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성회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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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77회 작성일18-10-11 08:55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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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2월 성회(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들의 모임)
- 일 시 : 2019. 02. 18.(월) ~ 02. 22.(금) 매일 밤 11:20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내년 2월이면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그리워하는 주님의 보좌를 향하여
함께 자리는 하지 못할지라도 우리 마음만은 함께 묶어진 마음으로
주님의 보좌를 향하고 싶습니다.
요한복음 17장 24절 말씀에
주님께 속하여 한마음으로 묶어진 이들이
주님의 보좌를 향하여 함께 향하고 있음을 읽게 됩니다.
그들이 한마음으로 주님을 향하고 있지만
함께하는 자리는 못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하늘나라로 가신 예수님을 향하여
열흘 동안 함께 마음 묶어서
예루살렘 떠나지 아니하고 성전에서 기뻐하고 찬송하며
그 예루살렘 다락에서 전심으로 함께 기도했던 이들이
늘 함께 있을 수는 없을 줄 압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주님께 속하여 다스림 받는 예루살렘은
그들이 어디에 있더라도 늘 가져보는 마음일 것이며,
그들이 참된 성전 되신 주님 안에서 보좌의 주님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것도
그들이 어디에 흩어져 있더라도 늘 가져보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향하여 솟아오른 다락에서
남김 없는 전 마음으로 기도하고 기대하며,
사랑하는 주님을 앙망하는 그 마음은
그들이 함께 있지 못할지라도 마음만은 분명히 함께하는 것 사실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이 빌립보서 1장에서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기도 속에 있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도 소중하지만 마음에 있다는 말은 얼마나 더 소중한 말일까요!
우리가 어떤 중요한 문제점은 때로 수첩에 기록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마음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신 이것은
참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께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함께할 수 없고
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과 늘 함께할 수는 없어도
마음만은 주님 안에서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안에 있다는 말과 주님을 향하는 마음과
오늘도 보좌에 계신 주님께서 그의 생명과 그의 사랑으로 이끄셔서
서로 사랑하게 하시는 이 가운데서
그들은 함께 있을 수 없었지만
마음으로는 주님께 속하여 주님을 바라보면서
정말 함께하는 참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고자 한다면
지금은 어찌해야 할까요?
예수님 가신 저 하늘나라를 끊임없이 바라보고만 있어야 할까요?
그렇게 해도 영혼은 자유가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십자가와 부활하심과 보좌의 은총을 우리가 마음으로 적용해보다보면
오늘도 내가 이 세상에서 육신 속에 있는 것 같아도
나의 온 마음은 부활하신 주님 안에 있고
예수님 보이지 아니하셔도 그 보좌의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주님 안에서 바라보기는 결코 어렵지 아니할 줄 압니다.
시편 16편 말씀에서 다윗이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란 마음으로
주님께 피하여 주님 안에 있을 때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고 할 만큼
주님은 참으로 가까웠습니다.
우리가 주님 밖에 있을 때는 주님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 가신 하늘나라를 바라본다 해도 말입니다.
그러나 뚜렷하게 구별 되어
이 세상에 머물러있지 아니하고 육신에 머물러있지 아니하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 믿음으로 속하여 있을 때는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고 할 만큼
오늘을 살아갈 복,
내가 어떤 문제를 만나도 해결될 수 있는 축복,
우리의 길을 영광스럽고 복되게 인도하여 주실 참된 복으로
정말 주님이 전부가 된다는 말씀인 줄 압니다.
“주 밖에 나의 복이 없나이다.”
오늘 참된 성전으로 가르쳐주신 예수님.
요한복음 2장에서 말씀하신 그 주님 안에
내 마음이 더듬어서 믿음으로 주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보좌의 주님이 정말 가깝습니다.
내 기쁨이시고, 내 사랑이시고, 내 생명이시고, 내 힘이 되십니다.
정말 주님은 나의 빛이 되십니다.
내 모든 것 되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들이란 것은
주님 안에 자리 잡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복음으로서,
믿음으로 주님 안에 자리 잡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축복입니다.
아무리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가 위태해서 아기스 왕 또는 모압 왕 밑으로 피난 갔을 때
주님은 그에게 가깝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다윗이 하나님께서 주신 예루살렘에 자리 잡아 살지라도
그가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 안에 자리 잡고자 내 주님을 추구하며,
주님 안에 서서 영광스런 보좌의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바라보며,
다스림 받는 삶이 아닐 때
다윗은 보기 민망한 자였습니다.
주님은 결코 다윗의 힘이 아니었고 다윗의 주님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사무엘하 11장과 24장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변함없는 마음으로 주님 안에 자리 잡고
그것이 쫓기는 몸이라도, 참으로 궁핍과 시련이 많을지라도,
주님을 가까운 나의 주님으로 바라볼 때
주님은 동굴 속에 있는 다윗에게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의 의지가 되어주시고, 강함이 되어주시고, 평강이 되어주시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참 쉬웠습니다.
너무 자연스러웠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참 너무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스쳐가는 말에 불과합니다.
힘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뜻하신 올바른 길에 서다 보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얼마나 마음에 큰 힘이 되는지요!
여러분, 이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여러분이라면 세상 살만 합니다.
어렵다 말하지 않습니다.
죽을 것 같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내 힘이시고, 내 사랑이시고, 내 기쁨이시고, 내 빛이시고
나와 함께해 주시는 이 놀라움 속에 있다면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천국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생활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 만하다는 말을 능히 할 수 있습니다.
대적을 보면서도 “적군은 우리 밥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
그것 아니라면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해도 별 힘이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성령의 은사가 없었나요?
그들에게 임해오는 성령의 은사가 많았기에
사도 바울 선생님은 질서 있게 잡아주어야 될 형편이었습니다.
없었다면 질서 있게 이렇게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유익을 위해서 주신다고 하시지 않던가요?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 때는 혼돈이고
그것을 기점으로 하다보면 이런 말을 들어야 합니다.
“당신이 천사의 말과 갖가지 방언을 한다 할지라도
주님과의 참된 사랑이 없다면, 이 사랑은 은사 아닙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은사 중에 한 가지로 생각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가 있을 때는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영혼의 신랑이 되고
내가 그의 신부적인 가까운 마음이 될 때 사랑이 오갑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벗어나면 글쎄요, 은사는 있을지라도 사랑은 없습니다.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만다고 했습니다.
주님과 나의 사랑이 아니면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내가 주님과 연합하지도 아니하고
예수님을 내 사랑으로 마음에 품지도 아니하면서 이 사랑이 있나요?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들었던 교회이고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던 교회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랑도 없고, 빛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요!
제대로 활용하고 있었다면 사도 바울 선생님이 이런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이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고,
모든 것을 아는 예언하는 능력이 있다할지라도
당신이 굉장해 보이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주님과 당신 사이의 사랑의 관계가 이어지지 않아서
사랑이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과 나의 사랑입니다.
주님과 나의 사랑이 있을 때 고린도전서 16장 13절 말씀처럼
오늘도 깨어서 온 마음으로 내 생명 되신 주님께 믿음을 둘 때,
그리고 그 주님이 나에게 실제이기 때문에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설 때,
포도나무 가지로서
세상은 보지 못해도 담대하고,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는 자로
우리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할 수 있음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 마음에 있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사랑의 연합이 있고, 사랑으로 주님을 존귀히 여기고
주님을 내 모든 것으로 삼는 그 자가
지금! 사랑 가운데서 살 수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점이 얼마나 귀한지요.
당신이 당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할지라도
주님과 나 사이의 사랑의 연합이 없고
사랑의 주님을 따라 행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시었습니다.
그 다음 말씀은
“사랑은! 사랑은!! 사랑은!!!”
주님과 나 사이의 참된 연합과 참된 사귐이 있어서
그 사이에 흘러나오는 사랑이 있을 때
우리는 인격적으로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얼마나 주님의 사람다운지요.
그의 사람으로 부끄럽지 않는지요.
이 사랑은 지금이지만 영원히 이어져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되지만
그 중에 으뜸은 사랑이라 하시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이 이어져 가겠나요?
내 주님과 나의 사랑이 없다면 그날 소망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나요?
그러나 주님과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나의 사랑을 가지게 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이 사랑이 있기에 오늘도 희망이 있고 내일도 희망이 있고
먼 그날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지요!
사사기에서 믿음은 가지고 사랑이 없는 자는
내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주님과 나의 사랑의 교제가 없으므로
목마르면 무엇이든 마셔버리고 맙니다.
세상에 기울어져버리는 그것은 사랑 아닙니다.
허락해주신 이 세상이지만 내 주님의 마음을 더듬어 보는 그들이
기드온 삼백용사입니다.
그 사랑이 있는 자는 항아리 속에 불이 있는 자입니다.
항아리는 질그릇인 우리를 가리키는 말이지 않을까요?
내 속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불빛을 좇아 그 사랑 가운데서
한 걸음 한 걸음 근신하며 걸어갑니다.
이들이 십삼만 오천을 무찌른 기드온 삼백용사입니다.
피곤해도 주님을 성실히 따랐던 이들이고요,
에브라임 지파의 형제들이 투덜대며 싸우러 올 그때라도
겸손히 낮추어서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품어주는 마음이고요.
아무리 배고프고 아무리 어려워도
먼저 주님 따르기에 온 마음을 쓰는 이들입니다.
이 사랑의 주님을 모시고 따르는 이들은
네가 왕 되라고 해도 절대 왕 되고자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주님은 내 사랑이고 그분이 왕인 줄 압니다.
우리는 압니다.
나는 정말 보잘 것 없는 자임을 압니다.
주님이 내 믿음 되어주셔서 이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던 것이지
우리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그들은 생각지 아니한 줄 압니다.
굉장해 보이지 않는 초라한 삼백 명으로,
그것도 칼도 제대로 갖지 않은 그들로서
십삼만 오천을 무찌른다는 것은 참 쉬운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주님과의 사랑이 있으므로 담대함이 있고, 확신이 있어서
주님과 함께할 때는
사랑의 주님이 그들과 함께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왜 삼손이 망했나요?
사랑 문제입니다.
힘이 있을 때는 어떤 때였고,
사로잡혀서 눈 뽑히고, 연자맷돌 돌리고, 구경거리가 된 때는 어떤 때입니까?
주님과의 사랑이 아니면 나실인이 못 됩니다.
그 누구 하나 눈여겨보지 않는 어두운 밤이라도
내 영혼이 주님을 향하여 허리띠 동여매고 서 있을 만큼
사랑의 불은 켜져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35절은
이렇게 사랑의 불이 있음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어둡지 않습니다.
천국의 은혜의 이슬이 있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더 불붙어갈 것입니다.
이들이 이 땅에 있지만 주님을 향하여 불붙는 마음을 가진 이들입니다.
자기가 왕이 아닙니다. 초라한 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므로 강하고
사랑의 주님이 내 믿음 되시기에 너무 기쁘고
사랑의 주님이 내 소망이 되시기에 너무 좋은 것입니다.
오늘 성실하게 섬기는 것도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내년 2월 18일(月)~22일(金)까지 5일 동안의 깊은 밤 시간!
그것도 이번에는 쉽게 저녁부터 만나지 아니하고
전파로 11시 20분부터 만난답니다.
이것은 사랑하고자 정함 있는 마음이 아니면 참여하지도 말란 뜻이겠지요!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지금! 지금부터 준비해 주시기를 …
그 이름이 누구든 간에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라는
고린도전서 16장의 이 말씀에 우리가 들어가서는 안 되겠죠?
복음을 안다면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참된 복음 속에 서 있다면, 예수님을 불붙듯이 사랑합니다.
오늘 내 속에 복음이 살아있는 자 치고
예수님을 이렇게 불붙듯이 사랑치 않는 사람 없습니다.
복음이 말로만, 복음이 곁으로 비스듬히 가서 제대로 안 박힌 사람.
복음을 비스듬히 알아서 정확히 모르는 사람.
이들은 다 신앙의 헛발질을 합니다.
주님을 사랑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도 귀중합니다.
주님을 위해 섬기는 것도 귀중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나의 사랑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이것 아니라면 그날 주님께로부터 칭찬 듣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라고
에베소서 6장 24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에베소서 1장부터 6장까지의 복음의 알맹이적인 내용이
우리 생활 속에서 적용되지 않았다면
절대 예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광야에 쓰러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납니다.
그들은 우상숭배도 했습니다.
그들은 간음도 했습니다.
그들은 불평도 했습니다.
그들은 원망도 했습니다.
묶어서 말하면 절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 어떠한데
그 사랑 안에 자리 잡는다면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 안에서 날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더듬고 살아간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도 성전된 주님과 함께
능히 하나님을 경배하며 사랑하는 그런 값진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0월은 우리 마음을 이 분야로 굳게 정하여 보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11월, 12월, 1월 석 달 동안
그리고 2월의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의 마음을 점점 주님을 사랑하는 이로 굳혀가고 싶습니다.
주 예수님을 나의 진정한 그리스도로 사랑하는 이들!
주 예수님을 내 생명처럼 오늘 이 땅에서 사랑하는 이들!
누가복음 14장의 제자의 길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부모, 처자, 형제자매, 자기 목숨까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께 온 마음으로 연합되어 사랑하는 이들이
참된 주님의 제자랍니다.
그런 자 아니면 길에서 다 흩어지고야 만다는 뜻입니다.
오늘 나에게 있는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면서도
내 사랑 되신 주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며 따르고자 하는 이가
주님의 진정한 제자의 길에 설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람이 된다는 뜻이지요.
조그만 어려움, 조그만 시련, 조그만 고난 때문에 어려워할 것 아니고
주님 사랑하는 불붙는 마음에
그런 것은 문제될 것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가진 것 아닙니다.
주님을 내 모든 것 삼는 마음입니다.
나 자신이나 그 무엇을 기준 삼는 이는 벌써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름만의 사랑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실제 내 모든 것으로, 내 사랑되어 주시기 원하십니다.
이들은 전쟁에 나갈 수 있습니다.
이들은 보좌를 향해 망대를 높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그러해도 말입니다.
이들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될까요?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지금 이 10월에
여러분의 마음을 굳혀 보시고 마음이 정해진다면,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로서
우리 예수님이 원하시는
복음서에 기록된 그런 사람으로 서고자 마음을 정해 본다면,
여러분은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닐 것입니다.
큰 축복이고, 말할 수 없는 영광이고
오늘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기쁨이 되는 자로 서갈 수 있을 줄 압니다.
주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정말 사랑하는 이들!
사랑하다 보니 그분이 내 구주가 되어주셔서,
오늘도 주님 주신 믿음을 좇아 강하고 풍성한 마음으로
이 땅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그의 사람으로
하루하루가 값지고 영광스럽기를 원합니다.
사도행전의 내용 속에 깊이 잠겨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 속에는 보좌의 주님을 너무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 사랑하기에
그분의 뜻을 어려움 속에서도 이루어 드리고자 나아가는
그의 사도들의 걸음이 참 아름답습니다.
사도행전을 너무 잘못 보는 것 같습니다.
무조건 땅 끝까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므로 기다림이 있고
보좌의 주님께서 임하시는 주님의 영이 있어서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무조건 땅 끝까지가 아닙니다.
무조건 예루살렘을 향해 다시금 돌아가자 하는
이런 구호는 너무 안타깝게 생각됩니다.
그들은 사도행전의 길을 갈 때 보좌의 주님을 사랑하므로
고난 속에서도 게으르지 않고 성실하게 전진해 갔고,
그들의 영혼은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늘 여유와 안정감이 있었고
그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이었듯이,
이런 사도행전의 발걸음이
지금 우리에게도 계속되었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가만히 있고자 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골방으로만 들어가려고 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을 사랑하므로
이 험한 길에 주님의 뜻을 좇아
고린도후서 5장의 불붙는 사랑을 가지고
어려운 세상인 줄 알지만 나아갔던 고린도후서 6장의 사도 바울 선생님처럼,
이런 조그만 주님의 보냄 받은 사람들로
한분 한분이 값지고 귀중하게 서 갈 수 있을 줄 압니다.
그러시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8년 9월에
2월 성회 준비위원 드림.
흘러 떠내려갈까 보아서
유다서 1장 6절에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것이 어둠의 권세요, 사단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줄 압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사단으로 바뀌어진 것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남으로 그러한 것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히브리서 2장 말씀에서 큰 구원을 받은 우리,
여기서 ‘큰 구원’은 우리가 어려운 큰 질고나 또 큰 환난이나
이런 가운데서 건짐 받은 것을 큰 구원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신 큰 은혜임이 사실입니다만
히브리서 2장에서 말씀하시는 큰 구원은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어둠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또 달리 말한다면
어둠에 붙들려서 정결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이제는 놀라우신, 거룩하신 주님께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2장에서 말씀하시는 큰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또 한편 주님의 부활하심에 동참하므로
하나님 나라의 그 영광과 거룩한 삶에 동참하게 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큰 구원’이란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근본적으로 어려운 우리 삶을 건져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2장에서 중요한 것은
이 큰 구원 받은 우리도 흘러 떠내려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조심하고, 조금만 정신 차리고 깨어 있다면
이 값진 삶을 살 수 있을 터인데 말입니다.
사실 엘리가
주님께서 그를 불러주셨던 참된 그 위치에 굳건하게 서서
주님의 사람으로 서고자 마음을 정해갔다면
그런 비참한 집이 되지는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모르긴 하지만 엘리가
참으로 주님께 속한 그의 사람으로 깨어 있었다면
그의 자녀들도 그런 비참한 종말로 끝나지 아니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불러주신 이 놀라운 은총은
히브리서 3장과 4장 말씀처럼
오늘이라고 하는 평범한 이날에도 우리가 정신 차려보면
그 놀라우신 주님께 속하여서
살아계신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주님께 순종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가 이 어둡고 죄악 많은 거친 이 세상에 휘말리지 아니하고
자유도 있고 삶의 행복도 느끼면서
주님의 사람으로 굳건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6장은 조금만 마음 쓰지 아니하고
주님의 사람으로 깨어 있고자 하지 아니한다면
전날에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었던 우리라고 할지라도
타락한 길로 가고야 말게 됨을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깨어 있으면 주님의 사람으로서 확실한 소망과 더불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는 견고한 삶을
주님과 함께 뜻깊게 걸어갈 수 있는 것 사실입니다.
다윗이 주님께 속함이란 이 참된 위치에서 깨어있고자 하지 아니할 때
그는 어느덧 블레셋으로 내려가 있었고
때론 모압 땅으로 밀려가 있었고 때론 요단 동편으로 쫓겨나 있는
이러한 다윗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내 주님 안에 내가 속한 영역이 있고
그곳에서 주님은 나의 빛이 되시고 나의 분깃이 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 속에서 강한 마음으로
비록 주어진 환경과 여건 속에 어려움 있을지라도
흘러 떠내려가지 아니하고 굳건하게 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줄 압니다.
흘러 떠내려가기는 너무 쉽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12장에서
어두움의 권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흘러 떠내려가게 하고자
갖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읽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과 나의 관계를 온전하고 철저하게 붙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흘러 떠내려가지 아니 할 수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라는 주제가
감상적이고 단순한 말이 결단코 아닙니다.
오늘 우리를 흘러 떠내려가게 하는 수많은 문제가 밀려오는 이 세상에서도
내가 주님을 향하여 온 마음으로 매이고 주님께 굳건하게 속하여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내 주님을 바라보며
나의 주님과 함께 달려가고
내 주님 모신 족한 마음과 그 은혜 속에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세상이 우리 발 곁에 어떤 모습으로 흘러 온다할지라도
그것이 누가복음 6장이나 마태복음 7장 말씀처럼
홍수와 창수와 거센 바람일지라도
주님께 속한 자로 굳건하게 서서 주님의 사람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그러한 삶이 가능함을 정말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난 이후에
그가 땀 흘려 수고하여 먹고 집 짓고 살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사람에게 주신 진정한 지위는 아니었습니다.
삼손이 주님께 속한 나실인이란, 주님의 사람의 위치를 가벼이 여기고
그 삶에 성실치 아니했을 때
그는 사로잡힌 자였고, 그는 두 눈 뽑힌 자였고, 그는 연자맷돌 돌리는
많은 대적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위가 그렇게 처량할까요?그렇게 비참할까요?
갈보리 십자가로 가시고 부활하시므로 우리에게 주신 그 영토.
오늘도 보좌의 주님이 내 주님 되어 주시는
이 진정한 깨어 있는 참된 사귐이 있다면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와도 우리는 흘러 떠내려가지 아니할 것입니다.
강한 자로 굳게 서서 주님의 뜻을 온 기쁨으로 이루어 드리는
보람 있는 오늘 우리의 삶이 이어져갈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로마서 8장은 주님 안에 자리 잡은 자가
어떤 죽음의 분위기가 밀려와도
그 안에서 차라리 죽음을 각오한다할지라도
떠나지 않겠다는 강한 마음이 로마서 8장 35,36절의 말씀인 줄 압니다.
주님으로 이기는 내용이 37절입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사는 이 삶은
어떠한 가운데서도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이 39절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러합니다.
로마서 12장 말씀처럼
이런 자로 주님과 함께 우리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시게 하는
살아있는 그의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놀라운 생활이
오늘 여러분의 생활이 되기를 원합니다.
다윗이 사무엘상 17장에는
골리앗과의 전투를 위해 시냇가에서
조약돌 다섯 개 줍는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물매를 가진 지갑은 늘 옆구리에 차고 있었겠지만
조약돌은 늘 가지지 아니한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등은 가졌지만
기름을 가지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들이 있었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의 살아있는 사귐을 가진다면,
오늘도 그 은혜 속에서 주님 주신 젖과 포도주를 마시고
내 주님 주시는 기름 부으심의 은혜를 가져서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를 옷 입고 나아가고자 한다면
흘러 떠내려갈 리가 있겠나요?
세상은 원하지도 않을 것이고 세상에 밀리지도 아니할 줄 압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한 때 받은 은혜는 아닙니다.
시냇가에서 조약돌을 구했던 다윗처럼
오늘도 내 주님 향하여 나아가서
천국의 시냇물이 흘러오는 그 은혜의 보좌를 바라보고
여기서 잠잠히 주님을 향하다 보면
오늘 여러분은 흘러 떠내려가지 아니할
뚜렷한 은혜를 가질 수 있을 줄 압니다.
이것은 지나간 오래 된 것 아닙니다.
오늘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손에 사로잡힌 자여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이런 시간을 보냈다면 골리앗은 두렵지 않습니다.
다윗이 갑옷을 입을 필요가 없는 것은 주님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많은 도구가 필요치 않은 것은
지금 내가 주님의 손안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10월부터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준비하는 이라면
바로 이 한 가지에 역점 두었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역이나 주변에서 조금만 마음 쓰다 보면
시냇가에서 조그만 조약돌 같은 돌들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에 많이 닳았고 매끈매끈할지 몰라도
흘러 떠내려가지 않았던 그 돌
각자가 열다섯 개 정도는 주변에서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책상 위에 두시고 그 돌 하나를 곁으로 옮겨 놓으면서
“이날도 이런 주님과 나의 관계를 가지고 살겠다!”라고 해 보세요.
다음 날도 하나 …
그래서 보름이 지나면 또다시 새롭게 반복해 가면서
여러분이 주님과 함께 이런 사귐을 되새겨 보기를 원합니다.
혹시 돌이 잘 준비 되지를 않는다면
여러분이 “이 조약돌을 제게 보내주세요.”라고 하신다면
열다섯 개의 조약돌을 보내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일일이 여러분들의 우편료를 담당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큰돈은 아니니까 우편요금은 여러분이 담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평안하시고요,
이렇게 해서 10월, 11월, 12월, 1월, 2월의 그날까지
하루하루를 알차게 주님과의 사귐 속에 준비하셨다가
그날 깊은 밤에 우리가 함께 주님 바라보며
주님 보좌를 향하여 솟아오른 마음으로 함께 마음이 묶어지는
참 좋은 시간을 기다려 주시기 부탁합니다.
평안하십시오.
하루하루가 주님 모신 복된 날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일 시 : 2019. 02. 18.(월) ~ 02. 22.(금) 매일 밤 11:20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내년 2월이면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그리워하는 주님의 보좌를 향하여
함께 자리는 하지 못할지라도 우리 마음만은 함께 묶어진 마음으로
주님의 보좌를 향하고 싶습니다.
요한복음 17장 24절 말씀에
주님께 속하여 한마음으로 묶어진 이들이
주님의 보좌를 향하여 함께 향하고 있음을 읽게 됩니다.
그들이 한마음으로 주님을 향하고 있지만
함께하는 자리는 못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하늘나라로 가신 예수님을 향하여
열흘 동안 함께 마음 묶어서
예루살렘 떠나지 아니하고 성전에서 기뻐하고 찬송하며
그 예루살렘 다락에서 전심으로 함께 기도했던 이들이
늘 함께 있을 수는 없을 줄 압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주님께 속하여 다스림 받는 예루살렘은
그들이 어디에 있더라도 늘 가져보는 마음일 것이며,
그들이 참된 성전 되신 주님 안에서 보좌의 주님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것도
그들이 어디에 흩어져 있더라도 늘 가져보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향하여 솟아오른 다락에서
남김 없는 전 마음으로 기도하고 기대하며,
사랑하는 주님을 앙망하는 그 마음은
그들이 함께 있지 못할지라도 마음만은 분명히 함께하는 것 사실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이 빌립보서 1장에서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기도 속에 있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도 소중하지만 마음에 있다는 말은 얼마나 더 소중한 말일까요!
우리가 어떤 중요한 문제점은 때로 수첩에 기록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마음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신 이것은
참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께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함께할 수 없고
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과 늘 함께할 수는 없어도
마음만은 주님 안에서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안에 있다는 말과 주님을 향하는 마음과
오늘도 보좌에 계신 주님께서 그의 생명과 그의 사랑으로 이끄셔서
서로 사랑하게 하시는 이 가운데서
그들은 함께 있을 수 없었지만
마음으로는 주님께 속하여 주님을 바라보면서
정말 함께하는 참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고자 한다면
지금은 어찌해야 할까요?
예수님 가신 저 하늘나라를 끊임없이 바라보고만 있어야 할까요?
그렇게 해도 영혼은 자유가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십자가와 부활하심과 보좌의 은총을 우리가 마음으로 적용해보다보면
오늘도 내가 이 세상에서 육신 속에 있는 것 같아도
나의 온 마음은 부활하신 주님 안에 있고
예수님 보이지 아니하셔도 그 보좌의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주님 안에서 바라보기는 결코 어렵지 아니할 줄 압니다.
시편 16편 말씀에서 다윗이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란 마음으로
주님께 피하여 주님 안에 있을 때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고 할 만큼
주님은 참으로 가까웠습니다.
우리가 주님 밖에 있을 때는 주님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 가신 하늘나라를 바라본다 해도 말입니다.
그러나 뚜렷하게 구별 되어
이 세상에 머물러있지 아니하고 육신에 머물러있지 아니하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 믿음으로 속하여 있을 때는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고 할 만큼
오늘을 살아갈 복,
내가 어떤 문제를 만나도 해결될 수 있는 축복,
우리의 길을 영광스럽고 복되게 인도하여 주실 참된 복으로
정말 주님이 전부가 된다는 말씀인 줄 압니다.
“주 밖에 나의 복이 없나이다.”
오늘 참된 성전으로 가르쳐주신 예수님.
요한복음 2장에서 말씀하신 그 주님 안에
내 마음이 더듬어서 믿음으로 주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보좌의 주님이 정말 가깝습니다.
내 기쁨이시고, 내 사랑이시고, 내 생명이시고, 내 힘이 되십니다.
정말 주님은 나의 빛이 되십니다.
내 모든 것 되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들이란 것은
주님 안에 자리 잡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복음으로서,
믿음으로 주님 안에 자리 잡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축복입니다.
아무리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가 위태해서 아기스 왕 또는 모압 왕 밑으로 피난 갔을 때
주님은 그에게 가깝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다윗이 하나님께서 주신 예루살렘에 자리 잡아 살지라도
그가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 안에 자리 잡고자 내 주님을 추구하며,
주님 안에 서서 영광스런 보좌의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바라보며,
다스림 받는 삶이 아닐 때
다윗은 보기 민망한 자였습니다.
주님은 결코 다윗의 힘이 아니었고 다윗의 주님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사무엘하 11장과 24장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변함없는 마음으로 주님 안에 자리 잡고
그것이 쫓기는 몸이라도, 참으로 궁핍과 시련이 많을지라도,
주님을 가까운 나의 주님으로 바라볼 때
주님은 동굴 속에 있는 다윗에게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의 의지가 되어주시고, 강함이 되어주시고, 평강이 되어주시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참 쉬웠습니다.
너무 자연스러웠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참 너무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스쳐가는 말에 불과합니다.
힘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뜻하신 올바른 길에 서다 보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얼마나 마음에 큰 힘이 되는지요!
여러분, 이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여러분이라면 세상 살만 합니다.
어렵다 말하지 않습니다.
죽을 것 같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내 힘이시고, 내 사랑이시고, 내 기쁨이시고, 내 빛이시고
나와 함께해 주시는 이 놀라움 속에 있다면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천국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생활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 만하다는 말을 능히 할 수 있습니다.
대적을 보면서도 “적군은 우리 밥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
그것 아니라면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해도 별 힘이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성령의 은사가 없었나요?
그들에게 임해오는 성령의 은사가 많았기에
사도 바울 선생님은 질서 있게 잡아주어야 될 형편이었습니다.
없었다면 질서 있게 이렇게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유익을 위해서 주신다고 하시지 않던가요?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 때는 혼돈이고
그것을 기점으로 하다보면 이런 말을 들어야 합니다.
“당신이 천사의 말과 갖가지 방언을 한다 할지라도
주님과의 참된 사랑이 없다면, 이 사랑은 은사 아닙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은사 중에 한 가지로 생각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가 있을 때는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영혼의 신랑이 되고
내가 그의 신부적인 가까운 마음이 될 때 사랑이 오갑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벗어나면 글쎄요, 은사는 있을지라도 사랑은 없습니다.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만다고 했습니다.
주님과 나의 사랑이 아니면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내가 주님과 연합하지도 아니하고
예수님을 내 사랑으로 마음에 품지도 아니하면서 이 사랑이 있나요?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들었던 교회이고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던 교회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랑도 없고, 빛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요!
제대로 활용하고 있었다면 사도 바울 선생님이 이런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이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고,
모든 것을 아는 예언하는 능력이 있다할지라도
당신이 굉장해 보이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주님과 당신 사이의 사랑의 관계가 이어지지 않아서
사랑이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과 나의 사랑입니다.
주님과 나의 사랑이 있을 때 고린도전서 16장 13절 말씀처럼
오늘도 깨어서 온 마음으로 내 생명 되신 주님께 믿음을 둘 때,
그리고 그 주님이 나에게 실제이기 때문에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설 때,
포도나무 가지로서
세상은 보지 못해도 담대하고,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는 자로
우리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할 수 있음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 마음에 있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사랑의 연합이 있고, 사랑으로 주님을 존귀히 여기고
주님을 내 모든 것으로 삼는 그 자가
지금! 사랑 가운데서 살 수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점이 얼마나 귀한지요.
당신이 당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할지라도
주님과 나 사이의 사랑의 연합이 없고
사랑의 주님을 따라 행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시었습니다.
그 다음 말씀은
“사랑은! 사랑은!! 사랑은!!!”
주님과 나 사이의 참된 연합과 참된 사귐이 있어서
그 사이에 흘러나오는 사랑이 있을 때
우리는 인격적으로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얼마나 주님의 사람다운지요.
그의 사람으로 부끄럽지 않는지요.
이 사랑은 지금이지만 영원히 이어져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되지만
그 중에 으뜸은 사랑이라 하시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이 이어져 가겠나요?
내 주님과 나의 사랑이 없다면 그날 소망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나요?
그러나 주님과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나의 사랑을 가지게 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이 사랑이 있기에 오늘도 희망이 있고 내일도 희망이 있고
먼 그날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지요!
사사기에서 믿음은 가지고 사랑이 없는 자는
내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주님과 나의 사랑의 교제가 없으므로
목마르면 무엇이든 마셔버리고 맙니다.
세상에 기울어져버리는 그것은 사랑 아닙니다.
허락해주신 이 세상이지만 내 주님의 마음을 더듬어 보는 그들이
기드온 삼백용사입니다.
그 사랑이 있는 자는 항아리 속에 불이 있는 자입니다.
항아리는 질그릇인 우리를 가리키는 말이지 않을까요?
내 속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불빛을 좇아 그 사랑 가운데서
한 걸음 한 걸음 근신하며 걸어갑니다.
이들이 십삼만 오천을 무찌른 기드온 삼백용사입니다.
피곤해도 주님을 성실히 따랐던 이들이고요,
에브라임 지파의 형제들이 투덜대며 싸우러 올 그때라도
겸손히 낮추어서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품어주는 마음이고요.
아무리 배고프고 아무리 어려워도
먼저 주님 따르기에 온 마음을 쓰는 이들입니다.
이 사랑의 주님을 모시고 따르는 이들은
네가 왕 되라고 해도 절대 왕 되고자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주님은 내 사랑이고 그분이 왕인 줄 압니다.
우리는 압니다.
나는 정말 보잘 것 없는 자임을 압니다.
주님이 내 믿음 되어주셔서 이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던 것이지
우리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그들은 생각지 아니한 줄 압니다.
굉장해 보이지 않는 초라한 삼백 명으로,
그것도 칼도 제대로 갖지 않은 그들로서
십삼만 오천을 무찌른다는 것은 참 쉬운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주님과의 사랑이 있으므로 담대함이 있고, 확신이 있어서
주님과 함께할 때는
사랑의 주님이 그들과 함께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왜 삼손이 망했나요?
사랑 문제입니다.
힘이 있을 때는 어떤 때였고,
사로잡혀서 눈 뽑히고, 연자맷돌 돌리고, 구경거리가 된 때는 어떤 때입니까?
주님과의 사랑이 아니면 나실인이 못 됩니다.
그 누구 하나 눈여겨보지 않는 어두운 밤이라도
내 영혼이 주님을 향하여 허리띠 동여매고 서 있을 만큼
사랑의 불은 켜져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35절은
이렇게 사랑의 불이 있음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어둡지 않습니다.
천국의 은혜의 이슬이 있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더 불붙어갈 것입니다.
이들이 이 땅에 있지만 주님을 향하여 불붙는 마음을 가진 이들입니다.
자기가 왕이 아닙니다. 초라한 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므로 강하고
사랑의 주님이 내 믿음 되시기에 너무 기쁘고
사랑의 주님이 내 소망이 되시기에 너무 좋은 것입니다.
오늘 성실하게 섬기는 것도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내년 2월 18일(月)~22일(金)까지 5일 동안의 깊은 밤 시간!
그것도 이번에는 쉽게 저녁부터 만나지 아니하고
전파로 11시 20분부터 만난답니다.
이것은 사랑하고자 정함 있는 마음이 아니면 참여하지도 말란 뜻이겠지요!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지금! 지금부터 준비해 주시기를 …
그 이름이 누구든 간에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라는
고린도전서 16장의 이 말씀에 우리가 들어가서는 안 되겠죠?
복음을 안다면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참된 복음 속에 서 있다면, 예수님을 불붙듯이 사랑합니다.
오늘 내 속에 복음이 살아있는 자 치고
예수님을 이렇게 불붙듯이 사랑치 않는 사람 없습니다.
복음이 말로만, 복음이 곁으로 비스듬히 가서 제대로 안 박힌 사람.
복음을 비스듬히 알아서 정확히 모르는 사람.
이들은 다 신앙의 헛발질을 합니다.
주님을 사랑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도 귀중합니다.
주님을 위해 섬기는 것도 귀중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나의 사랑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이것 아니라면 그날 주님께로부터 칭찬 듣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라고
에베소서 6장 24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에베소서 1장부터 6장까지의 복음의 알맹이적인 내용이
우리 생활 속에서 적용되지 않았다면
절대 예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광야에 쓰러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납니다.
그들은 우상숭배도 했습니다.
그들은 간음도 했습니다.
그들은 불평도 했습니다.
그들은 원망도 했습니다.
묶어서 말하면 절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 어떠한데
그 사랑 안에 자리 잡는다면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 안에서 날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더듬고 살아간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도 성전된 주님과 함께
능히 하나님을 경배하며 사랑하는 그런 값진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0월은 우리 마음을 이 분야로 굳게 정하여 보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11월, 12월, 1월 석 달 동안
그리고 2월의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의 마음을 점점 주님을 사랑하는 이로 굳혀가고 싶습니다.
주 예수님을 나의 진정한 그리스도로 사랑하는 이들!
주 예수님을 내 생명처럼 오늘 이 땅에서 사랑하는 이들!
누가복음 14장의 제자의 길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부모, 처자, 형제자매, 자기 목숨까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께 온 마음으로 연합되어 사랑하는 이들이
참된 주님의 제자랍니다.
그런 자 아니면 길에서 다 흩어지고야 만다는 뜻입니다.
오늘 나에게 있는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면서도
내 사랑 되신 주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며 따르고자 하는 이가
주님의 진정한 제자의 길에 설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람이 된다는 뜻이지요.
조그만 어려움, 조그만 시련, 조그만 고난 때문에 어려워할 것 아니고
주님 사랑하는 불붙는 마음에
그런 것은 문제될 것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가진 것 아닙니다.
주님을 내 모든 것 삼는 마음입니다.
나 자신이나 그 무엇을 기준 삼는 이는 벌써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름만의 사랑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실제 내 모든 것으로, 내 사랑되어 주시기 원하십니다.
이들은 전쟁에 나갈 수 있습니다.
이들은 보좌를 향해 망대를 높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그러해도 말입니다.
이들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될까요?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지금 이 10월에
여러분의 마음을 굳혀 보시고 마음이 정해진다면,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로서
우리 예수님이 원하시는
복음서에 기록된 그런 사람으로 서고자 마음을 정해 본다면,
여러분은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닐 것입니다.
큰 축복이고, 말할 수 없는 영광이고
오늘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기쁨이 되는 자로 서갈 수 있을 줄 압니다.
주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정말 사랑하는 이들!
사랑하다 보니 그분이 내 구주가 되어주셔서,
오늘도 주님 주신 믿음을 좇아 강하고 풍성한 마음으로
이 땅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그의 사람으로
하루하루가 값지고 영광스럽기를 원합니다.
사도행전의 내용 속에 깊이 잠겨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 속에는 보좌의 주님을 너무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 사랑하기에
그분의 뜻을 어려움 속에서도 이루어 드리고자 나아가는
그의 사도들의 걸음이 참 아름답습니다.
사도행전을 너무 잘못 보는 것 같습니다.
무조건 땅 끝까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므로 기다림이 있고
보좌의 주님께서 임하시는 주님의 영이 있어서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무조건 땅 끝까지가 아닙니다.
무조건 예루살렘을 향해 다시금 돌아가자 하는
이런 구호는 너무 안타깝게 생각됩니다.
그들은 사도행전의 길을 갈 때 보좌의 주님을 사랑하므로
고난 속에서도 게으르지 않고 성실하게 전진해 갔고,
그들의 영혼은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늘 여유와 안정감이 있었고
그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이었듯이,
이런 사도행전의 발걸음이
지금 우리에게도 계속되었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가만히 있고자 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골방으로만 들어가려고 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을 사랑하므로
이 험한 길에 주님의 뜻을 좇아
고린도후서 5장의 불붙는 사랑을 가지고
어려운 세상인 줄 알지만 나아갔던 고린도후서 6장의 사도 바울 선생님처럼,
이런 조그만 주님의 보냄 받은 사람들로
한분 한분이 값지고 귀중하게 서 갈 수 있을 줄 압니다.
그러시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8년 9월에
2월 성회 준비위원 드림.
흘러 떠내려갈까 보아서
유다서 1장 6절에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것이 어둠의 권세요, 사단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줄 압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사단으로 바뀌어진 것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남으로 그러한 것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히브리서 2장 말씀에서 큰 구원을 받은 우리,
여기서 ‘큰 구원’은 우리가 어려운 큰 질고나 또 큰 환난이나
이런 가운데서 건짐 받은 것을 큰 구원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신 큰 은혜임이 사실입니다만
히브리서 2장에서 말씀하시는 큰 구원은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어둠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또 달리 말한다면
어둠에 붙들려서 정결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이제는 놀라우신, 거룩하신 주님께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2장에서 말씀하시는 큰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또 한편 주님의 부활하심에 동참하므로
하나님 나라의 그 영광과 거룩한 삶에 동참하게 됨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큰 구원’이란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근본적으로 어려운 우리 삶을 건져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2장에서 중요한 것은
이 큰 구원 받은 우리도 흘러 떠내려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조심하고, 조금만 정신 차리고 깨어 있다면
이 값진 삶을 살 수 있을 터인데 말입니다.
사실 엘리가
주님께서 그를 불러주셨던 참된 그 위치에 굳건하게 서서
주님의 사람으로 서고자 마음을 정해갔다면
그런 비참한 집이 되지는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모르긴 하지만 엘리가
참으로 주님께 속한 그의 사람으로 깨어 있었다면
그의 자녀들도 그런 비참한 종말로 끝나지 아니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불러주신 이 놀라운 은총은
히브리서 3장과 4장 말씀처럼
오늘이라고 하는 평범한 이날에도 우리가 정신 차려보면
그 놀라우신 주님께 속하여서
살아계신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주님께 순종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가 이 어둡고 죄악 많은 거친 이 세상에 휘말리지 아니하고
자유도 있고 삶의 행복도 느끼면서
주님의 사람으로 굳건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6장은 조금만 마음 쓰지 아니하고
주님의 사람으로 깨어 있고자 하지 아니한다면
전날에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었던 우리라고 할지라도
타락한 길로 가고야 말게 됨을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깨어 있으면 주님의 사람으로서 확실한 소망과 더불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는 견고한 삶을
주님과 함께 뜻깊게 걸어갈 수 있는 것 사실입니다.
다윗이 주님께 속함이란 이 참된 위치에서 깨어있고자 하지 아니할 때
그는 어느덧 블레셋으로 내려가 있었고
때론 모압 땅으로 밀려가 있었고 때론 요단 동편으로 쫓겨나 있는
이러한 다윗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내 주님 안에 내가 속한 영역이 있고
그곳에서 주님은 나의 빛이 되시고 나의 분깃이 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 속에서 강한 마음으로
비록 주어진 환경과 여건 속에 어려움 있을지라도
흘러 떠내려가지 아니하고 굳건하게 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줄 압니다.
흘러 떠내려가기는 너무 쉽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12장에서
어두움의 권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흘러 떠내려가게 하고자
갖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읽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과 나의 관계를 온전하고 철저하게 붙들고자 한다면
우리는 흘러 떠내려가지 아니 할 수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라는 주제가
감상적이고 단순한 말이 결단코 아닙니다.
오늘 우리를 흘러 떠내려가게 하는 수많은 문제가 밀려오는 이 세상에서도
내가 주님을 향하여 온 마음으로 매이고 주님께 굳건하게 속하여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내 주님을 바라보며
나의 주님과 함께 달려가고
내 주님 모신 족한 마음과 그 은혜 속에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세상이 우리 발 곁에 어떤 모습으로 흘러 온다할지라도
그것이 누가복음 6장이나 마태복음 7장 말씀처럼
홍수와 창수와 거센 바람일지라도
주님께 속한 자로 굳건하게 서서 주님의 사람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그러한 삶이 가능함을 정말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난 이후에
그가 땀 흘려 수고하여 먹고 집 짓고 살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사람에게 주신 진정한 지위는 아니었습니다.
삼손이 주님께 속한 나실인이란, 주님의 사람의 위치를 가벼이 여기고
그 삶에 성실치 아니했을 때
그는 사로잡힌 자였고, 그는 두 눈 뽑힌 자였고, 그는 연자맷돌 돌리는
많은 대적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위가 그렇게 처량할까요?그렇게 비참할까요?
갈보리 십자가로 가시고 부활하시므로 우리에게 주신 그 영토.
오늘도 보좌의 주님이 내 주님 되어 주시는
이 진정한 깨어 있는 참된 사귐이 있다면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와도 우리는 흘러 떠내려가지 아니할 것입니다.
강한 자로 굳게 서서 주님의 뜻을 온 기쁨으로 이루어 드리는
보람 있는 오늘 우리의 삶이 이어져갈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로마서 8장은 주님 안에 자리 잡은 자가
어떤 죽음의 분위기가 밀려와도
그 안에서 차라리 죽음을 각오한다할지라도
떠나지 않겠다는 강한 마음이 로마서 8장 35,36절의 말씀인 줄 압니다.
주님으로 이기는 내용이 37절입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사는 이 삶은
어떠한 가운데서도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이 39절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러합니다.
로마서 12장 말씀처럼
이런 자로 주님과 함께 우리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시게 하는
살아있는 그의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놀라운 생활이
오늘 여러분의 생활이 되기를 원합니다.
다윗이 사무엘상 17장에는
골리앗과의 전투를 위해 시냇가에서
조약돌 다섯 개 줍는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물매를 가진 지갑은 늘 옆구리에 차고 있었겠지만
조약돌은 늘 가지지 아니한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등은 가졌지만
기름을 가지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들이 있었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의 살아있는 사귐을 가진다면,
오늘도 그 은혜 속에서 주님 주신 젖과 포도주를 마시고
내 주님 주시는 기름 부으심의 은혜를 가져서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를 옷 입고 나아가고자 한다면
흘러 떠내려갈 리가 있겠나요?
세상은 원하지도 않을 것이고 세상에 밀리지도 아니할 줄 압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한 때 받은 은혜는 아닙니다.
시냇가에서 조약돌을 구했던 다윗처럼
오늘도 내 주님 향하여 나아가서
천국의 시냇물이 흘러오는 그 은혜의 보좌를 바라보고
여기서 잠잠히 주님을 향하다 보면
오늘 여러분은 흘러 떠내려가지 아니할
뚜렷한 은혜를 가질 수 있을 줄 압니다.
이것은 지나간 오래 된 것 아닙니다.
오늘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손에 사로잡힌 자여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이런 시간을 보냈다면 골리앗은 두렵지 않습니다.
다윗이 갑옷을 입을 필요가 없는 것은 주님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많은 도구가 필요치 않은 것은
지금 내가 주님의 손안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10월부터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준비하는 이라면
바로 이 한 가지에 역점 두었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역이나 주변에서 조금만 마음 쓰다 보면
시냇가에서 조그만 조약돌 같은 돌들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에 많이 닳았고 매끈매끈할지 몰라도
흘러 떠내려가지 않았던 그 돌
각자가 열다섯 개 정도는 주변에서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책상 위에 두시고 그 돌 하나를 곁으로 옮겨 놓으면서
“이날도 이런 주님과 나의 관계를 가지고 살겠다!”라고 해 보세요.
다음 날도 하나 …
그래서 보름이 지나면 또다시 새롭게 반복해 가면서
여러분이 주님과 함께 이런 사귐을 되새겨 보기를 원합니다.
혹시 돌이 잘 준비 되지를 않는다면
여러분이 “이 조약돌을 제게 보내주세요.”라고 하신다면
열다섯 개의 조약돌을 보내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일일이 여러분들의 우편료를 담당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큰돈은 아니니까 우편요금은 여러분이 담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평안하시고요,
이렇게 해서 10월, 11월, 12월, 1월, 2월의 그날까지
하루하루를 알차게 주님과의 사귐 속에 준비하셨다가
그날 깊은 밤에 우리가 함께 주님 바라보며
주님 보좌를 향하여 솟아오른 마음으로 함께 마음이 묶어지는
참 좋은 시간을 기다려 주시기 부탁합니다.
평안하십시오.
하루하루가 주님 모신 복된 날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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