.
세 번째 : 우리가 사무엘상 30장에서 배울 수 있는 나의 주님께 속한 조그만 빈 들판의 삶의 귀중함은 피곤함과 강함의 차이점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주님을 벗어났던 다윗과 그 육백 명의 사람들은 다 피곤할 대로 피곤하였습니다. 슬프고도 슬펐습니다. 주님 벗어난 그곳에 피곤함과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주님께 돌아와서 나의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의 자비로움 속에 순종하고자 할 그때 사무엘상 30장에서 다윗은 온 밤을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은혜 속에서 지내어가고, 이끄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다음 새벽부터 그날 종일 싸우고 이튿날 해 질 무렵까지 정말 치열한 전투를 해가는!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겨우 싸움하는 정도의 일이 아닙니다. 그 강인한 아말렉들과 함께 치열하게 싸우는 싸움을 생각해 보십시요!
새벽에는 아말렉이 잠들어 있다가, 전날에 춤추고 취하여 있다가 다윗의 무리와 싸워서 그들이 잠깐 몰렸다고 하십시다. 그러나 그날 정오 시간도, 그날 오후 시간도, 다음 날도 그 아말렉이 취하여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온 육의 힘을 동원해서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서 내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의 이끄심 속에 나아가고 있는 다윗과 사백 명의 그 다윗의 사람들을 그들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도망간 이들이 다 생생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숫자만 헤아려 봐도 사백 명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결코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내 주님의 은혜 속에서 한밤을 주님께 사로잡힌 바 될 그때에 우리는 피곤하고 슬픈 자가 아니라 강한 자이고, 능한 자이고, 주님의 어떠하심이 우리에게 흘러넘치는 자 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해서 주님 주시는 큰 구원 속에 잃었던 가족들을 다 찾아오는 큰 기쁨을 얻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내 주님께 매임의 좁은 길 속에 우리는 강한 자 될 수 있고요. 나의 주님 주시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고요. 빼앗겼던 우리 가족을 주님께로 이끌어 올 수 있으며, 그리고 주님 주신 은혜로 선물까지 친구들에게 보낼 수 있는 이 큰 기쁨 있는 모습을 우리가 주목하게 됩니다.
주님 벗어난 길!
살 만하다 생각할지 몰라도 종국은 피곤하고 슬픔의 길입니다.
내 주님께 속한 좁음의 길!
어려워 보여도 그 속에 강함이 있고, 신선함이 있고, 주님 주신 큰 기쁨이 있는, 영광이 있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줄 압니다.
조그만 빈 들판.
내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을 앙망하므로 영혼이 새로워지고, 그래서 스가랴 12장 말씀처럼 주님을 가까이하는 가운데 “약한 자가 다윗과 같고 강한 자는 여호와의 사자와 같은” 주님의 붙드시는 능함과 강함 속에 있는 우리였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네 번째 : 사무엘하 1장입니다.
우리는 사무엘하 1장에서 극도로 어려운 여건을 보내고 있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의 삶을 찾아볼 수 있음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는 정말 찾아보기 어려운,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슬픔을 띤 아름다운 노래를 우리가 들을 수 있습니다.
내 주님께 속한 자만이, 나의 주님께 이끌리는 자만이, 내 주님의 사랑 가운데 다스림 받는 자만이, 오늘 불타버린 성읍이란 이 빈 들판 같은 여건을 불평하지 아니하고 함께 계신 주님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나 스스로 온 힘 기울여서 지쳐버리지 아니하고 내 주님 보시기에 합한 자로서 삶을 꾸려가는 이 진정함이 있을 그때, 우리는 다윗과 다윗의 용사들이 들려오는 소문을 듣고 옷을 찢고 슬퍼하는 그 모습을 읽게 됩니다.
사울 왕과 요나단과 이스라엘 군사들이 저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에게 패한 그 소식을 듣고 옷을 찢고 슬퍼하고 슬퍼하는, 그래서 그 슬픔을 마침내는 노래 부르는 그 모습을 읽게 됩니다.
원수의 죽음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 아닙니다.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길이 열린 것 같아서 이제 소망을 가져보는 그러한 마음도 아닙니다.
주님께 속한 자는 주님 마음을 가지고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참으로 꾸려갈 수 있음을 우리가 주목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사무엘하 1장의 이 모습은 다윗이 오늘의 내 환경이 불타버린 성읍 같아서 황폐한 곳이라 할지라도, 내 주님께 속하여 주님 모신 그 밝은 마음으로 주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님과 함께 살고 싶은 강한 마음으로 내 주님께 이끌려 가는 자만이, 주님 주시는 그 주님의 슬픔을 노래할 수 있고 내 주님과 함께 주님의 그 어떠함을 노래할 수 있는 줄 압니다.
한때 다윗은 수금을 연주하므로 사울 왕을 괴롭혔던 악귀를 물러가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울 왕의 영혼에 진정한 치유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수금을 타는 다윗을 향해 사울 왕이 단창을 던진 것을 볼 때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내 주님께 속하여 주님 주시는 그 마음을 좇아 슬퍼하며, 참으로 애통해하는 이들의 마음속에는 천국의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보시기에도 감동할 수 있는, 정말 그런 아름다움인 동시에, 우리 하나님께 정말 보암직한 그런 삶을 드림과 동시에, 또 한편 주님이 축복해 주신 말할 수 없는 은혜로 인해서 어둠의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가진 그런 자로,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움을 드릴 수 있는 값진 섬김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줄 압니다.
다섯 번째 : 다윗의 조그만 빈 들판을 생각한다면 사무엘하 2장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선택하는 삶이 좁은 빈 들판 같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온 이스라엘은 이제 다윗이 살아있는 줄 분명히 알고 있고요. 그리고 온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에는 은연중에 다윗이 왕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참으로 많았을 줄 압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께 속하여 그가 선택한 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으심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주님과 함께 살아오므로 영광스런 경험도 많이 있지만, 그가 지금 선택하는 것은 내 주님께 속한 유다! 그곳에서 “주님 어디로 갈까요?” 물어보는 다윗! 어떤 의미에서 “주님! 당신께 속함 속에서 당신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하는 마음이 다윗에게 정말 강하였을 줄 압니다.
사무엘하 1장의 이 마음이나 사무엘하 2장의 이 마음은 참으로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과의 연합을 추구하는! 조그만 빈 들판을 선택하는 진실한 마음이라고 말해야 할 줄 압니다.
세상 아닙니다!
그 점을 선택하는 모습 결단코 아닙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7장의 좁은 문, 좁은 길을 걸어가는 이는 한때 아닙니다. 이 좁은 문, 좁은 길이 한때의 간증이 아닙니다. 새로운 길에서 우리가 거듭거듭 새롭게 행하여야 할 귀중한 일입니다.
이를테면 이스라엘 백성이 아지 못하는 종족과 아지 못하는 나라와 더불어 새롭게 가나안 복지의 전투를 해 갈 때, 그들은 새 마음으로 주님께 속하여 주님을 나의 힘으로, 나의 앞서 싸워주시는 분으로 붙들고 나아간 것 사실입니다만, 전쟁이 다 끝나고 난 이후에도 주님께 속한 바른 길 걷고자 한다면, 여호수아 24장처럼 새롭게 나의 섬길 주님을 오늘! 오늘! 그것도 전심으로 택하여야 되듯이, 우리가 주님을 향한 마음은 정말 그러해야 합니다.
오늘 나의 새로운 진정한 선택이 주님이시란 말이 유다라는 말이요. 그리고 “주님! 어디로 갈까요?”란 말은 주님 따르고 싶은 말입니다.
이때 주님은 동행, 곧 내 주님과 연합 속에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헤브론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줄 압니다.
조그만 빈 들판, 조그만 삶!
어떤 의미에서 좁은 문, 좁은 길!
이곳에 주님과 함께 사는 영광 있습니다.
여섯 번째 : 사무엘하 5장에서 다윗의 조그만 빈 들판이라는 의미를 말씀드려 보려고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장로님들이 나아와서 기름을 부음으로 다윗은 온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의 왕위에 자리 잡는 것은 얼마나 영혼이 안정감 없는 길인지 모릅니다.
다윗은 주님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주님과 함께만은 꼭 붙들고 싶었습니다. 왕은 주님의 뜻을 좇아 섬기는 섬김의 자리라고 한다면, 내 주님 자신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은 강하였습니다.
그것은 좁음의 길입니다.
그것은 주님께 참 마음으로 구하는 자에게 허락해 주시는 조그만 빈 들판입니다.
다윗은 안으로 주님의 이끄심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시온 산성이었습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주님을 향하여 솟아올라 내 주님을 모시고 보좌의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예루살렘의 생활이 주님께서 그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원하시는, 진정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이끄심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이 좁음! 이 좁음!
오늘 우리에게 필요치 않나요?
천국의 예루살렘에 가기에 앞서서 요한계시록 14장의 시온 산에 내 주님과 함께 솟아오른 이들의 마음이 그런 마음 아닐까요?
저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께로부터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런 마음으로 내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자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요!
그렇지 않는다면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란 이 넓음 속에서 그의 인격은 틀림없이 무너지고야 말 줄 압니다. 좁음이어야 합니다. 내 주님만 모신 빈 들판 같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솟아올라 주님만 바라보는 그 마음은 내 주님만 바라보는 조그만 빈 들판 같은 마음인 줄 압니다. 이럴 때 영혼 속에 주님과 함께가 생생하며, 내 영혼이 어렵지 아니하고, 내 영혼이 번거롭지 아니하고, 혼란스럽지 아니하고,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빛 가운데서의 자유와 주님이 통치해 주시는 영광이 함께 하실 줄 압니다.
일곱 번째 : 다윗이 선택한 조그만 빈 들판의 의미로서 열왕기상 1장을 인용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다윗의 몸은 연로하였고 이 땅을 떠날 때가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몸은 차가웠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선택한 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어떠한 것이나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 그의 마음과 몸을 평온케 하고 따뜻하게 하고 싶어하지 아니했습니다.
따스함 있고 평온함 있는 그곳에서 그가 선택한 길은 그 무엇이 없어 보이는 빈 들판으로 나아간 것처럼, 그는 보이지 않는 주님을 나의 사랑으로 나의 의지할 주님으로 선택하는 마음이 강하였습니다. 비록 몸은 움직일 수 없는 그러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혼은 주님을 향하여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가 옥중에 매여 있고 주어진 환경 속에 시달려도 내 주님을 향하여 이런 마음이라면, 주님은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주님을 향하여 솟아오르도록 이끌어 주실 수 있는 줄 압니다.
우리가 열왕기상 1장과 2장에서 읽을 수 있는 다윗이 운명하기 직전까지 그가 말한 내용은 강한 독수리 같은 영혼이지 갈대 같고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영혼은 결단코 아니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선택하는 좁음 속에, 세상의 넓음이 아니라 내 주님만이란 이 좁음 속에, 그리고 주님만을 나의 사랑으로! 주님만을 나의 사랑으로! 내가 의지하며 내가 매달릴 나의 진정한 품 안으로 구할 그때, 주님은 그의 영혼을 독수리처럼 강하게! 강하게! 견고하게! 그의 영혼을 붙들어 주신 것을 열왕기상 1장과 2장에서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
떠나기 두렵지 않은, 그리고 마무리 짓는 일을 결코 어설프게 끝내지 않는 넉넉함 속에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그렇습니다.
사실 다윗의 일생 속에 우리가 분명하게 더듬어 본 바로는 주님께 참으로 속하여 가는, 내 주님만을 붙드는 조그만 빈 들판의 그 어떠함을 붙들어 보는 강한 자세여야만 세상의 보이는 것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오늘도 여러분과 제가 나약하지 아니하고, 주님 보시기에 강하고, 능하게 아름다운 자로 살아가는 것이 능히 가능할 줄 압니다.
오늘 세상의 보이는 것, 세상의 보이는 그 무슨 일들 아닙니다. 다 우리를 피곤케 하고 어렵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만 속함이란, 참으로 주께서 부르신 그 참된 은혜의 길 속에서 내 주님께 사로잡힘이란 이 조그만 빈 들판의 삶을 추구하여 갈 그때,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셨던 복음은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움직일 것이며,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의 영혼 속에 생생한 주님이 되시며, 다윗의 그 아름답고 생생했던 생활처럼 오늘도 여러분의 생활 속에 주님께 영광 돌리는 생활이 능히 가능할 줄 압니다.
다윗의 조그만 빈 들판!
오늘 우리는 깊이 있게 묵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넉넉한 나의 빈 들판
김 아 가 권사님
모두가 돌아간 홀로 서 있는 빈 들판.
내 주님 나의 집, 새롭게 입을 나의 옷,
나의 양식 되시오니 넉넉합니다.
이 땅 전투하는 곳
승리의 터 부활하신 내 주님 안
믿음으로 굳게 서서
그 옛 선진들의 익히신
젖 먹는 어린양 번제 드리고
하나님께 부르짖던,
하루 세 번씩 무릎 꿇던 그 병법
오늘 우리도 배워 익혔으니
이 땅의 남은 전투!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많은 이들 우리에게 다가올 일들로
참된 안식 잃어갈 때에
광야의 하늘 바람 우리 안에 있으니
그 언젠가 그 바람 회리바람 되어
내 사랑! 내 님께로 올리울 날 있으리니
빈들에 선 마음 넉넉합니다.
이제 곧 다가올 8월 성회!
내 주님의 보좌로부터
보이지 않는 생명수 강 넘쳐흘러
저 먼 아프리카, 남미, 북미, 열방 곳곳에
새로운 어장터 서고
영혼들 소생하여 헤엄쳐
하늘 내 아버지 집에
가득 채워질 믿음 있으며
기도로 하늘 문 열어
그 생명수 강에 하늘 길 예비하여지리니
우리의 빈들이 이렇게 넉넉합니다.
오! 주님!
끝까지 이 빈들에 선 하늘 사람으로 이끄소서!
아멘! 아멘!!
내 주님 나의 집, 새롭게 입을 나의 옷,
나의 양식 되시오니 넉넉합니다.
이 땅 전투하는 곳
승리의 터 부활하신 내 주님 안
믿음으로 굳게 서서
그 옛 선진들의 익히신
젖 먹는 어린양 번제 드리고
하나님께 부르짖던,
하루 세 번씩 무릎 꿇던 그 병법
오늘 우리도 배워 익혔으니
이 땅의 남은 전투!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많은 이들 우리에게 다가올 일들로
참된 안식 잃어갈 때에
광야의 하늘 바람 우리 안에 있으니
그 언젠가 그 바람 회리바람 되어
내 사랑! 내 님께로 올리울 날 있으리니
빈들에 선 마음 넉넉합니다.
이제 곧 다가올 8월 성회!
내 주님의 보좌로부터
보이지 않는 생명수 강 넘쳐흘러
저 먼 아프리카, 남미, 북미, 열방 곳곳에
새로운 어장터 서고
영혼들 소생하여 헤엄쳐
하늘 내 아버지 집에
가득 채워질 믿음 있으며
기도로 하늘 문 열어
그 생명수 강에 하늘 길 예비하여지리니
우리의 빈들이 이렇게 넉넉합니다.
오! 주님!
끝까지 이 빈들에 선 하늘 사람으로 이끄소서!
아멘! 아멘!!
산 위 동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5장에서 자기 백성을 심으신 곳이 산 위임을 가리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사야 5장에서 주목해 볼 수 있는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신 곳은 분명히 산 위였습니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이사야 5장 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참 좋은 포도원은 산 위에 있는 포도원이었습니다. 극상품 포도나무일 뿐만 아니라 산 위에 만든 포도원이었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5장의 “산 위에 있는 동네”란 말씀에서도 이 소중한 의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 자신에게 속하여 아름다운 열매 맺는 나무 못됨을 우리 스스로 알았다면, 이젠 나를 부인하고 나를 거절하고 죽음에 넘겨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 사시고 참되신 나의 주님께 속하는 이 놀라운 은총을 우리가 얻고자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속함이란 이 놀라운 영토를 설명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곳은 산 위였습니다.
이사야 28장 16절에도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온! 그것은 봉우리입니다. 평지가 아닙니다! 내 주님을 향하여 솟아오른 그 봉우리 위에, 우리가 신뢰하며 딛고 설 수 있는 “한 돌을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에 그리스도 자신께 신앙의 참된 근거를 두는 사람이라 하면서도 이 세상이 많이 보이고 또 자신의 어떠함이 많이 보인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참 마음으로 주님께 향하여 다가선 마음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우리의 참된 마음이 자기를 벗을 수 없고, 이 번거롭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벗어날 때 우리는 자유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참된 마음으로 나의 진정한 삶을 구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어 놓으신 곳은 분명히 기름진 산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28장 16절의 ‘시온’이란 산이었습니다.
부활의 영토에서 우리 예수님이 서신 그곳!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20장에 예루살렘에서 만나주신 적 있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진정으로 그의 삶을 사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진정한 삶을 주시고자 하신 마음으로 자신을 허락해 주신 것은 우리가 아는 마태복음 28장의 갈릴리의 산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갈릴리는 우리 예수님께서 삶을 사셨던 곳이었습니다. 삼십 세까지 삶을 가지셨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산 위였습니다.
내 주님을 모신 산 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정 만나고 함께 모신 삶을 가지는 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모신 삶을 가지는 것은 갈릴리의 산인 것처럼, 내 주님과 더불어 산 위에 있는 동네!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을 붙들어서 정말 기쁘며, 행복하며, 그리고 우리 위에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은혜가 분명히 함께하실 줄 압니다.
세상으로 본다면 세상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좁음의 곳이 산 위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세상에서 저 멀리 떨어진 좁음으로 간 빈 들판!
그곳이 산 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하며 그때 우리는 마태복음 5장의 “복 있는 자”라는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와 닿을 수 있으며, 우리는 주님을 모신 그런 아름다운 극상품 포도나무와 같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마태복음 6장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 되어주시는, 우리 하나님 되어주시는 그 놀라운 은총이 우리 위에 생생할 줄 압니다.
세상으로 볼 때는 땅끝이 산 위입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하며, 그곳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로움을 힘입는! 이런 마음가짐이 오늘 여러분이 사시는 아파트나, 여러분이 근무하시는 심히 복잡한 일과에서도 우리 영혼만은 이러한 것을 유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 가지 더 마태복음 7장에서 이러한 길에 서 있을 때 극상품 포도나무이신 주께 속한 우리를 ‘가시와 찔레’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극상품 포도나무입니다.
나의 주님께 이렇게 속한 우리가 ‘바둑이나 꿀꿀이’로 비유되지는 않습니다. ‘거룩과 진주’라는 말씀으로 우리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줄 압니다.
이와 같은 견고하고 아름다운 삶 속에 서서 내 하나님의 은혜와 뜻을 구하여 갈 그때에 여러분에게는 가시와 찔레나 바둑이나 꿀꿀이 같은 소욕이 우리 인격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빛 되심과 사랑하심이 우리 삶을 주관해 주시는, 그래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살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행하는,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열매 맺는 생활이 가능할 줄 압니다.
내 영혼이 여기에서 벗어난다면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이사야 5장 8절)라는 말씀처럼, 가지고자 하는 욕심과 영혼이 채워지지 않는 마음 때문에 포학과 부르짖음 밖에 없다고 말해야 할 줄 압니다.
산 위에서 내 주님을 향하여 이런 인격 속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이사야 66장의 이런 자로 서서 오늘도 무너져가는 세상을 향하여 우리 주님 애통해 하시는 그 마음을 좇아 중보기도 하며, 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간구하여 가는, 또 한편 이사야 62장 말씀처럼 이러한 내 주님과의 가까운 영역에 서서 우리 주님,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가 뜻하시는 아름다운 성도의 삶을 세워주시기를,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몸들을 세워주시기를 오늘도 간구해 보는 진실한 기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삶에 서갈 때 이사야 59장에 사람 없음을 탄식하셨던 주님께서 여러분을 그가 찾으시고자 하신 진정한 사람이라고 기뻐하실 줄 압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그것은 이 세상으로 본다면 정말 좁음 속에서 솟아오른 조그만 빈 들판입니다. 주님 함께 계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그리고 내 하나님의 빛과 사랑 가운데 우리 하나님의 뜻을 얻을 수 있는, 이 조그만 빈 들판의 의미를 우리가 놓치지 않았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이사야 5장 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참 좋은 포도원은 산 위에 있는 포도원이었습니다. 극상품 포도나무일 뿐만 아니라 산 위에 만든 포도원이었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5장의 “산 위에 있는 동네”란 말씀에서도 이 소중한 의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 자신에게 속하여 아름다운 열매 맺는 나무 못됨을 우리 스스로 알았다면, 이젠 나를 부인하고 나를 거절하고 죽음에 넘겨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 사시고 참되신 나의 주님께 속하는 이 놀라운 은총을 우리가 얻고자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속함이란 이 놀라운 영토를 설명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곳은 산 위였습니다.
이사야 28장 16절에도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온! 그것은 봉우리입니다. 평지가 아닙니다! 내 주님을 향하여 솟아오른 그 봉우리 위에, 우리가 신뢰하며 딛고 설 수 있는 “한 돌을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에 그리스도 자신께 신앙의 참된 근거를 두는 사람이라 하면서도 이 세상이 많이 보이고 또 자신의 어떠함이 많이 보인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참 마음으로 주님께 향하여 다가선 마음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우리의 참된 마음이 자기를 벗을 수 없고, 이 번거롭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벗어날 때 우리는 자유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참된 마음으로 나의 진정한 삶을 구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어 놓으신 곳은 분명히 기름진 산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28장 16절의 ‘시온’이란 산이었습니다.
부활의 영토에서 우리 예수님이 서신 그곳!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20장에 예루살렘에서 만나주신 적 있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진정으로 그의 삶을 사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진정한 삶을 주시고자 하신 마음으로 자신을 허락해 주신 것은 우리가 아는 마태복음 28장의 갈릴리의 산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갈릴리는 우리 예수님께서 삶을 사셨던 곳이었습니다. 삼십 세까지 삶을 가지셨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산 위였습니다.
내 주님을 모신 산 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정 만나고 함께 모신 삶을 가지는 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모신 삶을 가지는 것은 갈릴리의 산인 것처럼, 내 주님과 더불어 산 위에 있는 동네!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을 붙들어서 정말 기쁘며, 행복하며, 그리고 우리 위에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은혜가 분명히 함께하실 줄 압니다.
세상으로 본다면 세상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좁음의 곳이 산 위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세상에서 저 멀리 떨어진 좁음으로 간 빈 들판!
그곳이 산 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하며 그때 우리는 마태복음 5장의 “복 있는 자”라는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와 닿을 수 있으며, 우리는 주님을 모신 그런 아름다운 극상품 포도나무와 같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마태복음 6장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 되어주시는, 우리 하나님 되어주시는 그 놀라운 은총이 우리 위에 생생할 줄 압니다.
세상으로 볼 때는 땅끝이 산 위입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하며, 그곳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로움을 힘입는! 이런 마음가짐이 오늘 여러분이 사시는 아파트나, 여러분이 근무하시는 심히 복잡한 일과에서도 우리 영혼만은 이러한 것을 유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 가지 더 마태복음 7장에서 이러한 길에 서 있을 때 극상품 포도나무이신 주께 속한 우리를 ‘가시와 찔레’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극상품 포도나무입니다.
나의 주님께 이렇게 속한 우리가 ‘바둑이나 꿀꿀이’로 비유되지는 않습니다. ‘거룩과 진주’라는 말씀으로 우리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줄 압니다.
이와 같은 견고하고 아름다운 삶 속에 서서 내 하나님의 은혜와 뜻을 구하여 갈 그때에 여러분에게는 가시와 찔레나 바둑이나 꿀꿀이 같은 소욕이 우리 인격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빛 되심과 사랑하심이 우리 삶을 주관해 주시는, 그래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살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행하는,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열매 맺는 생활이 가능할 줄 압니다.
내 영혼이 여기에서 벗어난다면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이사야 5장 8절)라는 말씀처럼, 가지고자 하는 욕심과 영혼이 채워지지 않는 마음 때문에 포학과 부르짖음 밖에 없다고 말해야 할 줄 압니다.
산 위에서 내 주님을 향하여 이런 인격 속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이사야 66장의 이런 자로 서서 오늘도 무너져가는 세상을 향하여 우리 주님 애통해 하시는 그 마음을 좇아 중보기도 하며, 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간구하여 가는, 또 한편 이사야 62장 말씀처럼 이러한 내 주님과의 가까운 영역에 서서 우리 주님,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가 뜻하시는 아름다운 성도의 삶을 세워주시기를,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몸들을 세워주시기를 오늘도 간구해 보는 진실한 기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삶에 서갈 때 이사야 59장에 사람 없음을 탄식하셨던 주님께서 여러분을 그가 찾으시고자 하신 진정한 사람이라고 기뻐하실 줄 압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그것은 이 세상으로 본다면 정말 좁음 속에서 솟아오른 조그만 빈 들판입니다. 주님 함께 계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그리고 내 하나님의 빛과 사랑 가운데 우리 하나님의 뜻을 얻을 수 있는, 이 조그만 빈 들판의 의미를 우리가 놓치지 않았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이지만
김 창 조 형제님
사랑 많으신 주님께서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에게조차도 주님의 긍휼을 기대할 때 주님의 긍휼을 베푸시고 사랑의 손길을 베푸셨음을 성경 말씀 창세기 앞부분에서 읽어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나중 삶이 주님을 찾고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인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나 산 사람들로부터 너무나도 마음에 큰 아픔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한 사람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이 세상에서 데려가 천국에서 그분 자신과 같이 살도록 하시기까지 하는 것 같습니다.(창 5:24)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못된 나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생각해 볼 때 주님의 마음만은 아프시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저에게 애매모호하지 않고 뚜렷이 나타내어 주시는데, 유일한 나의 구주와 나의 주님 되시는 예수님은 주님 자신을 뚜렷이 나타내어 주시는데, 이 못된 자아는 나의 앞을 얼마나 흐리게 하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쉬운지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양들을 사랑하시는데, 양들이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고 주님을 따르지 않을 때 주님 마음은 정말 많이 아프셨을 것 같습니다.(요한복음 10장)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 음성에 귀 기울여 주님을 따르고, 주님과의 사귐을 놓치지 않으므로, 주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의 주님 예수님을 사랑하며 주님과 동행하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지극히 작은 자이지만 주님의 위로 되는 자로, 주님만 드러내는 삶을 잘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한 사람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이 세상에서 데려가 천국에서 그분 자신과 같이 살도록 하시기까지 하는 것 같습니다.(창 5:24)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못된 나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생각해 볼 때 주님의 마음만은 아프시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저에게 애매모호하지 않고 뚜렷이 나타내어 주시는데, 유일한 나의 구주와 나의 주님 되시는 예수님은 주님 자신을 뚜렷이 나타내어 주시는데, 이 못된 자아는 나의 앞을 얼마나 흐리게 하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쉬운지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양들을 사랑하시는데, 양들이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고 주님을 따르지 않을 때 주님 마음은 정말 많이 아프셨을 것 같습니다.(요한복음 10장)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 음성에 귀 기울여 주님을 따르고, 주님과의 사귐을 놓치지 않으므로, 주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의 주님 예수님을 사랑하며 주님과 동행하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지극히 작은 자이지만 주님의 위로 되는 자로, 주님만 드러내는 삶을 잘 살고 싶습니다.
다음 길의 준비
박 원 철 목사님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주님의 축복스러운 사역에 제자들의 마음이 머물러 있음으로 생기 있기보다는 도리어 둔해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오병이어의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였더라도 발을 씻듯이 주님 한분 모신 단순한 마음으로 배를 탔더라면, 이후에 만나는 환경의 풍랑도 결코 그들의 정함 있는 믿음을 흔들 수 없고 주님의 평강으로 다스려 가는 기회가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손길은 정말 놀랍고 감격스러운 것이지만, 그 모두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고 속히 피난처 되시는 내 주님께 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해야만 우리의 마음이 쉽게 무디어지거나 부패하지 않고 생생한 다음 길을 준비하게 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온 종일 섬기시고서도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나 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 조용히 엎드리신 주님을 생각해 보면 해답은 분명해집니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기에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루의 빈 들판 시간은 다음 길의 준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이 땅에서 맛보는 행복한 천국입니다.
오병이어의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였더라도 발을 씻듯이 주님 한분 모신 단순한 마음으로 배를 탔더라면, 이후에 만나는 환경의 풍랑도 결코 그들의 정함 있는 믿음을 흔들 수 없고 주님의 평강으로 다스려 가는 기회가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손길은 정말 놀랍고 감격스러운 것이지만, 그 모두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고 속히 피난처 되시는 내 주님께 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해야만 우리의 마음이 쉽게 무디어지거나 부패하지 않고 생생한 다음 길을 준비하게 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온 종일 섬기시고서도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나 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 조용히 엎드리신 주님을 생각해 보면 해답은 분명해집니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기에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루의 빈 들판 시간은 다음 길의 준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이 땅에서 맛보는 행복한 천국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소중한 내용들
요한계시록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소중한 내용들 많이 있겠지만, 그중에 몇 가지 중요한 것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삶을 이러한 것에 가까이 집중해가는, 오늘 하나님 보시기에 참된 해답을 가지고 사는 길에 우리 모두 섰으면 하는 마음으로 몇 가지만 헤아려 보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 요한계시록 11장 말씀에서 우리 하나님께서 갈대 같은 지팡이로 척량하시는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이란 이 의미를 우리가 놓치지 않는다면, 오늘도 우리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헤아릴 것이 없는 그런 초라한 삶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 앞에 남음이 있고 참으로 기억될 것이 있는 값진 생활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
이곳에 참예하지 못하고 성전 뜰만 밟는다면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계수하지 않으신 것을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의 의미를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길로써의 제단.
그리고 그곳에 참예하므로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하는 그러한 것이 내 생활이 된 사람.
참된 성전은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그리스도 자신이 유일한 참된 성전입니다. 그리고 이 사시고 참된 생명력 흐르는 성전에 참예하는 유일한 제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음을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너무 명료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제단은 나의 지나간 허물과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고, 능히 씻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못된 성품, 그릇된 성품, 우리 하나님을 반역하는 참으로 조화되지 않는 그러한 것을 처치해 줄 수 있는 제단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철저한 씻음도 필요하고, 내 하나님 보시기에 조화되지 못한 참으로 그러한 육체의 정과 욕심과 그 모든 것을 처치해 주시는 것도 정말 필요합니다.
이 문제를 처리해 주셔야 우리는 참된 성전에 속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울어도 못할 것입니다.
힘써도 아니 될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한들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 놓으신 그의 제단은 이 점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으로 씻어주심. 능히 가능합니다. 남김없이 씻어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소멸하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 앞에 적합하지 않은, 참으로 그러한 우리의 그릇된 모든 것은 소멸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전된 주님께 속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에스겔 47장처럼 솟아나는 주의 생명을 좇아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들!
그것은 두고두고 하나님 앞에 계수될 수 있는, 의미가 있는 그러한 우리임을 기억해 봅니다.
두 번째 :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어린양의 피.”
그리고 “자기의 증거하는 말.”
그리고 “큰 독수리의 두 날개.”
그리고 “광야 자기 곳.”
이 짤막한 말씀들은 스쳐 지나가는 내용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에서 이기는 자로서 내 주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어린양의 피!”
그것은 언제나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확신 있게 설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처음도 그러하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어린양의 피!”
그리고 “자기의 증거하는 말”로 인하여 대적하는 자 마귀를 이겼다고 말씀합니다만, 이 말씀은 결코 우리 스스로의 지혜나 우리 스스로의 그 무엇은 결단코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자 한다면, 요한복음 8장이나 요한복음 15장 말씀처럼 그 주님의 말씀이 내 속에 거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주님께 속한 자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에 속한 자여야 살아계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참 포도나무 안에 포도나무의 진액과 포도나무의 그 무엇이 있듯이, 우리가 주님께 속할 때 주님의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 삶의 확실한 보증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오늘 여러분과 제가 이 어두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유일한 등불입니다.
어두움이 우리를 어떤 방법으로 혼란스럽게 할지라도 예수님 안에서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말씀으로! 붙든 이 삶은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오늘도 참으로 대적하는 자를 이길 수 있는, 빛 가운데 어둠을 이길 수 있는 이 놀라운 삶을 가능케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2장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큰 독수리 두 날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누구에게 입니까? 그것은 시편 103편, 이사야 40장, 신명기 32장 말씀처럼 내 주님을 끊임없이 앙망하는, 나의 주님으로 바라볼 때입니다. 주님을 앙망할 때만이 새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얻듯이 영혼이 어느덧 솟아오를 수 있고, 능가할 수 있는 그런 은혜가 있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조그만 일, 복잡한 일 그리고 혼란스러운 일 가운데서라도 날 사랑하시며 나의 주님으로 서 주시는 주님을 언제나 앙망할 수 있는 것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침내 이 땅에서 자리 잡게 되는 것은 광야입니다.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라고 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내가 자리 잡을 곳으로 알지 아니하고 내 주님 의지하고 주님과 함께 지나가는 광야로 압니다.
저 빈들의 엘리야처럼, 저 빈들의 세례 요한처럼, 정처 없이 광야의 어려움 속에 끊임없이 길 갔던 사도 바울 선생님이나 사도 요한처럼, 이 세상을 광야로 알고 내 주님을 모신 마음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만이, 여러분과 제가 세상을 능가하며 이기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 줄 압니다.
세 번째 : 요한계시록 13장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 볼 수 있는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그리고 “성도의 인내와 믿음”이란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세상의 주관자가 괴롭히는 것을 이곳에서는 짐승이 괴롭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공산 치하에서 어려움을 당하셨던 성도님들의 생활이나 또 일제시대 때 주님께 속한 정결한 마음으로 살던 성도님들이 당하신 그 어려움을 본다면, 그것은 정말 이러한 것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얼마든지 이러한 어려움 속에 직면할 수 있음을 주목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주목할 것은 여러분과 제가 그 짐승을 향해서 짐승처럼 싸운다면 우리 예수님 들려주신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라는 말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생활은 결코 그러한 삶이 아닙니다.
마치 양이 목자를 모시고 목자의 다스림 받는 목자의 이름 속에 살듯이, 우리가 주님의 영역 속에서 주님의 다스림 받는 그의 이름 속에 살아간 우리로 볼 때는 “믿음과 인내”라는 말씀은 아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곳에 믿음이란 말씀의 의미는 내가 나의 주가 되시고 내 목자 되시는 주님을 향하는 신뢰하는 마음인 동시에, 그분이 나의 삶을 주관하시며 이끌어 주셔서 허락해 주신 마음이 포함된 말씀인 줄 압니다.
이 세상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목자이신 나의 주가 되신 주님을 모신 마음으로 그리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그의 이름 속에 있는 우리로 알고 살아가야 할 것이며, 그래서 그분을 믿는 믿음의 마음과 그분의 허락하여 주신 마음이란 이 영토를 벗어나서는 아니 될 줄 압니다.
이곳에 벗어나면 우리는 짐승에게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벗어나면 우리 영혼은 참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이 길에 서서 주님을 향한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성실하게 길 간다면 여러분과 저의 영혼은 하늘에 속한 자로!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가기가 결코 어렵지 아니할 줄 압니다.
이곳에서 우리가 할 일은 한 가지뿐입니다.
인내입니다. 인내입니다!
주님과 나의 올바른 관계 속에 이러한 길에 서가므로 언제나 주님의 그 붙드시는 은혜 속에서 주님의 그 돌보시는 사랑 가운데서 여러분의 삶이 이어지기를 원합니다.
네 번째 : 요한계시록 14장 12~13절에서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귀중성을 참된 성도의 삶의 귀중성으로 알아본다면 참 도움될 것 같습니다. 이곳에 기록된 것은 아주 단순한 세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살아있는 관계를 갖지 못한다면 수많은 복잡한 것을 가지고 살아도 신앙생활다운 생활은 못될 것 같습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는 이 축복된 말씀처럼, 우리가 이 땅 떠나갈 때는 그 날 영광 속에서 주님 주시는 안식에 동참할 것인데,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나의 주님을 향하여 이런 참된 마음속에 서가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조금 전에 인용한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볼 수 있던 “인내와 믿음”이 있습니다. 주님 주시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하나님의 계명”이 있습니다. 오늘 이 땅에 살면서 나의 주님께 속하여 주님 주시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며 살아가고, 그리고 내 주님을 모시고 언제나 참으로 주님이 이끄시는 그 길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알아차리며 살아가고, 그리고 어떤 일과 생활 속에서도 내 주님 바라보고 인내하며 사는 삶을 가집니다. 이것은 살아계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는 관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단순한지요!
양의 단순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 속한 포도나무 가지의 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믿음만 있고 주님의 살아계심이 없을까요? 주님의 살아계심이 있는 자가 여기에 “예수 믿음”이란 주님이 주시는 믿음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이신 주님 안에서 농부이신 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명령을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은 일에는 얼마든지 주님 생각하며, 하나님 생각하며 우리는 참을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길!
이 길 속에서 여러분이 그날 주 앞에서 안식을 갖고 기뻐할 수 있는 오늘의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것 있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 : 요한 계시록 19장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란 말씀과 “하나님의 종”이란 말씀과 “어린양의 아내”란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조그만 일, 조그만 것에서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양하라”는 말씀과 어린 양의 아내의 입은 옷이 아주 가는 세마포였음을 상기해 보면서, 오늘 내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과 함께 연합함으로 주님께 속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 된 그 자세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고 생각할 그 무엇을 되새겨 보았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햇빛 주시고 비를 주신다”고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 마음으로 나의 주님께 돌아와 내 주님과 함께 연합함으로 우리 주님의 돕는 이로서, 우리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셨듯이 주님의 돕는 이로, 주님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이 마음 없을 것 같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려워진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그 은혜에 대해서 찬양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마실까?”“어디서 살까?”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말씀에서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것 입을 것 정착할 곳은 하나님께서 생각해 주신 것 명료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모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간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간다면, 이 세상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가지고 삶을 꾸려가도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가지만, 우리는 오늘 조그만 만나를 거두어도 어제 입던 낡지 않은 그 옷을 오늘 입고 있어도, 오늘 우리가 자리 잡아 사는 곳이 초라한 광야의 삶이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 가득한 마음이 있는 줄 압니다.
사사기에서 기드온과 삼손이 하나님을 힘입어 큰일 했습니다. 기드온은 그 엄청난 큰일에 대해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것 같습니다.
다윗도 수많은 전쟁 속에서 이기고 그 하나님을 향하여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 틀림없이 있었을 줄 압니다.
아합도 열왕기상 20장에서 아람 왕 벤하닷이 자기와 비교할 수 없는 서른두 왕을 거느리고 와서 싸우고자 했던 그 엄청난 전투를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겼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틀림없이 있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의 조그마한 생활!
오늘의 조그마한 나의 생활 속에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내 마음이 참으로 자유롭지 못한 그런 욕망 가운데 살아간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은 아닌 줄 압니다.
사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큰일보다는 조그마한 일들이 많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러한 가운데서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는 말씀처럼,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예수님께 속하여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만이!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만이!할 수 있는 마음인 줄 압니다.
우리는 골로새서 2장 말씀처럼 주님께 연합해서 주님 안에 설 수 있고, 주님 안에 견고할 수 있고, 주님 안에 다스림 받을 수 있어서, 벌써 감사가 넘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육신 속에 있어서는 안 되는 자신을 여러분과 제가 압니다.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함을,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제대로 되지 못함을 분명하게 압니다.
거기는 만족 없습니다.
거기는 진정한 자유 없습니다.
거기는 진정한 평화 없습니다.
거기는 진정한 빛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자리 잡고 나의 주님과 하나님을 향하는 하나님의 존전 앞에 사는 우리 마음속에는 주의 생명 있습니다.
주님의 빛 있습니다.
만족과 밝음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혼이 설 수 있는 것 압니다. 영혼이 견고한 것 압니다. 영혼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행할 수 있다는 것 압니다.
이 일만 생각해도 엄청난 사역은 하지 않더라도 우리 영혼 속에는 벌써 감사가 가득합니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살면서 주님과 함께 다음 걸음을 걸어가면서 주님의 돕는 이로 역사해서 나름대로 큰일을 이룬다면 또 감사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감사하는 마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시는 물 때문에, 먹는 음식 때문에, 그리고 길 때문에 불평이 자자했습니다. 그러할 때 그들이 가는 길속에서 유혹이 오면 또 그 유혹 때문에 넘어지고 참으로 그러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만족한 자로 살고, 주님 안에서 강한 자로 서고, 내 주님 안에서 다스림 받는 자로 서서 감사하는 것!
얼마나 소중한지요!
여기 어린 양의 아내의 옷을 설명할 때 “세마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였습니다. 이것은 내 주님 안에 자리 잡은 순결한 마음과 내 주님 얼굴빛 가운데 살아가는 끊임없는 삶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내 주님 안에 자리 잡은 그 순결한 마음과 주님 얼굴 사모함으로 그분 빛 가운데서 살아가는 오늘의 조용한 끊임없는 생활!
주님은 이점을 정말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처구니없는 이런저런 것 구할 것이 아니라, 이 참다운 삶을 가지고 있으면서 주님 기뻐하셔서 또 나름대로 섬김을 원하신다면, 술람미 여인을 아가서 7장의 돕는 이로 주께서 데려가셨듯이, 아가서 8장에서 돕는 이로 불러가셨듯이 주님의 뜻하시는 섭리 가운데 섬겨본다 할지라도, 주님 안에서 내 주님과 함께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이 놀라운 삶을 우리가 가지고 살았으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가운데 중요한 몇 가지만 간단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 요한계시록 11장 말씀에서 우리 하나님께서 갈대 같은 지팡이로 척량하시는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이란 이 의미를 우리가 놓치지 않는다면, 오늘도 우리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헤아릴 것이 없는 그런 초라한 삶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 앞에 남음이 있고 참으로 기억될 것이 있는 값진 생활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
이곳에 참예하지 못하고 성전 뜰만 밟는다면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계수하지 않으신 것을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의 의미를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길로써의 제단.
그리고 그곳에 참예하므로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하는 그러한 것이 내 생활이 된 사람.
참된 성전은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그리스도 자신이 유일한 참된 성전입니다. 그리고 이 사시고 참된 생명력 흐르는 성전에 참예하는 유일한 제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음을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너무 명료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제단은 나의 지나간 허물과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고, 능히 씻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못된 성품, 그릇된 성품, 우리 하나님을 반역하는 참으로 조화되지 않는 그러한 것을 처치해 줄 수 있는 제단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철저한 씻음도 필요하고, 내 하나님 보시기에 조화되지 못한 참으로 그러한 육체의 정과 욕심과 그 모든 것을 처치해 주시는 것도 정말 필요합니다.
이 문제를 처리해 주셔야 우리는 참된 성전에 속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울어도 못할 것입니다.
힘써도 아니 될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한들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 놓으신 그의 제단은 이 점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으로 씻어주심. 능히 가능합니다. 남김없이 씻어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소멸하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 앞에 적합하지 않은, 참으로 그러한 우리의 그릇된 모든 것은 소멸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전된 주님께 속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에스겔 47장처럼 솟아나는 주의 생명을 좇아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들!
그것은 두고두고 하나님 앞에 계수될 수 있는, 의미가 있는 그러한 우리임을 기억해 봅니다.
두 번째 :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어린양의 피.”
그리고 “자기의 증거하는 말.”
그리고 “큰 독수리의 두 날개.”
그리고 “광야 자기 곳.”
이 짤막한 말씀들은 스쳐 지나가는 내용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에서 이기는 자로서 내 주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어린양의 피!”
그것은 언제나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확신 있게 설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처음도 그러하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어린양의 피!”
그리고 “자기의 증거하는 말”로 인하여 대적하는 자 마귀를 이겼다고 말씀합니다만, 이 말씀은 결코 우리 스스로의 지혜나 우리 스스로의 그 무엇은 결단코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자 한다면, 요한복음 8장이나 요한복음 15장 말씀처럼 그 주님의 말씀이 내 속에 거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주님께 속한 자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에 속한 자여야 살아계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참 포도나무 안에 포도나무의 진액과 포도나무의 그 무엇이 있듯이, 우리가 주님께 속할 때 주님의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 삶의 확실한 보증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오늘 여러분과 제가 이 어두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유일한 등불입니다.
어두움이 우리를 어떤 방법으로 혼란스럽게 할지라도 예수님 안에서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말씀으로! 붙든 이 삶은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오늘도 참으로 대적하는 자를 이길 수 있는, 빛 가운데 어둠을 이길 수 있는 이 놀라운 삶을 가능케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2장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큰 독수리 두 날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누구에게 입니까? 그것은 시편 103편, 이사야 40장, 신명기 32장 말씀처럼 내 주님을 끊임없이 앙망하는, 나의 주님으로 바라볼 때입니다. 주님을 앙망할 때만이 새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얻듯이 영혼이 어느덧 솟아오를 수 있고, 능가할 수 있는 그런 은혜가 있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조그만 일, 복잡한 일 그리고 혼란스러운 일 가운데서라도 날 사랑하시며 나의 주님으로 서 주시는 주님을 언제나 앙망할 수 있는 것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침내 이 땅에서 자리 잡게 되는 것은 광야입니다.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라고 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내가 자리 잡을 곳으로 알지 아니하고 내 주님 의지하고 주님과 함께 지나가는 광야로 압니다.
저 빈들의 엘리야처럼, 저 빈들의 세례 요한처럼, 정처 없이 광야의 어려움 속에 끊임없이 길 갔던 사도 바울 선생님이나 사도 요한처럼, 이 세상을 광야로 알고 내 주님을 모신 마음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만이, 여러분과 제가 세상을 능가하며 이기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 줄 압니다.
세 번째 : 요한계시록 13장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 볼 수 있는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그리고 “성도의 인내와 믿음”이란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세상의 주관자가 괴롭히는 것을 이곳에서는 짐승이 괴롭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공산 치하에서 어려움을 당하셨던 성도님들의 생활이나 또 일제시대 때 주님께 속한 정결한 마음으로 살던 성도님들이 당하신 그 어려움을 본다면, 그것은 정말 이러한 것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얼마든지 이러한 어려움 속에 직면할 수 있음을 주목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주목할 것은 여러분과 제가 그 짐승을 향해서 짐승처럼 싸운다면 우리 예수님 들려주신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라는 말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생활은 결코 그러한 삶이 아닙니다.
마치 양이 목자를 모시고 목자의 다스림 받는 목자의 이름 속에 살듯이, 우리가 주님의 영역 속에서 주님의 다스림 받는 그의 이름 속에 살아간 우리로 볼 때는 “믿음과 인내”라는 말씀은 아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곳에 믿음이란 말씀의 의미는 내가 나의 주가 되시고 내 목자 되시는 주님을 향하는 신뢰하는 마음인 동시에, 그분이 나의 삶을 주관하시며 이끌어 주셔서 허락해 주신 마음이 포함된 말씀인 줄 압니다.
이 세상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목자이신 나의 주가 되신 주님을 모신 마음으로 그리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그의 이름 속에 있는 우리로 알고 살아가야 할 것이며, 그래서 그분을 믿는 믿음의 마음과 그분의 허락하여 주신 마음이란 이 영토를 벗어나서는 아니 될 줄 압니다.
이곳에 벗어나면 우리는 짐승에게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벗어나면 우리 영혼은 참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이 길에 서서 주님을 향한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성실하게 길 간다면 여러분과 저의 영혼은 하늘에 속한 자로!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가기가 결코 어렵지 아니할 줄 압니다.
이곳에서 우리가 할 일은 한 가지뿐입니다.
인내입니다. 인내입니다!
주님과 나의 올바른 관계 속에 이러한 길에 서가므로 언제나 주님의 그 붙드시는 은혜 속에서 주님의 그 돌보시는 사랑 가운데서 여러분의 삶이 이어지기를 원합니다.
네 번째 : 요한계시록 14장 12~13절에서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귀중성을 참된 성도의 삶의 귀중성으로 알아본다면 참 도움될 것 같습니다. 이곳에 기록된 것은 아주 단순한 세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살아있는 관계를 갖지 못한다면 수많은 복잡한 것을 가지고 살아도 신앙생활다운 생활은 못될 것 같습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는 이 축복된 말씀처럼, 우리가 이 땅 떠나갈 때는 그 날 영광 속에서 주님 주시는 안식에 동참할 것인데,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나의 주님을 향하여 이런 참된 마음속에 서가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조금 전에 인용한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볼 수 있던 “인내와 믿음”이 있습니다. 주님 주시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하나님의 계명”이 있습니다. 오늘 이 땅에 살면서 나의 주님께 속하여 주님 주시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며 살아가고, 그리고 내 주님을 모시고 언제나 참으로 주님이 이끄시는 그 길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알아차리며 살아가고, 그리고 어떤 일과 생활 속에서도 내 주님 바라보고 인내하며 사는 삶을 가집니다. 이것은 살아계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는 관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단순한지요!
양의 단순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 속한 포도나무 가지의 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믿음만 있고 주님의 살아계심이 없을까요? 주님의 살아계심이 있는 자가 여기에 “예수 믿음”이란 주님이 주시는 믿음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이신 주님 안에서 농부이신 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명령을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은 일에는 얼마든지 주님 생각하며, 하나님 생각하며 우리는 참을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길!
이 길 속에서 여러분이 그날 주 앞에서 안식을 갖고 기뻐할 수 있는 오늘의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것 있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 : 요한 계시록 19장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란 말씀과 “하나님의 종”이란 말씀과 “어린양의 아내”란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조그만 일, 조그만 것에서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양하라”는 말씀과 어린 양의 아내의 입은 옷이 아주 가는 세마포였음을 상기해 보면서, 오늘 내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과 함께 연합함으로 주님께 속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 된 그 자세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고 생각할 그 무엇을 되새겨 보았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햇빛 주시고 비를 주신다”고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 마음으로 나의 주님께 돌아와 내 주님과 함께 연합함으로 우리 주님의 돕는 이로서, 우리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셨듯이 주님의 돕는 이로, 주님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이 마음 없을 것 같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려워진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그 은혜에 대해서 찬양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마실까?”“어디서 살까?”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말씀에서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것 입을 것 정착할 곳은 하나님께서 생각해 주신 것 명료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모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간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간다면, 이 세상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가지고 삶을 꾸려가도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가지만, 우리는 오늘 조그만 만나를 거두어도 어제 입던 낡지 않은 그 옷을 오늘 입고 있어도, 오늘 우리가 자리 잡아 사는 곳이 초라한 광야의 삶이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 가득한 마음이 있는 줄 압니다.
사사기에서 기드온과 삼손이 하나님을 힘입어 큰일 했습니다. 기드온은 그 엄청난 큰일에 대해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것 같습니다.
다윗도 수많은 전쟁 속에서 이기고 그 하나님을 향하여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 틀림없이 있었을 줄 압니다.
아합도 열왕기상 20장에서 아람 왕 벤하닷이 자기와 비교할 수 없는 서른두 왕을 거느리고 와서 싸우고자 했던 그 엄청난 전투를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겼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틀림없이 있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의 조그마한 생활!
오늘의 조그마한 나의 생활 속에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내 마음이 참으로 자유롭지 못한 그런 욕망 가운데 살아간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은 아닌 줄 압니다.
사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큰일보다는 조그마한 일들이 많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러한 가운데서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는 말씀처럼,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예수님께 속하여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만이!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만이!할 수 있는 마음인 줄 압니다.
우리는 골로새서 2장 말씀처럼 주님께 연합해서 주님 안에 설 수 있고, 주님 안에 견고할 수 있고, 주님 안에 다스림 받을 수 있어서, 벌써 감사가 넘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육신 속에 있어서는 안 되는 자신을 여러분과 제가 압니다.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함을,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제대로 되지 못함을 분명하게 압니다.
거기는 만족 없습니다.
거기는 진정한 자유 없습니다.
거기는 진정한 평화 없습니다.
거기는 진정한 빛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자리 잡고 나의 주님과 하나님을 향하는 하나님의 존전 앞에 사는 우리 마음속에는 주의 생명 있습니다.
주님의 빛 있습니다.
만족과 밝음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혼이 설 수 있는 것 압니다. 영혼이 견고한 것 압니다. 영혼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행할 수 있다는 것 압니다.
이 일만 생각해도 엄청난 사역은 하지 않더라도 우리 영혼 속에는 벌써 감사가 가득합니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살면서 주님과 함께 다음 걸음을 걸어가면서 주님의 돕는 이로 역사해서 나름대로 큰일을 이룬다면 또 감사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감사하는 마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시는 물 때문에, 먹는 음식 때문에, 그리고 길 때문에 불평이 자자했습니다. 그러할 때 그들이 가는 길속에서 유혹이 오면 또 그 유혹 때문에 넘어지고 참으로 그러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만족한 자로 살고, 주님 안에서 강한 자로 서고, 내 주님 안에서 다스림 받는 자로 서서 감사하는 것!
얼마나 소중한지요!
여기 어린 양의 아내의 옷을 설명할 때 “세마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였습니다. 이것은 내 주님 안에 자리 잡은 순결한 마음과 내 주님 얼굴빛 가운데 살아가는 끊임없는 삶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내 주님 안에 자리 잡은 그 순결한 마음과 주님 얼굴 사모함으로 그분 빛 가운데서 살아가는 오늘의 조용한 끊임없는 생활!
주님은 이점을 정말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처구니없는 이런저런 것 구할 것이 아니라, 이 참다운 삶을 가지고 있으면서 주님 기뻐하셔서 또 나름대로 섬김을 원하신다면, 술람미 여인을 아가서 7장의 돕는 이로 주께서 데려가셨듯이, 아가서 8장에서 돕는 이로 불러가셨듯이 주님의 뜻하시는 섭리 가운데 섬겨본다 할지라도, 주님 안에서 내 주님과 함께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이 놀라운 삶을 우리가 가지고 살았으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가운데 중요한 몇 가지만 간단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선하신 목자
양이 해야 할 일은 아주 단순합니다.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목자께서 하십니다. 목자께서는 양을 바른길로 인도하십니다. 양을 위하여 길을 정하시고, 양이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인지를 살피십니다. 양을 내어놓으실 때는 목자께서 앞서 가십니다.
양은 계획할 것도, 결정할 것도, 지혜나 예지력을 발휘할 것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선하신 목자의 돌보심만을 의지하고 어디로 인도하든지 목자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주님은 미쁘신 분이시니, 믿음에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그의 권능을 온전히 신뢰한다면, 순종에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목자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십시요. 목자의 돌봄을 받는 양처럼 주님의 돌보심과 인도를 따르기 위하여 자신을 버리고 주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십시요.
주님께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주님을 따르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항상 그의 양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안팎에 푸른 것 하나 없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듯하고, 푸른 초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도, 선하신 목자께서는 우리가 있는 곳을 푸른 초장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막을 즐겁고 장미꽃 피는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중략)
목자께서는 양에게 어떤 초장이 가장 좋은 것인지를 아십니다. 양은 의문을 품거나 의심하지 말고 신뢰하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초장이 대적이나 이 땅의 시험 가운데 있을 수 있음도 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시면, 우리는 그곳이 우리를 위한 푸른 초장임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곳의 풀을 먹는 것이 우리를 강하게 성장시킬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 한나 휘톨 스미스의 『모든 위로의 하나님』中에서 -
(Hannah Whitall Smith. 1956. The Lord Our Shepherd, God of All Comfort, Moody Press)
번역 이 상 분 권사님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목자께서 하십니다. 목자께서는 양을 바른길로 인도하십니다. 양을 위하여 길을 정하시고, 양이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인지를 살피십니다. 양을 내어놓으실 때는 목자께서 앞서 가십니다.
양은 계획할 것도, 결정할 것도, 지혜나 예지력을 발휘할 것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선하신 목자의 돌보심만을 의지하고 어디로 인도하든지 목자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주님은 미쁘신 분이시니, 믿음에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그의 권능을 온전히 신뢰한다면, 순종에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목자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십시요. 목자의 돌봄을 받는 양처럼 주님의 돌보심과 인도를 따르기 위하여 자신을 버리고 주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십시요.
주님께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주님을 따르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항상 그의 양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안팎에 푸른 것 하나 없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듯하고, 푸른 초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도, 선하신 목자께서는 우리가 있는 곳을 푸른 초장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막을 즐겁고 장미꽃 피는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중략)
목자께서는 양에게 어떤 초장이 가장 좋은 것인지를 아십니다. 양은 의문을 품거나 의심하지 말고 신뢰하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초장이 대적이나 이 땅의 시험 가운데 있을 수 있음도 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시면, 우리는 그곳이 우리를 위한 푸른 초장임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곳의 풀을 먹는 것이 우리를 강하게 성장시킬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 한나 휘톨 스미스의 『모든 위로의 하나님』中에서 -
(Hannah Whitall Smith. 1956. The Lord Our Shepherd, God of All Comfort, Moody Press)
번역 이 상 분 권사님
많은 열매 항상 열매
양이 해야 할 일은 아주 단순합니다.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목자께서 하십니다. 목자께서는 양을 바른길로 인도하십니다. 양을 위하여 길을 정하시고, 양이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인지를 살피십니다. 양을 내어놓으실 때는 목자께서 앞서 가십니다.
양은 계획할 것도, 결정할 것도, 지혜나 예지력을 발휘할 것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선하신 목자의 돌보심만을 의지하고 어디로 인도하든지 목자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주님은 미쁘신 분이시니, 믿음에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그의 권능을 온전히 신뢰한다면, 순종에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목자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십시요. 목자의 돌봄을 받는 양처럼 주님의 돌보심과 인도를 따르기 위하여 자신을 버리고 주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십시요.
주님께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주님을 따르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항상 그의 양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안팎에 푸른 것 하나 없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듯하고, 푸른 초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도, 선하신 목자께서는 우리가 있는 곳을 푸른 초장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막을 즐겁고 장미꽃 피는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중략)
목자께서는 양에게 어떤 초장이 가장 좋은 것인지를 아십니다. 양은 의문을 품거나 의심하지 말고 신뢰하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초장이 대적이나 이 땅의 시험 가운데 있을 수 있음도 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시면, 우리는 그곳이 우리를 위한 푸른 초장임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곳의 풀을 먹는 것이 우리를 강하게 성장시킬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 한나 휘톨 스미스의 『모든 위로의 하나님』中에서 -
(Hannah Whitall Smith. 1956. The Lord Our Shepherd, God of All Comfort, Moody Press)
번역 이 상 분 권사님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목자께서 하십니다. 목자께서는 양을 바른길로 인도하십니다. 양을 위하여 길을 정하시고, 양이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인지를 살피십니다. 양을 내어놓으실 때는 목자께서 앞서 가십니다.
양은 계획할 것도, 결정할 것도, 지혜나 예지력을 발휘할 것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선하신 목자의 돌보심만을 의지하고 어디로 인도하든지 목자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주님은 미쁘신 분이시니, 믿음에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그의 권능을 온전히 신뢰한다면, 순종에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목자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십시요. 목자의 돌봄을 받는 양처럼 주님의 돌보심과 인도를 따르기 위하여 자신을 버리고 주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십시요.
주님께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주님을 따르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항상 그의 양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안팎에 푸른 것 하나 없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듯하고, 푸른 초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도, 선하신 목자께서는 우리가 있는 곳을 푸른 초장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막을 즐겁고 장미꽃 피는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중략)
목자께서는 양에게 어떤 초장이 가장 좋은 것인지를 아십니다. 양은 의문을 품거나 의심하지 말고 신뢰하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초장이 대적이나 이 땅의 시험 가운데 있을 수 있음도 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시면, 우리는 그곳이 우리를 위한 푸른 초장임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곳의 풀을 먹는 것이 우리를 강하게 성장시킬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 한나 휘톨 스미스의 『모든 위로의 하나님』中에서 -
(Hannah Whitall Smith. 1956. The Lord Our Shepherd, God of All Comfort, Moody Press)
번역 이 상 분 권사님
내 삶의 중심, 나의 빈 들판
정 찬 규 집사님
내 영혼의 목마름 속에
주님을 떠날 수 없는 마음으로
때로는 주님 향한 그리움 속에
엄마 품에 기댄 어린아이처럼
때로는 섬김을 준비하며
새롭게 은혜의 이슬에 젖고자
오르던 빈 들판.
거기서
주님을 기다릴 때마다
하늘 보좌로부터 임해오는
은혜의 이슬에 촉촉이 젖게 해주시고
내 영혼에 빛으로
새롭게 다가오셔서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해주신 주님!!
거기서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
나를 벗어버리고
어린양의 고기 불에 구워먹듯
주님의 말씀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하시면서
묵상하도록 이끄셨던 주님!!
거기서
주님을 내 영혼의 진정한 양식으로 먹을 때
주님께서 친히 내 안에서 살아 주심으로
나의 애씀으로는 되지 않던
‘주님 모신 온전한 삶’이
비로소 가능함을 알게 해주신 내 주님!!
이제는
내 삶의 일부가 아닌
어느덧 내 삶의 중심이 되어있는 빈 들판!
내 주님 당신 안에 새로이 잠기고자
내 주님께 귀 뚫은 종처럼 매이고자
언제나 변함없는 언약적인 마음으로
그곳을 선택하여 오르렵니다.
거기서
스스로 다른 그 무엇 얻고자
다른 그 무엇 되고자 아니하며
내 주님께 철저하게 붙잡힌 ‘주님의 것’
내 주님 마음 헤아리며 섬기는 ‘주님의 돕는 이’
이 이름을 친히 내게 주실
주님으로 인하여
새롭게 이끄시는 길들 속에서
나는 없고 내 주님만 드러나는
주님의 사람, 빈 들판 사람이고 싶습니다.
아멘!
정 찬 규 집사님
주님을 떠날 수 없는 마음으로
때로는 주님 향한 그리움 속에
엄마 품에 기댄 어린아이처럼
때로는 섬김을 준비하며
새롭게 은혜의 이슬에 젖고자
오르던 빈 들판.
거기서
주님을 기다릴 때마다
하늘 보좌로부터 임해오는
은혜의 이슬에 촉촉이 젖게 해주시고
내 영혼에 빛으로
새롭게 다가오셔서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해주신 주님!!
거기서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
나를 벗어버리고
어린양의 고기 불에 구워먹듯
주님의 말씀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하시면서
묵상하도록 이끄셨던 주님!!
거기서
주님을 내 영혼의 진정한 양식으로 먹을 때
주님께서 친히 내 안에서 살아 주심으로
나의 애씀으로는 되지 않던
‘주님 모신 온전한 삶’이
비로소 가능함을 알게 해주신 내 주님!!
이제는
내 삶의 일부가 아닌
어느덧 내 삶의 중심이 되어있는 빈 들판!
내 주님 당신 안에 새로이 잠기고자
내 주님께 귀 뚫은 종처럼 매이고자
언제나 변함없는 언약적인 마음으로
그곳을 선택하여 오르렵니다.
거기서
스스로 다른 그 무엇 얻고자
다른 그 무엇 되고자 아니하며
내 주님께 철저하게 붙잡힌 ‘주님의 것’
내 주님 마음 헤아리며 섬기는 ‘주님의 돕는 이’
이 이름을 친히 내게 주실
주님으로 인하여
새롭게 이끄시는 길들 속에서
나는 없고 내 주님만 드러나는
주님의 사람, 빈 들판 사람이고 싶습니다.
아멘!
정 찬 규 집사님
삶의 참된 비결
삶의 참된 비결은 분명하게 그 근원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18절에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이것이 이 땅에서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 선생님은 근심하지 않았나요? 그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서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고린도후서 11장에서도 갖가지 어려움 당하는 것은 고사하고 교회들을 향하여 눌리는 염려가 있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11장 말씀을 읽어보아도 그의 영혼 깊은 데서 주님께 속하여 참으로 주님을 내 사랑하는 신랑처럼! 내 사랑하는 신랑처럼! 주님을 앙망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눈은 분명하게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눈이 없다면 순전함이 유지될 수 없음을 말씀합니다. 겉에서 짓누르는 어려움은 고사하고라도, 우리가 부딪치는 그러한 것을 참으로 견딘다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우리 마음 자체가 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11장 말씀은 내 주님을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는 가운데서 짓누르는 그 모든 것도 견디고, 또 한편 주님을 바라보며 여러 교회들을 위하여 참된 사랑을 가지고 근심하고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고린도후서 11장 말씀을 깊이 있게 본다면 이런 짓눌림을 당하는 어려움, 그리고 그가 마음으로 여러 교회를 향한 근심 속에는 그래도 주님이 사랑하는 주님으로 서 주시고, 주님을 내 주님으로 인식하고 내 주님으로 인정하고 내 주님으로 앙망하는, 영혼의 조용한 안정과 기쁨은 틀림없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쉼 없이, 쉼 없이 기도한다는 것!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의 항상 기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17절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이런 것이 가능하다면 범사에 감사하는 것도 가능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이 생활의 원천이 어디서 올까요? 데살로니가 전서 3장, 4장, 5장에서 간단하게 헤아려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 하나님께서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님을 믿었는데 데살로니가전서 3장에서 왜 환난을 허락하십니까? 분명히 허락하신 환난입니다.
이 환난은 그들이 신앙을 놓아버릴 수 있을 만큼 큰 환난인 것 같습니다. 두려워 할 만큼 큰 환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기 위함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인격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언제나 항상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그런 마음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어려움 속에서 우리 하나님이 뜻하신 것은 “주님 안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사시고 참되신 주님 안에 서라는 것입니다. 내 영혼의 피난처로, 내 영혼이 설 수 있는 반석으로 나의 주님을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상하리만치 이렇게 설 때 영혼은 두려움이 아니고, 근심이 아니고, 안식과 기쁨이 있습니다. 환난 속에서도 주님 안에 서므로 안식이 있고 주님을 바라봄으로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언제나 기뻐할 수 있는 좋은 근거입니다.
세상보다 주님은 더 강하십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 안에서 우리 영혼이 굳건하게 선다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해 주시는 길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말씀에 “믿음의 시련”이라고 할 만큼 여러 가지 어려움을 성도들이 많이 겪었습니다. 왜 그렇게 인도하셨나요? 우리는 두 가지 이유를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얻음이라”
크게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큰 기쁨으로 인도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한편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보이는 현실이 어려울 때 보이지 않는 주님 안에 서고 보이지 않는 주님을 붙들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 우리는 항상 기뻐함과 쉼 없는 기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은 주님과 함께 능가할 수 있고 항상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모시고 가는 배는 부서지지 않습니다.
풍랑이 있고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를 확인해 볼지 몰라도 우리가 주님께 믿음을 둔다면 이겨갈 수 있습니다.
풍랑 이는 그 어려움 속에서 다른 것 바라볼 여가 없습니다. 주님을 끊임없이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수 있는 인격으로 바뀌어 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 : 중요한 것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거룩을 잃어버린다면 기쁨 잃어버립니다. 성도가 영혼의 거룩을 잃어버린다면 기도를 잃어버립니다. 거룩을 잃어버린다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탄식과 슬픔과 죄인이란 고백밖에 할 수 없습니다. 무너진 인격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기뻐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이기는 것 아닙니다.
사람이 제대로 살려고 한다면 육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압니다. 마귀가 역사하는 곳 우리 육입니다. 육이 얼마나 거센지 여러분은 감당 못 할 것 뻔히 압니다.
우리는 자기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자기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거룩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속할 때, 갈라디아서 5장, 6장 말씀처럼 주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자기를 이길 수 있는 사람, 예수님의 영으로 다스림 받는 자입니다. 거룩하게 살 수 있는 사람, 예수님의 영의 인도하심 속에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자!
갈라디아서 5장 25절 말씀처럼 오늘도 주님 안에서 주님의 영으로 살고 주님의 영으로 행하는 자입니다. 나머지 허튼 것 구하지 아니하고 이런 마음으로 서갈 때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거룩!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더 사랑스럽고 친근히 하고 싶은 그러한 마음! 주님의 영은 가능케 해 주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범사에 밝은 마음과 주님과 함께 하나님 보시기에 사는 복된 마음으로 우리는 어떤 환경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 데살로니가 5장에서 한 가지만 좀 더 주목해 보십시다.
3장의 주님 안에 견고하게 선다는 것과 주님 바라보는 마음, 4장의 주님 안에서 주님의 영으로 성령님으로 다스림 받는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근신하면서 내 주님과 함께 사는 삶에 조바심 하는 것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의 깨어 있는 생활입니다.
환난 속에서도, 이 연약한 육체와 어두움과 죄악 많은 세상 속에서도, 나와 함께 하여 주시는 주님께 속한 이 삶을 가지고, 내 주님을 바라보면서 “자든지 깨든지 주님과 함께”란 마음으로 근신하면서 주님의 빛 가운데 서 간다면, 항상 기뻐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는 능히 가능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여러분!
조용히 주님께 나아가서 삶을 정돈하여 감으로 오늘 환난이 없어 보이지만, 오늘 여러분이 세상을 직면하기에 앞서서 이 좁음 속에서 내 주님께 조용히 나아가서 내 주님께 믿음으로 서고, 주님을 옷 입고, 내 주님과 참으로 동행할 수 있는 준비를 해 가므로, 근신된 마음으로 삶을 정돈하여 가므로, 이 갖가지 문제가 있고 침울한 이 땅에서도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하는 하나님 자녀의 영광스런 생활이 오늘 여러분과 저의 생활이 되기를 권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서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고린도후서 11장에서도 갖가지 어려움 당하는 것은 고사하고 교회들을 향하여 눌리는 염려가 있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11장 말씀을 읽어보아도 그의 영혼 깊은 데서 주님께 속하여 참으로 주님을 내 사랑하는 신랑처럼! 내 사랑하는 신랑처럼! 주님을 앙망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눈은 분명하게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눈이 없다면 순전함이 유지될 수 없음을 말씀합니다. 겉에서 짓누르는 어려움은 고사하고라도, 우리가 부딪치는 그러한 것을 참으로 견딘다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우리 마음 자체가 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11장 말씀은 내 주님을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는 가운데서 짓누르는 그 모든 것도 견디고, 또 한편 주님을 바라보며 여러 교회들을 위하여 참된 사랑을 가지고 근심하고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고린도후서 11장 말씀을 깊이 있게 본다면 이런 짓눌림을 당하는 어려움, 그리고 그가 마음으로 여러 교회를 향한 근심 속에는 그래도 주님이 사랑하는 주님으로 서 주시고, 주님을 내 주님으로 인식하고 내 주님으로 인정하고 내 주님으로 앙망하는, 영혼의 조용한 안정과 기쁨은 틀림없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쉼 없이, 쉼 없이 기도한다는 것!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의 항상 기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17절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이런 것이 가능하다면 범사에 감사하는 것도 가능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이 생활의 원천이 어디서 올까요? 데살로니가 전서 3장, 4장, 5장에서 간단하게 헤아려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 하나님께서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님을 믿었는데 데살로니가전서 3장에서 왜 환난을 허락하십니까? 분명히 허락하신 환난입니다.
이 환난은 그들이 신앙을 놓아버릴 수 있을 만큼 큰 환난인 것 같습니다. 두려워 할 만큼 큰 환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기 위함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인격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언제나 항상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그런 마음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어려움 속에서 우리 하나님이 뜻하신 것은 “주님 안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사시고 참되신 주님 안에 서라는 것입니다. 내 영혼의 피난처로, 내 영혼이 설 수 있는 반석으로 나의 주님을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상하리만치 이렇게 설 때 영혼은 두려움이 아니고, 근심이 아니고, 안식과 기쁨이 있습니다. 환난 속에서도 주님 안에 서므로 안식이 있고 주님을 바라봄으로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언제나 기뻐할 수 있는 좋은 근거입니다.
세상보다 주님은 더 강하십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 안에서 우리 영혼이 굳건하게 선다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해 주시는 길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말씀에 “믿음의 시련”이라고 할 만큼 여러 가지 어려움을 성도들이 많이 겪었습니다. 왜 그렇게 인도하셨나요? 우리는 두 가지 이유를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얻음이라”
크게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큰 기쁨으로 인도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한편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보이는 현실이 어려울 때 보이지 않는 주님 안에 서고 보이지 않는 주님을 붙들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 우리는 항상 기뻐함과 쉼 없는 기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은 주님과 함께 능가할 수 있고 항상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모시고 가는 배는 부서지지 않습니다.
풍랑이 있고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를 확인해 볼지 몰라도 우리가 주님께 믿음을 둔다면 이겨갈 수 있습니다.
풍랑 이는 그 어려움 속에서 다른 것 바라볼 여가 없습니다. 주님을 끊임없이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수 있는 인격으로 바뀌어 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 : 중요한 것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거룩을 잃어버린다면 기쁨 잃어버립니다. 성도가 영혼의 거룩을 잃어버린다면 기도를 잃어버립니다. 거룩을 잃어버린다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탄식과 슬픔과 죄인이란 고백밖에 할 수 없습니다. 무너진 인격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기뻐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이기는 것 아닙니다.
사람이 제대로 살려고 한다면 육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압니다. 마귀가 역사하는 곳 우리 육입니다. 육이 얼마나 거센지 여러분은 감당 못 할 것 뻔히 압니다.
우리는 자기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자기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거룩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속할 때, 갈라디아서 5장, 6장 말씀처럼 주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자기를 이길 수 있는 사람, 예수님의 영으로 다스림 받는 자입니다. 거룩하게 살 수 있는 사람, 예수님의 영의 인도하심 속에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자!
갈라디아서 5장 25절 말씀처럼 오늘도 주님 안에서 주님의 영으로 살고 주님의 영으로 행하는 자입니다. 나머지 허튼 것 구하지 아니하고 이런 마음으로 서갈 때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거룩!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더 사랑스럽고 친근히 하고 싶은 그러한 마음! 주님의 영은 가능케 해 주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범사에 밝은 마음과 주님과 함께 하나님 보시기에 사는 복된 마음으로 우리는 어떤 환경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 데살로니가 5장에서 한 가지만 좀 더 주목해 보십시다.
3장의 주님 안에 견고하게 선다는 것과 주님 바라보는 마음, 4장의 주님 안에서 주님의 영으로 성령님으로 다스림 받는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근신하면서 내 주님과 함께 사는 삶에 조바심 하는 것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의 깨어 있는 생활입니다.
환난 속에서도, 이 연약한 육체와 어두움과 죄악 많은 세상 속에서도, 나와 함께 하여 주시는 주님께 속한 이 삶을 가지고, 내 주님을 바라보면서 “자든지 깨든지 주님과 함께”란 마음으로 근신하면서 주님의 빛 가운데 서 간다면, 항상 기뻐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는 능히 가능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여러분!
조용히 주님께 나아가서 삶을 정돈하여 감으로 오늘 환난이 없어 보이지만, 오늘 여러분이 세상을 직면하기에 앞서서 이 좁음 속에서 내 주님께 조용히 나아가서 내 주님께 믿음으로 서고, 주님을 옷 입고, 내 주님과 참으로 동행할 수 있는 준비를 해 가므로, 근신된 마음으로 삶을 정돈하여 가므로, 이 갖가지 문제가 있고 침울한 이 땅에서도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함과 쉬지 않는 기도와 범사에 감사하는 하나님 자녀의 영광스런 생활이 오늘 여러분과 저의 생활이 되기를 권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