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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우리 다시 함께 기도해요' 안내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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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97회 작성일23-04-02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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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에 이어서


  야곱은 자기 형 에서가 사백 명의 자객을 거느리고 자기를 사로잡고자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주님을,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자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하나님을 모시고 살던 집에서 살았기에 그 어려운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그가 향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32장, 33장에서의 야곱은 얍복 강변에서 그 하나님을 향해 간절함으로 마음이 매여갔습니다. 하갈의 기도를 들어 주셨듯이 하나님은 야곱을 만나주셨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히스기야 왕이 부르짖었던 이사야 36장 37장 38장과 같은 기도입니다.

  사무엘상 7장에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스바에 다 모두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돌아온 이들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기도의 어떠함을 보여줄 수 있는 그 시간!
앞에서의 그런 기도와는 다른 기도였습니다.
미스바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 주께 돌아온 이들이 지금은 기도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깊이 있게 배울 수 있는 참 좋은 시간이라는 것을 사무엘은 알았습니다.

  블레셋이 엄청난 세력으로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백성은 겁을 냈습니다만 사무엘은 그가 의지하는 주님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젖 먹는 어린양을 잡아 주님을 향하여 번제 드리고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아마 사무엘의 마음은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의지하는 주님! 내가 모시고 사는 주님! 지금 블레셋 군대가 옵니다. 나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어린양과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 주님이지 않습니까! 이것을 막아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믿음에 선, 확신 있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께 돌아온 이들이 다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런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에서 사도 바울 선생님이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빌립보 지방으로 가서 마침내 두 가정이 주님께 돌아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루디아 아주머니의 가정.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있어서 여인들 가운데 그 루디아 아주머니는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잠자다가 참으로 당황했던 그 간수. “내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자기의 잃어버린 상태를 깊이 있게 느끼고 다가온 그 자! “주 예수를 믿으라”라는 말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믿고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전심으로 믿었습니다. 루디아 아주머니도, 간수도!

  그냥 막연하게 하나님을 불러보는 강가에 모인 여인들과는 다르지요.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그들은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만났을 때 두고두고 이야기한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 선생님이 선한 일로 잡혀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고, 갇혀있던 감옥에서 그 깊은 밤이지만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었던 그 기도! 그리고 그 기도와 더불어 울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아니라 찬송했던 그 모습!
그것은 기도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리고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온 감옥 터가 흔들리고, 문들이 열리고, 쇠사슬이 풀어지고!
여러분, 여기에 주님께 돌아온 예수 믿음과 기도! 이 두 가지가 있었기에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 선생님이 곧 떠나셔도 망하지 않고 더 번창해 갔습니다. 주님께 돌아와서 주님을 내 주님으로 믿는 이 믿음과 기도만 있다면 우리에게 놀라운 결과는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마음을 모두어 기도하고자 합니다.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 대군이 밀려올 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오늘은 책벌의 날이고 능욕의 날이라고 하면서 한 말이 있다면 아기를 잉태했지만 해산할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기도는 좋은 기도 아닙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시편 50편에 나오는 기도는 내가 주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 가득할 뿐 아니라 그 주님께 내 온 마음이 매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한 그 말씀처럼, 지금 주님께 온 마음으로 매여 있는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여러분, 이것이 참된 기도이지 않겠습니까!
감사 가득한 마음으로 내 주님께 꽉 묶인, 내 주님 모시고 내 주님께 매인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세상에서 만나는 이런저런 환난 때는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정말 감사하고 내가 정말 매여 있는 그 주님을 내가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건질 것이다. 내가 그 건짐 때문에 너는 나를 영화롭게 한다.”
“아! 주님 살아 계시는구먼요. 하나님 살아 계시는구먼요!”
여러분, 이런 것이 참된 기도 아닌가요?

  시편 91편은 주님을 나의 피난처로, 나의 요새로,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으로, 나의 거처로 그 주님 안에 자리 잡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세상에 살다 보면 우리 영혼이 이런 자세가 안 되면 마음이 늘 어지럽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매이다 보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라는 말씀처럼 우리 영혼은 쉼이 있고, 자유가 있고, 평온이 있고 내 하나님의 존전 앞에 사는 그런 복됨이 있습니다.

  여기서 멈추는 것 아니지요. 우리는 이런 영혼을 가지고 내 구주, 내 주님 되신 주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주님께 꽉 매여 있는 마음이고 우리가 주님의 것인데 왜 빼앗겨요. 주님은 건져주십니다.
  “저가 내 이름을 안즉” 어디 머리로만 안단 말일까요? 양이 목자를 내 목자로 아는 것이 머리만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온전하게 나의 목자로 매이고 그의 은혜 속에 살고, 그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 주님은 나의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입니다. 이름을 아는 것 대단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참 포도나무’란 것을 실제적인 이름으로 아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참 빛’이 되시는 것을 실제적으로 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여기에 우리 삶이 주님으로 인하여 흘러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할 나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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