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우리 다시 함께 기도해요' 안내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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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96회 작성일23-04-02 14:41본문
(5)에 이어서
그런데 주님께서 진정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어간 것은 참된 기도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고 저도 그렇습니다. 주님과 나의 언약을 모른다면 온 마음으로 주께 돌아오지도 않고, 내가 전 마음으로 주님께 향하지도 않고, ‘내가 주님만 위해서 살 것이다!’ 이런 헌신된 마음도 없는데, 기도해봤자 얼마나 가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뜨거운 관계가 되었다면 기도는 정말 중요합니다. 그것이 부서지지 않는다 그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7장에서 그 아름다운 것이 형성되었던 사람이 멀리 가지도 않았는데, 8장에서 다 무너져 버렸어요. 주님을 내 왕으로 붙들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한마디로 하면 깨어있는 기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기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이라고 할 수 있는 언약을 모르면서 기도만 하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얍복 강변의 야곱이 늘 그렇게 기도할 수 있나요? 안 됩니다.
히스기야 왕이 늘 그렇게 기도할 수 있나요? 안 됩니다. 피곤해요.
그런데 언약을 알면 기도는 기쁨입니다.
이사야 56장처럼 언약 속에 동행했던 그들은 주님이 인도하시는 기도의 성산에서 내 주님과의 사귐의 기쁨을 마음껏 누립니다. 그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거기에서는 우리 가슴속에 내일에 대한 끓어오르는 마음이 생깁니다. 무엇입니까? “나, 내일 주님 따를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냐면, 이사야 56장은 ‘나의 제단’이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러분, 기도 속에 주님께 매여서 “나, 주님 따를 것이다.”하는 것 아니면 제단은 못 찾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합니까? 나의 번제와 희생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 속에 그런 것을 참으로 강하게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어떻습니까? 어제 술 마셨으니 오늘도 마시자. 잠자기를 좋아한다. 참으로 잠들어 버리고 취해 버린 그들. 그것 아닙니다. 누구지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깨어있을 것입니다.
깨어있음의 기쁨이 얼마나 크며, 깨어있음의 영광이 얼마나 큰가요!
그런데 여러분, 이 깨어있음의 자리를 아브라함도 놓쳐 버릴 때가 있습니다. 창세기 15장과 16장에서 말입니다. 노아도 놓쳐버릴 수 있습니다. 창세기 9장에서 말입니다. 요셉도 이 영광의 깨어있음을 놓쳐버렸어요. 창세기 48장에서 말입니다. 그것이 시편 78편에 나옵니다. 내가 요셉의 장막을 싫어한다고요.
내가 깨어서 주님께 나아가 주님께 속하고, 시편 132편처럼 “내 주님 안을 발견하기까지 나는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피곤하고 내가 아무리 슬퍼도 나는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주님은 영원히 우리 속에 살아계신 주님으로 자리 잡아 주십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기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에게 지금이 이런 은혜의 시간이라면, 우리의 기도에 그 무엇이 형성되었으면 좋겠어요.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에게 이처럼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기도의 자세를 갖추도록 해 주신 주님을 더듬어 보면 참 감사가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의 자세를 만들어 볼까요?
아브라함이 창세기 24장에서 자기의 아들 이삭을 위해 그 며느리를 구할 때,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고, 방법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대로 했습니다. 그 방법은 어려워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최상의 방법이었습니다. 아들을 데리고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신부가 따라오겠어요? ‘한쪽 눈이 없는지, 다리가 저는지,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그러나 무언가 주님을 아는 이는 ‘아! 하나님이 나를 이끄신다.’라고 하며 옵니다. 주님을 아는 이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섬길 수 있는 이는 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어려운 것 같아도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나요?
아브라함의 길 속에서 ‘내 율례’란 말씀이 여기에 해당 되는 낱말입니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삼백십팔 명이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칼싸움을 연습했다기보다는 아마 내 하나님 의지하고, 하나님 가까이 모시고 연습했겠지요. 그것이 주님의 율례입니다. 대단히 중요합니다. 참 축복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의 율례!”
창세기 21장 마지막 부분에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것은 율례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 생활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창세기 26장에서 아브라함에 관하여 다섯 가지 낱말을 말씀하셨는데, 아브라함은 내 음성을 듣고, 내 권고를 듣고, 내 명령을 지키고, 내 율례와 내 법을 지켰다고 말씀하셨는데 하나하나가 다 귀한데 ‘율례’란 말씀을 빼 버리면 안 됩니다. 기도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이끄시는 율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진정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어간 것은 참된 기도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고 저도 그렇습니다. 주님과 나의 언약을 모른다면 온 마음으로 주께 돌아오지도 않고, 내가 전 마음으로 주님께 향하지도 않고, ‘내가 주님만 위해서 살 것이다!’ 이런 헌신된 마음도 없는데, 기도해봤자 얼마나 가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뜨거운 관계가 되었다면 기도는 정말 중요합니다. 그것이 부서지지 않는다 그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7장에서 그 아름다운 것이 형성되었던 사람이 멀리 가지도 않았는데, 8장에서 다 무너져 버렸어요. 주님을 내 왕으로 붙들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한마디로 하면 깨어있는 기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기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이라고 할 수 있는 언약을 모르면서 기도만 하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얍복 강변의 야곱이 늘 그렇게 기도할 수 있나요? 안 됩니다.
히스기야 왕이 늘 그렇게 기도할 수 있나요? 안 됩니다. 피곤해요.
그런데 언약을 알면 기도는 기쁨입니다.
이사야 56장처럼 언약 속에 동행했던 그들은 주님이 인도하시는 기도의 성산에서 내 주님과의 사귐의 기쁨을 마음껏 누립니다. 그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거기에서는 우리 가슴속에 내일에 대한 끓어오르는 마음이 생깁니다. 무엇입니까? “나, 내일 주님 따를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냐면, 이사야 56장은 ‘나의 제단’이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러분, 기도 속에 주님께 매여서 “나, 주님 따를 것이다.”하는 것 아니면 제단은 못 찾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합니까? 나의 번제와 희생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 속에 그런 것을 참으로 강하게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어떻습니까? 어제 술 마셨으니 오늘도 마시자. 잠자기를 좋아한다. 참으로 잠들어 버리고 취해 버린 그들. 그것 아닙니다. 누구지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깨어있을 것입니다.
깨어있음의 기쁨이 얼마나 크며, 깨어있음의 영광이 얼마나 큰가요!
그런데 여러분, 이 깨어있음의 자리를 아브라함도 놓쳐 버릴 때가 있습니다. 창세기 15장과 16장에서 말입니다. 노아도 놓쳐버릴 수 있습니다. 창세기 9장에서 말입니다. 요셉도 이 영광의 깨어있음을 놓쳐버렸어요. 창세기 48장에서 말입니다. 그것이 시편 78편에 나옵니다. 내가 요셉의 장막을 싫어한다고요.
내가 깨어서 주님께 나아가 주님께 속하고, 시편 132편처럼 “내 주님 안을 발견하기까지 나는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피곤하고 내가 아무리 슬퍼도 나는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주님은 영원히 우리 속에 살아계신 주님으로 자리 잡아 주십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기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에게 지금이 이런 은혜의 시간이라면, 우리의 기도에 그 무엇이 형성되었으면 좋겠어요.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에게 이처럼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기도의 자세를 갖추도록 해 주신 주님을 더듬어 보면 참 감사가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의 자세를 만들어 볼까요?
아브라함이 창세기 24장에서 자기의 아들 이삭을 위해 그 며느리를 구할 때,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고, 방법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대로 했습니다. 그 방법은 어려워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최상의 방법이었습니다. 아들을 데리고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신부가 따라오겠어요? ‘한쪽 눈이 없는지, 다리가 저는지,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그러나 무언가 주님을 아는 이는 ‘아! 하나님이 나를 이끄신다.’라고 하며 옵니다. 주님을 아는 이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섬길 수 있는 이는 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어려운 것 같아도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나요?
아브라함의 길 속에서 ‘내 율례’란 말씀이 여기에 해당 되는 낱말입니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삼백십팔 명이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칼싸움을 연습했다기보다는 아마 내 하나님 의지하고, 하나님 가까이 모시고 연습했겠지요. 그것이 주님의 율례입니다. 대단히 중요합니다. 참 축복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의 율례!”
창세기 21장 마지막 부분에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것은 율례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 생활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창세기 26장에서 아브라함에 관하여 다섯 가지 낱말을 말씀하셨는데, 아브라함은 내 음성을 듣고, 내 권고를 듣고, 내 명령을 지키고, 내 율례와 내 법을 지켰다고 말씀하셨는데 하나하나가 다 귀한데 ‘율례’란 말씀을 빼 버리면 안 됩니다. 기도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이끄시는 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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