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조그만 나의 빈들판
2015-01-14 / 67 회차
조그만 나의 빈들판
기도의 전선에서
취적리교회 배 명 자 집사님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은
기도의 땅 기도의 전선입니다.
내 기도의 땅 기도의 전선에서
휴전선 백오십오 마일을 따라…
육십삼만의 국군 장병들을
내 기도의 어깨에 짊어지도록
하나님은 병사님들을
내 기도의 어깨에 얹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병사님들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최상의 시간을 보내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내 기도는
어떤 환경 어떤 흉흉한 소식들 들려와도
힘을 잃지 않습니다.
답답할 때에도
괴로울 때에도
아픔 있을 때에도
그 언제나 병사님들을 향해
열려 있는 기도의 창에서
병사님들을 보듬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싶지는 않은지요!
오늘이 평안이어도
내일은 또 어떤 일들이
엄습해 올지 모르는 전선
그렇지만 기도의 창에서
부지런히 하나님 찾는다면
마음의 쉼 평화
누리기 쉽지 않은 그곳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 형제 친구들 곁에서처럼
마냥 철부지로 뒹굴 수만은 없는 전선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이 가깝습니다."는 고백이
병사님들의 마음을 열고
다가선 기도의 창에서 들려지기를
이곳 기도의 전선에서
귀 기울이겠습니다.
기도의 땅 기도의 전선입니다.
내 기도의 땅 기도의 전선에서
휴전선 백오십오 마일을 따라…
육십삼만의 국군 장병들을
내 기도의 어깨에 짊어지도록
하나님은 병사님들을
내 기도의 어깨에 얹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병사님들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최상의 시간을 보내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내 기도는
어떤 환경 어떤 흉흉한 소식들 들려와도
힘을 잃지 않습니다.
답답할 때에도
괴로울 때에도
아픔 있을 때에도
그 언제나 병사님들을 향해
열려 있는 기도의 창에서
병사님들을 보듬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싶지는 않은지요!
오늘이 평안이어도
내일은 또 어떤 일들이
엄습해 올지 모르는 전선
그렇지만 기도의 창에서
부지런히 하나님 찾는다면
마음의 쉼 평화
누리기 쉽지 않은 그곳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 형제 친구들 곁에서처럼
마냥 철부지로 뒹굴 수만은 없는 전선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이 가깝습니다."는 고백이
병사님들의 마음을 열고
다가선 기도의 창에서 들려지기를
이곳 기도의 전선에서
귀 기울이겠습니다.
통신병이었을 때의 일
김 규 성 집사님
오늘은 문득 20여 년 전 군 생활할 때의
그 시간이 생각났습니다.
통신병이라 통신 창고에서
기름걸레로 무전기를 닦을 때 깨우쳤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편 29:11)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 허락하시는 평강의 복을
통신병이었을 때
통신 창고에서 깨우쳐 누렸던
잊지 못할 일이 생각났습니다.
고된 훈련을 받으며
왼편 가슴 포켓에
신약과 시편이 묶인 성경을 넣고
닳도록 읽었던 말씀이
저의 힘들고 고단했던 군 생활의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었던
시절도 떠오르곤 합니다.
오늘의 반복되는 삶 속에서
무료하지 않을 수 있고
고된 삶 속에서도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주님이 내 삶의 의미가 되어주셨기에 가능합니다.
반복되고 갇힌듯한 삶을 산다 해도
주님이 내 삶의 길이 되어 주신다면
열심히 살아볼 가치가 있다 생각됩니다.
그러하기에 저는
주님을 향해 주님을 목적 삼고
그때나 지금이나 늘 새롭게 나아갈 수 있음을
진실되게 고백해 봅니다.
그 시간이 생각났습니다.
통신병이라 통신 창고에서
기름걸레로 무전기를 닦을 때 깨우쳤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편 29:11)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 허락하시는 평강의 복을
통신병이었을 때
통신 창고에서 깨우쳐 누렸던
잊지 못할 일이 생각났습니다.
고된 훈련을 받으며
왼편 가슴 포켓에
신약과 시편이 묶인 성경을 넣고
닳도록 읽었던 말씀이
저의 힘들고 고단했던 군 생활의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었던
시절도 떠오르곤 합니다.
오늘의 반복되는 삶 속에서
무료하지 않을 수 있고
고된 삶 속에서도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주님이 내 삶의 의미가 되어주셨기에 가능합니다.
반복되고 갇힌듯한 삶을 산다 해도
주님이 내 삶의 길이 되어 주신다면
열심히 살아볼 가치가 있다 생각됩니다.
그러하기에 저는
주님을 향해 주님을 목적 삼고
그때나 지금이나 늘 새롭게 나아갈 수 있음을
진실되게 고백해 봅니다.
특별한 날들
부산 수민교회 황 경 례 집사님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시편 135편 4절)
성서 예레미야 1장 5절에서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만드시기도(조성) 전에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특별한 사람이라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저를 당신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조성되기도 전에 저를 알았고 택하셨습니다.
특별한 소유- 영어 성경에서는 “특별한 보물”이라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2015년 새해, 보잘것없는 저를 특별한 보물로 불러주셨습니다. 2015년 한날, 한날이 주님 안에서 특별한, 기억될만한 날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평범한 날 속에서도, 인생의 골짜기 같은 삶 속에서도 주님이 계시므로 특별한 날이 될 수 있고요. 땅끝에서 주님을 앙망한다면 특별한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찬송과 기도와 감사 속에서 오늘을 특별한 날로 계수하시는 주님을 기대합니다.
주님의 얼굴, 그 음성만이 나의 해답입니다.
성서 예레미야 1장 5절에서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만드시기도(조성) 전에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특별한 사람이라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저를 당신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조성되기도 전에 저를 알았고 택하셨습니다.
특별한 소유- 영어 성경에서는 “특별한 보물”이라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2015년 새해, 보잘것없는 저를 특별한 보물로 불러주셨습니다. 2015년 한날, 한날이 주님 안에서 특별한, 기억될만한 날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평범한 날 속에서도, 인생의 골짜기 같은 삶 속에서도 주님이 계시므로 특별한 날이 될 수 있고요. 땅끝에서 주님을 앙망한다면 특별한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찬송과 기도와 감사 속에서 오늘을 특별한 날로 계수하시는 주님을 기대합니다.
주님의 얼굴, 그 음성만이 나의 해답입니다.
짧은 묵상
엘리야가 열왕기상 19장에서 도망가서 로뎀나무 아래 눕기 전까지 그는 주님을 모신 삶을 확고하게 살았던 사람이고, 또 한편 앞서간 하나님의 백성이란 이름은 갖고 있지만 정말 어처구니없이 살아갔던 그런 열조들과는 분명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음을 그는 알았습니다.
영혼에 진정한 힘이 있었습니다.
영혼에 참 빛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의 진정한 행복 속에서 그 어려운 길들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란 이름은 갖고 있지만 세상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어두움과 죄악이 주장하는 삶을 살았던 이들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생활이었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삶을 보면 그는 보통 사람, 곧 이 땅 주변에 살고 있었던 그 평범한 하나님의 백성들과는 분명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다윗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또 한편의 다윗의 삶을 보면 이 세상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삶을 걸어갔던 흔적이 있음을 읽게 됩니다.
이 두 구분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불확실하게 어느 날은 그렇게 살고, 어느 날은 그러했을까요?
그것은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명료합니다.
우리는 「짧은 묵상」을 통해서 이 귀중함을 마음으로부터 조금만 헤아려 보려고 합니다.
시편 28편, 29편, 30편은 세 편 다 다윗의 시입니다. 이곳에서 다윗이 어떠할 때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었는가를 우리가 잠시나마 묵상해 보는 것은 참으로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마음깊이 있게 간직해 본다면 나름대로의 한없는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린다면 불행 중에 불행이 되고, 우리의 생활도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있지만 진정한 삶이 없는 그런 삶으로 끝내버린 그들의 이름 속에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주목하다보면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그날이 기다려지는 우리의 걸음이 틀림없이 될 수 있을 줄 압니다.
순서를 자유롭게 인용해 보겠습니다.
시편 29편입니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고 돌릴찌어다”라는 뜻으로 다윗은 말씀합니다.
참으로 영광이 있는 자, 권능이 있는 자!
그들은 자기로 인해서 그러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고 해서 자기가 물 위를 걸은 것입니까? 주님이 붙들어 주시는 은혜 속에 걸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마른땅처럼 걸어갔지만 자기의 어떠함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놀라움 때문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간 것이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이나 똑같은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권능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여호수아서의 수많은 전투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힘으로 하면 아이성의 실패 때문에 땅에 머리 맞대고 먼지 뒤집어쓰며 슬퍼했던 그들과 같은 모습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붙드심과 주님의 능력으로 전투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얻는 것처럼, 유업을 받는 것처럼 기쁨으로 진행해 갈 수 있을 줄 압니다.
시편 29편의 삶의 실상은 이러합니다.
홍수 때 물 위에 좌정하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이는 파도가 거세게 일고 바람 부는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만들어주십니다.
홍수! 그것은 사람이 감당키 어려운 것입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정확히 보면, 주님은 참으로 그 홍수 위에 자리 잡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속하고 주님을 앙망하므로, 나의 주님과 함께 그 홍수 위를 영광스럽게 걸어갈 수 있는 자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여야 합니다.
내가 지난밤에 받은 능력으로, 아닙니다.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 때문에 그 주님을 바라볼 때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습니다.
오늘 이 세상의 어떠함이 아무리 휘몰아쳐 와도 파도요 홍수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서 주시는 영토가 물속이 아니고 물 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믿음으로 자리 잡고, 내 주님과 연합하여 내 주님과 동행하는 자로, 이사야 56장 말씀처럼 오늘도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내 주님 기뻐하면서 내 주님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으로 언약을 굳게 붙들고 간다면, 여러분은 이 땅의 열조들과 같은 사람들이 결단코 아닙니다.
시편 30편의 다윗은 그가 주님 은혜로 산과 같이 견고히 서서 걸어왔던 자인데 그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수많은 바람과 내리치는 폭풍우 속에도 산은 끄떡없이 있듯이, 내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산과 같이 서 있었는데 주님께서 얼굴을 가리우시니 근심했다는 것입니다. 환경과 여건이 어렵지 않아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전서 2장 말씀처럼 주님 안에서 우리는 빛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처럼 주님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얼굴빛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시편 32편 7절 이하의 말씀처럼 주님 안에서 내 영혼이 주님의 얼굴빛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주님은 우리의 의지이십니다.
이때 여러분과 저는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세상이 어떠해도 산과 같이 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흔들리는 갈대 같고 꺼져가는 등불 같은 그런 삶은 아닙니다. 강한 삶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예수님 안에서 주님 얼굴빛으로 충만하고, 자유가 있고, 주님이 내 믿음이 되시고, 행복이 있는 이런 자로 우리가 걸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시편 28편에서 우리는 짤막하게 한 부분을 좀 더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시편 28편 마지막 부분은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란 짤막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무 당연한 말씀이고 너무 쉬운 말씀이기에 스쳐 지나가기가 쉽습니다. 구원이니, 복이니, 목자니, 붙들어 세워달란 것이니 다 너무 단순하고 쉬운 낱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조금만 생각해 보세요.
주님의 은혜 속에 살아온 이는 끊임없는 그의 백성이면서 주님의 구원 속에 살아가고자 합니다. 정말 주님의 구원 속에 살아가고자 합니다!
어제 아무리 은혜 속에 살았어도 오늘도 주님의 구원 속에 살아가고자 합니다.
어제 아무리 주의 축복 속에 살았어도 오늘도 주님의 축복하심을 기대하고 싶습니다.
어제도 함께 하여 주시고 밤에도 함께해 주신 목자라도 오늘도 내 목자이신 주님을 꽉 붙들고 살고 싶습니다.
어제도 그분이 붙들어 주시는 영광 속에 살아왔지만 오늘도 날 붙들어 달라고 참으로 주님 날 붙들어 주시라고 간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제의 은혜를 알 뿐만 아니라 오늘 주님의 은혜를 앙망하는 강한 자세입니다.
필요합니다. 정말 필요합니다!
이런 내용이 주님은 날마다 구원을 주시는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란 시편 68편이고요, 이런 내용이 주님께서 열납하시는 때를 알고 주님께 찬송 부를 줄 아는 이가 내 주님께 참으로 부르짖어 간구하고 있는 시편 69편이고요, 이런 내용이 “주님, 속히! 주님, 지금!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시라고 시간시간 주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시편 70편입니다.
여러분!
2015년도가 이런 하루하루 이런 순간순간들로 진행되기를 권합니다.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실 줄 압니다.
영혼에 진정한 힘이 있었습니다.
영혼에 참 빛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의 진정한 행복 속에서 그 어려운 길들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란 이름은 갖고 있지만 세상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어두움과 죄악이 주장하는 삶을 살았던 이들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생활이었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삶을 보면 그는 보통 사람, 곧 이 땅 주변에 살고 있었던 그 평범한 하나님의 백성들과는 분명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다윗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또 한편의 다윗의 삶을 보면 이 세상 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삶을 걸어갔던 흔적이 있음을 읽게 됩니다.
이 두 구분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불확실하게 어느 날은 그렇게 살고, 어느 날은 그러했을까요?
그것은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명료합니다.
우리는 「짧은 묵상」을 통해서 이 귀중함을 마음으로부터 조금만 헤아려 보려고 합니다.
시편 28편, 29편, 30편은 세 편 다 다윗의 시입니다. 이곳에서 다윗이 어떠할 때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었는가를 우리가 잠시나마 묵상해 보는 것은 참으로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마음깊이 있게 간직해 본다면 나름대로의 한없는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린다면 불행 중에 불행이 되고, 우리의 생활도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있지만 진정한 삶이 없는 그런 삶으로 끝내버린 그들의 이름 속에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주목하다보면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그날이 기다려지는 우리의 걸음이 틀림없이 될 수 있을 줄 압니다.
순서를 자유롭게 인용해 보겠습니다.
시편 29편입니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고 돌릴찌어다”라는 뜻으로 다윗은 말씀합니다.
참으로 영광이 있는 자, 권능이 있는 자!
그들은 자기로 인해서 그러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고 해서 자기가 물 위를 걸은 것입니까? 주님이 붙들어 주시는 은혜 속에 걸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마른땅처럼 걸어갔지만 자기의 어떠함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놀라움 때문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간 것이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이나 똑같은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권능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여호수아서의 수많은 전투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힘으로 하면 아이성의 실패 때문에 땅에 머리 맞대고 먼지 뒤집어쓰며 슬퍼했던 그들과 같은 모습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붙드심과 주님의 능력으로 전투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얻는 것처럼, 유업을 받는 것처럼 기쁨으로 진행해 갈 수 있을 줄 압니다.
시편 29편의 삶의 실상은 이러합니다.
홍수 때 물 위에 좌정하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이는 파도가 거세게 일고 바람 부는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만들어주십니다.
홍수! 그것은 사람이 감당키 어려운 것입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정확히 보면, 주님은 참으로 그 홍수 위에 자리 잡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속하고 주님을 앙망하므로, 나의 주님과 함께 그 홍수 위를 영광스럽게 걸어갈 수 있는 자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여야 합니다.
내가 지난밤에 받은 능력으로, 아닙니다.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 때문에 그 주님을 바라볼 때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습니다.
오늘 이 세상의 어떠함이 아무리 휘몰아쳐 와도 파도요 홍수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서 주시는 영토가 물속이 아니고 물 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믿음으로 자리 잡고, 내 주님과 연합하여 내 주님과 동행하는 자로, 이사야 56장 말씀처럼 오늘도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내 주님 기뻐하면서 내 주님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으로 언약을 굳게 붙들고 간다면, 여러분은 이 땅의 열조들과 같은 사람들이 결단코 아닙니다.
시편 30편의 다윗은 그가 주님 은혜로 산과 같이 견고히 서서 걸어왔던 자인데 그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수많은 바람과 내리치는 폭풍우 속에도 산은 끄떡없이 있듯이, 내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산과 같이 서 있었는데 주님께서 얼굴을 가리우시니 근심했다는 것입니다. 환경과 여건이 어렵지 않아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전서 2장 말씀처럼 주님 안에서 우리는 빛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처럼 주님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얼굴빛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시편 32편 7절 이하의 말씀처럼 주님 안에서 내 영혼이 주님의 얼굴빛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주님은 우리의 의지이십니다.
이때 여러분과 저는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세상이 어떠해도 산과 같이 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흔들리는 갈대 같고 꺼져가는 등불 같은 그런 삶은 아닙니다. 강한 삶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예수님 안에서 주님 얼굴빛으로 충만하고, 자유가 있고, 주님이 내 믿음이 되시고, 행복이 있는 이런 자로 우리가 걸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시편 28편에서 우리는 짤막하게 한 부분을 좀 더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시편 28편 마지막 부분은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란 짤막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무 당연한 말씀이고 너무 쉬운 말씀이기에 스쳐 지나가기가 쉽습니다. 구원이니, 복이니, 목자니, 붙들어 세워달란 것이니 다 너무 단순하고 쉬운 낱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조금만 생각해 보세요.
주님의 은혜 속에 살아온 이는 끊임없는 그의 백성이면서 주님의 구원 속에 살아가고자 합니다. 정말 주님의 구원 속에 살아가고자 합니다!
어제 아무리 은혜 속에 살았어도 오늘도 주님의 구원 속에 살아가고자 합니다.
어제 아무리 주의 축복 속에 살았어도 오늘도 주님의 축복하심을 기대하고 싶습니다.
어제도 함께 하여 주시고 밤에도 함께해 주신 목자라도 오늘도 내 목자이신 주님을 꽉 붙들고 살고 싶습니다.
어제도 그분이 붙들어 주시는 영광 속에 살아왔지만 오늘도 날 붙들어 달라고 참으로 주님 날 붙들어 주시라고 간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제의 은혜를 알 뿐만 아니라 오늘 주님의 은혜를 앙망하는 강한 자세입니다.
필요합니다. 정말 필요합니다!
이런 내용이 주님은 날마다 구원을 주시는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란 시편 68편이고요, 이런 내용이 주님께서 열납하시는 때를 알고 주님께 찬송 부를 줄 아는 이가 내 주님께 참으로 부르짖어 간구하고 있는 시편 69편이고요, 이런 내용이 “주님, 속히! 주님, 지금!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시라고 시간시간 주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시편 70편입니다.
여러분!
2015년도가 이런 하루하루 이런 순간순간들로 진행되기를 권합니다.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실 줄 압니다.
보잘것없었던 이 작은 마음이
삼동교회 유 오 순 집사님
이 땅 삶의 터전이
아무리 견고하게 산다고 하지만
주님의 이름이 가슴에 없을 땐
헛되고 슬픔만입니다.
이 땅 가진 것이 부족함 없을지라도
내 것이라고 할 땐
조용한 바람 불어도 날아가 버릴
보이지 않는 먼지입니다.
내 가슴으로 품는
나 스스로의 꾸려진 사랑의 울타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아픔만 남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가슴으로 이루어가는 사랑은
때론 가시밭 걷는 그 아픔과
고통의 시간이 따른다 할지라도
그 길에 주님 십자가 은총의
참된 마음의 안식과 위로가 있습니다.
자기중심 속에 품고 있는 이웃사람.
주님 심장 품고 그들 향해 손 내밀어 줄 때
애타게 기다리시고
뜨거운 사랑 쏟아부어 주시고자
메말라하는 그들 손잡아 주십니다.
주님 발 앞에 앉아 있을 때
요란하고 참 조용치 못한 이 땅이지만
내게 관계할만한 일 아니기에
주님 앞에 마음 모아봅니다.
보잘것없었던 이 작은 마음에
오늘도 지금 이 순간도
새벽별 되신 주님 은혜 이슬을
쉼 없이 맞으며 주님 기다립니다.
아무리 견고하게 산다고 하지만
주님의 이름이 가슴에 없을 땐
헛되고 슬픔만입니다.
이 땅 가진 것이 부족함 없을지라도
내 것이라고 할 땐
조용한 바람 불어도 날아가 버릴
보이지 않는 먼지입니다.
내 가슴으로 품는
나 스스로의 꾸려진 사랑의 울타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아픔만 남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가슴으로 이루어가는 사랑은
때론 가시밭 걷는 그 아픔과
고통의 시간이 따른다 할지라도
그 길에 주님 십자가 은총의
참된 마음의 안식과 위로가 있습니다.
자기중심 속에 품고 있는 이웃사람.
주님 심장 품고 그들 향해 손 내밀어 줄 때
애타게 기다리시고
뜨거운 사랑 쏟아부어 주시고자
메말라하는 그들 손잡아 주십니다.
주님 발 앞에 앉아 있을 때
요란하고 참 조용치 못한 이 땅이지만
내게 관계할만한 일 아니기에
주님 앞에 마음 모아봅니다.
보잘것없었던 이 작은 마음에
오늘도 지금 이 순간도
새벽별 되신 주님 은혜 이슬을
쉼 없이 맞으며 주님 기다립니다.
주님은 내게…
강현교회 최 행 옥 권사님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마음으로 찬양 드리고 싶은 분이고요,
나를 가장 잘 아시므로
내가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믿고 의지할 분이십니다.
내가 힘들 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함께해 주시는 분.
참된 삶을 알게 해 주시고
마음에 평강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세미한 마음의 소리를 듣고 자 하는
민감함을 주십니다.
남은 인생길,
소망을 가지고 함께 길을 가고 싶은 분.
주님은 내게 이런 분이십니다.
그러나
삶으로 살아드리지 못함에 부끄러운 나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내게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마음으로 찬양 드리고 싶은 분이고요,
나를 가장 잘 아시므로
내가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믿고 의지할 분이십니다.
내가 힘들 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함께해 주시는 분.
참된 삶을 알게 해 주시고
마음에 평강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세미한 마음의 소리를 듣고 자 하는
민감함을 주십니다.
남은 인생길,
소망을 가지고 함께 길을 가고 싶은 분.
주님은 내게 이런 분이십니다.
그러나
삶으로 살아드리지 못함에 부끄러운 나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내게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만 모시고 싶습니다
삼동교회 김 훤 자매님
예수님!
저는 이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많이 못 듣습니다.
예수님!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제 마음에 비추어주십니다.
이 세상은
저를 보이는 것으로 많이 유혹합니다.
그렇지만 그 유혹 따라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 맘을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저는 이 세상의 변화에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 소리들은 몰라도 되거든요.
제 마음에
예수님을 찾는 맘 아닐 때가 저는 무섭거든요.
예수님의 마음에 맞추어 살아야 하거든요.
2015년이라고 해서 세상은 시끄럽게 요란해요.
하지만 제 마음은
예수님께만 마음 맞추어 살렵니다.
이렇게 살면
들리는 소리 많지 않아도
예수님과 기쁘게 살 수 있거든요.
예수님!
저와 함께 살아주셔요.
저는 이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많이 못 듣습니다.
예수님!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제 마음에 비추어주십니다.
이 세상은
저를 보이는 것으로 많이 유혹합니다.
그렇지만 그 유혹 따라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 맘을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저는 이 세상의 변화에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 소리들은 몰라도 되거든요.
제 마음에
예수님을 찾는 맘 아닐 때가 저는 무섭거든요.
예수님의 마음에 맞추어 살아야 하거든요.
2015년이라고 해서 세상은 시끄럽게 요란해요.
하지만 제 마음은
예수님께만 마음 맞추어 살렵니다.
이렇게 살면
들리는 소리 많지 않아도
예수님과 기쁘게 살 수 있거든요.
예수님!
저와 함께 살아주셔요.
나의 좁음
우리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넓은 길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계시록 22장 말씀을 인용하면 내가 주님의 그 보혈의 은총으로 우리의 얼룩진 두루마기를 빨았나요?
이때 우리는 이 세상에 자리 잡을 곳이 없습니다. 진실된 마음이라면 생명나무이신 주님뿐입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라고 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참된 마음으로, 용서받은 마음으로, 구속받은 그 마음으로 진실하게 살고자 한다면 우리 하나님은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생명나무로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속받은 자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정결케 된 자가 이 땅에 자리 잡을 곳은 많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리 잡을 곳은 참으로 유일하신 참 포도나무 되신, 생명나무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안에 그 주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22장에서 이 생명나무에 속한 이들의 삶을 가리켜 말씀할 때 그다음은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라고 하시었습니다.
이 문은 넓은 문입니까? 좁은 문입니까?
두말할 것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3장에서 가리켜 말씀하신 좁은 문입니다.
이 ‘좁다’란 말씀의 의미는 무슨 말일까요?
요한복음 10장 말씀에 양에게 있어서 만은 예수님께서 “내가 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음성이 들리기 전에는 우리의 출발이 없습니다. 문이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문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일과를 마치고 오늘의 일과를 마쳤다고 하는 것도 주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문입니다.
그래서 주님만이 문이란 의미에서 이것은 좁은 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언제나 주님께 속하여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다가 거룩한 하늘나라에 가게 된다는 말씀인 줄 압니다.
좁은 문, 좁은 길!
얼마나 우리가 되새겨 보고 싶은 참된 것인가요!
여러분!
이사야에서 한 세 군데만 귀중한 이 좁음의 의미를 이끌어 보려고 합니다.
순서를 자유롭게 하면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사야 6장 말씀에 보면 이사야가 제단 숯불에 입술을 댐으로 마침내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그 정결하게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의 귀중성은 무엇일까요?
다른 말씀이 아니라 그 성전에 정결한 자로 참여할 수 있다는 말씀인 줄 압니다. 우리가 사실 제단 숯불 없이 정결하게 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도대체 제단 숯불이 무엇이길래 그 제단 숯불이 자기를 부정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불가능한 자임을 알까요?
웃시야 왕처럼 죽임을 당할 만한 그런 자인데 (사실 이사야 6장의 웃시야 왕은 부정한 자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갔다가 그는 문둥이 되어서 마침내 버림받고야 말았습니다. 차라리 “나는 부정합니다. 부정합니다. 나는 감당치 못합니다. 하나님의 존전에 못 나갑니다.”라고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살려 주셨을 것 같습니다.) 이제 뜻하지 않게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광경을 본 이사야로 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나 해답은 제단 숯불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장차 우리의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우리의 허물과 죄를 씻어 줄 수 있는 유일한 구속이 될 수 있음을 예언하여 주신 내용입니다.
같은 성서인 이사야 6장의 제단 숯불은 이사야 53장의 우리 주님의 그 십자가에서 찢어지는 그 은총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히셔서 찢어지실 때 주님의 몸을 불사름을 가리켜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러나 그 제단 숯불은 지금도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나무가 타버리고 난 이후에 숯불이 남듯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구속의 은총의 영향력은 지금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십자가로 인하여 정결하게 되는 것은 효험이 다 끝나버린 것입니다.
아닙니다.
제단 숯불은 지금도 타오르고 있습니다.
생생합니다. 그 십자가의 그 뜨거운 사랑을 우리가 마음으로 영접하여 맞이한다면 우리도 정결하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정결하게 된 우리가 속할 곳은 어디입니까?
성전입니다.
요한 계시록 11장은 우리 삶의 어떠함을 단정 지어 말씀하십니다. 제단을 통하여 성전에 들어가 그 속에서 경배하는 자!
그는 그곳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생활은 늘 그곳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근무지를 가도 농사를 지어도 장사를 해도 제단 숯불로 인해서 이제 성전된 주님께 들어간 이는 내 주님 안에 속한 이 삶을 벗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 성전 되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그 마음을 가지고 은혜 속에 산다는 것입니다.
이곳에 생명수의 흐름이 있습니다.
이곳에 하나님께서 늘 계수할만한, 측량할 만한 가치 있는 삶이 날마다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 11장 말씀처럼 우리가 성전 뜰만 밟고 있다면 그것은 제단과 그 제단 숯불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고요.
오늘도 이를 통하여 나아갈 수 있는 성전된 그리스도 안, 부활하신 주님 안에 속한다는 이 은혜는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 속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내 마음대로 사는 부정한 자는 세상이 넓어 보이겠지요. 그러나 제단에 속하여 나아가서 제단 숯불로 나를 정결케 하고, 그 사랑에 나도 동참하고, 더 나아가서 성전 되신 예수님 안에서 높이 들린 하늘 보좌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 부여잡고 사는 이 생활은, 세상 것 붙들지 않고 세상 것 내 것이라 말하지도 않지만, 가장 부요하고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은혜로 충만한 생활인 줄 압니다. 좁음!
이제 이사야가 6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땅에 우리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의 거라사인이 귀신 들린 가운데서 자유롭게 되고 난 이후에 그가 자기의 가족, 자기의 친척, 자기의 친구, 자기의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역할이 있을 수 있듯이, 우리에게는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 가까운 곳에 보냄 받은 삶으로 우리를 보내실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악하다고 해서 세상이 패역하다고 해서 나도 악하고 패역한 생활밖에 못산다면 우리는 보냄 받은 자는 결단코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전된 주님께 속하여 내 하나님 공경할 수 있는 거룩하고도, 깨끗하고도, 경건하고도 그리고 의롭고도 맑은 생활!
이것을 가지고 간다면 우리가 가서 사는 생활자체가 빛이 되고 소금될 수 있을 줄 압니다. 이사야처럼 엄청난 예언은 못해도 예수님께 속한 자! 제단 숯불로 정결하게 된 자! 성전 되신 주님께 속한 이는 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좁음을 벗어나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아갈 때는 주님을 옷 입고 주님과 함께란 걸음으로 나아가는 걸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이끌려 가는 걸음입니다.
이 좁음을 벗어나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사야 5장 말씀에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연하여 짓고 전토에 전토를 연하여 가져서 땅에 홀로 거하려고 하는 욕심꾸러기가 있습니다.
이방사람을 가리킨 말씀이 아닙니다.
성도가 자기에게 돌아오면 육신의 욕심은 늘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도 행하는 것은 자비가 아니고 포학과 부르짖음이라고 하시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기업이라도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은혜 속에 있더라도 자기에게 돌아와 버리고 만다면, 우리는 밑 빠진 웅덩이 같은 욕심이 우리 마음에 끓어오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좁음 속에 살아야 합니다.
같은 장 이사야 5장 말씀에 극상품 포도나무라고 하시는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사울이 왕위에 나아갈 때 극상품 포도나무 같은 주님께 속한 자였습니다 마는, 그는 왕위에 앉고 난 이후에 자기에게로 돌아가고야 말았습니다. 다윗도 주님께 속함이란 이 좁음 속에서 머물지 않는다면, 그는 이웃집 넘겨다보며 그 집을 파괴하는 참으로 포학한 자로 전락하고야 맙니다.
우리의 삶을 살 곳은 진정 좁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입니다.
생명나무이신 주님 안입니다.
그 좁음 속에 예수님과 연합해서 나의 주님과 함께 날 사랑하시고 날 기억하시고 날 축복하시는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망대같이 끊임없이 바라보는, 한때 왔다 가버리는 야곱 같은 기도가 아니고, 저 시온 산성처럼 솟아올라 늘 향하는 산꼭대기 위에 자리 잡았던 엘리야처럼 늘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여러분!
이 좁음 속에 있을 때 우리 영혼이 언제나 기름집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빛이 충만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주저앉고자 하는 자가 아닙니다. 섬기고자 하는 자입니다.
이것을 표현할 때 ‘즙틀’이라고 표현합니다. 짜서라도 주님 뜻 따라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넓게 영토를 차지하고 살고자 하는 이! 주님은 울타리를 걷어치우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들짐승들이 점령하도록 내버려 두신답니다.
기억하십시오!
좁음 속에서 내주님과 함께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며 그 은혜 속에 있는 우리에게는 주님은 놀라운 생명나무 되어 주시고, 그분의 생명을 나의 생명으로 삼고 사는 아름다운 생활, 아름다운 기도, 아름다운 열매 가득할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우리 농부 되어 주시는, 보호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고 지켜주시는 놀라운 은총이 이 좁음 속에 있음을 잊지 마시기를 원합니다.
한 가지 더 ‘좁음’이란 말씀을 이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사야 4장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4장 말씀 앞부분은 심판 당한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참된 내 하나님의 백성을 원하시지 이름뿐인, 그래서 생활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다면, 그것은 진정 나에게 생명나무나 성전으로 만나주시는 주님이 아니라 도리어 심판으로 만나는 무서운 우리 하나님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이사야 4장에서 여러 여인들이 한 남편의 이름 속에 머물고자 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전쟁으로 남자들이 많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소멸하는 영, 심판하는 영, 이런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장에서 말입니다.
여러분!
아주 쉽게 말씀드려서 우리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 말씀에서 “이제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 안에서 세상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세상에 속한 나!
나 자신에게 속한 나!
그래서 그러한 것에 이끌려 살던 나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그 심판 속에서 나도 심판받는 자로 기꺼이 감사하므로 그 심판 속에 지나가고자 한다면!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 예수님의 무덤을 나의 무덤으로 여긴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에 속한 자, 세상에 속한 자를 심판해 주시는 은혜를 얻을 수 있을 줄 압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심판의 영은 지금은 우리에게 참으로 밝은 사랑과 온유함의 영으로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실 수 있는 줄 압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여기 ‘소멸하는 영’이란 말씀도 잠깐만 우리가 되새겨 보는 것 도움 되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고린도 전서 7장이나 9장 말씀에서도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주어진 환경과 여건 가운데 전부다 내 마음이 매여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께 속한 이 영광스러운, 참으로 내주님 기쁘시게 산다란 이 값진 삶은 못살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필요한 것이 있어 무엇을 산다할지라도,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런 저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주변에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이 다 있다 할지라도, 내 마음으로 그러한 것에 묶이지 않는, 참으로 살아계신 주께 속하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고린도 전서 9장 말씀처럼 오늘도 내가 육체속에 머물지만 육체의 연약함이나 육체의 그 어떠함에 이끌려 가지 아니하고 나를 쳐서 주님께 복종해 가는!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강한 마음으로 내 주님께 다스림 받는 삶속에 서있다면 우리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내 주님께 속하여 주님 모신 마음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생생할 것입니다.
이사야 4장의 심판하는 영, 소멸하는 영.
그리고 또 한편 주님과 함께 그의 돕는 이로, 그가 뜻하시는 그 섬김에 그가 뜻하시는 그 모임에 우리는 주님의 돕는 이로 섬길 수 있는 생생한 영광이 있을 줄 압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곱씹어본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 살아계신 주께 속하여 살아계신 주님 모신 그 삶 가운데서 오늘 나에게 주어진 허락된 현실이라도 내 마음 그러한 것에 묶이지 아니하고, 나의 연약함이나 나의 곤함이나 나의 어떠함에 내 마음이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나를 쳐서라도 주님께 이끌려 가는 이 좁음 속에 걸어갈 그때 여러분의 걸음걸음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의 기쁨이 되는 영광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줄 압니다.
좁음! 정말 필요합니다.
좁음!! 정말 우리 마음속에 요긴하고 참으로 추구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곳에서 주님의 백성이란, 주님의 사람이란 이름과 주님의 긍휼이 여러분에게 늘 새롭게 가깝다는 축복됨을 유지하시기를 권합니다.
요한 계시록 22장 말씀을 인용하면 내가 주님의 그 보혈의 은총으로 우리의 얼룩진 두루마기를 빨았나요?
이때 우리는 이 세상에 자리 잡을 곳이 없습니다. 진실된 마음이라면 생명나무이신 주님뿐입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라고 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참된 마음으로, 용서받은 마음으로, 구속받은 그 마음으로 진실하게 살고자 한다면 우리 하나님은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생명나무로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속받은 자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정결케 된 자가 이 땅에 자리 잡을 곳은 많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리 잡을 곳은 참으로 유일하신 참 포도나무 되신, 생명나무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안에 그 주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22장에서 이 생명나무에 속한 이들의 삶을 가리켜 말씀할 때 그다음은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라고 하시었습니다.
이 문은 넓은 문입니까? 좁은 문입니까?
두말할 것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3장에서 가리켜 말씀하신 좁은 문입니다.
이 ‘좁다’란 말씀의 의미는 무슨 말일까요?
요한복음 10장 말씀에 양에게 있어서 만은 예수님께서 “내가 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음성이 들리기 전에는 우리의 출발이 없습니다. 문이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문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일과를 마치고 오늘의 일과를 마쳤다고 하는 것도 주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문입니다.
그래서 주님만이 문이란 의미에서 이것은 좁은 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언제나 주님께 속하여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다가 거룩한 하늘나라에 가게 된다는 말씀인 줄 압니다.
좁은 문, 좁은 길!
얼마나 우리가 되새겨 보고 싶은 참된 것인가요!
여러분!
이사야에서 한 세 군데만 귀중한 이 좁음의 의미를 이끌어 보려고 합니다.
순서를 자유롭게 하면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사야 6장 말씀에 보면 이사야가 제단 숯불에 입술을 댐으로 마침내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그 정결하게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의 귀중성은 무엇일까요?
다른 말씀이 아니라 그 성전에 정결한 자로 참여할 수 있다는 말씀인 줄 압니다. 우리가 사실 제단 숯불 없이 정결하게 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도대체 제단 숯불이 무엇이길래 그 제단 숯불이 자기를 부정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불가능한 자임을 알까요?
웃시야 왕처럼 죽임을 당할 만한 그런 자인데 (사실 이사야 6장의 웃시야 왕은 부정한 자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갔다가 그는 문둥이 되어서 마침내 버림받고야 말았습니다. 차라리 “나는 부정합니다. 부정합니다. 나는 감당치 못합니다. 하나님의 존전에 못 나갑니다.”라고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살려 주셨을 것 같습니다.) 이제 뜻하지 않게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광경을 본 이사야로 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나 해답은 제단 숯불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장차 우리의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우리의 허물과 죄를 씻어 줄 수 있는 유일한 구속이 될 수 있음을 예언하여 주신 내용입니다.
같은 성서인 이사야 6장의 제단 숯불은 이사야 53장의 우리 주님의 그 십자가에서 찢어지는 그 은총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히셔서 찢어지실 때 주님의 몸을 불사름을 가리켜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러나 그 제단 숯불은 지금도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나무가 타버리고 난 이후에 숯불이 남듯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구속의 은총의 영향력은 지금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십자가로 인하여 정결하게 되는 것은 효험이 다 끝나버린 것입니다.
아닙니다.
제단 숯불은 지금도 타오르고 있습니다.
생생합니다. 그 십자가의 그 뜨거운 사랑을 우리가 마음으로 영접하여 맞이한다면 우리도 정결하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정결하게 된 우리가 속할 곳은 어디입니까?
성전입니다.
요한 계시록 11장은 우리 삶의 어떠함을 단정 지어 말씀하십니다. 제단을 통하여 성전에 들어가 그 속에서 경배하는 자!
그는 그곳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생활은 늘 그곳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근무지를 가도 농사를 지어도 장사를 해도 제단 숯불로 인해서 이제 성전된 주님께 들어간 이는 내 주님 안에 속한 이 삶을 벗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 성전 되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그 마음을 가지고 은혜 속에 산다는 것입니다.
이곳에 생명수의 흐름이 있습니다.
이곳에 하나님께서 늘 계수할만한, 측량할 만한 가치 있는 삶이 날마다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 11장 말씀처럼 우리가 성전 뜰만 밟고 있다면 그것은 제단과 그 제단 숯불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고요.
오늘도 이를 통하여 나아갈 수 있는 성전된 그리스도 안, 부활하신 주님 안에 속한다는 이 은혜는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 속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내 마음대로 사는 부정한 자는 세상이 넓어 보이겠지요. 그러나 제단에 속하여 나아가서 제단 숯불로 나를 정결케 하고, 그 사랑에 나도 동참하고, 더 나아가서 성전 되신 예수님 안에서 높이 들린 하늘 보좌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 부여잡고 사는 이 생활은, 세상 것 붙들지 않고 세상 것 내 것이라 말하지도 않지만, 가장 부요하고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은혜로 충만한 생활인 줄 압니다. 좁음!
이제 이사야가 6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땅에 우리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의 거라사인이 귀신 들린 가운데서 자유롭게 되고 난 이후에 그가 자기의 가족, 자기의 친척, 자기의 친구, 자기의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역할이 있을 수 있듯이, 우리에게는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 가까운 곳에 보냄 받은 삶으로 우리를 보내실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악하다고 해서 세상이 패역하다고 해서 나도 악하고 패역한 생활밖에 못산다면 우리는 보냄 받은 자는 결단코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전된 주님께 속하여 내 하나님 공경할 수 있는 거룩하고도, 깨끗하고도, 경건하고도 그리고 의롭고도 맑은 생활!
이것을 가지고 간다면 우리가 가서 사는 생활자체가 빛이 되고 소금될 수 있을 줄 압니다. 이사야처럼 엄청난 예언은 못해도 예수님께 속한 자! 제단 숯불로 정결하게 된 자! 성전 되신 주님께 속한 이는 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좁음을 벗어나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아갈 때는 주님을 옷 입고 주님과 함께란 걸음으로 나아가는 걸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이끌려 가는 걸음입니다.
이 좁음을 벗어나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사야 5장 말씀에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연하여 짓고 전토에 전토를 연하여 가져서 땅에 홀로 거하려고 하는 욕심꾸러기가 있습니다.
이방사람을 가리킨 말씀이 아닙니다.
성도가 자기에게 돌아오면 육신의 욕심은 늘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도 행하는 것은 자비가 아니고 포학과 부르짖음이라고 하시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기업이라도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은혜 속에 있더라도 자기에게 돌아와 버리고 만다면, 우리는 밑 빠진 웅덩이 같은 욕심이 우리 마음에 끓어오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좁음 속에 살아야 합니다.
같은 장 이사야 5장 말씀에 극상품 포도나무라고 하시는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사울이 왕위에 나아갈 때 극상품 포도나무 같은 주님께 속한 자였습니다 마는, 그는 왕위에 앉고 난 이후에 자기에게로 돌아가고야 말았습니다. 다윗도 주님께 속함이란 이 좁음 속에서 머물지 않는다면, 그는 이웃집 넘겨다보며 그 집을 파괴하는 참으로 포학한 자로 전락하고야 맙니다.
우리의 삶을 살 곳은 진정 좁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입니다.
생명나무이신 주님 안입니다.
그 좁음 속에 예수님과 연합해서 나의 주님과 함께 날 사랑하시고 날 기억하시고 날 축복하시는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망대같이 끊임없이 바라보는, 한때 왔다 가버리는 야곱 같은 기도가 아니고, 저 시온 산성처럼 솟아올라 늘 향하는 산꼭대기 위에 자리 잡았던 엘리야처럼 늘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여러분!
이 좁음 속에 있을 때 우리 영혼이 언제나 기름집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빛이 충만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주저앉고자 하는 자가 아닙니다. 섬기고자 하는 자입니다.
이것을 표현할 때 ‘즙틀’이라고 표현합니다. 짜서라도 주님 뜻 따라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넓게 영토를 차지하고 살고자 하는 이! 주님은 울타리를 걷어치우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들짐승들이 점령하도록 내버려 두신답니다.
기억하십시오!
좁음 속에서 내주님과 함께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며 그 은혜 속에 있는 우리에게는 주님은 놀라운 생명나무 되어 주시고, 그분의 생명을 나의 생명으로 삼고 사는 아름다운 생활, 아름다운 기도, 아름다운 열매 가득할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우리 농부 되어 주시는, 보호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고 지켜주시는 놀라운 은총이 이 좁음 속에 있음을 잊지 마시기를 원합니다.
한 가지 더 ‘좁음’이란 말씀을 이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사야 4장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4장 말씀 앞부분은 심판 당한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참된 내 하나님의 백성을 원하시지 이름뿐인, 그래서 생활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다면, 그것은 진정 나에게 생명나무나 성전으로 만나주시는 주님이 아니라 도리어 심판으로 만나는 무서운 우리 하나님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이사야 4장에서 여러 여인들이 한 남편의 이름 속에 머물고자 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전쟁으로 남자들이 많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소멸하는 영, 심판하는 영, 이런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장에서 말입니다.
여러분!
아주 쉽게 말씀드려서 우리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 말씀에서 “이제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 안에서 세상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세상에 속한 나!
나 자신에게 속한 나!
그래서 그러한 것에 이끌려 살던 나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그 심판 속에서 나도 심판받는 자로 기꺼이 감사하므로 그 심판 속에 지나가고자 한다면!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 예수님의 무덤을 나의 무덤으로 여긴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에 속한 자, 세상에 속한 자를 심판해 주시는 은혜를 얻을 수 있을 줄 압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심판의 영은 지금은 우리에게 참으로 밝은 사랑과 온유함의 영으로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실 수 있는 줄 압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여기 ‘소멸하는 영’이란 말씀도 잠깐만 우리가 되새겨 보는 것 도움 되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고린도 전서 7장이나 9장 말씀에서도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주어진 환경과 여건 가운데 전부다 내 마음이 매여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께 속한 이 영광스러운, 참으로 내주님 기쁘시게 산다란 이 값진 삶은 못살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필요한 것이 있어 무엇을 산다할지라도,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런 저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주변에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이 다 있다 할지라도, 내 마음으로 그러한 것에 묶이지 않는, 참으로 살아계신 주께 속하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고린도 전서 9장 말씀처럼 오늘도 내가 육체속에 머물지만 육체의 연약함이나 육체의 그 어떠함에 이끌려 가지 아니하고 나를 쳐서 주님께 복종해 가는!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강한 마음으로 내 주님께 다스림 받는 삶속에 서있다면 우리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내 주님께 속하여 주님 모신 마음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생생할 것입니다.
이사야 4장의 심판하는 영, 소멸하는 영.
그리고 또 한편 주님과 함께 그의 돕는 이로, 그가 뜻하시는 그 섬김에 그가 뜻하시는 그 모임에 우리는 주님의 돕는 이로 섬길 수 있는 생생한 영광이 있을 줄 압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곱씹어본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 살아계신 주께 속하여 살아계신 주님 모신 그 삶 가운데서 오늘 나에게 주어진 허락된 현실이라도 내 마음 그러한 것에 묶이지 아니하고, 나의 연약함이나 나의 곤함이나 나의 어떠함에 내 마음이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나를 쳐서라도 주님께 이끌려 가는 이 좁음 속에 걸어갈 그때 여러분의 걸음걸음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의 기쁨이 되는 영광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줄 압니다.
좁음! 정말 필요합니다.
좁음!! 정말 우리 마음속에 요긴하고 참으로 추구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곳에서 주님의 백성이란, 주님의 사람이란 이름과 주님의 긍휼이 여러분에게 늘 새롭게 가깝다는 축복됨을 유지하시기를 권합니다.
좁은 길
조 병 례 집사님
우리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넓은 길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계시록 22장 말씀을 인용하면 내가 주님의 그 보혈의 은총으로 우리의 얼룩진 두루마기를 빨았나요?
이때 우리는 이 세상에 자리 잡을 곳이 없습니다. 진실된 마음이라면 생명나무이신 주님뿐입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라고 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참된 마음으로, 용서받은 마음으로, 구속받은 그 마음으로 진실하게 살고자 한다면 우리 하나님은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생명나무로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속받은 자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정결케 된 자가 이 땅에 자리 잡을 곳은 많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리 잡을 곳은 참으로 유일하신 참 포도나무 되신, 생명나무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안에 그 주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22장에서 이 생명나무에 속한 이들의 삶을 가리켜 말씀할 때 그다음은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라고 하시었습니다.
이 문은 넓은 문입니까? 좁은 문입니까?
두말할 것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3장에서 가리켜 말씀하신 좁은 문입니다.
이 ‘좁다’란 말씀의 의미는 무슨 말일까요?
요한복음 10장 말씀에 양에게 있어서 만은 예수님께서 “내가 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음성이 들리기 전에는 우리의 출발이 없습니다. 문이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문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일과를 마치고 오늘의 일과를 마쳤다고 하는 것도 주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문입니다.
그래서 주님만이 문이란 의미에서 이것은 좁은 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언제나 주님께 속하여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다가 거룩한 하늘나라에 가게 된다는 말씀인 줄 압니다.
좁은 문, 좁은 길!
얼마나 우리가 되새겨 보고 싶은 참된 것인가요!
여러분!
이사야에서 한 세 군데만 귀중한 이 좁음의 의미를 이끌어 보려고 합니다.
순서를 자유롭게 하면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사야 6장 말씀에 보면 이사야가 제단 숯불에 입술을 댐으로 마침내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그 정결하게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의 귀중성은 무엇일까요?
다른 말씀이 아니라 그 성전에 정결한 자로 참여할 수 있다는 말씀인 줄 압니다. 우리가 사실 제단 숯불 없이 정결하게 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도대체 제단 숯불이 무엇이길래 그 제단 숯불이 자기를 부정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불가능한 자임을 알까요?
웃시야 왕처럼 죽임을 당할 만한 그런 자인데 (사실 이사야 6장의 웃시야 왕은 부정한 자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갔다가 그는 문둥이 되어서 마침내 버림받고야 말았습니다. 차라리 “나는 부정합니다. 부정합니다. 나는 감당치 못합니다. 하나님의 존전에 못 나갑니다.”라고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살려 주셨을 것 같습니다.) 이제 뜻하지 않게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광경을 본 이사야로 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나 해답은 제단 숯불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장차 우리의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우리의 허물과 죄를 씻어 줄 수 있는 유일한 구속이 될 수 있음을 예언하여 주신 내용입니다.
같은 성서인 이사야 6장의 제단 숯불은 이사야 53장의 우리 주님의 그 십자가에서 찢어지는 그 은총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히셔서 찢어지실 때 주님의 몸을 불사름을 가리켜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러나 그 제단 숯불은 지금도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나무가 타버리고 난 이후에 숯불이 남듯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구속의 은총의 영향력은 지금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십자가로 인하여 정결하게 되는 것은 효험이 다 끝나버린 것입니다.
아닙니다.
제단 숯불은 지금도 타오르고 있습니다.
생생합니다. 그 십자가의 그 뜨거운 사랑을 우리가 마음으로 영접하여 맞이한다면 우리도 정결하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정결하게 된 우리가 속할 곳은 어디입니까?
성전입니다.
요한 계시록 11장은 우리 삶의 어떠함을 단정 지어 말씀하십니다. 제단을 통하여 성전에 들어가 그 속에서 경배하는 자!
그는 그곳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생활은 늘 그곳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근무지를 가도 농사를 지어도 장사를 해도 제단 숯불로 인해서 이제 성전된 주님께 들어간 이는 내 주님 안에 속한 이 삶을 벗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 성전 되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그 마음을 가지고 은혜 속에 산다는 것입니다.
이곳에 생명수의 흐름이 있습니다.
이곳에 하나님께서 늘 계수할만한, 측량할 만한 가치 있는 삶이 날마다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 11장 말씀처럼 우리가 성전 뜰만 밟고 있다면 그것은 제단과 그 제단 숯불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고요.
오늘도 이를 통하여 나아갈 수 있는 성전된 그리스도 안, 부활하신 주님 안에 속한다는 이 은혜는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 속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내 마음대로 사는 부정한 자는 세상이 넓어 보이겠지요. 그러나 제단에 속하여 나아가서 제단 숯불로 나를 정결케 하고, 그 사랑에 나도 동참하고, 더 나아가서 성전 되신 예수님 안에서 높이 들린 하늘 보좌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 부여잡고 사는 이 생활은, 세상 것 붙들지 않고 세상 것 내 것이라 말하지도 않지만, 가장 부요하고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은혜로 충만한 생활인 줄 압니다. 좁음!
이제 이사야가 6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땅에 우리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의 거라사인이 귀신 들린 가운데서 자유롭게 되고 난 이후에 그가 자기의 가족, 자기의 친척, 자기의 친구, 자기의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역할이 있을 수 있듯이, 우리에게는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 가까운 곳에 보냄 받은 삶으로 우리를 보내실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악하다고 해서 세상이 패역하다고 해서 나도 악하고 패역한 생활밖에 못산다면 우리는 보냄 받은 자는 결단코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전된 주님께 속하여 내 하나님 공경할 수 있는 거룩하고도, 깨끗하고도, 경건하고도 그리고 의롭고도 맑은 생활!
이것을 가지고 간다면 우리가 가서 사는 생활자체가 빛이 되고 소금될 수 있을 줄 압니다. 이사야처럼 엄청난 예언은 못해도 예수님께 속한 자! 제단 숯불로 정결하게 된 자! 성전 되신 주님께 속한 이는 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좁음을 벗어나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아갈 때는 주님을 옷 입고 주님과 함께란 걸음으로 나아가는 걸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이끌려 가는 걸음입니다.
이 좁음을 벗어나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사야 5장 말씀에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연하여 짓고 전토에 전토를 연하여 가져서 땅에 홀로 거하려고 하는 욕심꾸러기가 있습니다.
이방사람을 가리킨 말씀이 아닙니다.
성도가 자기에게 돌아오면 육신의 욕심은 늘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도 행하는 것은 자비가 아니고 포학과 부르짖음이라고 하시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기업이라도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은혜 속에 있더라도 자기에게 돌아와 버리고 만다면, 우리는 밑 빠진 웅덩이 같은 욕심이 우리 마음에 끓어오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좁음 속에 살아야 합니다.
같은 장 이사야 5장 말씀에 극상품 포도나무라고 하시는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사울이 왕위에 나아갈 때 극상품 포도나무 같은 주님께 속한 자였습니다 마는, 그는 왕위에 앉고 난 이후에 자기에게로 돌아가고야 말았습니다. 다윗도 주님께 속함이란 이 좁음 속에서 머물지 않는다면, 그는 이웃집 넘겨다보며 그 집을 파괴하는 참으로 포학한 자로 전락하고야 맙니다.
우리의 삶을 살 곳은 진정 좁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입니다.
생명나무이신 주님 안입니다.
그 좁음 속에 예수님과 연합해서 나의 주님과 함께 날 사랑하시고 날 기억하시고 날 축복하시는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망대같이 끊임없이 바라보는, 한때 왔다 가버리는 야곱 같은 기도가 아니고, 저 시온 산성처럼 솟아올라 늘 향하는 산꼭대기 위에 자리 잡았던 엘리야처럼 늘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여러분!
이 좁음 속에 있을 때 우리 영혼이 언제나 기름집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빛이 충만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주저앉고자 하는 자가 아닙니다. 섬기고자 하는 자입니다.
이것을 표현할 때 ‘즙틀’이라고 표현합니다. 짜서라도 주님 뜻 따라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넓게 영토를 차지하고 살고자 하는 이! 주님은 울타리를 걷어치우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들짐승들이 점령하도록 내버려 두신답니다.
기억하십시오!
좁음 속에서 내주님과 함께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며 그 은혜 속에 있는 우리에게는 주님은 놀라운 생명나무 되어 주시고, 그분의 생명을 나의 생명으로 삼고 사는 아름다운 생활, 아름다운 기도, 아름다운 열매 가득할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우리 농부 되어 주시는, 보호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고 지켜주시는 놀라운 은총이 이 좁음 속에 있음을 잊지 마시기를 원합니다.
한 가지 더 ‘좁음’이란 말씀을 이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사야 4장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4장 말씀 앞부분은 심판 당한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참된 내 하나님의 백성을 원하시지 이름뿐인, 그래서 생활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다면, 그것은 진정 나에게 생명나무나 성전으로 만나주시는 주님이 아니라 도리어 심판으로 만나는 무서운 우리 하나님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이사야 4장에서 여러 여인들이 한 남편의 이름 속에 머물고자 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전쟁으로 남자들이 많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소멸하는 영, 심판하는 영, 이런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장에서 말입니다.
여러분!
아주 쉽게 말씀드려서 우리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 말씀에서 “이제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 안에서 세상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세상에 속한 나!
나 자신에게 속한 나!
그래서 그러한 것에 이끌려 살던 나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그 심판 속에서 나도 심판받는 자로 기꺼이 감사하므로 그 심판 속에 지나가고자 한다면!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 예수님의 무덤을 나의 무덤으로 여긴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에 속한 자, 세상에 속한 자를 심판해 주시는 은혜를 얻을 수 있을 줄 압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심판의 영은 지금은 우리에게 참으로 밝은 사랑과 온유함의 영으로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실 수 있는 줄 압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여기 ‘소멸하는 영’이란 말씀도 잠깐만 우리가 되새겨 보는 것 도움 되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고린도 전서 7장이나 9장 말씀에서도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주어진 환경과 여건 가운데 전부다 내 마음이 매여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께 속한 이 영광스러운, 참으로 내주님 기쁘시게 산다란 이 값진 삶은 못살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필요한 것이 있어 무엇을 산다할지라도,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런 저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주변에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이 다 있다 할지라도, 내 마음으로 그러한 것에 묶이지 않는, 참으로 살아계신 주께 속하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고린도 전서 9장 말씀처럼 오늘도 내가 육체속에 머물지만 육체의 연약함이나 육체의 그 어떠함에 이끌려 가지 아니하고 나를 쳐서 주님께 복종해 가는!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강한 마음으로 내 주님께 다스림 받는 삶속에 서있다면 우리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내 주님께 속하여 주님 모신 마음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생생할 것입니다.
이사야 4장의 심판하는 영, 소멸하는 영.
그리고 또 한편 주님과 함께 그의 돕는 이로, 그가 뜻하시는 그 섬김에 그가 뜻하시는 그 모임에 우리는 주님의 돕는 이로 섬길 수 있는 생생한 영광이 있을 줄 압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곱씹어본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 살아계신 주께 속하여 살아계신 주님 모신 그 삶 가운데서 오늘 나에게 주어진 허락된 현실이라도 내 마음 그러한 것에 묶이지 아니하고, 나의 연약함이나 나의 곤함이나 나의 어떠함에 내 마음이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나를 쳐서라도 주님께 이끌려 가는 이 좁음 속에 걸어갈 그때 여러분의 걸음걸음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의 기쁨이 되는 영광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줄 압니다.
좁음! 정말 필요합니다.
좁음!! 정말 우리 마음속에 요긴하고 참으로 추구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곳에서 주님의 백성이란, 주님의 사람이란 이름과 주님의 긍휼이 여러분에게 늘 새롭게 가깝다는 축복됨을 유지하시기를 권합니다.
요한 계시록 22장 말씀을 인용하면 내가 주님의 그 보혈의 은총으로 우리의 얼룩진 두루마기를 빨았나요?
이때 우리는 이 세상에 자리 잡을 곳이 없습니다. 진실된 마음이라면 생명나무이신 주님뿐입니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라고 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참된 마음으로, 용서받은 마음으로, 구속받은 그 마음으로 진실하게 살고자 한다면 우리 하나님은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생명나무로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속받은 자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정결케 된 자가 이 땅에 자리 잡을 곳은 많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리 잡을 곳은 참으로 유일하신 참 포도나무 되신, 생명나무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안에 그 주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22장에서 이 생명나무에 속한 이들의 삶을 가리켜 말씀할 때 그다음은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라고 하시었습니다.
이 문은 넓은 문입니까? 좁은 문입니까?
두말할 것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3장에서 가리켜 말씀하신 좁은 문입니다.
이 ‘좁다’란 말씀의 의미는 무슨 말일까요?
요한복음 10장 말씀에 양에게 있어서 만은 예수님께서 “내가 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음성이 들리기 전에는 우리의 출발이 없습니다. 문이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문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일과를 마치고 오늘의 일과를 마쳤다고 하는 것도 주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문입니다.
그래서 주님만이 문이란 의미에서 이것은 좁은 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언제나 주님께 속하여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다가 거룩한 하늘나라에 가게 된다는 말씀인 줄 압니다.
좁은 문, 좁은 길!
얼마나 우리가 되새겨 보고 싶은 참된 것인가요!
여러분!
이사야에서 한 세 군데만 귀중한 이 좁음의 의미를 이끌어 보려고 합니다.
순서를 자유롭게 하면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사야 6장 말씀에 보면 이사야가 제단 숯불에 입술을 댐으로 마침내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그 정결하게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의 귀중성은 무엇일까요?
다른 말씀이 아니라 그 성전에 정결한 자로 참여할 수 있다는 말씀인 줄 압니다. 우리가 사실 제단 숯불 없이 정결하게 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도대체 제단 숯불이 무엇이길래 그 제단 숯불이 자기를 부정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불가능한 자임을 알까요?
웃시야 왕처럼 죽임을 당할 만한 그런 자인데 (사실 이사야 6장의 웃시야 왕은 부정한 자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갔다가 그는 문둥이 되어서 마침내 버림받고야 말았습니다. 차라리 “나는 부정합니다. 부정합니다. 나는 감당치 못합니다. 하나님의 존전에 못 나갑니다.”라고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살려 주셨을 것 같습니다.) 이제 뜻하지 않게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광경을 본 이사야로 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나 해답은 제단 숯불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장차 우리의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우리의 허물과 죄를 씻어 줄 수 있는 유일한 구속이 될 수 있음을 예언하여 주신 내용입니다.
같은 성서인 이사야 6장의 제단 숯불은 이사야 53장의 우리 주님의 그 십자가에서 찢어지는 그 은총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히셔서 찢어지실 때 주님의 몸을 불사름을 가리켜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러나 그 제단 숯불은 지금도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나무가 타버리고 난 이후에 숯불이 남듯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구속의 은총의 영향력은 지금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십자가로 인하여 정결하게 되는 것은 효험이 다 끝나버린 것입니다.
아닙니다.
제단 숯불은 지금도 타오르고 있습니다.
생생합니다. 그 십자가의 그 뜨거운 사랑을 우리가 마음으로 영접하여 맞이한다면 우리도 정결하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정결하게 된 우리가 속할 곳은 어디입니까?
성전입니다.
요한 계시록 11장은 우리 삶의 어떠함을 단정 지어 말씀하십니다. 제단을 통하여 성전에 들어가 그 속에서 경배하는 자!
그는 그곳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생활은 늘 그곳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근무지를 가도 농사를 지어도 장사를 해도 제단 숯불로 인해서 이제 성전된 주님께 들어간 이는 내 주님 안에 속한 이 삶을 벗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 성전 되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그 마음을 가지고 은혜 속에 산다는 것입니다.
이곳에 생명수의 흐름이 있습니다.
이곳에 하나님께서 늘 계수할만한, 측량할 만한 가치 있는 삶이 날마다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 11장 말씀처럼 우리가 성전 뜰만 밟고 있다면 그것은 제단과 그 제단 숯불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고요.
오늘도 이를 통하여 나아갈 수 있는 성전된 그리스도 안, 부활하신 주님 안에 속한다는 이 은혜는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 속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내 마음대로 사는 부정한 자는 세상이 넓어 보이겠지요. 그러나 제단에 속하여 나아가서 제단 숯불로 나를 정결케 하고, 그 사랑에 나도 동참하고, 더 나아가서 성전 되신 예수님 안에서 높이 들린 하늘 보좌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 부여잡고 사는 이 생활은, 세상 것 붙들지 않고 세상 것 내 것이라 말하지도 않지만, 가장 부요하고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은혜로 충만한 생활인 줄 압니다. 좁음!
이제 이사야가 6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땅에 우리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의 거라사인이 귀신 들린 가운데서 자유롭게 되고 난 이후에 그가 자기의 가족, 자기의 친척, 자기의 친구, 자기의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역할이 있을 수 있듯이, 우리에게는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 가까운 곳에 보냄 받은 삶으로 우리를 보내실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악하다고 해서 세상이 패역하다고 해서 나도 악하고 패역한 생활밖에 못산다면 우리는 보냄 받은 자는 결단코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전된 주님께 속하여 내 하나님 공경할 수 있는 거룩하고도, 깨끗하고도, 경건하고도 그리고 의롭고도 맑은 생활!
이것을 가지고 간다면 우리가 가서 사는 생활자체가 빛이 되고 소금될 수 있을 줄 압니다. 이사야처럼 엄청난 예언은 못해도 예수님께 속한 자! 제단 숯불로 정결하게 된 자! 성전 되신 주님께 속한 이는 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좁음을 벗어나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아갈 때는 주님을 옷 입고 주님과 함께란 걸음으로 나아가는 걸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이끌려 가는 걸음입니다.
이 좁음을 벗어나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사야 5장 말씀에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연하여 짓고 전토에 전토를 연하여 가져서 땅에 홀로 거하려고 하는 욕심꾸러기가 있습니다.
이방사람을 가리킨 말씀이 아닙니다.
성도가 자기에게 돌아오면 육신의 욕심은 늘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도 행하는 것은 자비가 아니고 포학과 부르짖음이라고 하시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기업이라도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은혜 속에 있더라도 자기에게 돌아와 버리고 만다면, 우리는 밑 빠진 웅덩이 같은 욕심이 우리 마음에 끓어오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좁음 속에 살아야 합니다.
같은 장 이사야 5장 말씀에 극상품 포도나무라고 하시는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사울이 왕위에 나아갈 때 극상품 포도나무 같은 주님께 속한 자였습니다 마는, 그는 왕위에 앉고 난 이후에 자기에게로 돌아가고야 말았습니다. 다윗도 주님께 속함이란 이 좁음 속에서 머물지 않는다면, 그는 이웃집 넘겨다보며 그 집을 파괴하는 참으로 포학한 자로 전락하고야 맙니다.
우리의 삶을 살 곳은 진정 좁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입니다.
생명나무이신 주님 안입니다.
그 좁음 속에 예수님과 연합해서 나의 주님과 함께 날 사랑하시고 날 기억하시고 날 축복하시는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망대같이 끊임없이 바라보는, 한때 왔다 가버리는 야곱 같은 기도가 아니고, 저 시온 산성처럼 솟아올라 늘 향하는 산꼭대기 위에 자리 잡았던 엘리야처럼 늘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여러분!
이 좁음 속에 있을 때 우리 영혼이 언제나 기름집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빛이 충만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주저앉고자 하는 자가 아닙니다. 섬기고자 하는 자입니다.
이것을 표현할 때 ‘즙틀’이라고 표현합니다. 짜서라도 주님 뜻 따라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넓게 영토를 차지하고 살고자 하는 이! 주님은 울타리를 걷어치우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들짐승들이 점령하도록 내버려 두신답니다.
기억하십시오!
좁음 속에서 내주님과 함께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며 그 은혜 속에 있는 우리에게는 주님은 놀라운 생명나무 되어 주시고, 그분의 생명을 나의 생명으로 삼고 사는 아름다운 생활, 아름다운 기도, 아름다운 열매 가득할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우리 농부 되어 주시는, 보호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고 지켜주시는 놀라운 은총이 이 좁음 속에 있음을 잊지 마시기를 원합니다.
한 가지 더 ‘좁음’이란 말씀을 이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사야 4장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4장 말씀 앞부분은 심판 당한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참된 내 하나님의 백성을 원하시지 이름뿐인, 그래서 생활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다면, 그것은 진정 나에게 생명나무나 성전으로 만나주시는 주님이 아니라 도리어 심판으로 만나는 무서운 우리 하나님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이사야 4장에서 여러 여인들이 한 남편의 이름 속에 머물고자 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전쟁으로 남자들이 많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소멸하는 영, 심판하는 영, 이런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4장에서 말입니다.
여러분!
아주 쉽게 말씀드려서 우리 예수님은 요한복음 12장 말씀에서 “이제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 안에서 세상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세상에 속한 나!
나 자신에게 속한 나!
그래서 그러한 것에 이끌려 살던 나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그 심판 속에서 나도 심판받는 자로 기꺼이 감사하므로 그 심판 속에 지나가고자 한다면!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 예수님의 무덤을 나의 무덤으로 여긴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에 속한 자, 세상에 속한 자를 심판해 주시는 은혜를 얻을 수 있을 줄 압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심판의 영은 지금은 우리에게 참으로 밝은 사랑과 온유함의 영으로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실 수 있는 줄 압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여기 ‘소멸하는 영’이란 말씀도 잠깐만 우리가 되새겨 보는 것 도움 되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고린도 전서 7장이나 9장 말씀에서도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주어진 환경과 여건 가운데 전부다 내 마음이 매여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께 속한 이 영광스러운, 참으로 내주님 기쁘시게 산다란 이 값진 삶은 못살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필요한 것이 있어 무엇을 산다할지라도,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런 저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주변에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이 다 있다 할지라도, 내 마음으로 그러한 것에 묶이지 않는, 참으로 살아계신 주께 속하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고린도 전서 9장 말씀처럼 오늘도 내가 육체속에 머물지만 육체의 연약함이나 육체의 그 어떠함에 이끌려 가지 아니하고 나를 쳐서 주님께 복종해 가는!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강한 마음으로 내 주님께 다스림 받는 삶속에 서있다면 우리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내 주님께 속하여 주님 모신 마음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생생할 것입니다.
이사야 4장의 심판하는 영, 소멸하는 영.
그리고 또 한편 주님과 함께 그의 돕는 이로, 그가 뜻하시는 그 섬김에 그가 뜻하시는 그 모임에 우리는 주님의 돕는 이로 섬길 수 있는 생생한 영광이 있을 줄 압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곱씹어본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 살아계신 주께 속하여 살아계신 주님 모신 그 삶 가운데서 오늘 나에게 주어진 허락된 현실이라도 내 마음 그러한 것에 묶이지 아니하고, 나의 연약함이나 나의 곤함이나 나의 어떠함에 내 마음이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나를 쳐서라도 주님께 이끌려 가는 이 좁음 속에 걸어갈 그때 여러분의 걸음걸음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의 기쁨이 되는 영광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줄 압니다.
좁음! 정말 필요합니다.
좁음!! 정말 우리 마음속에 요긴하고 참으로 추구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곳에서 주님의 백성이란, 주님의 사람이란 이름과 주님의 긍휼이 여러분에게 늘 새롭게 가깝다는 축복됨을 유지하시기를 권합니다.
주님의 성소에서
부산 수민교회 이 상 분 권사님
밤의 장막이 느린 호흡을 준비하면
세상 속에서 애쓰던 낮의 기억에
은밀한 마음 중심을 더듬어 봅니다.
한 척의 길을 놓치지 않고자 하였거든
스며나는 물가만을 서성인 연고인지
발목의 힘을 얻는 일천 척이며
무릎의 승리와 신실한 허리를 논하기가
아득한 듯하여 날개깃을 움츠립니다.
그래도 그럴 수는 없지요.
홍해를 가르시고 아모리의 왕을 치시고
제사장의 발로 요단을 멈추신 주님,
이스라엘을 아끼시고 언약을 이루신
주님이 함께하시거든 그럴 수는 없지요.
아이성을 넘지 못하면
온전한 이김은 기약이 없으니
오늘의 아이성을 무너뜨릴 때까지는
단창을 든 손을 거두지 못하지요.
창일한 강을 향한 인도하심,
그 한 척 한 척의 길을 놓치지 못하지요.
주님의 성소로 날개깃을 폅니다.
주님께서 피로 여신 성소로 날아갑니다.
그 거룩한 길,
주님이 함께하시는 빛의 길을 따라
주님을 뵙습니다.
그 옛날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이
어찌 그 여인만의 일이 되겠는지요.
내 심령의 향유는 주님을 모신 기쁨이니
이 밤도 내 기쁨을 주님의 발에 붓습니다.
세상 속에서 애쓰던 낮의 기억에
은밀한 마음 중심을 더듬어 봅니다.
한 척의 길을 놓치지 않고자 하였거든
스며나는 물가만을 서성인 연고인지
발목의 힘을 얻는 일천 척이며
무릎의 승리와 신실한 허리를 논하기가
아득한 듯하여 날개깃을 움츠립니다.
그래도 그럴 수는 없지요.
홍해를 가르시고 아모리의 왕을 치시고
제사장의 발로 요단을 멈추신 주님,
이스라엘을 아끼시고 언약을 이루신
주님이 함께하시거든 그럴 수는 없지요.
아이성을 넘지 못하면
온전한 이김은 기약이 없으니
오늘의 아이성을 무너뜨릴 때까지는
단창을 든 손을 거두지 못하지요.
창일한 강을 향한 인도하심,
그 한 척 한 척의 길을 놓치지 못하지요.
주님의 성소로 날개깃을 폅니다.
주님께서 피로 여신 성소로 날아갑니다.
그 거룩한 길,
주님이 함께하시는 빛의 길을 따라
주님을 뵙습니다.
그 옛날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이
어찌 그 여인만의 일이 되겠는지요.
내 심령의 향유는 주님을 모신 기쁨이니
이 밤도 내 기쁨을 주님의 발에 붓습니다.
빈들에 서 있는 이
눈 덮인 시골에서 길가는 정 찬 규 선교사님
세찬 겨울바람 불고 또 부는
소복이 눈 덮인 빈들!
외로워만 보이는 그곳에
변함없이 서 있는 이가 있습니다.
그의 영혼은 어느덧
하늘로부터 내리 우시는
은혜의 이슬에 촉촉이 젖어있고 (호세아 14:5)
온 대지를 녹이는 따스한 햇볕처럼
예수님의 얼굴빛은 그를 향하여 주십니다.
거기 빈 들에서…
그의 유일한 벗 되어주시는 주님께
모든 것 아뢰며 귀 기울이는
은밀하고도 친밀한 대화 속에
살아계신 주님과의 우정은 짙어져만 갑니다.
거기 빈 들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15~17)
조용히 물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스러우신 그 음성은
그의 귓가에 새롭게 들려오고요.
‘네, 주님!’ 하고
온 기쁨으로 대답하는 그에게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말씀하시며 (아가 2:13)
예수님은 전능하신 그 손을
살며시 내밀어 주십니다.
이제 나아가는 길에서
이런저런 수많은 것들이 부딪쳐 온다 하여도
살아계신 주님의 손에 붙들린 그의 영혼은
그 모든 것 뛰어넘을 수 있는
가뿐함과 강함과 자유가 있습니다. (눅 1:80)
소복이 눈 덮인 빈들!
외로워만 보이는 그곳에
변함없이 서 있는 이가 있습니다.
그의 영혼은 어느덧
하늘로부터 내리 우시는
은혜의 이슬에 촉촉이 젖어있고 (호세아 14:5)
온 대지를 녹이는 따스한 햇볕처럼
예수님의 얼굴빛은 그를 향하여 주십니다.
거기 빈 들에서…
그의 유일한 벗 되어주시는 주님께
모든 것 아뢰며 귀 기울이는
은밀하고도 친밀한 대화 속에
살아계신 주님과의 우정은 짙어져만 갑니다.
거기 빈 들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15~17)
조용히 물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스러우신 그 음성은
그의 귓가에 새롭게 들려오고요.
‘네, 주님!’ 하고
온 기쁨으로 대답하는 그에게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말씀하시며 (아가 2:13)
예수님은 전능하신 그 손을
살며시 내밀어 주십니다.
이제 나아가는 길에서
이런저런 수많은 것들이 부딪쳐 온다 하여도
살아계신 주님의 손에 붙들린 그의 영혼은
그 모든 것 뛰어넘을 수 있는
가뿐함과 강함과 자유가 있습니다. (눅 1:80)
조그만 빈들판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삼십 세 될 때까지에 관해서 아는 바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명료하게 세 가지는 알아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예수님께서 삼십 세까지의 생활이 어떠하셨는가를 결정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귀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누가복음 2장의 우리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될 때 예루살렘에 머무셨던 일입니다.
주님께서 요셉과 마리아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났건만, 정확하게 말하면 나흘이라고 말해야 할 이 짧지 않은 시간이건만, 예수님은 당황하는 흔적을 보이지 아니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주님께서는 은밀히 계시는 아버지 안에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전된 마음으로 자리 잡혀 있으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가요!
아마도 육신적으로 부모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가까이 사셨던 예수님의 형편으로 본다면, 삼일이나 사일 동안 떠나 있다가 만났을 때 보여준 이런 모습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라고 말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내려가셔서 순종하시는 것을 누가복음 2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목수로서 참으로 조용한 생활 속에서 특별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지만,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흠 없는 자로 살아가시는 주님의 삶의 원천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이때 주님은 말씀하시는 분 아니셨습니다.
이때 우리 주님은 놀라운 역사를 하시는 분 아니셨습니다.
평범한 목수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주님께서는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보시기에 흠 없으시고 티 없으신, 온전된 삶을 살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은밀히 보시는 아버지 안에 자리 잡고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경배하는 마음으로 사셨기 때문인 줄 압니다.
이것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이 걸음은 삼십 세 되어서 우리 예수님께서 요단강으로 나아가셔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그때까지 지속된 것인 줄 압니다.
우리가 두 번째 주목할 것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삼십 세 되셨을 때 바로 이 요단강변에서 세례요한을 통하여 들려주신 하나님의 증언이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짤막한 말씀 속에서 우리 주님은 조용하고 평범한 가운데서 어떠한 삶을 살아오셨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오늘 우리의 평범해 보이는 일과 생활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자리 잡아야 할 것임을 주목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빈들에서 예수님께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던 그 조그만 소년! 그것은 틀림없이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마음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모신 어린 마음인 줄 압니다. 예수님께서 그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 것은 이 소년이 주님과 마음으로 벌써 연관 맺어졌음을 말씀하여 주시는 줄 압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조그만 소년이든 그 어떤 누구든 예수님을 내 구주, 내 주님으로 마음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은밀히 붙들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사셨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그 은혜 속에서 내가 마음으로부터 경배하며 따를 수 있는 나의 진정한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갈 수 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삼십 세 될 때까지 이렇게 조용한 삶을 살아가셨듯이, 오늘 여러분과 저의 평범한 생활 속에서 우리 주님을 나의 마음의 주님 삼고 의지하면서 내 주님 모시고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서 본다면, 나사렛 예수님이란 이 평범한 목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과 저는 이 세상에서 특별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우리 주님께,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기쁨 되는 생활은 가능한 줄 압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평범한 삶의 길 가운데서 세 번째로 주목해 볼 수 있는 것은 마태복음 4장에서 주님께서 빈들에서 시험받으신 내용입니다.
여러분!
사십일 금식하시고 난 이후에 시험받으심은 사십일 동안에 갑자기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돈독해지신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가 알 수 있는 대로 마태복음 3장 마지막 부분의 말씀처럼, 주님은 금식하셨다는 말씀 없이 나사렛 동네에서 올라오셔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하셨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기뻐하시는 자이셨습니다.
이러하신 주님께서 시험받으시는 모습이 마태복음 4장입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이 아버지 하나님과 얼마나 돈독한 관계인가를 보여 주십니다. ‘사십일 동안 주려도’란 뜻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의 시험 받으심을 압니다.
이것은 갑자기 어느 날이 아닙니다.
창세기 17장은 아브라함이 언약적인 내 주님, 내 하나님을 모신 마음으로 살아온 지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어쩌면 언약적인 길에서만 성실하게 살아온 지 십 칠팔 년 되었을 그즈음에 시험받는 모습이 창세기 22장입니다. 이는 주님을 향한, 우리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자랑하시는 욥이 욥기에서 시험받으셨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씀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시험받으시는 모습에서 두드러지게 주목해 볼 값진 것은, 주님의 마음이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얼마나 돈독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려도 아버지 입으로 나오시는 말씀 없이는 먹지 않겠다고 하시는 예수님!
그 어떤 시험을 당해도 아버지 하나님을 공경하고 존경하면서 신뢰하는 그 아버지를 향한 마음이 변함없으셨던 주님!
어떤 좋은 길들, 어떤 굉장해 보이는 길 있어도 아버지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분만 섬기겠다는 마음이 변함없으셨던 예수님!
이것은 삼십 년 동안 걸어오신 주님의 발자취의 어떠하심을 분명하고도 생생하게 보여 주시는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이곳에서 정말 주목해 볼 그다음 귀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곳에서 오늘 여러분과 제가 우리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그 귀중한 자세를 힘입어 보는 것은 참 귀중한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삼 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닌 길속에서는 주님을 향한 그 관계(예수님을 모든 것 삼고 그분 말씀 소중히 들으며, 주님을 따라가면서 순종하는)의 강함을 보여 준 것이 제자들의 삶이었습니다.
그 당시 주님의 제자들이 기도생활을 많이 한 것, 결단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아주 많은 기도생활을 요구하신 것도 아니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이 주님을 향한 관계만은 온전하게 요구하셨고 그들도 주님을 향한 관계만은 예수님을 주님처럼 전부 삼고, 예수님을 주님처럼 귀를 기울이면서, 예수님을 주님처럼 사랑하므로 순종했던 것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목해 볼 정말 소중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짤막하게 말씀해 본다면 주님과 나의 관계가 없이 기도만 한다면 그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참으로 온전한 관계를 이어 주는 길은 못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했던 그 마음처럼, 우리 예수님께서 삼십년 동안 아버지 하나님을 어떻게 가까이 모시고 어떻게 가까운 마음으로 지내셨는지 자세히 알아볼 길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랑하며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사셨던 삶이었음은 명료합니다. 허물없으시고 죄 없으시고 뚜렷하신 것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삼 년 동안 드러나신 그 엄청난 사역의 시간 속에서 분명하게 보여 주신 것 있습니다. 참으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 그 엄청난 사역 속에서도 아버지 하나님과의 이런 관계를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생생하게 보여 주시고 이어 가셨던 예수님!
사랑하는 여러분!
마태복음 26장, 27장이나 요한복음 20장에서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보여 주신 마지막 모습이 어떠하셨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겟세마네 동산의 마지막 밤의 기도 속에서 주님 마음이 얼마나 아버지께만 매여 있으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뜻에 얼마나 철저하게 매여 있으신가를 말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그때도 수많은 군중이 아니라 은밀히 보시는 아버지께 온전하게 마음이 매여 계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의 뜻을 좇아 섬기셨던 예수님이시지만, 주님의 마음은 온전된 마음으로 아버지께 매여 계시었습니다.
또 한편 요한복음 20장에서도 무덤가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셨을 때 “나를 만지지 말라” 하셨던 예수님을 주목해 보세요.
아버지 하나님께 마음이 얼마나 온 마음으로 매여 오셨던 주님이신가를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복음 시작의 출발점에 우리 예수님의 마음이 아버지를 향하여 온전하셨던 것처럼 삼 년 동안의 엄청난 사역을 마치신 그 결과로도 주님의 마음은 아버지를 향하여 온전하시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하면 아버지만을 향하는 이런 마음을 유지해 갈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어떤 굉장한 일을 했다는 그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엄청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는 것보다도 더욱더 소중하고 값진 것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과 마가복음 10장에서도 우리 예수님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처음 될 자가 많으리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쉽게 이해한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기스의 아들 사울이 사무엘상 9장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서 왕으로 일어설 그때, 온 이스라엘 전체 중에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우리 하나님께서 마음 쓰셔서 뽑으실 만한 처음 된 자리에 있는 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울이 사무엘상을 걸어가는 그 모습을 볼 때 하나님과 마음이 가까웠나요?
점점 멀어져서 마침내는 하나님의 원수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죽이고자 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없애고자 온 마음을 기울이는 그러한 모습을 읽게 됩니다. 이것은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맨 꼴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울 왕에게서만 그러한 것을 볼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하 1장이나 사무엘상 16장의 다윗이 얼마나 주님과 가까웠던가요? 그러나 사무엘상 27장과 사무엘하 24장에서 다윗이 얼마나 주님과 멀던가요? 우리가 이 점을 가슴 깊이 느껴 보는 것은 정말 필요할 줄 압니다. 지금은 많은 말씀을 전하는 시간이 아니라 조그만 빈들판의 귀중성을 우리 마음에 되새겨 보는 시간입니다.
아무리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다가오신 나사렛 예수님을 뵈었다고 해도 그 사울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사도행전 9장에서 아나니아가 와서 예수 믿기를 권했을 때, 그가 믿고 세례받았을 때 주님께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단순한 내용 같습니다만, 내가 그분을 보고 쓰러졌다는 것과 이제 나는 지나간 나의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예수님께 속한 사람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이제 나 자신에게 속한 자 아니고요, 세상의 그 무엇에 속한 자 아니고요, 나사렛 예수님께 속한 자입니다. 남김 없는 마음으로 속한 자입니다.’라고 할 때 이것이 세례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주님께 속하는 자!’
이 얼마나 기쁜 말씀이며, 이제 내가 서 있는 영역이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런 자가 되었을 때 우리 마음속에 새롭게 밝아오는 하늘이 있을 수 있으며, 예수님이 내게 이 세상에서 유일한 참된 기쁨이시며, 내가 의지하고 사랑하고 따를 수 있는 주님이 되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것을 이 세상 살아가면서 계속 유지해 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창세기 12장에서 잘 출발했고 13장과 14장도 잘 걸어갔는데, 우리가 보는 15장과 16장에서는 그 하나님과 엄청나게 멀어져 버리고 마는 아브라함임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기스의 아들 사울도 그러했나요?
다윗도 한때는 그러했나요?
아브라함도 한때는 그것도 하루가 아니고 일 년이 아니고 적어도 십삼 년 이상은 그러한 것 같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마음이 멀면 먼 자입니다. 살아계신 주님과 나의 마음이 정말 가까우면 가까운 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삶의 비결을 어디에서 보여 주실까요?
그것은 두말할 것 없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가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셔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과 누가복음 22장 말씀처럼 마지막 밤에 습관을 좇아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던 예수님을 보셔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기도 속에서 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십니다만, 그가 아버지 하나님을 일상생활 속에 가까이할 수 있는 그 유일한 길로써 보여 주신 것이 기도였습니다.
마태복음 14장의 주님께서 일과를 다 마치시고 어두워져 오는 시간에 산 위로 오르셨던 주님!
그것은 기도입니다. 그것은 주님과 아버지와의 만남이셨습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것은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추구하셨는데 이 추구가 기도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가까이 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새벽 미명, 때로는 날이 밝아오는 첫 시간, 때로는 사람들이 병 고침 받고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몰려오는 그 시간도 주님은 물러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5장 말씀처럼 말입니다.
사실 우리 예수님의 그 평범해 보이는 기도생활을 강조하신 것은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우리가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움직이심은 바로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기록해 놓으신 것은 우리가 보고 본받으라고 하신 말씀인 줄 압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에 관해서 거듭거듭 말씀해 주시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나사렛 예수님을 향해서 막연하지 않습니다.
그 예수님!
세례받는 그 내용처럼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내 예수님입니다. 나의 육체보다도 더 가깝게 속할 수 있는 내 예수님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예수님과 연합하며 사랑할 수 있는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주님 가까이하는 기도 생활을 힘쓰고 끊임없이 추구하여 간다면,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더욱더 순결하며 더욱더 정함 있으며 더욱더 변함없으며 더욱더 온전하여 가는 주님과 나의 관계를 보여 줄 수 있을 줄 압니다.
주님을 가까이 찾지 않았을 때에 아브라함도 문제가 있었고, 다윗도 문제가 있었고, 우리가 아는 사울 왕도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사무엘상 앞부분에 나오는 엘리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과 내가 아무런 관계도 없이 기도만 하라는 것은 정말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 주님이 되신 것을 내가 영접하므로 알고, 내가 그 주님을 내 주님으로 의지하며 사랑하고 있는 관계라면, 여러분이 제일 중히 여겨야 할 것이 주님과 나의 사귐인 이 기도임을 잊지 마십시오!
요한 계시록 22장에서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일 뿐만 아니라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새벽별 되신 주님! 보이지 않는 그 주님을 어려움과 시련과 역경 속에서 유일하게 뿌리 둘 수 있는 주님으로 내가 추구하였나요? 그 주님을 언제나 생생하게 내 주님으로 모시고 살고 싶다면 새벽별이신 주님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어려움과 시련과 나 자신의 어떠함 때문에 주님을 뿌리로 붙들기는 했는데, 새벽별이신 주님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나의 가장 이른 시간, 가장 소중한 시간에 주님 찾는 마음을 놓아버린다면, 어느덧 여러분은 예수님이 내 뿌리란 것도 잊어버리게 되는 이 비참함을 볼 것입니다.
내게 보이는 뿌리가 세상 것뿐이고 세상에 있는 것이 전부라면, 내게 보이는 것이 저 태양 빛이나 달빛이나 세상의 등불 아래 있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하여 주신 기쁜 소식처럼, 이제는 나 자신과 이 세상이 나의 근거가 아니고, 사람에게 버림받으신 산돌이신 예수님이 내 믿음 내 뿌리임을 알고 추구하며 더듬어간다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주님을 내 믿음으로 붙들 수 있을 줄 압니다.
그리고 내 주님을 나의 소중한 주님으로 추구하여 가므로 기도생활에 빈틈없다면,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느헤미야처럼 이 기도 시간의 소중함을 붙들어 간다면, 기도에 깨어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만은 주님은 생생한 나의 주님으로 주님께 뿌리 두고 주님의 빛 가운데서 살아가도록 해 주실 줄 압니다.
사람이 문둥이가 되면 자기 가족들과 함께 거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친근했던 친구나 이웃들과도 함께 머물지도 못합니다.
가족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진행하여 갈 그때, 멀찍이 그 관계를 잊어버리지 않고자 가족들이 보일 듯 말 듯한 그 위치에서 조용히 따라갔던 문둥이들. 가족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친구와 이웃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할 수도 없었던 문둥이 된 그들. 밤에도 낮에도 그러한 삶 속에 있었던 그들.
그들이 “살려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외쳤던 그 한없는 외침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했을 때, 어느 날 그들은 새로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을 줄 압니다.
‘아! 이상하다! 정말 자유롭지 않았던 내 몸의 모든 부분이 자유로워져 간다. 그리고 참으로 이제 깨끗해져 간다.’라고 하며 확신에 찬 어느 날 그들은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 가운데 들어가서 제사장을 찾았습니다.
“제가 나은 것 같습니다. 이제 건강한 사람 같습니다. 확인해 주십시오.”
제사장이 이모저모를 자세히 다 살펴보고 난 이후에, “이 사람은 깨끗하다. 이 사람은 고침을 받은 사람이다.”란 확정을 주셨을 때, 레위기 14장 말씀에서 그들은 자기 집에 금방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확정받은 사람이라도 말입니다. 물론 진안에 들어온 자이지만 일 주간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까운 곳에서 밤낮을 보내어야만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왜 그리하셨을까요?
우리는 그 의미를 잘 압니다.
문둥이 되어 바라보고 바라보았을 때, 그 주님은 문둥이인 자기에게 어느덧 가까이 다가와 주시었습니다. 복음서 내용을 인용한다면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그 손으로 그를 만지며 고쳐 주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보좌에 멀찍이 계시면서 한번 외친 것 아니고요. 가까이 다가오셔서 손 내밀어 만져 주심으로 고쳐 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그들은 보지 못했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밤을 보내어 갈 때 전날에는 정말 보이지 않던 그분이 마음으로 얼마나 가깝게 의지할 분이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 내 주님 모시고 함께 동행했다는 앞서간 선조들의 걸음이 이런 것이구나!’하며 그들은 분명하게 마음으로 알았을 것 같습니다. 그들의 삶의 뿌리는 바로 그 귀하신 주님이셨습니다. 치료해 주시고 새로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제 내가 그렇게 가고 싶었던 집으로 들어가서 그러한 것에 온통 내 생각과 마음이 빼앗겨 버린다면, 우리는 나에게 밝은 빛 되셨던 그 새벽별을 잊어버릴 때 뿌리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레위기 14장 말씀을 인용해 본다면 우슬초란 하늘 이슬에 젖는 마음을 놓아버린다면, 나에게 든든한 아름다움과 강함되어 주셨던 백향목이신 주님을 놓쳐버리고야 마는 것입니다. 영혼이 살아있는 삶이 되기가 어려울 줄 압니다.
오늘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1장 말씀에서 기도란 그냥 빵을 구하는 것이라는 뜻으로만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는 필요해서 찾는 것이 고작해야 내 일상생활에 필요한, 쉽게 말하면 빵과 같은 것에 불과하겠지만, 아마도 이 빵이란 말씀 속에는 우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함축된 말씀인 것 같습니다. 이런 어려움 이런 곤란 다 포함된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구하라 주신다’라는 우리 생활에 필요한 이 빵에 관한 것만 주신다는 이런 모습으로 끝내지 아니하셨습니다.
‘찾으라 그러면 만날 것이요’
내 영원한 주님!
내 진정한 주님!
내 생명 되신 주님!
내 벗 되신 주님!
여러분이 그분을 찾는다는 것,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요! 그분이 계셔야 나의 존재가 의미가 있고, 그분이 계셔야 내가 오늘도 강한 자로 살아갈 수 있고 그분이 계셔야 내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기도란 빵만 구하는 것 아닙니다. 기도 속에는 이런 진정한 내 주님을 가까이 만나보는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21장의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을 때, 빵을 달라는 것이었습니까? 집을 달라는 것이었습니까? 우리 집안에 넉넉하게 그 무엇을 달라는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을 구하고 찾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안 계신다면 제게는 모든 것이 의미 없습니다.’는 뜻으로 주님을 전심으로 찾고 찾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무엘이 사무엘상 12장에서 그가 기도를 쉬지 않겠다는 것이 빵을 구하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나라를 위한 기도 있겠습니다마는 더 강한 것은 내 주되신 주님을 뵈옵는 기도인 줄 압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물론 가룟 유다는 아니고 사도 바울 선생님을 함께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 떠나시고 난 이후에 그들은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참으로 하나님 나라의 번창함을 위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정말 뗄 수 없는 강한 마음의 끊임없는 기도는 주님 자신을 구하는 기도였을 것 같습니다.
이런 기도가 메마르지 않고 이런 기도가 끊임없을 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스쳐 가듯 주님 만나고 싶은 사람이 동행이 되겠습니까? 될 리가 없습니다.
내가 스쳐 가듯 주님을 구해 본 사람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절대 그런 생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젖을 뗀 아기가 엄마 품을 그리워하듯이 내 주님 안을, 내 주님께 속함을 끊임없이 구하는 마음이라면, “내 안에 거하라”는 주님의 그 축복된 말씀은 우리에게 살아있을 줄 압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우리에게 이런 삶을 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은 다니엘서 6장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닫으면 안전한데 그는 그 창문 닫을 수 없다고 하며 사자 굴속에 던져지더라도 기도하고자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는 위에 있는 우리 예수님 계신 예루살렘을 향한 기도가 이러합니까?
그러하다면 틀림없이 장차는 우리가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갈 수 있겠지만, 또 한편 여러분과 저의 생활이 내 주님께 속하여 내 주님의 다스림 받는 예루살렘의 생활의 영광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는 줄 압니다.
이런 삶을 가진 자가 사자에게 잡아먹히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을 향해서 이 소중한 기도!
이것이 기도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은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으란 말씀만 했지 기도하도록 허락해 주신 주님의 내용은 모르십니까?
그 기도 속에 이 엄청난 내용이 들어 있음을 모르십니까?
이런 기도가 없으면 주님과 나의 관계가 막막하게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 모르십니까?
조용하게 마음을 정하고 주님과 나의 관계를 참으로 새롭게 해 보기 위해서 다가서는 조용한 빈들판. 그리고 조그만 빈들판은 이 땅의 많은 것 아니라도, 내 삶의 이 땅의 서고 넘어짐을 영광과 무의미한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조그만 빈들판의 기도에 있음을 잊지 마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어떤 높은 영광스러운 위치에 자리 잡는 것보다도 주님 허락해 주신 그 시간을 갖고자, 주님 앞에 조용히 나아가서 내 주님을 향하여 무릎 꿇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 조그만 빈들판이 세상의 어떤 영화스러운 자리보다도 복된 자리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을 빼앗기는 날은 천국도 멀어질 것이고 주님도 멀어질 것입니다. 이것을 향하여 문 닫는 날은 바벨론에 사는 그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 문 닫지 아니하고 이 기도 속에 여러분이 서가고자 한다면, 열린 천국은 우리에게 늘 허락되어 있고요. 그분의 은혜의 이슬 우리 영혼 늘 적셔 주시고요. 주님의 그 사랑의 음성과 조용히 비춰 오시는 그 얼굴빛은 여러분과 저에게 늘 가까이 머물러 있을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기도가! 이 기도가 살아있기 위해서, 여러분이 선택하는 결정적인 자리가 조그만 빈들판이 되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날도! 바로 이 시간도! 주님을 향한 이 정함 있는 마음 가운데서, 다가오는 2015년의 시간들이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고, 여러분이 주님과 함께 정복하며 다스리며 풍성하게 번성하는 축복의 시간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예수님께서 삼십 세까지의 생활이 어떠하셨는가를 결정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귀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누가복음 2장의 우리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될 때 예루살렘에 머무셨던 일입니다.
주님께서 요셉과 마리아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났건만, 정확하게 말하면 나흘이라고 말해야 할 이 짧지 않은 시간이건만, 예수님은 당황하는 흔적을 보이지 아니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주님께서는 은밀히 계시는 아버지 안에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전된 마음으로 자리 잡혀 있으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가요!
아마도 육신적으로 부모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가까이 사셨던 예수님의 형편으로 본다면, 삼일이나 사일 동안 떠나 있다가 만났을 때 보여준 이런 모습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라고 말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내려가셔서 순종하시는 것을 누가복음 2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목수로서 참으로 조용한 생활 속에서 특별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지만,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흠 없는 자로 살아가시는 주님의 삶의 원천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이때 주님은 말씀하시는 분 아니셨습니다.
이때 우리 주님은 놀라운 역사를 하시는 분 아니셨습니다.
평범한 목수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주님께서는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보시기에 흠 없으시고 티 없으신, 온전된 삶을 살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은밀히 보시는 아버지 안에 자리 잡고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경배하는 마음으로 사셨기 때문인 줄 압니다.
이것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이 걸음은 삼십 세 되어서 우리 예수님께서 요단강으로 나아가셔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그때까지 지속된 것인 줄 압니다.
우리가 두 번째 주목할 것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삼십 세 되셨을 때 바로 이 요단강변에서 세례요한을 통하여 들려주신 하나님의 증언이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짤막한 말씀 속에서 우리 주님은 조용하고 평범한 가운데서 어떠한 삶을 살아오셨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오늘 우리의 평범해 보이는 일과 생활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자리 잡아야 할 것임을 주목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빈들에서 예수님께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던 그 조그만 소년! 그것은 틀림없이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마음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모신 어린 마음인 줄 압니다. 예수님께서 그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 것은 이 소년이 주님과 마음으로 벌써 연관 맺어졌음을 말씀하여 주시는 줄 압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조그만 소년이든 그 어떤 누구든 예수님을 내 구주, 내 주님으로 마음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은밀히 붙들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사셨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그 은혜 속에서 내가 마음으로부터 경배하며 따를 수 있는 나의 진정한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갈 수 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삼십 세 될 때까지 이렇게 조용한 삶을 살아가셨듯이, 오늘 여러분과 저의 평범한 생활 속에서 우리 주님을 나의 마음의 주님 삼고 의지하면서 내 주님 모시고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서 본다면, 나사렛 예수님이란 이 평범한 목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과 저는 이 세상에서 특별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우리 주님께,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기쁨 되는 생활은 가능한 줄 압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평범한 삶의 길 가운데서 세 번째로 주목해 볼 수 있는 것은 마태복음 4장에서 주님께서 빈들에서 시험받으신 내용입니다.
여러분!
사십일 금식하시고 난 이후에 시험받으심은 사십일 동안에 갑자기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돈독해지신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가 알 수 있는 대로 마태복음 3장 마지막 부분의 말씀처럼, 주님은 금식하셨다는 말씀 없이 나사렛 동네에서 올라오셔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하셨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기뻐하시는 자이셨습니다.
이러하신 주님께서 시험받으시는 모습이 마태복음 4장입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이 아버지 하나님과 얼마나 돈독한 관계인가를 보여 주십니다. ‘사십일 동안 주려도’란 뜻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의 시험 받으심을 압니다.
이것은 갑자기 어느 날이 아닙니다.
창세기 17장은 아브라함이 언약적인 내 주님, 내 하나님을 모신 마음으로 살아온 지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어쩌면 언약적인 길에서만 성실하게 살아온 지 십 칠팔 년 되었을 그즈음에 시험받는 모습이 창세기 22장입니다. 이는 주님을 향한, 우리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자랑하시는 욥이 욥기에서 시험받으셨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씀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시험받으시는 모습에서 두드러지게 주목해 볼 값진 것은, 주님의 마음이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얼마나 돈독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려도 아버지 입으로 나오시는 말씀 없이는 먹지 않겠다고 하시는 예수님!
그 어떤 시험을 당해도 아버지 하나님을 공경하고 존경하면서 신뢰하는 그 아버지를 향한 마음이 변함없으셨던 주님!
어떤 좋은 길들, 어떤 굉장해 보이는 길 있어도 아버지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분만 섬기겠다는 마음이 변함없으셨던 예수님!
이것은 삼십 년 동안 걸어오신 주님의 발자취의 어떠하심을 분명하고도 생생하게 보여 주시는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이곳에서 정말 주목해 볼 그다음 귀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곳에서 오늘 여러분과 제가 우리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그 귀중한 자세를 힘입어 보는 것은 참 귀중한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삼 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닌 길속에서는 주님을 향한 그 관계(예수님을 모든 것 삼고 그분 말씀 소중히 들으며, 주님을 따라가면서 순종하는)의 강함을 보여 준 것이 제자들의 삶이었습니다.
그 당시 주님의 제자들이 기도생활을 많이 한 것, 결단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아주 많은 기도생활을 요구하신 것도 아니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이 주님을 향한 관계만은 온전하게 요구하셨고 그들도 주님을 향한 관계만은 예수님을 주님처럼 전부 삼고, 예수님을 주님처럼 귀를 기울이면서, 예수님을 주님처럼 사랑하므로 순종했던 것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목해 볼 정말 소중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짤막하게 말씀해 본다면 주님과 나의 관계가 없이 기도만 한다면 그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참으로 온전한 관계를 이어 주는 길은 못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했던 그 마음처럼, 우리 예수님께서 삼십년 동안 아버지 하나님을 어떻게 가까이 모시고 어떻게 가까운 마음으로 지내셨는지 자세히 알아볼 길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랑하며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사셨던 삶이었음은 명료합니다. 허물없으시고 죄 없으시고 뚜렷하신 것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삼 년 동안 드러나신 그 엄청난 사역의 시간 속에서 분명하게 보여 주신 것 있습니다. 참으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 그 엄청난 사역 속에서도 아버지 하나님과의 이런 관계를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생생하게 보여 주시고 이어 가셨던 예수님!
사랑하는 여러분!
마태복음 26장, 27장이나 요한복음 20장에서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보여 주신 마지막 모습이 어떠하셨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겟세마네 동산의 마지막 밤의 기도 속에서 주님 마음이 얼마나 아버지께만 매여 있으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뜻에 얼마나 철저하게 매여 있으신가를 말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그때도 수많은 군중이 아니라 은밀히 보시는 아버지께 온전하게 마음이 매여 계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의 뜻을 좇아 섬기셨던 예수님이시지만, 주님의 마음은 온전된 마음으로 아버지께 매여 계시었습니다.
또 한편 요한복음 20장에서도 무덤가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셨을 때 “나를 만지지 말라” 하셨던 예수님을 주목해 보세요.
아버지 하나님께 마음이 얼마나 온 마음으로 매여 오셨던 주님이신가를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복음 시작의 출발점에 우리 예수님의 마음이 아버지를 향하여 온전하셨던 것처럼 삼 년 동안의 엄청난 사역을 마치신 그 결과로도 주님의 마음은 아버지를 향하여 온전하시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하면 아버지만을 향하는 이런 마음을 유지해 갈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어떤 굉장한 일을 했다는 그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엄청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는 것보다도 더욱더 소중하고 값진 것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과 마가복음 10장에서도 우리 예수님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처음 될 자가 많으리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쉽게 이해한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기스의 아들 사울이 사무엘상 9장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서 왕으로 일어설 그때, 온 이스라엘 전체 중에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우리 하나님께서 마음 쓰셔서 뽑으실 만한 처음 된 자리에 있는 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울이 사무엘상을 걸어가는 그 모습을 볼 때 하나님과 마음이 가까웠나요?
점점 멀어져서 마침내는 하나님의 원수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죽이고자 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없애고자 온 마음을 기울이는 그러한 모습을 읽게 됩니다. 이것은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맨 꼴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울 왕에게서만 그러한 것을 볼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하 1장이나 사무엘상 16장의 다윗이 얼마나 주님과 가까웠던가요? 그러나 사무엘상 27장과 사무엘하 24장에서 다윗이 얼마나 주님과 멀던가요? 우리가 이 점을 가슴 깊이 느껴 보는 것은 정말 필요할 줄 압니다. 지금은 많은 말씀을 전하는 시간이 아니라 조그만 빈들판의 귀중성을 우리 마음에 되새겨 보는 시간입니다.
아무리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다가오신 나사렛 예수님을 뵈었다고 해도 그 사울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사도행전 9장에서 아나니아가 와서 예수 믿기를 권했을 때, 그가 믿고 세례받았을 때 주님께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단순한 내용 같습니다만, 내가 그분을 보고 쓰러졌다는 것과 이제 나는 지나간 나의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예수님께 속한 사람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이제 나 자신에게 속한 자 아니고요, 세상의 그 무엇에 속한 자 아니고요, 나사렛 예수님께 속한 자입니다. 남김 없는 마음으로 속한 자입니다.’라고 할 때 이것이 세례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주님께 속하는 자!’
이 얼마나 기쁜 말씀이며, 이제 내가 서 있는 영역이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런 자가 되었을 때 우리 마음속에 새롭게 밝아오는 하늘이 있을 수 있으며, 예수님이 내게 이 세상에서 유일한 참된 기쁨이시며, 내가 의지하고 사랑하고 따를 수 있는 주님이 되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것을 이 세상 살아가면서 계속 유지해 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창세기 12장에서 잘 출발했고 13장과 14장도 잘 걸어갔는데, 우리가 보는 15장과 16장에서는 그 하나님과 엄청나게 멀어져 버리고 마는 아브라함임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기스의 아들 사울도 그러했나요?
다윗도 한때는 그러했나요?
아브라함도 한때는 그것도 하루가 아니고 일 년이 아니고 적어도 십삼 년 이상은 그러한 것 같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마음이 멀면 먼 자입니다. 살아계신 주님과 나의 마음이 정말 가까우면 가까운 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삶의 비결을 어디에서 보여 주실까요?
그것은 두말할 것 없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가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셔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과 누가복음 22장 말씀처럼 마지막 밤에 습관을 좇아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던 예수님을 보셔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기도 속에서 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십니다만, 그가 아버지 하나님을 일상생활 속에 가까이할 수 있는 그 유일한 길로써 보여 주신 것이 기도였습니다.
마태복음 14장의 주님께서 일과를 다 마치시고 어두워져 오는 시간에 산 위로 오르셨던 주님!
그것은 기도입니다. 그것은 주님과 아버지와의 만남이셨습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것은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추구하셨는데 이 추구가 기도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가까이 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새벽 미명, 때로는 날이 밝아오는 첫 시간, 때로는 사람들이 병 고침 받고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몰려오는 그 시간도 주님은 물러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5장 말씀처럼 말입니다.
사실 우리 예수님의 그 평범해 보이는 기도생활을 강조하신 것은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우리가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움직이심은 바로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기록해 놓으신 것은 우리가 보고 본받으라고 하신 말씀인 줄 압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에 관해서 거듭거듭 말씀해 주시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나사렛 예수님을 향해서 막연하지 않습니다.
그 예수님!
세례받는 그 내용처럼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내 예수님입니다. 나의 육체보다도 더 가깝게 속할 수 있는 내 예수님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예수님과 연합하며 사랑할 수 있는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주님 가까이하는 기도 생활을 힘쓰고 끊임없이 추구하여 간다면,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더욱더 순결하며 더욱더 정함 있으며 더욱더 변함없으며 더욱더 온전하여 가는 주님과 나의 관계를 보여 줄 수 있을 줄 압니다.
주님을 가까이 찾지 않았을 때에 아브라함도 문제가 있었고, 다윗도 문제가 있었고, 우리가 아는 사울 왕도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사무엘상 앞부분에 나오는 엘리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과 내가 아무런 관계도 없이 기도만 하라는 것은 정말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 주님이 되신 것을 내가 영접하므로 알고, 내가 그 주님을 내 주님으로 의지하며 사랑하고 있는 관계라면, 여러분이 제일 중히 여겨야 할 것이 주님과 나의 사귐인 이 기도임을 잊지 마십시오!
요한 계시록 22장에서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일 뿐만 아니라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새벽별 되신 주님! 보이지 않는 그 주님을 어려움과 시련과 역경 속에서 유일하게 뿌리 둘 수 있는 주님으로 내가 추구하였나요? 그 주님을 언제나 생생하게 내 주님으로 모시고 살고 싶다면 새벽별이신 주님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어려움과 시련과 나 자신의 어떠함 때문에 주님을 뿌리로 붙들기는 했는데, 새벽별이신 주님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나의 가장 이른 시간, 가장 소중한 시간에 주님 찾는 마음을 놓아버린다면, 어느덧 여러분은 예수님이 내 뿌리란 것도 잊어버리게 되는 이 비참함을 볼 것입니다.
내게 보이는 뿌리가 세상 것뿐이고 세상에 있는 것이 전부라면, 내게 보이는 것이 저 태양 빛이나 달빛이나 세상의 등불 아래 있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하여 주신 기쁜 소식처럼, 이제는 나 자신과 이 세상이 나의 근거가 아니고, 사람에게 버림받으신 산돌이신 예수님이 내 믿음 내 뿌리임을 알고 추구하며 더듬어간다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주님을 내 믿음으로 붙들 수 있을 줄 압니다.
그리고 내 주님을 나의 소중한 주님으로 추구하여 가므로 기도생활에 빈틈없다면,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느헤미야처럼 이 기도 시간의 소중함을 붙들어 간다면, 기도에 깨어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만은 주님은 생생한 나의 주님으로 주님께 뿌리 두고 주님의 빛 가운데서 살아가도록 해 주실 줄 압니다.
사람이 문둥이가 되면 자기 가족들과 함께 거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친근했던 친구나 이웃들과도 함께 머물지도 못합니다.
가족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진행하여 갈 그때, 멀찍이 그 관계를 잊어버리지 않고자 가족들이 보일 듯 말 듯한 그 위치에서 조용히 따라갔던 문둥이들. 가족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친구와 이웃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할 수도 없었던 문둥이 된 그들. 밤에도 낮에도 그러한 삶 속에 있었던 그들.
그들이 “살려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외쳤던 그 한없는 외침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했을 때, 어느 날 그들은 새로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을 줄 압니다.
‘아! 이상하다! 정말 자유롭지 않았던 내 몸의 모든 부분이 자유로워져 간다. 그리고 참으로 이제 깨끗해져 간다.’라고 하며 확신에 찬 어느 날 그들은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 가운데 들어가서 제사장을 찾았습니다.
“제가 나은 것 같습니다. 이제 건강한 사람 같습니다. 확인해 주십시오.”
제사장이 이모저모를 자세히 다 살펴보고 난 이후에, “이 사람은 깨끗하다. 이 사람은 고침을 받은 사람이다.”란 확정을 주셨을 때, 레위기 14장 말씀에서 그들은 자기 집에 금방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확정받은 사람이라도 말입니다. 물론 진안에 들어온 자이지만 일 주간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까운 곳에서 밤낮을 보내어야만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왜 그리하셨을까요?
우리는 그 의미를 잘 압니다.
문둥이 되어 바라보고 바라보았을 때, 그 주님은 문둥이인 자기에게 어느덧 가까이 다가와 주시었습니다. 복음서 내용을 인용한다면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그 손으로 그를 만지며 고쳐 주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보좌에 멀찍이 계시면서 한번 외친 것 아니고요. 가까이 다가오셔서 손 내밀어 만져 주심으로 고쳐 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그들은 보지 못했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밤을 보내어 갈 때 전날에는 정말 보이지 않던 그분이 마음으로 얼마나 가깝게 의지할 분이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 내 주님 모시고 함께 동행했다는 앞서간 선조들의 걸음이 이런 것이구나!’하며 그들은 분명하게 마음으로 알았을 것 같습니다. 그들의 삶의 뿌리는 바로 그 귀하신 주님이셨습니다. 치료해 주시고 새로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제 내가 그렇게 가고 싶었던 집으로 들어가서 그러한 것에 온통 내 생각과 마음이 빼앗겨 버린다면, 우리는 나에게 밝은 빛 되셨던 그 새벽별을 잊어버릴 때 뿌리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레위기 14장 말씀을 인용해 본다면 우슬초란 하늘 이슬에 젖는 마음을 놓아버린다면, 나에게 든든한 아름다움과 강함되어 주셨던 백향목이신 주님을 놓쳐버리고야 마는 것입니다. 영혼이 살아있는 삶이 되기가 어려울 줄 압니다.
오늘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1장 말씀에서 기도란 그냥 빵을 구하는 것이라는 뜻으로만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는 필요해서 찾는 것이 고작해야 내 일상생활에 필요한, 쉽게 말하면 빵과 같은 것에 불과하겠지만, 아마도 이 빵이란 말씀 속에는 우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함축된 말씀인 것 같습니다. 이런 어려움 이런 곤란 다 포함된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구하라 주신다’라는 우리 생활에 필요한 이 빵에 관한 것만 주신다는 이런 모습으로 끝내지 아니하셨습니다.
‘찾으라 그러면 만날 것이요’
내 영원한 주님!
내 진정한 주님!
내 생명 되신 주님!
내 벗 되신 주님!
여러분이 그분을 찾는다는 것,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요! 그분이 계셔야 나의 존재가 의미가 있고, 그분이 계셔야 내가 오늘도 강한 자로 살아갈 수 있고 그분이 계셔야 내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기도란 빵만 구하는 것 아닙니다. 기도 속에는 이런 진정한 내 주님을 가까이 만나보는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21장의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을 때, 빵을 달라는 것이었습니까? 집을 달라는 것이었습니까? 우리 집안에 넉넉하게 그 무엇을 달라는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을 구하고 찾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안 계신다면 제게는 모든 것이 의미 없습니다.’는 뜻으로 주님을 전심으로 찾고 찾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무엘이 사무엘상 12장에서 그가 기도를 쉬지 않겠다는 것이 빵을 구하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나라를 위한 기도 있겠습니다마는 더 강한 것은 내 주되신 주님을 뵈옵는 기도인 줄 압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물론 가룟 유다는 아니고 사도 바울 선생님을 함께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 떠나시고 난 이후에 그들은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참으로 하나님 나라의 번창함을 위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정말 뗄 수 없는 강한 마음의 끊임없는 기도는 주님 자신을 구하는 기도였을 것 같습니다.
이런 기도가 메마르지 않고 이런 기도가 끊임없을 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스쳐 가듯 주님 만나고 싶은 사람이 동행이 되겠습니까? 될 리가 없습니다.
내가 스쳐 가듯 주님을 구해 본 사람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절대 그런 생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젖을 뗀 아기가 엄마 품을 그리워하듯이 내 주님 안을, 내 주님께 속함을 끊임없이 구하는 마음이라면, “내 안에 거하라”는 주님의 그 축복된 말씀은 우리에게 살아있을 줄 압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우리에게 이런 삶을 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은 다니엘서 6장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닫으면 안전한데 그는 그 창문 닫을 수 없다고 하며 사자 굴속에 던져지더라도 기도하고자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는 위에 있는 우리 예수님 계신 예루살렘을 향한 기도가 이러합니까?
그러하다면 틀림없이 장차는 우리가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갈 수 있겠지만, 또 한편 여러분과 저의 생활이 내 주님께 속하여 내 주님의 다스림 받는 예루살렘의 생활의 영광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는 줄 압니다.
이런 삶을 가진 자가 사자에게 잡아먹히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을 향해서 이 소중한 기도!
이것이 기도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은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으란 말씀만 했지 기도하도록 허락해 주신 주님의 내용은 모르십니까?
그 기도 속에 이 엄청난 내용이 들어 있음을 모르십니까?
이런 기도가 없으면 주님과 나의 관계가 막막하게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 모르십니까?
조용하게 마음을 정하고 주님과 나의 관계를 참으로 새롭게 해 보기 위해서 다가서는 조용한 빈들판. 그리고 조그만 빈들판은 이 땅의 많은 것 아니라도, 내 삶의 이 땅의 서고 넘어짐을 영광과 무의미한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조그만 빈들판의 기도에 있음을 잊지 마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어떤 높은 영광스러운 위치에 자리 잡는 것보다도 주님 허락해 주신 그 시간을 갖고자, 주님 앞에 조용히 나아가서 내 주님을 향하여 무릎 꿇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 조그만 빈들판이 세상의 어떤 영화스러운 자리보다도 복된 자리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을 빼앗기는 날은 천국도 멀어질 것이고 주님도 멀어질 것입니다. 이것을 향하여 문 닫는 날은 바벨론에 사는 그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 문 닫지 아니하고 이 기도 속에 여러분이 서가고자 한다면, 열린 천국은 우리에게 늘 허락되어 있고요. 그분의 은혜의 이슬 우리 영혼 늘 적셔 주시고요. 주님의 그 사랑의 음성과 조용히 비춰 오시는 그 얼굴빛은 여러분과 저에게 늘 가까이 머물러 있을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기도가! 이 기도가 살아있기 위해서, 여러분이 선택하는 결정적인 자리가 조그만 빈들판이 되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날도! 바로 이 시간도! 주님을 향한 이 정함 있는 마음 가운데서, 다가오는 2015년의 시간들이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고, 여러분이 주님과 함께 정복하며 다스리며 풍성하게 번성하는 축복의 시간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